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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안목포관광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의섬
온금동 다순구미와 조금새끼 일화의 전설을 찾아서 소 속 :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목포시소속(영어) 성 명 : 고 재 석 대 상 : SBS 스페샬 방송 프로그램 촬영 팀 5명 일 시 : 2012년 4월 6일 개 요 : 어느 날 우연히 유달산을 지나다가 SBS 스페셜 촬영 팀을 만나 목포를 알릴 수 있는 해설사란 명분으로 온금동과 그 주변 그리고 노적봉 옆에 다산목 등을 관광안내 해설 할 기회가 있어 그때의 취재 응답과 조사에 따른 소개 내용을 아래 전개 방식에 따라 엮으려 하며 느림과 미로(迷路)의 따뜻하고 순박한 온금동 다순구미 마을의 이야기로 이 마을은 물론 목포 유달산 일대 근대사의 상징인 적산 가옥들과 강점기의 조선과 일제의 서로 다른 주거문화의 변화 등 역사의 현장을 찾아 타임 머신을 타고 함께 떠나 볼 많은 여행객들을 기대해 본다.
전 개 : 1. 들어가며 2. 목포 근대사를 포함한 다순구미의 과거와 오늘 3. 다순구미의 조금새끼 일화와 째보선창, 큰 샘이란 우물, 산제당, 그리고 성석 (性石)과 성목(性木)들의 이야기 4. 사진으로 설명하는 다순구미와 설화 등 5. 글을 마치며 6. 외국인을 위한 온금동과 다순구미의 조금 새끼 요약 7. 용어정리 8. 유달산 온금동 다순구미 교통숙박 및 기타 9. 유달산 온금동 다순구미 관광안내지도 1. 들어가며 어제는 비도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오늘도 날씨는 좋구먼, 허지만 바다와 여자의 마음은 아무도 모르지 그래서 내일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올지도 ... 처음 들러 노인을 만나던 이 곳! 그분의 말이 평상시 날씨를 걱정하는 뱃사람들의 상투적인 말로 들리지 않음은 혹시 이 지역이 개발에 따른 철거지역을 암시하지나 않았는지 ... 나와 취재진들은 한동안 울컥하는 마음에 말을 잃었다. 방금 들어서면서 골목길에서 그물을 꿰매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만나고 온 터라 더욱 그랬다. 우리나라는 반도국가라 내륙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이 산과 바다가 어울리는 어촌이 많아 바다를 이용하여 생계를 이어왔으며 그래서 바다는 아주 옛날부터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목포 역시 논밭이 거의 없는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로 전체 면적의 80%를 매립해 이만큼 성장해 왔는데 오늘 찾은 이곳이 목포의 어촌 마을로서 최초의 태동지역인 온금동의 다순구미라는 곳이다. 크게는 온금동과 주변 서산동 그리고 금화동을 한데 묶어 이야기 해야겠지만 온금동 중에서 다순구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온금동은 현재의 목포 유달산 자락에 있는 구 제일여고 지역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 구 조선내화 공장 위쪽 언덕일대의 마을까지로 보지만 지금의 서산초등학교 앞 자연부락을 지칭함이며, 2011년 문화관광부로부터 가볼만한 여행지의 선정지로 지정한 바 있으며 한 때 이곳 다순구미에 관해 KBS 다큐멘타리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온금동이란 한자어로 다술 온(溫)과 비단 금(錦)을 쓰는 행정 동으로는 지금의 유달동에 속하는 동으로 원래 바다의 만(灣)의 형태로 갯가의 일부분이 내륙으로 깊이 들어와 ㄷ자 형의로 둘러싸여 바람은 적고 햇볕이 오랫동안 들어 따뜻한 곳이라는 의미로 우리말의 다순 금, 따순 금, 따신 금 또는 다순구미에서 한자어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구미란 말 역시 서남해안의 리아스식 지형의 마을의 이름에서 쓰고 있는 배낭기미나 행기미 등의 기미와 같이 길게 뻗어 후미진 곳의 아늑한 마을이란 말이다. 