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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
안톤 체호프 지음
▣ 저 자 안톤 체호프
러시아의 작가, 극작가. 모스크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 러시아의 가장 암담한 시대에 전제정치에 대한 반항을 인도주의적으로 작품화하였으며 우수한 지식인들이 횡사하는 것을 본 그는 보수적 언론 기관과의 관계를 끊고, 한때 심취했던 톨스토이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가졌다. 세기말의 침체된 기분을 반영, 환경의 중압에 짓눌린 소시민,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한 탁월한 중․단편을 발표했다. 인간에 가해지는 폭력과 불평등의 제거를 역설하고, 인간성의 고귀함을 가르쳤다. 20년간의 작가 생활 중 약 1천 편의 소설, 11편의 희곡을 썼고, 그의 극은 독자의 리얼리즘으로 무대 예술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왔으며, 『6호실』 『우리의 생활』 등의 소설과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등의 희곡을 남겼다.
▣ Short Summary
통통한 장밋빛 뺨과 검은 점이 하나 있는 부드러운 목덜미, 그리고 무언가 즐거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얼굴에 떠오르는 티 없는 미소. 그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올렌카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귀여운 여인’이라고 불린다. 올렌카는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미이다. 비를 탓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야외극장의 경영자의 불행에 마음이 움직여 그를 사랑하고 그와 결혼한다. 얼마 후 그와 사별한 올렌카는 목재소를 경영하는 상인과 결혼하여 그와 행복한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역시 그도 죽음으로 이별하고 공허해진 올렌카는 수의관과 사귀게 된다.
올렌카는 극장 경영자와 함께 살 때는 온통 세상에는 연극만이 존재한 듯 거기에 몰두하여 협력자가 되고, 목재소 경영자와 함께 살 때는 삶의 모든 것이 목재에만 집중되어 거기에서 의미를 찾게 되며 역시 수의관과 연애하는 동안에도 동물과 방역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듯 사랑하는 상대의 일부로 동화되는 ‘귀여운 여인’ 올렌카는 세 남자와 헤어진 후 수의관의 아들 사샤를 만나 그의 성장을 지켜보며 한없는 모성애를 느낀다. 이제껏 남자들에게 동화되기만 하였던 ‘귀여운 여인’ 올렌카는 비로소 모성애를 통하여 자기만의 주견(主見)을 지니게 된다.
귀여운 여인
안톤 체호프 지음
올렌카는 자기 집 뜰로 내려서는 작은 계단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동쪽으로부터는 검은 구름이 몰려들어 습기 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올렌카의 집 건넌방을 빌려 쓰고 있는 쿠우킨이란 사내가 절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야외극장 치볼리의 경영자이자 연출자였다. 며칠째 내리는 비로 인하여 관객도 모여들지 않고 사용료와 배우들의 급료만 밀려가고 있는 처지를 한탄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역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올렌카가 그의 말을 들으며 가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는 결국 쿠우킨의 불행에 마음이 움직여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올렌카는 항상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여자였다. 전에는 자기 아버지를 사랑했었는데, 그 아버지는 지금 병 중이라 어두운 방 안에서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젠가는 숙모를 사랑한 적도 있었다. 올렌카는 기품이 있으며 정이 많은 여자로서 부드러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고 몸은 아주 건강했다. 그 통통한 장밋빛 뺨이나 검은 점이 하나 있는 부드러운 목덜미, 무언가 즐거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그 얼굴에 떠오르는 티 없는 미소를 보게 되면 사내들은 “응, 거 괜찮게 생겼는걸!” 하며 웃음을 띠곤 했다.
