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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육의 눈은 굶기고, 영의 눈은 채우라!”
+ 본 문 : 창 세 기 3장 1절 - 7절 (구약성경 3 쪽)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서로 인사 / “잘 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신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런데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공기와 같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신이 아니라, 분명히 계시기는 계신데,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신 -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 너머의, 우리로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아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신을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개미가 내 모습 전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당연한 것인데도,
사람들은 지금까지 기독교의 하나님은 볼 수 없다는, 가장 큰 약점을 가진 신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볼 수 없다는 것, 이것은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두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우리 몸의 다른 기관과는 좀 다릅니다. 다른 기관은 뇌의 통제가 가능합니다.
보십시오. “손을 들어, 손을 내려, 발을 올려, 발을 내려, 앉아, 일어서, 누워, 돌아누워” 등 등,
그런데 우리 사람의 눈은 먼저 자기가 독자적으로 일을 하고, 나중에 뇌가 눈이 전한 정보를 받아들여,
비로소 생각하고 느낍니다. 성경에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마태 5:29)
눈의 주인이 분명히 나 자신인데, 마치 눈이 나의 주인인 양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와는 눈으로 먼저 따먹지 말라는, 금단의 선악과 열매를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 가운데 보암직도 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눈이 만족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열매는 먹는 것이어서 맛이 있어야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먹기 전에 먹기 위해, 손을 뻗기도 전에,
눈이 먼저 만족을 얻었고, 따서 한번 먹어봐야 한다는 생각은 눈이 먼저 본 다음에 든 것입니다.
하와의 손보다 눈이 먼저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먼저 눈이 보고, 머리가 생각하고, 손이 움직였습니다.
뱀이 열매를 따서 하와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속삭이면서 하와가 그 열매를 보게 했을 뿐입니다.
충동구매라는 말을 알 것입니다. 살 생각이 전혀 없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니까,
갑자기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물건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충동구매라고 합니다.
대형마트 장난감 코너에 가면, 갑자기 사고 싶어진 물건 때문에 엄마에게 때를 쓰는 아이들을 봅니다.
전혀 필요가 없는데, 집에 비슷한 것이 있는데도 눈으로 본 아이는 그걸 사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트에 갔다가 생각지도 않은 물건들을 사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살 필요도, 살 계획도 없었던 물건을 사도록 충동질했습니까? 바로 내 눈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이 움직이기 훨씬 이전에, 그 물건을 보게 된 내 눈이 먼저 움직여 버린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듣고 보니 “눈은 과연 내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우리는 이렇게 하와처럼 눈이 만족한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큽니다.
그리고 하와처럼 우리의 눈은 그 누군가에게 학습되고 세뇌되어, 조종당하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내 만족인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내 만족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내 선택인 것 같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된, 바로 그 누군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선택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와의 눈을 누가 조종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그 사탄은 이제 우리의 눈을 조종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세상사람 모두의 눈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은 지금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우리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사탄은 우리 사람들의 눈을 정복했고, 아니 이미 저와 여러분의 눈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내 눈인데도 이미 내 눈을 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곳을 바라보지 못한 채, 채워지지 않는 안목의 정욕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때로는 그만하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지 말라는데도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가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라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거든요.
그것은 이미 내 눈을 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조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그냥 바라만 보라고 유혹했을 때에,
하와는 제빨리 하나님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열매가 아닌 사탄을 바라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하와는 자신을 유혹하는 뱀의 정체가, 자기를 망하게 하는 사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 는 선악과 열매를, 사탄이 속삭이는 소리에 바라보는 순간,
하와의 눈은 마비되었고, 눈이 마비되니 생각도 마음도 마비되어 결국 사탄에게 조종당하고 만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래서 마침내 선악과를 따먹었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피해 숨었고,
그 일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해산의 고통과 노동의 수고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보는 것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위 영상시대가 되면서, 텔레비전, 컴퓨터, 아이패드, 스마트폰 등등, 우리의 눈을 유혹합니다.
결코 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어디를 가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보라고 강요합니다.
집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리모콘을 들고 텔레비전을 켜고, 멍청하게 바라봅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텔레비전 앞에서는 다 사라졌습니다. 오직 텔레비전과의 대화만 있을 뿐입니다.
엄마 아빠가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만에 안 들면, 아이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켭니다.
아니면 스마트폰을 켭니다. 그런 가족들의 모습은, 이미 기계의 조종을 당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가정에서만 그렇습니까? 직장에서도, 버스나 기차 안에서도, 심지어 길을 가면서도 기계만 쳐다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데이트 할 때도 얼굴 쳐다보고는 대화가 안 돼, 스마트폰을 쳐다보면서 한 대요.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켜놓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당황하셨습니까?”
