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공조판서 황형(黃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황원(黃瑗)이고, 아버지는 정랑 황대수(黃大受)이며, 어머니는 내섬시정 곽회영(郭懷英)의 딸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감찰·음죽현감 등을 거쳐, 호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언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을 김제군수로 임명한 이산해(李山海)를 추론(追論)하였다. 그리고 정여립의 옥사에 대해 직언하지 않는 대신을 논박하다가 이듬 해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 건저(建儲)문제가 일어나자 정철(鄭澈)의 일파로 몰려 파직당하였다. 1592년 다시 기용되어 사서·병조좌랑·정언 등을 지냈다. 다음 해 지평으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접반하였다.
그 때 송응창이 오로지 양명학만을 주장하자 『대학강어(大學講語)』를 지어 정주학(程朱學)을 논의하였다. 그 뒤 세자(世子: 뒤의 광해군)를 따라 남하해 체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596년 변방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방법을 진달(進達: 공물을 상급 관청으로 올리는 것)해서 절충장군이 되었다. 통신사로 명나라의 사신 양방형(楊邦亨)·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명나라의 내원을 청해 가선대부에 승진하였다. 이어 위유사(慰諭使)·찬획사(贊劃使) 등을 거쳐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남원의 복구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뒤이어 공조·호조의 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등이 되어, 인재등용과 기강확립 등을 골자로 하는 12조의 시무차자(時務箚子)를 올렸다. 그리고 『소학』의 권장을 청하였다. 1601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스승인 성혼을 비난하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는 도중 어양(漁陽)에 이르렀을 즈음, 정인홍의 탄핵으로 삭탈관작되었음을 듣고 강화로 돌아갔다. 그러나 1605년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07년 복관(復官)되었으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시행하지 않아 부여에 가서 살았다. 1609년(광해군 1) 호조참판으로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재정의 절용과 민력(民力)을 아낄 것을 주청하였다.
1612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다음 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쫓겨나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그 뒤 옹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졸하였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공주의 창강서원(滄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사酬唱錄)』. 『추포집』. 『대학강어』 등이 있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