아버지의 유언장에 이미 그녀의 집으로 명시된 올렌카의 집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집시 촌에 있었고, 거기서는 치볼리의 야외극장이 멀지 않았다. 올렌카의 마음은 달콤한 고민으로 가득 찼다. 잠을 잘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새벽녘에 쿠우킨이 돌아오면 침실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커튼 사이로 얼굴과 한쪽 어깨만을 내밀며 상냥한 미소를 짓곤 했다. 마침내 쿠우킨의 청혼으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올렌카의 목덜미와 살이 통통하고 건강한 어깨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 쿠우킨은 손뼉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당신은 귀여운 여자야!” 쿠우킨은 행복했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린 그날 밤에도 비가 내렸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서는 절망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즐겁게 살았다. 올렌카는 입장권을 팔거나 극장 안의 여러 가지 일을 거들어 주었으며, 장부를 기입하고 급료를 지불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올렌카는 어느덧 친구나 친지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것, 제일 중요한 것은 연극이며, 참된 즐거움을 맛보고 교양이나 휴머니즘을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서는 연극을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게 되었다. 때때로 무대 연습에 끼어들어 배우의 연기를 고쳐주고 악사들의 행동을 감독했으며, 지방 신문에 연극의 악평이 실리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며 억울해하고, 신문사에 직접 해명하러 다녔다.
배우들은 올렌카를 좋아하여, ‘귀여운 여인’이라고 불렀다. 그 겨울도 즐거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쿠우킨은 겨울 동안 마을 극장을 빌려 그것을 아마추어 극단에게 제공했다. 올렌카는 점점 몸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만족한 생활 덕분으로 얼굴이 환해졌으나, 쿠우킨은 마르고 핏기가 없어졌다. 겨울 동안에는 사업이 잘 되었는데도 그는 대단한 손해를 보았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마다 기침을 하기 때문에 올렌카는 나무딸기나 보리수 꽃을 달여 먹이거나 오드콜로뉴를 발라주기도 하고 자기의 따뜻한 숄로 덮어 주기도 했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분이에요!” 하고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올렌카는 다정하게 말했다.
사순절에 쿠우킨은 극단 출연 교섭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남편이 떠나자 잠을 못 이루는 올렌카는 자신을 수탉이 없으면 겁을 집어 먹고 잠을 못 이루는 암탉에 견주어 보았다. 쿠우킨의 모스크바 체재가 의외로 길어지고 있었고, 부활제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한 편지에는 치볼리 극장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지시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부활제 일주일 전인 월요일 밤나무로 된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전보예요.” 올렌카는 전에도 몇 번 남편의 전보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웬일인지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떨리는 손으로 전보를 받아 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이반 페트로비치 금일 급사(急死). 지시 바람. 화요일 장례.” 올렌카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가엾은 사람. 그리운 사람. 왜 나는 당신과 만나게 되었나요? 어째서 당신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인가요? 당신을 먼저 보내고 이젠 누구를 의지하란 말인가요. 올렌카는 너무 비참해요. 불행해요.”
장례를 치르고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올렌카는 아직도 상복을 입은 채 낮 미사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역시 교회에서 돌아오던 중이던 바실리 안드레이비치 푸스토발로프라는 이웃 사람과 우연히 함께 걷게 되었다. 그는 바바카예프 목재상의 주인이었지만, 밀짚모자에 흰 조끼를 입고 금시계 줄을 드리운 모습이 상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골 지주에 가까웠다. “세상일은 미리 다 정해진 것입니다. 신의 섭리이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는 다정하게 올렌카를 위로하며 집 앞까지 바래다 준 후 돌아갔다. 그런 후 올렌카에게는 그의 진실 어린 목소리가 들렸고, 눈을 감으면 그의 검은 수염이 떠올랐다. 그 사나이가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 친하지도 않은 중년 여인이 커피를 마시러 와서는 푸스토발로프에 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는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둥, 그 사람에게라면 어떤 여자도 기꺼이 시집을 갈 것이라는 둥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는 푸스토발로프 자신이 찾아왔다. 그는 10분 가량 앉아있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올렌카는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얼마나 그에게 반했던지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듯이 몸을 뒤척이다가 아침이 되자 그녀는 중년부인에게 사람을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약혼이 성립되고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들은 사이좋게 지냈다. 남편은 대개 점심때까지 재목 하치장에 있다가 일을 보러 외출하였는데, 그 뒤는 올렌카가 맡아 저녁때까지 사무실에 앉아서 계산서를 떼거나 물건을 발송하거나 했다. “재목 값이 해마다 20퍼센트씩이나 오르고 있어요.” 올렌카는 목재를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올렌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목재상을 경영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밤마다 꿈속에서 산더미같이 쌓인 판자나 나무 토막, 어딘가 마을 저쪽으로 재목을 운반하는 짐마차의 행렬이 나타나곤 했다. 또는 굵은 나무들이 부딪쳐서 넘어지고 일어서며 쌓이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가 올렌카가 놀라 소리를 지르고 깨어나면 푸스토발로프가 다정하게 말했다. “올렌카, 왜 그래. 여보? 어서 성호를 그어요!”