또한 이 지역은 바로 옆에서 감싸주고 좀 앞으로 내 밀고 있는 금화동의 러시아산의 위치로 인해 일제가 러시아산(山)을 욱산(旭 아침해 욱山)이라 불렀고 또 다순구미 앞 서산동을 개명 전에 욱정(旭聤}이라 부르던 것과 괘를 같이해 다순구미란 말과 무관하지 않은 곳으로 보이며 유달산 서남쪽 끝으로 약간 내민 만의 형태라 해를 먼저 받고 일조량이 좀 긴 곳이다. 게다가 마을의 태동 시 초가집들이 마치 버섯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꾸불꾸불한 비탈진 골목길임에도 불구하고 햇볕이 오랫동안 들어 옛날에 땔감으로 살던 부삭 방의 아랫목의 두꺼운 구들장처럼 그런 인간미의 따뜻함과 순박함이 배어있는 마을이라 할 수 있으며 내리쬐는 아침볕에 마치 비단벌레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양지바른 달동네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으로 본다. 그리고 초기에 이 마을을 구성해온 사람들은 인근 암태도를 비롯하여 진도, 완도 등의 주로 섬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며 소박한 심성에 작은 촌락을 이루며 애 낳고 고깃배 한척 늘어나는 재미로 남정네들은 바다의 거친 파도와 싸워왔으며 아낙들은 고기를 이어 날라 팔거나 인근 조선내화, 두부공장 그리고 면화공장의 잡부이거나 목화와 보리를 재배하고 그물을 꿰매는 일, 그리고 심지어는 일제의 면화공장에서 나오는 목화씨의 기름으로 똥 비누를 만들며 살아 왔다. 그래서 그들이 어쩜 목포의 시조라고 볼 수도 있지만 1900년대 목포의 인구가 늘고 일제의 서구식 근대화란 미명하의 침탈에 좋은 평지는 멀리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밀리고 또 밀리는 깔끄막의 힘겨운 삶에다 결국 조선인들에게 물려준 거라곤 비상시 혹시라도 그들 배의 정박과 출항을 위해 편리한 째보선창의 이용을 위한 조선내화 공장과 인근 금화동의 일명 저급 히빠리마찌와 사꾸라마찌의 유곽들의 시끄러움과 이곳을 출입하는 피난민들의 득세로 홍역을 치렀으나 그들은 늘 낮은 지대의 주로 일본 사람들이 살던 당시 서산동(현, 유달동)의 주거지로서의 나까마찌와 번화가인 혼마찌의 좋은 건물들과 풍요로움을 내려다보고 살았다는 측면에서 달리 보면 행복의 기준이 마음의 평온함에 있다고 볼 때 그들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이러한 배경 하에 우린 오늘 이 노인의 말을 따라 얽히고설킨 그들의 마을과 삶 그리고 일화와 전설에 따른 현장을 찾고 목포 근대사의 일부와 연계하여 이곳을 널리 알리고자 온금동의 다순구미란 타임캡슐을 공개해 본다. 2. 목포 근대사를 포함한 다순구미의 과거와 오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초기에 이 지역을 찾은 사람들은 주로 인근 섬사람들이었고 바다가 아직 매립되기 전 유달산 서남쪽 끝에 집을 지어 갔으며 좁은 산길을 따라 인근 바닷가에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조선소를 이용했고 주로 바다 생활을 해왔다. 1897년 목포의 개항이후 외국인 거류지를 선정하고 일본을 주축으로 러시아와 그리고 도로 설계를 맡은 네델란드 등과 합동으로 산을 깍아내고 바위를 폭파하여 바다를 매립하고 지금의 유달 초등학교 앞 도로를 두부를 반드시 자른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으로 한 다음 1912년에는 온금동의 다순구미마을 쪽 움푹 들어간 부분에 있는 간석지 전부를 매축하여 해벽공사를 한 다음 당시 ㄷ자 형의 올뫼나루, 째보나루 또는 째보선창이라 부르는 부두를 개착(開鑿)하여 어항의 출입과 정박을 편하게 했으며 선창을 중심으로 좌우는 종횡으로 도로를 내어 주변 택지는 일용잡화나 필수품 점 등의 자리를 채워 인구의 증가와 교역의 확대에 따라 부두공사를 점점 넓혀간 것이다. 그리고 유달산 넘어 반대편에 있는 조선인들끼리의 상호 소통로인 아리랑고개를 경계선으로 흑과 백으로 나누듯이 유달산의 노적봉 넘어 그리고 목포역 근처의 오거리 전 평화극장을 관통하여 목포 시가를 크게 둘로 나누어 마치 줄그어 금기(禁忌)라도 하듯 외국인 거류지역 특히 일본인의 거리와 조선인의 거리를 구분하려 했던 것으로 본다. 