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서지역 부여 세력의 일본 열도 진출에 대한 융합적 고찰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지양미박사 박사논문)
그동안 부여에 대한 문헌 자료와 고고학 유물을 통해 밝혀진 내용을 보면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로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연결하는 이른바 열국시대의 중심국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큰 나라 였던 고조선은 위만의 등장으로 해체의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조선의 많은 거수국(渠帥國)들이 군웅할거하는 열국시대가 되었다.
그 중심에서 가장 큰 힘을 가졌던 부여는 고구려에 복속되기까지 약 9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강한 나라였다.
이러한 부여는 역사적으로 한국사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지만, 강역 범위 는 현재 중국의 영토 범위 내에 속해 있어
부여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중(韓中) 간에 명확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역사주권론, 즉 역사 정통성 계승론 에 입각해 부여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영토주권을 앞세운 다민족통일국가론에 입각해 부여를 자국의 소수민족사 중에 하나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중국의 부여 인식은 ‘부여는 고대 중국 동북지역 의 일개 소수민족이 건립한 중원왕조에 속한 지방노예제 정권’으로
보는 것 이 보편적이며, 이 인식을 기본전제로 하여 모든 부여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부여의 일본 열도 진출 배경을 보면 서기전 4세기에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내주었고, 이 여파로 동북아 질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 벼농사를 짓던 일단의 무리 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는데,
그 이후 만주 및 한반도의 정세 변화는 열도로의 이주로 이어졌다.
고조선 출신의 도왜인(渡倭人)들은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 중반까지 약 550년에 해당하는
야요이시대(弥生時代) 를 열었고, 그 이후 부여 출신의 기마민족에 의해 고분시대(古墳時代)가 열려
일본은 비로소 왕실과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일본 사학계에서 소수의 학자들과 서양의 일본사학자들에 의해 일찍부터 논의되어 온 사실이다.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부여역사에 대한 연구, 발표 과정에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첫째, 현재 한국사학계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2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조선도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는 상황이라,
부여사 연구는 더욱이 안개 속에서 코끼리를 만지는 형국이라는 점이다.
둘째, 다수의 연구자들은 부여사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적 틀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우리의 상고역사문화가 성리학과의 충돌로 많은 사료들이 수거되어 금서(禁書)가 되었고,
실학시대에는 일부 역사가들의 현장답사 없는 지리비정(地理比定)과 유교적 관념의 틀로 상고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했던 무모함과도 연결된 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한국의 상고사를 지우려고 끊임없이 애를 썼고, 특히 한일관계사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기 이전의 역사가 기록된 사료 들은 거의 멸실(滅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사서의 기록들과 『삼국사기』에 간간히 나오는 부여의 기록으로 부여의 역사가 늦어도
서기전 3세기에 시작되었고, 부여가 삼국의 뿌리임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여는 한반도가 아닌 만주에 있었던 북방기마민족 이었음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고대 동북아시아를 이끌었던 북방기마민족은 농업과 유목뿐만 아니라 말을 이용하여 동서양의 교역로를
개척했던 사람들 이었다. 북방기마민족의 중심에는 고조선이 있었고,
고조선 해체 후 그 정통성 은 부여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부여의 일본 열도 진출 가능 여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는 의라신사 궁사의 증언이다.
지금까지 일본 아스카(飛鳥)시대는 당시의 유물과 사료를 통해 백제문화가 넓게 전파되었다고 대부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고분시대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실질적으로 고분시대의 일부 유물 들은
백제 유물과 매우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니와(はにわ)와 갑옷· 마구(馬具) 등은 가야 유물과 더 가까웠고,
가야의 기원에 관한 연구도 미흡 한 상황에서 가야가 곧 임나일본부라는 잘못된 주장의 근거로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과의 남창희교수는 오사카에서 ‘대의라신사(大依羅神社)’를 확인하였고,
신사를 관리하는 세습 궁사(宮司) 로부터 ‘의라는 3세기 말에 한반도에서 넘어 온 사람이며 일본에서 왕족이 되었다.’ 는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의라왕은 왕자였을 때인 285년에 선비족 모용외 의 침입을 받아, 아버지인 의려왕(依慮王)이
자살하였고 의라왕자와 왕실 가족들은 옥저로 피신하였다가 그 다음해 왕이 되어 서진(西晉)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았다고 전해지는 실존 인물이다.
그 이후 부여의 국력은 쇠하여 선비족과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진서 (晉書)』의 기록은 국내외의 역사서에서 인용되어 전해져 왔다. 다만, 『태백 일사(太白逸史)』
「대진국본기(大辰國本紀)」에는 의라왕이 왜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오사카에 현존하고 있는 대의라신사의 묘 주(廟主)와 『진서』 등에 기록된 부여 의라왕이 동일인이라면,
그동안 일본 국내의 백제사 연구자들이다.
특히 고조선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인 三韓管境制를 밝혀, 고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얽힌 의혹 및
고조선문화의 실체 등을 총체적으로 해명해 준 다. 일부 학자들과 서양의 일본사학자들이 주장하였던
‘부여기마족의 왜 정복설’ 의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후한서』 등 중국사료에는 부여의 특산품을 비롯한 부여의 유물을 전하고 있다.
부여 세력이 일본 열도에 진출했다면, 그들이 머물던 곳에 유물의 흔적 이 남게 된다.
최근에 부여 유물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는 베이파오 라마동 고분군과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을 사료 속의 부여 유물과 비교함으로써 부여의 이동경로를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