남편이 생각하는 것은 곧 올렌카가 생각하는 것이었다. 가령 남편이 방안이 덥다거나 장사가 한가해졌다고 하면 올렌카도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은 도무지 오락이란 것은 싫어하여 축제일에도 외출을 하지 않았는데, 올렌카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집이 아니면 사무실에서 일만 하는군.” 하고 친구들은 말했다.
토요일마다 내외는 저녁 기도에 나갔고, 축제일에는 아침 미사에 나갔다. 교회에서 돌아올 때는 언제나 사이좋게 감동의 빛을 띠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었다. 두 사람 모두 향기로운 마음을 발산하고, 올렌카의 명주옷은 살랑살랑 상쾌한 소리를 냈다. 사무실에서도 언제나 사모바르가 끓고, 손님들은 차와 둥근 빵을 대접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 부부는 함께 목욕탕에 갔다가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돌아오곤 했다. “우린 사이좋게 살고 있어요.” 하고 올렌카는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푸스토발로프가 모길레프 현으로 재목을 구입하러 가게 되면 올렌카는 적적하여 밤잠도 자지 않고 울기만 했다. 가끔 저녁에는 건넌방에 세들어 있는 군수의관(軍獸醫官) 스미르닌이란 젊은 사내가 놀러 오곤 했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주고 트럼프 상대도 해주어 올렌카도 기분을 바꿀 수 있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수의관의 사생활이었다. 스미르닌은 이미 결혼하여 자식이 하나 있었으나 부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이혼을 하였다. 지금은 그 부인을 미워하면서도 매달 40루블의 돈을 자식 양육비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으면서 올렌카는 몇 번이나 한숨을 쉬고 머리를 흔들며 가엾어 했다. “블라지미르 플라토니치, 부인과 화해하세요. 아드님을 위해서라도 부인을 용서해야 해요! 아드님도 모든 것을 이해해줄 거예요.”
푸스토발로프가 돌아오자 올렌카는 목소리를 죽여 가며 수의관과 그 가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으면서, 그 어린애는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겠느냐고 남의 일 같지 않게 동정했다. 그러고는 그들 부부는 성상(聖像)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들에게도 자식을 달라고 기도했다.
푸스토발로프 내외는 아기자기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이좋게 6년간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푸스토발로프는 재목이 발송되는 것을 살피러 모자도 쓰지 않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가 그만 감기가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결국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신음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올렌카는 또다시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당신 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예요. 너무나 슬프고 불행해요. 친절한 여러분,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의지할 데 없는 저를….”
모자나 장갑과는 인연을 끊고, 올렌카는 언제나 검은 상복에 흰 상장(喪章)을 달고 있었다. 교회와 남편의 묘지를 찾아가는 것 외엔 거의 집을 나가지 않고 수녀와 같은 생활을 했다.
6개월이 지나자 겨우 상장을 떼고 덧문을 열어놓게 되었다. 낮에는 가끔 식모를 데리고 반찬을 사러 시장에 가는 모습이 보였으나, 올렌카의 요즈음 생활이나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다만 추측을 할 뿐이었다. 그녀가 수의관과 차를 마시고 있다느니, 수의관이 그녀에게 신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느니, 또 우체국에서 어떤 친구를 만난 올렌카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이 그 추측의 원천이 되었다. “이 고장에서는 가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질병이 많은 거예요. 우유를 마시고 병을 얻거나, 말이나 소로부터 병이 옮는다는 사실은 잘 알지 않아요? 원래 가축의 건강도 인간의 건강과 마찬가지로 주의를 해야 해요.”