어쨌든 가파르고 좁은 아리랑고개가 1981년도 제10회 전국 소년체전이 광주 목포 공동 개최로 인해 유달산 일주도로 공사와 함께 째보선창까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나중에 째보선창에 대해서 설명하겠지만 몇 가지 특이할만한 것은 전북 군산의 금암동(錦岩同)도 온금동처럼 바위가 많아 비단 금 을 썼으며 똑같은 째보선창이 있었는데 일인들의 어항과는 별도로 조선인들이 이용한 포구였으며 조정래의소설 아리랑과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도 이 애환이 서린 째보선창이 등장하고 또 김훈의 창작기행 ‘암태도’에서도 인근 암태도의 서태석이 주도한 소작쟁의와 관련 “암태도의농민들은 붙잡혀간 소작인회 간부 농민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위하여, 또는 일본인 행정당국자와 담판을 벌리기 위하여 김일환이란 기곗배를 모선으로 7, 8척의 돛단배를 거느리고 3, 4명씩 무리를 지어서 목포의 째보선창으로 건너왔다.”그리고 또 송기숙의 장편 소설에도 “선창에 내린 소작인들은 우왕좌왕 게자루 풀어 놓은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라고 소작위원들이 소리를 질렸으나 째보선창은 원체 어수선해서 소작인들은 갈팡질팡 이었다.”는 말도 나오는 곳으로 이처럼 째보선창을 묘사한 작가들이 많다. 그런데 이처럼 다순구미와 째보선창의 시대적 변천과 맛 물려 다순구미가 뉴타운 재 개발지역으로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으니 단순히 옛것의 향수에 젖어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라는 역사적 맥을 이을 것이 다 사라지는 개인적 슬픔과 존재개발의 정당성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요즘 서구에서 밀려오는 느림의 미학인 슬로시티로 증도와 청산도 그리고 담양 등이 관광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뜨고 있는 추세이며 또 하나의 비근한 예로 SBS방송에서 보았듯이 최근에 짝퉁의 왕국인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오스트리아 최고의 관광지인 할슈타트와 관련한 기사를 그대로 소개해 본다. “중국에 인공으로 조성된 마을은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 알프스 산자락을 끼고 펼쳐진 호수에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집들이 자리하고 있어, 세계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진 호수와 역사 깊은 소금 광산, 그리고 빼어난 자연 경관 덕분에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웃지 못 할 일로 생각되겠지만 우리와 가까이 있는 함평이 나비축제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예를 보면 결국 웃어넘길 일만도 아니다. 자본주의 맨 끝이 결국은 느림의 일차산업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도시의 아파트문화 빌딩문화가 결국은 전통과 향수로 돌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도심 속의 느림의 공간인 다순구미 만이라도 주변의 전원을 그대로 둔 채 잘 보존 관리하면 유달산과, 그리고 목포의 근대유산 등과 접목하여 아주 좋은 관광 상품이 될 걸로 보며 삼학도 복원이 그 예를 증명해주는 샘이다. 대성동의 피난민 달동네, 유달산자락의 달성동 달동네가 사라진 지금 최소한 바다를 끼고 있는 목포는 어쩜 소비도시로서 도시의 양면성을 이용해 관광을 주 사업으로 가야한다고 본다. 눈에 보기 좋은 타운만이 절대적 능사는 아닌 것 같은데 있는 것도 없애버리는 우를 범할까 염려되는 이것이 다순구미의 현실이다. 3. 다순구미의 산제 당, 큰 샘이란 우물, 조금새끼 일화와 째보선창 그리고 성석 (性石)과 성목(性木)들의 이야기 다순구미는 바닷가 깊숙이 자리 잡은 도심 속의 어촌 이다는 이 말을 시작으로 이 동네의 최고의 어르신을 만나 마을에 얽히고설킨 대화의 보따리를 풀어본다. 