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뚜기는 어떤 회사?
마요네즈·카레 점유율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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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국 오뚜기 사장
▲1942년 경북 영주 태생
▲1964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1974년 오뚜기식품 입사
▲1981년 오뚜기식품 영업담당 상무이사
▲1996년 오뚜기라면 대표이사
▲2000년 오뚜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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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은 오뚜기 카레’ CM송 멜로디가 아직도 선연한 오뚜기는 최초, 1등 기록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식품 기업 중 하나다.
회사 설립연도인 69년 국내 최초 즉석카레 생산에 성공한 데 이어 토마토케첩, 마요네즈, 3분류 레토르트 등을 줄줄이 국내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점한 시장인 만큼 지금도 독보적인 1위 자리가 확고하다. 마요네즈와 케첩, 분말카레, 레토르트 시장에서 모두 8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한다.
당면, 국수, 수프, 즉석국 역시 60% 안팎 시장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2007년 11월 시장조사기관 AC닐슨 조사 기준 26종(오뚜기 전체 생산품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에서 1등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오뚜기의 1조클럽 멤버 등극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2005년 9809억원의 매출액을 올림으로써 이미 2006년 1조원 매출이 기대됐다. 그러나 2006년에는 9702억원으로 오히려 매출액이 줄어들었다.
사실 2006년은 오뚜기에 여러모로 좋지 않은 한 해였다. 매출액뿐 아니라 영업이익과 순이익도 크게 감소했다. 가공식품 부문에서 과당경쟁이 벌어지면서 제품 할인율이 커졌던 게 주된 요인이다.
그러나 2007년 들어 다시 상황이 반전됐다. 2007년 매출액은 1조587억원으로 9%나 증가했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591억원, 461억원으로 65%, 45% 늘어났다. 2006년 말 삼포식품을 인수하면서 냉장, 냉동식품 분야에 새롭게 뛰어드는 등 제품 다양화에 성공한 것도 한 요인이 됐다.
올 초부터 오뚜기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있다.
지난 1월 28일 러시아 의생물학연구소에 의해 ‘오뚜기밥’이 우주식품으로 최종 선정된 것부터가 호재다. 그동안 주가에 전혀 반영돼 있지 않던 자산가치(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평촌 공장 등)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애널리스트들이 제시하는 목표주가도 높아졌다(2월 29일 현 주가 12만4000원, 목표주가 20만~23만원). 덕분에 내년 창립 40주년을 눈앞에 두고 최고의 한 해를 맞이할 기대감이 팽배해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업 ‘오뚜기’
‘1등상품’만 출고… 정상자리 ‘우뚝’
(주)오뚜기는 1969년 ‘풍림상사’로 출발했다. 이어 여러 이름으로 변경된 뒤 1996년 국민들
에게 낯익은 ‘(주)오뚜기’로 새단장을 했다. 1972년 서울 문래동에서 안양 평촌동으로 공장
을 이전하면서부터 눈부신 도약은 시작됐다. 1981년에 미국과 일본에 지사를 설치하는 것을
필두로 1987년 국내 최초로 마요네스 KS 마크를 획득하는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1988년 자동창고를 준공하였으며 식품의 질을 개선, 향상 시키는 일
환으로 이듬해 ‘오뚜기 중앙연구소’를 개소했다.
이런 급부상은 1992년 삼남에 공장을 준공하는 길로 이어져 1994년 상장기업으로, 광활한 자
원의 땅 중국으로 뻗어가 중국 현지법인 ‘강소풍림식품유한공사’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한
편 오뚜기는 식품산업계에선 처음으로 라면에 ‘생산자 실명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양적 발전에 그치지 않고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 환자들에게 새생명을 주는 한국심장
재단과 결연하여 지난해까지 1천여명의 새생명을 탄생케 하는 내적 발전도 꾀했다.
상호처럼 꿋꿋하게 성장해가던 오뚜기는 자사를 아껴준 고객에 대한 감사로 무료 골밀도 측정
행사를 실시하는 한편 1998년엔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천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는 영예
도 안게 됐다.
쉼 없는 성장 뒤엔 숨은 일꾼
국내외적으로 원활한 무역을 하기 위해 군산에 지점을 개설한 후 두 달 후엔 HACCP 인증을 취
득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일파만파 이어지는 성장의 가도는 근로자의 날 기념 ‘국무총리 표
창’을 수여하는 결실을 낳았다.
라면과 과자의 절묘한 혼합 ‘뿌셔뿌셔’라는 신상품을 생산해 1억개를 돌파하고 야채음료
‘야채가족100’출시하는 등 상품개발의 고삐도 늦추지 않았다. 올해로 창사 33주년을 맞는
오뚜기의 함태호 회장은 ‘관심은 변화를 불러온다’라는 경영어록을 출판하여 지난 30여 년
간 오뚜기의 힘찬 행보를 선도해 온 탁월한 기량을 여실히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발전
뒤엔 1974년에 입사하여 삶의 반평생을 보내며 젊음과 열정을 쏟아 부은 강신국 장로의 역할
을 빼놓을 수 없다.
지역색 없이 인재 골고루 등용
(주)오뚜기의 사장으로, 신림중앙교회 장로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강신국 장로는 1974년 8
월 경리부장으로 입사했다. 그는 5년만에 상무로 진급하고 이어 3년만에 영업본부장에 까지 오
르는 등 능력을 인정받아 오뚜기 제휴 관련 기업에서 12년간 사장을 역임하며 실무적인 경륜을
탄탄히 닦아온 기업인이다.
