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 ~ ?.
자(字)는 익지(益之), / 부(父)는 민홍한(閔弘翰) , 조부(祖父)는 민흥종(閔興宗)이고, 증조부(曾祖父)는 민정충(閔精忠) 이다. 효종(孝宗)5년 식년시(式年試) 급제 병과(丙科)급제, 감찰(監察)를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사겸(閔思謙) 효종(孝宗)5년(1654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丙科2)
민사관(閔師寬)(순조 26년, 1826)~(순조 27년, 1827), 진양속지 제1권/임관/목사(牧使)
민사관(閔思寬) 生員
민사국(師國)부는 민재(在), 조부는 민진욱(震旭), 자는 민우세(禹世)도정(都正)
민사권(閔思權) 18世祖,
자(字)는 경소, 사복시정(司僕寺正) 역임,/ 대제학 여흥군 민유( 愉; 중현조)의 8대손, 형조참판 민징원(閔澄源)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에 5대 손으로, 증호조판서 여흥군 민종윤(宗胤)의 아들이며, 평난공신 여양군 민인백(仁伯)이 공에 장남(長男)이고 . 이청망통대사헌(以淸望通大司憲) 민인길(仁佶)이 차남(次男), 五男 민인전(仁佺) 贈병조판서, 이다, 충좌위부사 민성(閔垶) 충민공이 손자이다. 선조대왕이 장차(將次) 서행(徐行)으로 행차(行次) 행차하시는데 공(公)이 어가 앞에 엎드려 아뢰기를,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여기 있거늘, 사력(死力)을 다하여 지키시고, 가지 마시옵소서 하고 청(請)하였으나 상(上)이 뒤돌아 보고, 신하에게 물으니 신하 왈 이미 결정된 사항을 어찌 소리(小吏)에 말을 듣고 중지 하시옵니까? 하니 불청(不聽) 하심으로 말 고삐를 붙들고 울면서 수행(隨行 하다가 종래(終來) 그해 11월 12일 용강여사(龍江旅舍)에서 卒하였다,순충덕적보조공신(純忠德積輔祚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議政府右議正 兼 領經筵事)에 증직(贈職) 되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짐,
민사녕(思寧)17世祖,
송사랑(承仕郞) 贈참의(參議)/ 자(子)는 사직참봉(社稷參奉) 민여혼(汝渾) 贈호조참판(戶曹參判),
민사덕(師德) 16世祖, 자는 민응기(應祺)縣監(현감)
민사도(思道)18世祖.
자(字)는 경행(敬行). 부(父)는 민간(閔簡), 조부(祖父)는 민세구(閔世球)이고, 증조부(曾祖父)는 형조참의(刑曹參議) 민효손(閔孝孫)이다. 중종(中宗)37년 정시(庭試)급제 병과(丙科)급제, 직강(直講), 현감(縣監)을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사도(閔思道) 중종(中宗)37년(1542년), 정시(庭試) 병과1(丙科1)
민사량(思亮) 20世祖, 1616 ~ ?.
자(字)는 원명(遠明), 여절교위(勵節校尉) 민사건(師騫; 감사공파(監司公派)시조)에 6대손이고, 관찰사 민기문(起文;역암공파( 菴公派)시조)에 4대손으로, 부(父)는 민성휘(閔聖徽), 조부(祖父)는 호조정랑(戶曹正郞) 민유부(閔有孚)이고 증조부(曾祖父)는 민리(閔리) 이다. 인조(仁祖)17년 식년시(式年試)급제 병과(丙科)급제, 통덕랑(通德郞) 주부(主簿)를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사량(閔思亮) 인조(仁祖)17년(163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12(丙科12)
민사부(師傅) 부는 민정(정), 자는민승세(承世), 손은 민종묵(種默)형조 판서
민사선(師宣) 1747 ~ ?.
자(字)는 희문(希文) ,거주지(居住地)는 경(京)으로, 부(父)는 민숙(閔塾) , 조부(祖父)는 민진정(閔震炡), 증조부(曾祖父)는 민정매(閔挺梅) 이다. 정조(正祖) 2년 정시(庭試) 을과(乙科)급제, 승지(承旨)를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사선(閔師宣) 정조(正祖)2년(1778년), 정시(庭試) 을과2(乙科2)
민사성(師聖) 16世祖, 부는 민계(溪), 조부는 민희삼(希參), 자는민우(愚)집의(執義)
민사안(閔思顔) 해남(海南)읍지(邑誌) 진사(進士)
민사안(思安)17世祖,
자(字)는 언정(彦靜), 현령 역임./부는 좌찬성 민제인(齊仁; 입암공파(立岩公派)에 삼남이다, 조부는 민구손(龜孫)동복현감, 증조부(祖父)는 민수사옥(閔粹史獄))에 당사자 민수(閔粹)이고, 고조부(曾祖父)는 대전 입향조 민충원(閔沖源)이다. 자는 함경감사 민여경(汝慶)證이조판서이다, 금오랑(金吾郞), 주부(主簿)를 역임 하시고,사평감찰(司評監察), 도사판관(都事判官)을 지내셨다. 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 吏曹參判), 행통훈대부 한성부판관(行通訓大夫 漢城府判官)에 증직(贈職) 되셨고, 입암집 원집6권 간행(立巖集 原集6卷 刊行). 묘소; 경기 여주 산북면
민사억(師億) 부는 민돈(墩), 조부는 민진소(閔震 ), 아들은 민경세(慶世)승지(承旨)
민사연(思淵) 자는 민석규(錫圭), 손은 민유(游)승지(承旨)
민사연(閔思淵)字(자)는 아경(亞卿), 朝鮮(조선)에서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민사영(閔思寧)좌찬성을 역임.