우리나라 어디든 바다를 끼고 바다에서 생활하는 어촌이 다 그러하듯이 풍어를 기원하고 안전을 기도하는 해신당과 같은 당이 있거나 다순구미처럼 마을 뒷산 바위 밑에 그냥 허름한 움막 형태의 제터가 있는데 이름 하여 다순구미 산제 당 (山祭堂)으로 산에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란 뜻이다. 이곳을 가보니 지금은 빈 제터의 흔적만 남아있으나 1978년까지는 이 마을의 최고의 고령을 제주로 하여 정식으로 제터를 갖추고 제를 올렸는데 바다에서 사람을 많이 잃거나 젊은 사람들이 점점 바다를 기피하여 시내나 타 도시로 이주하는 경향이라 결국 마을에는 고령화로 다순구미에서 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라 산제 당이 문제로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의 산제 당과 조금새끼 등의 설화는 너무 오랫동안 이 노인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이구동성으로 전하는 말이라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전해오는 말 그대로를 전하면 "산제를 모시는 사람을 제주라 하며, 마을 사람 중에서 연세가 지긋하고 깨끗하면서 정성이 많은 사람이 선정되었다. 제주의 선정은 마을 유지들이 했는데, 매년 같은 사람이 도맡아 지낼 때가 많았다. 산제를 모시는 시간은 정월 초이렛날 밤이었다. 시간이 되면 제주가 산제 당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는데, 유교식 절차에 따라 진설-헌작-독축-재배 순으로 제를 진행하였다. 제사를 모신 다음 날에 제주 집에서 음복이 있었다. 마을의 유지나 주변 사람들 몇이 이 음복에 참석했다고 한다. 산제 후 갯제는 지내지 않았으며 매구나 줄다리기 같은 행사나 놀이도 없었다. 다만 정월 보름 무렵 마당밟이를 하게 되면, 먼저 산제 당에 가서 매구를 친 후 샘굿을 치고 걸궁을 했다고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산제 당은 70년대 말경에 당시 온금동 동장에 의해서 헐어졌다고 한다. 전해오는 주민들의 이야기로 산제를 안 지낸 후 마을 사람들 중에 화를 입은 사람이 많다고 하고, 산제 당 파괴에 대한 이야기와 당이 파괴되기 3일 전쯤 산신이 제주의 꿈속에서 나타나서 제주도로 가겠다고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산제 당은 처음에는 한 칸짜리 기와지붕 이었다가 기와가 상하니까 기와를 걷어내고 슬라브 지붕으로 바꿨다고 한다. 온금동 노인들 중에도 산신의 그림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산제를 지낼 때에만 당집 문을 열었다. 그때는 제주만이 제사를 지내므로 다른 사람은 볼 수가 없고, 또 무섭다고 하여 누가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산제 당을 무섭고 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산제 당이 없어진 지금도 그곳에 대한 외경심이 남아있다. 산제 당이 철거된 때를 전후하여 산제가 중단되자 마을에 궂은 일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었다고 주민들은 회상했다. 현재 산제 당 터와 축대와 비석들이 남아있다.“ 등의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사이에 실재로 주고받은 다순구미의 조금새끼란 일화가 재미있어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할아버지 혹시 담배라도 피우세요? 아 이 사람들아 낼 모래 언제 집이 띠낄지 모르는 마당에 댐배 없으면 무신 낙으로 살겄는가! 늙어서 일은 못하고 허구헌날(늘) 댐배나 죽이는거지. 요 며칠 날 한 두달이나 됐을까... 이뿐 여식하나 찾아왔었는데 여그서 뭘 물어볼 것 있다고 피우지도 않은 댐배 같지도 않은 뺏뺏한 거 한 보루 줘서 피우는데 싱거서 어디 맛태가리도 없어 디싱가 뭔가 뚜껀걸로 바꿔서 피웠네. 어디서 들었는지 언제 다순기미가 띠끼냐, 보상은 받았느냐, 또 조금새끼란 말이 무신 말이냐, 산신제는 지금도 하느냐? 등등 늙은 놈이 담배하나 얻어 피고 대답하느라 버텅이 무너질 것 같았당께! 헌데 한술 더 떠 거기들은 무신 대포만한 사징끼를 들쳐 매고 왔는가? 이러다가 나 시타되는거 아녀? 아 네 할아버지 저희들은 SBS방송국에서 다순구미의 취재거리를 찾아왔습니다. 취재가 뭔말인디? 