옛날에는 기차나 버스 여행을 하면 “오징어 땅콩이나 삶은 계란 왔어요. 도시락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 사 먹으며, 달리는 차창 밖으로 평소에 보지 못하는 풍경들 마음껏 바라보았습니다.
돈이 없어 야간 완행열차를 타면 “창밖으로 비치는 저 캄캄한 숲속의 불 켜진 집에서는 누가 살까?
몇 기구 되지 않는 저 외딴 마을에 사는 아이들의 학교는 어디쯤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상상으로,
야간 완행열차의 지루함을 달랬고, 낯선 옆에 앉은 사람과 통성명을 하면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버스 앞에 달린 텔레비전이나, 기차 천정에 달린 조그마한 텔레비전에 시선고정,
아니면 젊은이들은 아이패드나 노트북을 꺼내고, 스마트폰이나 게임기를 꺼내 화면에 집중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이렇게 우리 눈을 도무지 가만히 놔두지 않고 무언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사탄이 이미 우리의 눈을 조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미 내 눈은, 내 눈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존재하는 물건이고, 존재하는 사람이고,
존재하는 생각이고, 존재하는 보상입니다. 보는 것은 곧 존재하는 것이고 곧 가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보는 것 이상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누군가 오랫동안 지켜봐왔던 것 안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하나만 찾아내도 그는 지혜자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인간은 보는 것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도 육신의 눈으로 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보여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답답한 마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아야 믿고, 본 것을,
내 손으로 만져야만 믿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니 잘 안 믿어질 수밖에요.
그러면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하나님!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무엇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눈 코 입 귀를 보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전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생활은 어떤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리 사람들을 다스리시는 모습은 어떤지 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천국에 이미 가 있을 내가 아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모습은 어떤지 보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우리의 소원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그 얼굴을 보이시고,
패션쇼장의 모델들처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셔야 하고,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하는 기도를 어떻게 들으시고, 다 응답하시는지 낱낱이 보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것을 보는 것이 정말 필요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왜 봐야 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믿기 위해서? 벌을 주시는 모습을 보면 무서워서라도 잘 믿을 것 같아서?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다고 합시다. 언제나 저 위에서 하나님께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정말 좋을까요?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눈을 마주칠 자신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 칠 자신이 있을 정도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의 시선도 부담스러운 우리인데, 하물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내가 보게 된다면,
우리는 하늘을 향해 고개 한번 못 들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할 것이고,
하나님의 시선 때문에 어디에 가서 잠시라도 숨 한번 편하게 쉬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얼굴을 불쑥 내미신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과연 그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입니다.
앞에서 개미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미가 어찌어찌해서 나의 온 모습을 본들 개미와 나 사이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개미가 나의 전체를 다 보고 나서, 아주 작은 자신과 비교하여,
어마어마하게 큰 내 덩치에 놀라서 까무러치는 것 말고는, 개미에게 뭐가 달라지는 게 있겠습니까?
그저 보기만하는 것은 관계에 아무런 도움이 못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면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볼 수 없기 때문에 못 믿는 것처럼 말하고 핑계를 대지만,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저절로 아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통하여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아름답고 광대한,
이 우주를 배경으로 정말 고상하고 품위 있는, 서로 깊이 알고 사랑하는 관계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쳐다보고만 있는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까지 잘 알기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를 만들어놓고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계시다가 잘못할 때마다,
하늘에서 바로 벼락을 치시는 그런 하나님을 눈으로 보려는 생각, 보고 믿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보고 믿으라고, 보이지 않는 건 없는 거라고 우리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를 무너뜨린 것처럼,
우리 인간을 죄인으로 전락시킨 바로 그 방법, 우리의 눈을 점령해 조종해서 타락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최초의 사람 하와와 아담처럼, 사탄에게 눈을 점령당해 너무나 쉽게 넘어갑니다.
우리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에, 얼마나 조종당하는지 이제는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눈에 갇힐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우리 사람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한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특별하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 - 곧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우리 사람의 눈을 점령하여 죄를 짓게 만드는,
사탄의 음모를 이미 아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 안에 비밀장치 - 하나님의 호흡을 넣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호흡은 지금도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 없다.” 고 하지 않고, “여기 나와 함께 있다.” 고 믿습니다.