올렌카는 수의관의 이야기를 되풀이하였고,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나 수의관과 의견이 같았다. 애정 없이는 1년도 살지 못하는 올렌카가 자기 집 건넌방에서 새로운 행복을 발견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다른 여자라면 세상의 비난을 받을 것이 틀림없지만, 올렌카의 경우엔 누구 하나 이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올렌카와 수의관은 자기들 사이에 생긴 변화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기려 했으나 그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올렌카는 원래 비밀을 지니지 못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군대 동료들이 수의관을 찾아오면 올렌카는 차와 저녁을 대접하면서 가축의 홍역 또는 결핵에 대해서, 또는 시장의 도살장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입이 딱 벌어진 수의관은 손님이 돌아가자 올렌카의 손을 붙잡고 화를 내며 불평했다. “알지도 못하는 그런 소린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 수의사끼리 말할 때는 제발 입을 열지 말아요. 지루할 뿐이니까!” 그러면 올렌카는 놀라고 불안스런 눈초리를 하며 되묻는 것이었다. “볼로치카, 그럼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요?”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나이를 껴안고 화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시베리아와 같은 먼 곳은 아니지만, 군대가 꽤 먼 어느 벽촌으로 이동하게 되어 수의관도 이 군대와 함께 떠나버린 것이다. 올렌카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올렌카는 완전한 외톨이였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올렌카는 조금 야위고 볼품도 없어져, 길에서 만나는 사람도 전과 같이 미소를 던지지 않았다. 분명히 젊고 아름답던 시절은 지나가버리고 다시는 그녀에게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행복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저녁이 되어 뜰로 내려가는 층계에 앉아 있으면 치보리 야외극장의 음악 소리와 불꽃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아무 희망도 없이 뜰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밤이 깊으면 잠자리에 들었으나, 꿈속에서도 텅 빈 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먹고 마시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불행은 자기의 주관이란 것이 전혀 없어진 것이었다. 눈으로는 주위의 여러 가지 대상을 바라보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아무런 주관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가령 병(甁)이 하나 세워져 있다든지, 또는 비가 내리고 있다든지, 아니면 농부가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을 분명히 보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 병이 세워져 있고 비가 오고 농부가 어디를 가는지를 자기의 생각으로는 말하지 못했다. 1000루블을 준다고 해도 말을 못 하는 것이었다. 쿠우킨이나 푸스토발로프가 살아 있을 때에는, 혹은 수의관과 함께 있을 때에는 올렌카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 속도 마음도 자기 집 뜰과 같이 텅 비어 있었다. 쑥이라도 먹은 것 같이 쓰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시가지는 점점 사방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집시 마을은 이미 집시 가(街)로 이름이 바뀌고, 치볼리 야외극장과 재목 하치장이 있던 장소에는 건물이 즐비하고 많은 샛길도 생겼다. 시간의 흐름이란 얼마나 빠른 것인가! 올렌카의 집은 이미 낡아 지붕은 녹슬고 창고는 기울어졌으며 뜰에는 잡초와 가시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올렌카 자신도 늙고 추하게 되었다. 여름에는 뜰로 내려가는 층계에 앉아 있었고 겨울에는 창가에 앉아 눈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역시 공허하고 적적했다. 그럴 때 문득 봄의 기척이 느껴진다거나 바람이 교회의 종을 건드려 소리가 나게 되면, 불현듯 과거의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메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일로서 그것이 지나면 다시 공허가 깃들어 자기가 왜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검은 고양이 브리스카가 다가와 재롱을 부리건만 올렌카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전부를, 마음과 이성의 모든 것을 붙들고 그녀의 사상과 생활에 방향을 찾아주고 식어가는 피를 데워줄 하나의 애정이었다. 그녀는 옷깃에 매달리는 고양이를 쫓아 버리며 짜증을 냈다. 이렇게 날이 가고 해가 거듭되었으나 아무런 기쁨도 없고 아무런 주장이나 의견도 없이 살림은 식모인 마브라가 하는 대로 맡겨버렸다.