아 그건 다순구미 마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 거리를 물어 널리 알리려고 하는 것이지요. 으음! 나는 텔레비전도 없어 심(힘)팔리는구먼... 그냥 아무거나 생각나시는 데로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 위 산제당은 이제 막을 내린 것 같고 뭐 사람이 있어야 배를 타고 제도 드리지 늙은 것들만 남아서 멋하겄는가? 암튼 옛날에 여그까지 바다였어 흙으로 도까 집터 만든다고 우리 선조들이 고생 많이했지. 옛날에는 고기가 많이 잡혀 째보나루 중선 배들에서 고기는 티어 바다로 들어가고 애팬네들은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밥상은 씨러질듯 얼굴은 방실방실 어디 고기가 많이 잡혀 좋았겠는가? 지 실랑 살아서 돌아오니 좋았겄... 헌데 이곳이 따수니까 좋았지만 여그가 바다라 땅을 파믄 갯벌이라 먹을 물이 부족해 한해가 든 때는 바닷물을 식수로 먹었당께! 쩌짝으로 올라가믄 큰시암 거리가 나오는데 보믄 알겄지만 하나는 우리들이 한해들어 죽겄씅께 시암을 하나 판 것이 있고 그 옆에는 큰 시암이라고 하며 우덜이 물이 없어 다 죽는다고 하니까 돈 있고 배웠다는 정인호란 양반이 돈을 많이 들어 우리들이 죽어라 팠지 가 보믄 알겄지만 얼마나 물이 목마르게 헌지 시암파고 시암우에 여그가 시암이다는 것을 알릴라고 한문으로 우물 정(井)자를 돌로 만들어 논 것을 보믄 우덜 맘을 알 것이네. 그래서 감사의 뜻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서 1922년도 일제 때 비의 정면에는 유학정인호시혜불망비(幼學鄭麟浩施惠不忘碑)라는 비명과 함께 공덕비를 세운 연유가 대략 적어져 있고 이 공덕비를 아리랑거리에 세웠다가 1981년도 전국체전 준비로 유달산 일주 도로를 정비 확장하는 바람에 큰 시암으로 옮겨 놓았고 이 때 째보나루(올뫼나루 또는 째보선창)도 일자 도로가 돼버린 것이제. 그때는 물이 귀해 일본 놈들도 급하니까 지금의 유달산 구 제일여고 뒷쪽 저수지를 만들어 기왔장을 이용한 또랑물로 살았으며 나중에 1수원지에서 5 수원지까징 만들어 물을 끌어오느라 날리를 쳤고 우덜은 물지게 양동우로 3~4시간 걸려 깔그막을 오리락 내리락 했으니 시방 등골이 남아난 것도 용치. 지금은 전국에서 목포가 가장 물값이 비싸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여그까징 수돗물이 들어와 세상 많이 좋아졌제. 아 참 그러고 조금새끼라는 말을 많이 묻던데 자네들 조금과 사리가 뭔 줄 아는가? 뭐 달과 해가 어쩌고 저째서 그런다고 하지만 난 그런 어려운 말은 모르고 음력으로 15일과 말일이 조금이고 나머지는 사리라고 하는디 조금 때는 물이 쪼금 움직인다고 해서 조금인 것 같고 이때는 물의 이동이 거의 없어 바다에 먹을 것이 없으니까 고기들도 숨어서 잠을 자는 꼴이니 꽃게도 못 잡는 때라 배를 가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야 하지 뭣할 것인가? 배를 가진 사람들은 어디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그 다순기미도 옴팍한 곳에 있어 따신 곳이라 한 때는 살기 좋아서 집도 많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많아 조금 때 돌아오면 이 꼴목 저 꼴목 누비고 다녀서 뉘집은 수저 저분이 몇 개, 뉘집 딸이 이쁘고, 뉘집 할배가 심술이 고약코어느 집 구조와 방은 어떤 식이고 싸그리 모를 것이 뭐 있것는가? 어쩌다 풍랑과 싸우다 목숨 건져 돌아오면 천지신명에게 감사할 틈도 없이 낮이나 저녁이나 새끼 만드는 일이 우선이었고 그러다 보니 뉘집 뉘집 새끼들은 거의 생시까지 같고 같이 배를 타는 나이가 되고 배타고 고기 잡다가 풍랑에 뒤짚이면 제사일도 같았으니 하늘도 무심했지! 그래서 다순기미의 조금새끼들이란 말이 나온 거고 배는 있고 애들이 없거나 어려서 배를 탈 사람들이 없어 생계가 어려워지고 그러다보니 산제도 애타령, 애들과 배의 무사고와 관련된 여자들의 기도처를 찾아 유달산을 삿삿이 찾아 다녔으며 유달산에는 우리가 맨 먼저 은밀히 알고 있는 성석(性石)이나 성목(性木) 그리고 기도하면 들어 줄만한 무속 인들도 좋아하는 바위들이 많이 있지. 한 가지 웃기는 것은 노적봉 옆에 다산목이라는 나무가 다순기미 여자들이 맨 처음 발견하고 몰래 기도하고 왔던 나무인데 뭐 새천년 종을 새우고 길을 내다보니 들통나 지금은 다순기미 사람들의 것이 아니어 버렀당께. 