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내마음의 해와 달 원문보기 글쓴이: 동은
잃어버린 왕국 실직국
가. 실직국(1)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곳 동해안에는 강릉지역의 예국(濊國), 삼척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란 군장 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하여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한다. 창해삼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와 같은 국가의 기틀을 갖춘 나라가 아니고, 소집단이 모여 한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무리 사회적 군장국가로서 당시 한반도 내에는 그러한 군장국가가 130여 개나 있었다.
철기시대를 맞아 다량의 청동제 및 철제무기를 소유한 이들 세 나라는 영역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 되고, 기원 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당시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이라 하여 안일왕 산성이라 부르는데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가면 지금도 정상부에 산성의 형태가 잘 남아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의 하천변에 자연석 바위로서 안일왕 산성을 알려주는 황장금표(黃腸禁表)를 지나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남쪽은 울진에서 제일 높은 통고산, 북쪽은 삿갓봉, 동쪽은 동해바다와 울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데, 이러한 지형지세로 볼 때 이 산성은 동쪽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 판단되며, 당시 창해삼국의 전투가 바닷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강릉의 예국이나 삼척의 실직국, 울진의 파조국 모두 강문항, 삼척항(정라진), 죽변항 등의 포구를 전투 기지화 했으며 그곳이 주된 침투경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실직국의 왕(王)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있는 “안일왕”. 울진지역에서는 “안일왕” 보다 “에밀왕”으로 불려지는데, 그곳의 70대∼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답니다. 즉 예국이,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말이었다.
이와 함께 안일왕 산성 주변의 통고산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하여 통고산, 삿갓봉의 복두괘현(僕頭掛縣.일명 박달재라고도 함)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은 임금이 피신했던곳, 병위동(또는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울진지역에는 2천여 년 전 영동남부지역의 중심세력이었던 실직국의 역사가 아직도 그 숨결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지역에 실직국 관련 설화가 잘 남아있는 것은 울진 지역의 지형적 고립성 때문으로 해석된다. 삼척지역의 실직국시대 유적으로는 원덕읍 노경리 및 근덕면 맹방해수욕장의 초기철기시대유적과 북평항만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집터 및 돌 톱 구슬 토기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그동안 관동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 3월 29일 삼척시립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현재 시립박물관 제1전시실(선사·역사실)에 전시되어 있다.
나. 실직국(2)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실직국이 한국 역사의 무대에 실명(實名)으로 등장한 것은 서기 102년부터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파사이사금 23년 조(條)의 내용이 그것이다. 102년 8월 실직국은 경북 경주 인근의 군장국가인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의 경북 안강)과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인다. 오늘날 경북의 울진, 영해, 영덕을 지나 경주의 관문인 청하면 지역까지 쳐 내려 가서 그 지역의 음집벌국과 전쟁을 치룰 만큼 실직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던 것 같다.
실직국과 음집벌국은 전쟁을 하다가 당시 남쪽지역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의 왕을 찾아가 판결을 요청한다. 이에 신라왕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금관국의 수로왕을 초청하여 판결을 내리게 했는데 수로왕은 문제의 그 땅을 음집벌국의 것이라고 판결을 내란다. 신라왕은 재판관으로 초청했던 수로왕을 위해 6부(部)에 명하여 잔치를 벌이도록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수로왕을 위한 잔치” - 이것이 실직국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왕의 명령을 받은 신라의 6부-급량(박씨),사량(김씨), 본피(정씨), 모량점량부. 손씨),한지(잠탁부. 배씨), 습비(석씨. 안강지역)-에서는 수로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게 되는데, 6부 중 5부에서는 이찬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수로왕을 접대했지만 오직 한지부(漢祗部,또는 한기부漢岐部)만이 벼슬이 낮은 자가 접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로왕은 화가 나서 부하에게 명하여 한지부의 족장격인 보제를 죽이고 금관국으로 귀국하였으며, 한지부의 족장 보제를 죽인 수로왕의 부하 탐하리는 음집벌국으로 도망가 숨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크게 노하여 살인범 탐하리를 찾아내려 하는데 음집벌국의 왕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군사를 내어 음집벌국으로 쳐들어간다. 이에 음집벌국의 왕은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고, 이 때 실직국과 경북 경산지역의 압독국도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04년 가을 실직국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접전을 벌이지만 다시 패하게 되고, 신라는 실직국의 핵심인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실직국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당시 실직국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정기적으로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상호 병존적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래서 138년부터는 신라의 왕이 실직국의 영역인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지낼 만큼 실직국은 신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이 되면 실직국은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480년 경 마침내 자치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실직국은 480년부터 500년까지 약 20여 년 간 고구려의 직접 통치를 받는다.