무더운 7월 어느 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기에 올렌카가 문을 열어주러 나갔는데, 상대방을 보는 순간 기절할 뻔했다. 머리가 희끗하고 평복을 입은 수의관 스미르닌이었다. 순간 그녀는 잊어버렸던 과거를 모두 되찾았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엉엉 울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차를 마시러 식탁에 마주앉게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 정착하려고 군대를 그만두고 왔죠. 자유의 몸이 되어 정착된 생활을 하면서 내 운을 시험해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자식 놈도 이젠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고, 아주 다 자랐어요. 실은 나는 마누라와 다시 결합했어요.” “그럼, 부인은 어디에?” “아들과 함께 여관에 있어요. 나는 셋집을 찾아다니는 중이고요.” “어머, 그렇다면 이 집에서 사세요! 여기가 마음에 안 드세요? 집세 같은 건 한 푼도 필요 없으니까요.” 올렌카는 흥분하여 울기 시작했다. “여기서 사세요. 난 건넌방 하나로도 충분해요. 아아, 정말 기뻐요!”
이튿날 지붕에는 페인트칠이 시작되고 벽에는 회를 바르기 시작했다. 올렌카의 얼굴에는 전처럼 미소가 되살아나고 전신에는 활기가 넘쳤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수의관의 아내는 마르고 못생긴 여자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어딘지 모르게 고집이 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함께 온 사샤라는 사내아이는 나이에 비해서는 작았으나(벌써 열 살이었다), 살이 찌고 서늘한 푸른 눈을 가졌으며 볼에는 보조개가 패여 있었다. 올렌카는 소년과 잠시 이야기하고 차를 마셨는데, 마치 소년이 자기 자식인 것처럼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소년이 식당에 앉아 복습하는 것을 올렌카는 감동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나 귀엽고 상냥한 아이인가. 어쩜 저렇게도 영리하고 잘 생겼을까!” “섬이란.” 하고 소년은 읽어갔다. “육지의 일부로서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것을 말한다.” “섬이란 육지의 일부로서….”하고 올렌카는 반복했다. 그것은 침묵과 공허로 그 많은 세월을 보낸 뒤, 처음으로 확신을 갖고 말하는 주견(主見)이었다. 비로소 자기 주견을 되찾게 된 올렌카는 저녁을 먹으면서 사샤의 부모를 상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즉 최근의 아이들은 중학교 공부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고전 교육이 실업 교육보다는 좋다. 왜냐면 중학 졸업생은 앞길이 창창하며 희망에 따라 기술자도 되고 의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사샤는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소년의 어머니는 하르코프에 있는 자기 언니네 집에 가서 거기 눌러 앉아 있었다. 부친은 매일같이 어디론가 가축 검사를 하러 갔는데, 어떤 때는 2, 3일씩 묵는 수도 있었다. 올렌카는 사샤가 자기 가정에서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었고, 따라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굶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소년을 위해 건넌방에 붙은 작은 방 하나를 비워주었다.
이렇게 사샤가 올렌카와 살게 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올렌카는 매일 아침 소년의 방으로 갔다. 소년은 한 손을 얼굴에 얹고 숨소리 하나 없이 잠들어 있었다. 올렌카는 깨우기가 가여웠다. “얘야, 사센카?” 하고 올렌카는 애처로운 듯이 아이를 불렀다. “착한 아이지. 일어나요! 학교 갈 시간이 됐어!” 소년은 일어나 옷을 입고 기도를 하고 나서 테이블에 앉았다. 큰 컵으로 차를 석 잔이나 마시고 둥근 도넛 두 개와 버터가 발린 빵 절반을 먹었다. 그는 아직 잠이 덜 깨어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사샤. 아직 우화를 암송하지 못했지?” 하고 올렌카는 말하면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바라보듯 소년을 살펴보았다. “정말 걱정이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돼요.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내버려 두세요. 제발.”하고 사샤는 말했다. 그러고는 작은 몸에 큰 모자를 쓰고 가방을 메고는 한길로 나가 학교로 걸어갔다. 그 뒤를 올렌카는 가만히 따라갔다. “사센카!”하고 올렌카가 불러 세웠다. 소년이 돌아보자 올렌카는 대추와 캐러멜을 소년의 손에 가득 쥐어 주었다.