그 외도 수많은 사연이 있지만 나이먹은 놈이 일일이 다 챙피해서 말은 못하겄고 한 가지만 더 말할 태니 나머지는 이런저런 풍문으로 조사하거나 기록하더라고. 그러니까 일제 때 저 쪽 언덕배기 산이 일본 놈들이 심은 벚꽃이 울창하다해서 금화동이라고 한 곳인데 러시아가 자기들의 영사관을 지을라고 준비한 곳이라 당시는 러시아산(山)이라 불렀으며 주변으로 일본의 유곽(遊廓)들이 이동해와 자리를 잡아 아주 시끄러운 곳이었으며 6.25 이후 피난민들까징 가세하여 출입하고 일본 여자들의 노래 소리에 뱃놈들이 잠이 오겄는가? 그러던 중 마을의 건장한 청년이 배는 안타고 그쪽을 기웃거리다 마을 아낙네들에게 들켜 거시기를 몇 도막으로 잘라버렸다는 거시기 난도바위라는 것이 뒷산에 있다고 하는디 나도 말만 들었째 보지는 못했당께. 아 그라고 요것은 쪼깐 챙피한데 내가 어릴적에 아주 심한 놈이었고 또 그런 놈들도 서넛 있지만 내가 몸달아 죽을만한 짝사랑 여자가 있었는디 그애가 안넘어 가니까 여그 가보믄 알겄지만 옛날엔 깔끄막에 쫍은 꼴목길이 아주 많았제 그렇지 않아도 쫍은 질에 또랑이 질 옆에 있어서 어느 질(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수 있지만 또 몇몇 꼴목은 나란히 걸어갈 만큼 넓지 않았고 지금은 쎄멘으로(시멘트) 또랑을 메꾸라이해서 두사람이 갈 수 있으나 꼴목에 깔끄막에 어디질이 터지고 어디가 막혔는지도 분간하기가 어려웠을 때 이놈의 가시나가 도대체 눈치가 없어 일부로 둘이 나란히 걸어가기가 심든 질이나 막힌 꼴목만 찾아 다녔고 질이 쫍으니까 가슴도 궁딩이도 서로 부닥쳐 얼굴은 뻘게지고 결국은 작전이 맞어 떨어져 지금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지만 결혼까징 갔었던 이것은 나 야그지만 대문도 다 들여다보이고 담배락 창문도 손대면 닿을 곳의 집들이라 소식 때 (젊었을 때) 베리벨(별이 별) 장난을 다했던 기억이 시방 생 각이 나는구먼. 아참 할아버지 왜 온금동을 쇠 금(金)을 안쓰고 비단 금(錦)자를 쓰나요? 저런 이 사람들아 뱃놈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고 먼 돈을 번다고 황금에 눈이 어두워 쇠 금자를 쓰겄는가? 그냥 따뜻하고 비단처럼 부드러워 아름다우면 되제. 안 그런가? 하하 맞아요 그렇군요. 오늘 너무 오랜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 인터넷에 올라온 것 들이 많을 것이니 저희들이 직접 다순구미 꼴목과 집들 그리고 유달산을 더 조사하여 촬영을 하고 글을 쓰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4. 사진으로 설명하는 다순구미와 설화 등
1960년대 유달산 온금동 일본인 마을 2012년 현재의 온금동과 조선내화 그리고 다순구미마을 다순구미 깔끄막과 바위 위 장독대 그리고 취재 할아버지 할아버지 궁딩이 데이트 골목길과 비탈길
1960년대 목포 온금동 째보선창과 조선내화공장 뒤 다순구미 군산 금암동의 째보선창 온금동 다순구미 마을 아낙네들의 그물 꿰매는 모습 다순구미 산제당과 우물 정井 모양의 큰 샘, 정인호 공덕비
비단같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비단벌레 같은 다순구미 기도바위와 돈을 많이 벌고 간 경상도 친구들 기념회장 바위
다순구미 아낙들이 맨 처음 발견한 다산목(여인목)과 남근목 (사랑목) 이 나무들은 유달산 노적봉 옆에 있는 나무로 옛 말에 생명이 지나가는 길에는 바위도 나무에 길을 내어준다는 말이 있듯이 다산목은 애를 많이 난 여인목으로 어미목의 뿌리가 바위 때문에 흙을 찾아 가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는 모양으로 지구상에 이처럼 여자를 닮은 나무가 있을까하는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나무이며 마치 옆에는 음양의 이치를 말하려는 듯 다산목을 사랑하는 사랑목으로 남근목이 자기 여인을 보호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나무들을 최근 2012년 4월에 SBS 스페샬 아기를 원하십니까? 의 프로그램에 내가 직접 소개했던 나무들이다. 그리고 다순구미 아낙네들이 조금새끼들을 심한 풍랑의 바다에 잃거나 자식을 원할 때 이곳을 찾아와 자식을 달라고 남몰래 기도했던 곳이었다 한다.
