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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7.03 03:30
러시아 작곡가의 '교향곡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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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부산시립교향악단 연주 모습. /한화
'2023 교향악축제'가 지난달 25일 마무리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기념으로 열린 올해 교향악축제 프로그램에는 흥미로운 우연이 있었어요. 17개 교향악단 중 4팀이 각기 다른 작곡가 4명의 '교향곡 1번'을 선택해 연주한 것이었죠. 첫 순서였던 광주시향(6월 1일)은 말러의 교향곡 1번을 연주했고, 서울시향(6월 17일)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또 부천 필(6월 21일)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 제주특별자치도립 제주교향악단(6월 22일)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연주했습니다. 이 중 비교적 많이 연주되는 브람스와 말러의 작품 외에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은 음악회에서 라이브로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아 더욱 화제가 됐죠. 두 작품 모두 작곡가의 초창기 모습과 성장을 엿볼 수 있는 곡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세 곡의 교향곡, 교향적 무곡, 교향시 '죽음의 섬' 등 훌륭한 관현악 작품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가 22세였던 1895년 완성한 교향곡 1번 작품번호 13은 창작 초기의 작품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요. 이 곡은 애석하게도 초연 때부터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죠. 작곡 후 2년이 지난 1897년 3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됐는데, 지휘를 맡았던 알렉산더 글라주노프가 어떤 이유였는지 성의 없는 자세로 연주에 임하면서 음악회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인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한 채 지휘를 했다고 생각한 라흐마니노프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이 작품을 생전에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을 쓰는 것에 자신감을 잃은 라흐마니노프는 그 후 약 3년간 슬럼프를 겪기도 했죠. 1901년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대성공을 거둔 다음에야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작곡가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교향곡 1번의 악보들이 발견됐고, 다시 생명을 얻은 교향곡 1번의 두 번째 연주는 라흐마니노프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1945년에야 이뤄졌습니다. 교향곡 1번은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달콤한 멜로디가 후기작에 비해 많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러시아의 광야를 연상시키는 큰 스케일과 호쾌한 오케스트라 음향이 듣는 이들을 사로잡는 작품입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일찍이 천재성을 널리 인정받은 음악가였습니다. 작곡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도 실력이 뛰어났던 쇼스타코비치는 조성진이 우승을 차지했던 바르샤바 쇼팽 국제 콩쿠르에 1927년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뒀어요. 무대 공포증 때문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알리는 자리에서는 자주 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925년 발표된 그의 교향곡 1번 작품번호 10은 불과 19살 때 만든 작품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성숙한 면모를 보이고 있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죠. 1926년 5월 초연된 이 교향곡은 발표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뒀어요.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이었던 브루노 발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등이 자신들의 음악회에서 소개하면서 젊은 쇼스타코비치는 단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풍자와 위트, 진지한 서정성과 화려함까지 담은 이 교향곡은 들을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되는 명곡입니다. 평생 모두 15곡의 교향곡을 발표한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활동하며 독재자들 때문에 여러 차례 음악 활동의 위기를 겪기도 하는데요, 그때마다 스타일을 바꾸고 작품 속에 다양한 메시지를 넣는 등 변신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1번
이번 교향악축제에서 연주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과 비슷한 세대인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1번 작품번호 25도 팬이 많은 작품입니다. 프로코피예프는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13살 때부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했어요. 평소 반항기가 많고 도발적인 성격 때문에 보수적인 교수들과 자주 다툼을 일으키곤 했죠. 그런 그와 유일하게 사이가 좋았던 선생님은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을 지내기도 한 니콜라이 체레프닌(1873~1945)이었습니다.
프로코피예프가 교향곡 1번을 창작한 것도 체레프닌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어요. 체레프닌은 제자와 함께 '고전파 작곡가 하이든이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썼을 법한 작품과 스타일'에 대해 연구했는데, 이 곡은 그 주제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17년 완성돼 이듬해 4월 초연된 이 교향곡에는 흔히 '고전 교향곡'이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간결하고 명쾌한 악상, 시종 즐거움이 넘치는 리듬과 발랄함이 느껴지는 선율 등으로 청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곡입니다. 당시 전위적이고 매우 급진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던 프로코피예프였기에 사람들은 이전까지와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의 이 곡을 듣고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고 하죠.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러시아 작곡가 세 사람의 첫 교향곡은 앞으로 나타날 위대한 걸작들의 서막처럼 느껴지는 흥미로운 작품들입니다. 거장이 지닌 예술성의 뿌리가 된 곡들을 찾아서 듣다 보면 작곡가들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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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왼쪽)와 그의 사후 복원된 교향곡 1번 악보 중 일부.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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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왼쪽)와 교향곡 1번 스케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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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러시아국립음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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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피아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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