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상자
추석을 맞은 요즈음, 갑자기 하달된 지시로 갈등을 겪고 있다. 명절 때의 선물 돌리기가 문제가 되어 애궂은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는 경우를 보게되기 때문이다. 어려운 동료의 농가를 돕기 위한 행사가 공연히 오해를 받을 일을 하지 말라는 지시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동료들의 고향집 돕기 차원에서 관계 부서의 동의를 얻어 청사 내에서 우리농산물을 판매한다. 직원들은 우리 농산물을 값싸게 이용할 수 있어 좋고, 수입산이 판을 치는 마당에 믿을 수 있어 좋고, 시장을 보는 불편을 덜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니 금상첨화다.
직원들이 많다보니 출신지도 다양해 밤, 대추에서부터 배, 고구마까지 각 고장의 싱싱한 맛 그대로를 느낄 수 있어 더없이 좋은 제도이다. 올해는 작년보다 일조량이 많아 과일 맛이 제대로 라며 서로들 흡족해하는 모습이나, 상품의 가치는 좀 떨어지지만 직원을 돕는다는 의미로 팔아주는 동료애를 보니 든든하다.
얼마 전에는 사과를 재배하는 과수원집 며느리가 부모님을 돕겠다고 사과판매를 신청하였다. 올해 처음으로 과실을 수확하는 관계로 판로 개척을 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던 듯 발벗고 나선 것이다. 무공해 무농약 상품이어서 외관상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선물하기에는 망설여졌다. 더군다나 홍보부족으로 퇴근시간이 가까워 가는데도 많은 물량이 남아 있었다.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여기저기 친분이 있는 동료들에게 전화하여 무공해이고 값이 저렴하니 동료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하나씩 들고 가라고 권하였다. 퇴근시간을 넘기고 남은 사과상자를 세어보니 삼십여 상자는 되어 초조해하는 부모님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다음 날 점심시간에 팔아 드릴 터이니 두고 가시라는 말씀을 드렸더니 안도하며 내려가시는 모습도, 같이 거들어준 동료들의 모습에서도 훈훈한 인정이 느껴진다.
포도농장 아들이 신청하여 들어온 포도는 송이가 듬성듬성한 것이 햇볕을 골고루 받아 하나같이 맛이 좋았다. 게다가 값도 저렴하고 싱싱해서 우리들의 도움 없이도 쉽게 팔아 사는 이나 파는 이 모두 흡족한 입장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추석 대목이 다가오면 이러한 풍경이 자연스레 열려 올해도 당연히 과일은 이렇게 구입할 것을 예상했었다. 이런 경로로 판매해온 직원들은 회람을 엘리베이터 앞에 붙여놓고 주문할 사람은 회람에다 수량과 이름을 미리 적어 놓도록 하였다. 친척들에게 선물할 일 있으면 이왕이면 여기서 준비를 할 심산으로 몇 군덴지 헤아리고 주문했던 사람들도 한 장의 공문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추석대목에 선물꾸러미처럼 보이는 물건을 들고 청사를 출입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즉, 내 돈 내고 산 물건 괜히 남들에게 오해받을만한 일을 사서 만들지 말라는 요지이다.
내용이 직원들에게 전달되고 몇 분 후 미처 전달받지 못한 어느 부모님은 노랗게 잘 익은 배를 들고 왔다가 하달된 공문 내용을 전해들었다. 겹으로 물어야하는 운반비로 늙은 농부의 휘어진 허리 위에 시름하나 얹어 드린 것 같아 돌아선 뒷모습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 남의 일 같지 않다. 여름날 뙤약볕아래서 구슬땀을 흘린 농부의 어깨가 오늘처럼 쓸쓸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수확의 기쁨을 기약하며 흘렸기 때문일 것이다.
물건이 배였으니 망정이지 포도같이 신선도가 오래 보존되지 못한 물건이었으면 그 시름은 곱절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이번에 싣고 올라온 배 팔면 농자금 대출 받은 것도 갚고 차례준비며 손자 옷 한 벌은 장만해 입히리라는 계산으로 가볍게 올라왔을 터였다.
사과상자나 굴비상자가 본래의 목적 외로 사용되었던 전례가 있어 엄중히 차단하려는 상부의 뜻을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몇몇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 때문에 평생을 가도 굴비 맛 한번 보지 못한 선량한 서민들이 피해를 보아서야 될 것인가. 옛 선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 들여 그야말로 소극적인 자세로, 오얏나무 아래서 갓 끈을 매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필요에 따라 오얏나무 아래서도 갓 끈을 매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많아지는 명절 대목이다.
2004년 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