학교가 보이는 골목길에 접어들자 소년은 자기 뒤에 키가 크고 뚱뚱한 여자가 따라 오는 것이 부끄러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주머니, 돌아가세요.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올렌카는 멈추어 서서 소년이 학교 정문 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곁눈질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아, 얼마나 이 소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이토록 깊은 사랑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모성적인 감정이 점점 더 강하게 불타고 있는 지금처럼 타산도 없고 욕심도 없고, 더구나 이처럼 기쁘고 마음이 뿌듯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핏줄은 아니지만 이 소년을 위해서라면, 그 볼의 보조개와 그 학생 모자를 위해서라면 올렌카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버릴 것이다. 웬일일까! 이 까닭을 누가 설명해줄 수 있을까!
사샤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나면 올렌카는 흡족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가슴 가득히 애정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샤와 함께 지낸 반 년 동안에 다시 젊어진 얼굴은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런 올렌카를 보고 친밀감을 느껴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요즘 어떠세요?” “요즈음은 중학교 공부도 어려워졌어요.” 하며 올렌카는 길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 “농담이 아니예요. 어제는 1학년에게 우화 암송과 라틴어 번역과 그리고 수학 문제까지 숙제를 내주었으니. 사실이지, 어린 학생에겐 너무 과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선생 이야기나 수업에 대한 이야기, 교과서 이야기를 사샤가 말하는 그대로 끄집어내었다.
2시가 넘어서야 올렌카와 샤샤는 함께 점심을 먹고, 밤에는 함께 예습을 하면서 진땀을 흘리곤 했다. 소년을 잠재우고 나서 올렌카는 오래도록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올렸다. 그러고는 자기도 침실로 들어가 먼 미래를 꿈꾸었다. 사샤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나 기술자가 되어 자기의 큰 저택을 갖고 자가용 마차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지. 올렌카는 눈을 감고 언제까지나 그런 생각만 했다.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검은 고양이는 올렌카 곁에서 야옹거리고 있었다.
“똑. 똑. 똑.” 갑자기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올렌카는 눈을 뜨고 겁에 질려 숨을 죽였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30초 가량 지나서 다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르코프에서 전보가 왔구나!’ 올렌카는 이렇게 생각하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사샤의 어머니가 사샤를 하르코프로 보내라고 전보를 쳤나봐. 아아, 어쩌면 좋아!’ 올렌카는 절망을 느꼈다. 머리와 사지가 싸늘해졌다.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의관이 클럽에서 돌아온 것이다.
“아아, 고마워라!” 그녀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의 고동이 점점 가라앉으면서 기분이 다시 가벼워졌다. 올렌카는 다시 드러누워 사샤의 일을 생각했다. 사샤는 옆방에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사샤의 잠꼬대가 들려왔다. “이 자식, 저리 가! 해볼 테냐!”
첫댓글 님은 책을 많이 보시나 보네요. 그렇게 준비하고 있으면 반드시 빛을 발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이군요 그러다보면 닮게되구요.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닮는 비결이기도 하구요. 잘 읽고 하나 배웠습니다.
님이라하니 한층더 귀한 이름처럼 여겨지네요 힘차게 삽시다님께서는 이시대에 진솔한 시인의 재능을 충분히 가지고 계신분입니다. 좋은 시좀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과찬의 말씀, 그대가 있기에 나도있고 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 우리모두 화이팅팅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