481년 영해까지 장악한 고구려는 점령국을 자국의 군현(郡縣)으로 복속시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는데 실직국 역시 고구려 군현의 하나인 실직군(悉直郡)으로 개편되어 고구려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당시 실직국의 영역은 실직군 밑에 죽현(죽령)현, 만경(만향)현, 해리(파리)현, 우곡(우계)현, 우진야현이란 5개의 현을 두었다는 고구려의 군현제 기록으로 보아 북으로는 우곡현(羽谷縣.羽谿縣;옥계), 서로는 죽현현(竹峴縣.竹嶺顯;하장), 남으로는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원덕)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 우시군(于尸郡;영해) 아혜현(阿兮縣;청하) 야시홀군(也尸忽郡;영덕)지역까지가 실직국의 영역으로 파악된다.
이로써 동해안지역을 대표했던 군장국가 실직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 3국의 열강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국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다. 실직주의 군주 - 김이사부
신라에서 주(州) 군(郡) 현(縣)제도를 실시한 것은 제22대 지증왕 6년(505년) 2월인데 이 때 동해안에는 유일하게 실직국(삼척)에 실직주를 설치했다. 이 실직주에 첫 군주로 부임한 인물이 이사부(異斯夫)였으며, 신라시대 군주(軍主)라는 이름은 이 때 처음 생긴 것이다. 군주는 지방행정의 수장일 뿐 아니라 군사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는 지위였다.
실직주의 군주로 부임한 이사부의 성은 김씨이며,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4대 손(孫)으로 이름은 태종(苔宗)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흔히 이사부로 알려져 있다. 이사부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 정립시대로 가던 때,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에 걸쳐 정치. 군사. 학문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우산국과 대가야 정벌을 완수했고, 진흥왕 때에는 병부령으로서 중앙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왕에게 아뢰어 국사(國史)를 편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사부의 많은 활약 가운데서도 우리 삼척과 연관된 것은 우산국(于山國) 정벌이다.
이사부가 실직주의 군주로 부임할 당시 울릉도는 우산국이라는 부족국가였으며, “우혜”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우혜왕은 대마도에서 “풍”이라는 미녀를 데리고 와 왕후로 봉한 다음부터 정사는 돌보지 않고 풍미녀와 사랑 놀음에 빠졌다. 게다가 왕후의 사치를 위해 삼척의 해안마을은 물론이고, 멀리 신라의 인근까지 노략질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이에 신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마침내 신라왕은 실직주의 군주 이사부에게 우산국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511년 이사부는 즉시 출병하여 우산국에 접근했지만 천연요새와 같은 지형과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벌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되돌아온 이사부는 군사를 철저히 훈련시키고, 이듬해인 512년 실직주를 그대로 존속시킨 상태에서 영역을 확장하여 강릉의 하슬라주 군주에 오른 후 다시 우산국 토벌길에 오른다. 삼척의 정라항에서 우산국에 다다른 이사부는 우혜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하도록 권한다. 그러나 우혜왕은 지난번 싸움에서 후퇴한 신라군인지라 얕보고 그 자리에서 사신의 목을 벤 후 전투를 시작한다. 이사부는 계획했던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어 간다.
모든 군선의 뱃머리에 만들어 세운 대형 나무(木)사자로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 하고 또 화살도 쏘게 하며 군선을 몰게 했던 것이다. 이 광경에 우산국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커다란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고 있으니...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이 때 신라의 군사들이 합창하여 큰 소리로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서 섬사람들을 몰살 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미 이상한 짐승에게 질려버린 우산국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데다가 신라군이 쏘아대는 빗발치는 화살을 피하기 바빴으므로 우혜왕은 자신의 투구를 벗어 이사부의 군문(軍門)에 던지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우산국은 멸망하고 이 때 부터 실직주의 관할영지가 된 것이다.
512년. 이렇게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역사의 자취가 남아있으니 울릉군 서면 남양포구의 사자바위와 투구바위가 그것이다. 신라군이 군선(軍船)에 싣고 왔던 나무사자가 울릉도에 내려져 바위로 변했다는 사자바위, 우혜왕이 항복할 때 벗어던진 투구가 남아 투구봉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아직도 울릉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척시에도 우산국 정벌의 기념물이 있다. 사직동과 근덕면의 경계(옛 삼척시.군의 경계)인 한재 길 옆에 세워진 사자상과 동해시와 경계인 등봉리 주유소 길 옆의 사자상(獅子像)으로 1986년 박환주 시장 재임시 향토사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산국 정벌 때 활용했던 나무사자를 기념하는 뜻에서 삼척시 경계지역에 돌 사자상을 설치해 둔 것이다.