(주)오뚜기는 밀가루, 설탕, 육류, 과자, 빵 등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식품을 다루고 있는 식품산
업계의 거목이다.
이렇게 빠른 성장을 이룩한 오뚜기에는 남다른 기업방침이 있었다는게 오늘날 오뚜기를 이끌
어가고 있는 강 장로의 확언이다.
그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고품질의 상품을 만들어 내야한다는 것이다. 한 상품이 시장점유
율을 50%이상 차지하게 되면 그것을 ‘1등상품’이라고 부른다. 오뚜기에선 갤럽 조사를 통
해 산출된 ‘1등상품’만을 출고하며 2등상품으로 하락하게 되면 그날로 그 상품은 출고정지
시킨다는게 그의 경영방침이다.
강 장로는 또한 제일제당과 (주)대상 그리고 동원참치, 농심 등 강력한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이
기기 위해 매주 금요일마다 현지 공장을 직접 방문하여 시음회를 갖는 등 제품향상을 위한 노력
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한편, 강 장로는 왕성한 영업력 역시 성장의 한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1970년대 후반 ‘SB카
레’와 ‘소머리표 마가린’ 그리고 미국의 한 기업과도 팽팽한 경쟁을 벌일 때 오뚜기는 ‘한
국사람의 입맛에 맞는 제품생산’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 점을 중점적으로 홍보하여 결국 다른 경쟁사들을 제치고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됐던 것이
다. 또한 다른 기업과는 달리 여러 지역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한다는 장점도 덧붙였다. 강 장로
는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정부 관공서의 투자기관이나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추천되는 인재를
쓰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각 지방에서 찾아온 다양한 인재들을 공개적인 채용절차를 통해서만 선발하며, “경영진에도
회장님의 일가친척이나 집안 연줄로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누구든지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남녀를 막론하고 부장도 국장도 될 수 있다”고 하며 21세기
의 경쟁력 있는 기업의 만들고자 하는 소신을 주저 없이 밝혔다.
사랑실천으로 심장병어린이돕기 지원
(주)오뚜기는 하나님의 기업임을 말로만 내세우지 않는다. 지난 1992년 7월부터 생활고로 인
해 치료한번 못해보고 세상을 떠나는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후원하기 위해 한국심장재단과
결연을 맺고 매년 5명의 심장병 어린이 환자의 수술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업은 단
계적으로 인원을 늘려 현재 매월 15명의 어린이에게 새생명을 주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오뚜기의 후원을 받은 어린이는 한국심장재단의 후원 받은 어린이 5,979명 중
20%에 가까운 1,026명이며 지원금액은 16억 원에 달한다.
또한 강 장로 자신은 젊은 시절부터 해 오던 YMCA봉사활동을 지속해 현재 16년째 회원으로 활
동하고 있다.
지시자가 아닌 지도자 강조
회사에서 장로로서의 직분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강신국 장로는 주저 없이 “지시자가
아닌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외적으로 공장의 준공이나 회사 창립일, 기공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을 모셔 예배를 드리게
하는 방법과 신우회를 조직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업임을 나타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으
로 그치지 않았다. 내적으로 형식적으로 되어 버릴 수 있는 이러한 모임보다 매주 한번 있는 조
회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는 사원들에게
“예배당에 가라고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사장인 나의 모습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가를 느껴라. 그리고 선택을 하
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는 지금 대기업으로 우뚝 선 오뚜기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교회에서나 회사에서나 항상
제일 먼저 나와 청소하는 등의 본을 보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삶의 모습, 자신의 인생 그대로를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강신국 장로가 거듭해
서 강조하는 말 “지시자가 되지 말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지시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내가 먼저 본을 보이면 된다”라고 말하는 모습 속에서 그만의 강직한 믿음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강 장로는 시간을 지키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 공공질서를 지키는 일, 동방예의지국의 후
손답게 예절을 지키며 분수를 지키는 일을 자신의 ‘5 守’로 정해 지켜왔다고 했다. 이것을 늘
마음에 품으며 살아온 삶이었기에, 온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며 영광 돌리는 일을 주장하는 말
이 결코 허공을 울리는 말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모습 계속 지켜갈 터
“찬송가 49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제일 좋아한다”는 강 장로는 모태신앙으로 자랐
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전도하는 일에 남다른 마음을 갖고 산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함께 교회에 가자”고 말하던 전도법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고 느껴 삶의 모습으로 전
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이로인해 “강 장로는 일상생활 속에서 틈만 나면 전도의 기회로 삼는다”고 한다. 어쩌다 택시
를 타게 되는 경우에도 하나님 얘기하는 것은 필수처럼 되어 버린 그는 평북노회에선 두 번째
여성피택장로인 김경숙씨와의 사이에 석호, 석완 2남과 귀영 1녀를 두고 있다. 강 장로는 처음
오뚜기에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철저한 기업정신으로 제품을 고품격화하는데 온 심혈을
쏟아 부었다. 그는 자신의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열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전
하며 사는 모습을 앞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흔들림없이 지켜갈 것을 다짐했다.
취재 : 방병관부장
기록 : 정선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