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선생 문집 서문
우리 동방에 명공석사(名公碩士)가 문장으로서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분이 한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생각나는 데로 그려낸다면 성현(聖賢)과 같이 이치에 밝은 글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인데 오직 우리 옥계선생의 글은 그것에 거의 근사(近似)하다 할 것이다. 일찍이 주부자의 말을 들으면 이렇게 말하였다. 이 진실이 그 심중에 있다면 반드시 그 글이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시험 삼아 선생의 글을 관찰하여보고 소급하여 여기에 나온 근원을 추구하여보면 잠겼으나 두텁고 순수하나 자세하고 밝아서 털끝만한 경솔하고 순수하지 못한 기미가 없다.
선생이 천성에서 얻은 것은 이와 같고 또 학문의 힘으로 본심을 잃지 않고 타고난 착한 성품을 길러서 명덕의 신묘함을 지키고 밖에서 살펴 그 응답하는 작용을 능히 이룩하여 순박하고 진실한 지경에 이르러 과오나 차질을 괘념할 것이 없으므로 그 펴서 문자의 사이에 나타냄이 자연 조리가 분명하고 빛이 애연(藹然-온화한 모양)히 창달(暢達-의견을 표현하고 전달함)하고 취미가 뛰어나며 소리가 화평하여 붓이나 잡고 먹을 가지며 장난하며 신기한 것을 힘쓰는 자의 능히 방불(髣髴-비슷함)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효제의 마음이 심중에 쌓여 시가(詩歌)와 문장 중에 나타남이 간절하고 불쌍히 여기어 슬퍼하고 충성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 가운데 쌓여서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 정성스럽고 믿음직하며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마음이 그 가운데 쌓여서 만사(輓詞-만장), 제문(祭文), 행장(行狀)을 짓는 데에도 나타나 단적으로 언행이 법도에 맞고 한마디의 부황되고 거짓이 없으며 읊으는 글이나 현지의 말 잡저(雜著)의 논설에 이르기까지 그 성정(性情-타고난 본성)의 정도가 아닌 것이 없고 그 정미(精微-정밀하고 자세함)한 뜻을 발하여 그 사리의 당연함에 근진하므로 다 그 속에 잠기고 순수한데 부합하니 진실로 이른바 덕이 있는 군자의 말이요 체계를 밝혀 적용하는 학자가 아닌가. 선생이 저술(著述)을 즐겨하지 않아서 유고(遺稿)가 많지 않고 이제 그 보존하고 있는 것이 모두 인사(人事)의 부득이한 것이요. 정(丁), 사문(斯文-유학자), 염(焰)이 일찍이 초하여 기록한 약간 권이 있어 인쇄 발행하였는데 불행히 병화에 소실되어 세상에 퍼진 것이 많지 않아 사림(士林)에서 깊이 애석하게 여겼는데
선생의 손 척(脊)이 개연(慨然)히 중간(重刊)할 의사가 있어 나를 찾아와 청하기를 우리 할아바지의 문집 초록(抄錄)이 너무 간략하여 그 유루(遺漏-잃어 틈이 있음)된 것을 첨가하고 그 듣고 본 바를 거두어 모았으니 책머리에 서문을 써 달라고 하므로 내가 무식하여 글을 할 줄 모른다고 여러 해 동안 사양하였으나 노군의 청이 오래도록 그치지 아니하여 사양할 수 없었으며 옛날 내 선인(先人-선친)이 선생 문하에 출입하며 가장 오래된 친구이어서 선생의 효제하는 학행을 보았고 선생의 아담한 문장을 강송(講誦-글을 소리내어 읽고 욈)하여 이치와 의리에 밝은 것을 탄복하였던 것을 내가 이미 듣고 알았으니 이와같이 끝까지 한마디 말이 없으면 노군을 소원한 죄가 될뿐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일생 동안 존경하고 숭상하던 뜻을 저버릴까 두려우므로 삼가 유고의 약간 수(首)를 취하여 문집에 증보(增補)하고 감히 첨삭하지는 아니하였다. 특히 세교(世交-대대로 맺어온 교분)에 관하여 후학들에게 유익하게 하였으나 있던없던 간에 궐한 것을 증보하지 못하고 빠뜨렸다는 꾸지람을 가히 피할 수 있겠는가?
아아 뒤에 이 문집을 보는 사람은 그 문사(文詞)만 읽지 말고 먼저 그 마음의 소이연(所以然-그렇게 된 까닭)을 추구한다면 효제하는 마음이 유연히 나오고 충신하는 행동을 자진하여 더 힘쓸 것이니 이 문집을 간행함이 어찌 세도(世道-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의 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숭정5년(1632년) 12월 16일에
팔계후학 정온은 삼가 서문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