우산국 정벌,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시켰기에 울릉도와 독도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토로 확실하게 자리 매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 실직국의 부흥운동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 동해남부 고속도로를 타고 울진 쪽으로 향하다가 보면 죽변 외곽도로인 간이 비행장이 나오는데, 그 비행장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편에 봉평신라비와 비각이 있다. 이 봉평신라비에서 “실직국의 부흥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한 면을 찾을 수 있다.
봉평 신라비는 1988년 3월 발견되어 4월 15일자 대구 매일신문 보도로 전국에 알려졌으며, 문화재관리국(청)과 대구대학교 연구팀의 조사 결과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진흥왕순수비보다 훨씬 이른 법흥왕 11년(524년)에 제작 건립된 봉평 신라비는 1988년 11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는데, 비석의 재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매우 불량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4각을 이루고 있으나 글씨가 새겨진 1면만 약간의 다듬질을 했고 다른 3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2미터 높이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총 10행 399자이며, 서체는 예서에서 해서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글씨체로서 치졸한 편이고, 비문의 내용은 크게 4문단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신라인 13명이 갑진년 정월 15일에 종묘에서 조상신으로부터 게시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둘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13명의 일행이 거벌모라 남미지에 순행하여 벌교령(오늘날의 비상계엄령)을 내린 것으로, 셋째 문단은 신라 6부(部)가 상의하여 정한 바에 따라 집행관인 대인에 의해 지방관 및 토호에게 형을 집행한 내용이며, 넷째 문단은 총지휘 감독한 실지군주와 석각한 사람 등의 인적사항으로 파악된다.
이 비문에 의하면 505년부터 신라의 직접 지배를 받던 실직국 백성들은 524년 거벌모라성을 불태우는 등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신라 측에서 보면 반란이지만 실직국으로서는 국권회복운동 또는 부흥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맙니다. 신라의 법흥왕이 친히 출병하여 난을 평정하고 지방관인 실지군주와 그 아래 실지도사와 거벌모라 도사에게 장형의 벌을 내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그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비석을 세워둔다.
비문을 보면 거벌모라의 남미지라는 노인촌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는데, 거벌모라는 당시 울진지역의 수부였던 봉평의 지명이고, 노인촌(奴人村)이란 신라에 정복당한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칭하며 이들은 다른 지역주민들보다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으리라 보며, 거벌모라도사는 실지도사와 함께 삼척의 실지군주의 지휘 아래 있었으므로 이것은 곧 신라에 정복당했던 실직국 사람들의 부흥운동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 비문을 통해 “실직”은 법흥왕 대에 “실지”라는 지명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의 지방행정제도가 오늘날 도지사격에 해당하는 군주 아래, 시장 군수급의 도사가 지역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실지주의 경우 군주 아래 삼척의 실지도사와 울진의 거벌모라도사로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실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은 당시 거벌모라의 호족이었던 진(秦)씨 일족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일본 경도지방의 전역에 먼저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계 주민들을 장악하고 그 지방의 가장 힘있는 호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광륭사라는 절을 하타 가와가츠가 세웠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들의 힘을 짐작하게 합니다. 진(秦)은 일본어로 하타, 울진의 옛 이름 파단(波但) 또한 일본어로 하타이다. 한 지역의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 때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예는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지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일본의 나라현 교토후 인근의 우즈마사촌(太秦村)에는 진씨(하타)의 종가가 살고 있으며, 진씨의 호수는 7,100여 호가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1988년 7월 교토대 명예교수인 우에다 마사하끼박사가 일본학자로는 최초로 봉평 신라비를 연구하기 위해 울진을 방문했고, 1989년에는 하타씨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일본 나가오카교오市 요오쿠사(寺)의 주지 구사카 다이코씨가 울진을 방문했으며, 1990년 봄에는 일본 영화감독 일행 5명이 봉평 신라비와 마을 전경, 봉평 해안과 북면 상당리의 진씨가(家)를 찾아 가대(家垈;집터)를 촬영해 갔다. 모두가 자기들의 뿌리를 찾기 위함이다. 이들 모두 울진의 봉평 신라비에 새겨진 “파단(波但)”이라는 글자를 보고 하타(秦)씨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라고 확신했다.
일본의 사료에 진씨와 한씨, 하타우찌와 아야우찌 이 2대 씨족의 시조는 모두 응신왕 대인 4세기 후반에 귀화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실직국 부흥운동의 주도세력이었다고 추정되는 진씨 일족의 일본 망명설은 향토사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