외국에 가서 다른 종교의 사원이나 성당을 보면, 관광지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건물의 디자인과 규모, 예술적 가치와 건축학적 가치, 고고학적 가치가 매겨질 정도로 대단합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교회당을 지나치게 크게 짓는다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지만, 대형 사찰들을 짓는,
건축비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얼마 되지 않는 대형교회를 제외하곤, 대부분 소박합니다.
건물만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의 사원이나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면, 촛불, 향, 성화와 조각상들,
그림으로 표현된 그들만의 천국과 지옥을 그린 그림과 뚜렷한 신의 형상, 사람이라는 한계를 넘어,
신의 경지에 올라갔다는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
사제나 신부들이 입고 있는 특별한 옷들, 이런 것들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서 믿음을 키워 갑니다.
보는 눈이 압도되는 만족을 주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봐도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는,
신들의 모습과 신의 경지에 들어간 성인들의 모습, 그리고 성화와 조각상들이 눈을 만족시켜 줍니다.
사탄은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말합니다. “이것이 진짜 너희를 구원할 신이니 믿어라.
저것들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인다. 아주 잘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들이 있는, 여기에 가서 절을 하고, 저기에 가서도 절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풀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아멘!
눈은 생각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가 원하는 생각과 사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공동체, 지역공동체, 국가공동체, 신앙공동체가 함께 바라보고 지키고 믿었던 것은 사라지고,
개인이 바라보고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 “개인의 생각과 믿음이 존중되는 사회”
말은 참으로 그럴 듯한 말 같지만, 사실은 하와와 아담을 유혹했던 사탄의 작전과 똑 같은 것입니다.
“네 눈으로 보았으니 너의 생각, 너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네 생각이 먼저다.
잘 보아라.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네 눈으로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을 너는 다 가져라.”
이처럼 하나님의 뜻 대신에 나의 뜻이 더욱 존중되는 사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배드리고 싶으면 예배드리고, 내가 예배드리기 싫으면 안 드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헌금도 내가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내 돈이니 내가 드리기 싫으면 안 드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역도, 기도도, 말씀생활도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눈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탄에게 마음대로 조종당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나의 눈을 제어하지 못해, 사탄이 보라는 것을 보고 그것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서,
사탄이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선악과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눈을 감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굶겨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핍박해야 합니다. 보고 싶다고 다 보여주면 안 됩니다. 눈을 외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울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 같은 치명적인 약점을 아시고 극단적인 처방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아멘! (마가복음 9:47)
우리의 눈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눈의 시대가 이미 왔는데, 사탄이 눈의 시대를,
마음껏 이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나친 교만이요 오만입니다.
사탄은 지금 우리 눈앞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들은 물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폭력,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는 살인, 더럽고 추악한 음란,
사람을 바보 만들어놓고 모두가 박장대소하는 잔인한 비웃음, 언제나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불평,
공경과 예의는 털끝만큼도 없는 방자함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방송, 인터넷, 스마트폰 등을 통해서,
우리 눈동자에 각인시키고, 마침내 우리 마음에 그와 똑 같은 짓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결국 그런 장면들에 눈과 양심의 마비현상이 와서, 그런 상황이 오면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보십시오. 밤새도록 자기 방에서 미친 짓으로 가득한 영상을 본 남자들이, 아이든 어른이든,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와서 자기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약한 여자들을 상대로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어른들은 조절이 가능하므로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최초의 범죄자 아담과 하와도 어른이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오래오래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육신의 두 눈으로 세상의 선악과만을 바라보다가, 마비되어 버린 내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눈을 감고 오래도록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라봄으로, 내 육신의 눈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다. 이 세상은 주님의 것이다. 모든 만물은 주님의 것이다. 나도 주님의 것이다.”
내 생각과 행동을 관장하는 내 육신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킴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일 때,
자석과도 같이 하나님께 내 시선을 고정시키고, 거기서 벗어나 하나님 자녀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 너머를 뚜렷이 볼 수 있는 진짜 시력 말입니다.
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조상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걸어갔던 믿음의 길을 바라보고,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쥐고 흔드는 사탄의 힘에 주눅들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호흡인 생기를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호흡을 내 안에 유지하며, 그 호흡에 의지하여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꺼져가는 불씨 같았던 내 호흡에 성령님께서,
기름과 같이 부어지셔서 활활 타오르는 불의 혀처럼,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그 하나님의 호흡이,
내 안에, 저와 여러분 안에, 선명하고 확실한 소리가 되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최초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기대하셨던 그 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로 범죄하게 하는 육신의 눈은 굶기고, 영의 눈으로는 가득 채우셔서,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