일제 강점기 목포 금화동의 러시아산(山) 주변 유곽들과 거리
다순구미 남자가 일제의 유곽을 기웃거린 죄로 다순구미 아낙네들이 난도질했다는 거시기 난도바위
다순구미 뒷산의 여근석과 남근석 모습
뒷산에서 구들장을 캐내다 이상해 중단한 먼 바위
짝퉁의 천국인 중국이 관광지로 베낀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좌측 짝퉁) 6. 글을 마치며
이 글을 쓰면서 섬 태생의 사람들은 도시문화에 살면서도 끝까지 섬사람들로 그리고 섬사람들의 순박하고 따뜻함을 그대로 대물림해야 하는지... 암튼 싫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난 온금동의 다순구미 마을이 마치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자만물지오(道者萬物之奧)란 말이 생각난다. 도 닦는 도자의 마음은 따뜻하고 아늑한 서남쪽의 후미진 곳처럼 그를 만나면 선한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악한 사람들은 악함을 깨우치게 보호하는 즉 도자가 이 둘 다를 포용하듯이 다순구미 역시 그런 마을로 보면 좋겠다. 우리는 시멘트나 그걸로 만든 건물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흙과 전원의 무공해 채소와 바다와 산이 주는 풍부한 산소는 사람들이 원하고 또 그것들은 사람이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넓고 화려한 고층의 시멘트 뉴타운이 결코 잘 보존 정비하고 꾸미면 역사의 맥과 생산적인 차원에서 다순구미 하나를 이길 수 없지 않겠는가! 그만큼 다순구미 쪽은 먼 훗날 시간이 흐를수록 대단한 관광 상품으로서 그 가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다순구미는 도심속의 슬로우시티로 느림과 자연이란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며 빨리빨리 문화와 다른 양면성으로 볼 때 화려한 뉴타운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또 그런 것은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편안함을 주는 자연을 찾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달산과 근대역사의 거리 그리고 느림의 미학이 풍기는 다순구미 마을이 충분한 감성적 트래킹 코스로 목포 원도심의 중요한 관광 상품으로 발전하면 좋겠다. 끝으로 부족하지만 다순구미의 조금 새끼와 관련 나의 마음을 다소 격식을 벗어난 글 일지라도 올려 본다.
6. 외국인을 위한 온금동과 다순구미의 조금새끼 요약 An amusing story of Jogumsaeggi of Dasoongumi, Ongumdong, Mokpo
We have an amusing story related to Jogumsaeggi of Dasoongumi, Ongumdong, which is located at the last South-West tip of the Yudal Mountain in Mokpo. Dasoongumi village of Ongumdong, in the primitive stage, started their marine lives as fishermen who came first from the neighbouring islands to Mokpo long time ago. In spite of that, they still remain poorer than the people living in the other areas of the same city as if they were originally born for the slow lives. In addition to, they live at the foot of the Yudal Mountain, the outskirts of town and almost their village is very shabby, but their village is warmer than the other zones of town because of the first sunshine in the morning and deep bay-shaped village with surrounding mountain and hill. Hence, they call their village Dasoongumi, say, warm village in Korean, also their area Ongumdong in the Chinese language and Dasoongumi comes under a small part(village) of the whole Ongumdong. Anyway, they especially have a very interesting anecdote(a told story), Jogumsaeggi, which means babies born in a time of the neap tides that they couldn't help coming back at the same time because they couldn't catch any fish for the period, not high tide. So they have babies of the same day and even the same time, and the babies have same birthdays and sometimes die at the same time because of heavy winds and waves. Owing to these reasons, I know they have such a told story, Jogumsaeggi and that they have a shrine at the tip of the near mountain to hold a ceremony to pray for their safety and lots of babies etc.. In a word, in the period of the low neap tides, the village usually has babies at night or even in the daytime. Now you know of the told story, Jogumsaeggi (babies of the duration of neap tides happening twice each month, 15th day and the last day by the lunar calender)? Isn't it funny? So, I'd like to particularly recommend the village, Dasoongumi so that you could enjoy taking pictures and experiencing a labyrinth of narrow alleyways with zigzags, steep slopes, their shabby homes and so on. Please remember the Dasoongumi village of Ongumdong like a slow city and also meet some interesting male's and female's genital stones at the mountain of the back of their village and two genital trees of male(Namgunmok) and female (Dasanmok) which were the objects of their pray for many babies by 'Nojeokbong'. Thanks a million in advance. By Koh, Jae - Seok
7. 용어정리 미로(迷路) : 어지럽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섞갈리기 쉬운 길, 문 제의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 성석(性石)과 성목(性木) : 남녀를 상징하는 남근석 여근석 그리고 남근목 여근목을 말함. 욱산(旭山) : 욱산이란 아침해 욱자로 해가 제일 먼저 드는 산이란 뜻 깔끄막 : 깔끄막 이란 언덕을 향한 비탈길을 말함 금기(禁忌) : 마음에 꺼려서 하지 않거나 피해버림 개착(開鑿) : 산을 뚫거나 땅을 파서 길을 냄 띠끼다 : 마을이나 집을 뜯어내거나 철거 함 도까 : 바다 등 낮은 곳에 흙으로 부토(매립)하다. 째보선창 : 옛날에 바다였던 다순구미를 매립하면서 제방을 곧 바로 쌓지 않고 ㄷ자형으로 꺽어 넣어서 어선 정박 처를 만들었는데 바닷가 안벽이 사람의 코 밑이 아래로 째진 언청이(언챙이)처럼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여 째보선창(또는 올뫼나루 : 산을 맨 처음 오르는 길 또는 선창), 째보나루)라 함. 휘빠리마찌 : 휘빠리란 일본말로 사람을 끌어 당기다의 뜻으로 사창가의 윤락녀 들이 지나가는 남자를 끌어당기는 행위로 옛날에 목포 부두 쪽에 그런 곳 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그리고 마찌란 우리말로 거리(길)란 말이다. 사꾸라마찌 : 사꾸라라는 말은 꽃으로 여자를 꽃에 비유하여 일본 사람들이 유곽이란 업소를 차려놓고 남자를 불러들이는 곳으로 지금도 그 때의 유곽들이 남아있다. 휘빠리마찌 보다 고급으로 보면 된다. 유곽(遊廓) : 유곽이란 유흥업소를 말함 매구(媒嫗) : 음력 정월 2일부터 15일 사이에 농악대가 농악을 하면서 부락을 한 바퀴 돈 다음, 집집마다 들어가 지신(地神)을 달래고 복을 비는 농촌의 민속 행사. 진설 : (陳設) 연회나 의식(儀式) 따위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제구를 잘 차려놓음. 마당밟이 : 정월 보름 무렵에 지신을 달래고 복을 비는 민속놀이를 말함 걸궁 : 대게 음력 정월 농한기에 마당을 비롯하여 부엌, 창고 등을 다니면서 풍악을 치면 부정한 것들이 사라진다고 믿어 집 주인은 풍악을 치는 풍악 패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쌀이나 돈으로 사례를 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거두어진 돈이나 쌀은 마을 공동 사업에 주로 사용된다. 헌작 (獻爵) : 제사 때, 술잔을 올림. 부삭 : 옛날 나무로 땔감을 써 밥을 지을 때 부엌을 말함
8. 유달산 온금동 다순구미 교통숙박 및 기타 팁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평택→당진→서천→군산→고창→무안→목포IC→초원호텔앞 우회전(영산로)→목포 해양대학 방면으로 좌회전(유달로)→보리마당 방면으로 좌회전(보리마당로)→온금동 서해안고속도로→평택→당진→서천→군산→고창→무안→목포IC→신안비치APT→북항(회센타)→유달산 방향(우회전)→목포 해양대학 방면으로 좌회전(유달로)→신안비치호텔(좌회전)→구 조선내화 앞→온금동→다순구미 ◆추천 여행 코스 올뫼나루길→조선내화→은영식육식당→온금동 경로당→또래어린이집→온금슈퍼(다순구미로)→공동샘(정인호 시혜불망비)→본격적인 계단→마을 꼭대기 채소밭→유달산월정사→온금경로당 좌측 포장길→여근석(산 중턱 2층 흰색 슬래브집 뒤)→해안로(옛 째보선창가). 온금동은 법정동명이며 행정동으로는 유달동에 속한다. 온금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으면 유달동 주민자치센터(061-272-3665) & 노적봉 관광안내센타(061-270-8411)문의 ▶ 목포 세발낙지 맛 좋은 집 독천식당(호남동/061-242-6528), 호산회관(용당동/ 061-278-0050), 신안뻘낙지(호남동/061-243-8181), 북항 은빛바다회타운 서해수산 (북항/061-244-0935) , 유달산 공원뻘낙지(노적봉 밑) (3만원), 세발낙지(싯가) 등 9. 유달산 온금동 다순구미 관광안내지도
ㅡㅡ 끝 ㅡㅡ 감사합니다.
KBS 다큐멘타리 온금동 다순구미의 조금새끼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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