민사옥(師鈺)
부는 민제(閔제), 조부는 민진엽(震燁), 자는 민양세(養世)正祖19년식년시(式年試)급제 병과(丙科)
민사완(閔思完) 좌승지(左承旨)
민사용(閔思容)17世祖, 1515(중종 10)∼1579(선조 12), 조선 전기의 문신
<남양주시지>
제2권 문화재와 인물 | 제2편 성씨와 인물 | 제2장 고려·조선조 인물*
자는 언묵(彦默)이고 본관은 여흥이다. 刑曹 判書(형조판서)민심언(閔審言) 유수(留守)공파 중현조에 5대 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복현감 민구손(龜孫), 아버지는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민제인(齊仁; 입암공파(立岩公派)시조)이며, 어머니는 고성 이씨이다. 형제로는 공(公)이 장남으로 민사관(思寬)예빈봉사(禮賓奉事), 민사안(思安)현령(縣令), 민사선(思宣)감찰(監察), 서출(庶出)로 민사환(思寰 ), 민사의(思宜)가 있다, 자는 ①민여건(汝健)이조판서, ②가선대부(嘉善大夫)민여준(汝俊)창신교위(彰信校尉), ③민여신(汝信)고산찰방(高山察訪), ④민여간(汝侃), ⑤민여임(汝任)공조참판, ⑥가선대부(嘉善大夫)울산부사(府使)민여검(汝儉)운촌공파(雲村公派) 시조, ⑦민여길(汝佶), ⑧여전(汝佺), 8 아들을 두었다, 손자는 민설군수(郡守), 증손자는 부사(府使)민광소,민광숙(光숙)남원부사(南原府使), 1546년(명종 1) 생원이 되었고, 관직은 문천군수에 이르렀다. 사후에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일패동 명우에 묘가 있다.
참고문헌 여흥민씨세계보 간행위원회, 『여흥민씨세계보』, 1974.
민사윤(師尹) 자는 민이세(이世)이고, 손은 민종길(種吉), 증손은 민병훈(秉勳)장령(掌令)
민사의(思敬) 부는 민종수(宗秀),조부(祖父)는 민정점(正漸),자는 민덕기(德基)병조참의(參議)
민사인(師仁) 직산(稷山)출신/부는 민지(閔지), 조부는민진훤(震煊), 자는 민영세(英世)함평현감
민사점(閔思點)15世祖,
字는 유득(有得), 號는 만은(晩隱). 吉州 목사(牧使)역임./ 민상백(閔祥伯; 중현조)에 7대손으로, 부는 사헌부 집의(執義) 민회삼(懷蔘) 의암공파(義菴公派)시조, 조부는 동지사 민효원(孝源), 증조부는 증참판 민소생(紹生)이다. 형제로는 민계점(繼點) 현감(縣監), 자는 민충익(閔忠翼) 충순위 돈녕(忠順衛 敦寧),
화순군지 (전시대의 인물1)/蔭仕 ◇綾州◇ 字는 유득(有得), 號는 만은(晩隱). 義庵 懷參의 子이다. ○畢齋 金宗直의 문인(門人)이니, 寒暄 金宏弼 一○ 鄭汝昌으로 道義密勿하였다. 단종(端宗) 계유(癸酉)에 忠武衛 부사직(副司直)을 除하고 갑술(甲戌)에 吉州 목사(牧使)를 除하니, 단종(端宗)이 昇遐함에 解官 而歸하여 杜門自靖하였다.
민사점(閔思點)
전라도 능주읍지 음사(蔭仕) 예종(睿宗)
민사점 여흥인 부사직(閔思點 驪興人 副司直)
민사정(師貞) 부는 민계(閔 계), 조부는 민진황(震煌),자는 민기세(箕世)홍문록
민사정(閔思程) 18世祖,
참판(參判) 역임, / 대제학 여흥군 민유( 愉; 중현조)의 8대손, 형조참판 민징원(閔澄源)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에 5대 손으로, 증호조판서 여흥군 민종윤(宗胤)의 아들이며, 조부는 민세규(世珪)첨정(僉正)贈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 증조부는 민효성(孝誠)통훈대부(通訓大夫)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고조부는 민형(亨)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이다, 후사(後嗣)가 없어 형인 민사권(思權)에 셋째 아들로 뒤를 이었다,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總府副總管)으로 증직(贈職) 되었다,
민사종(閔嗣宗) 17世祖,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 승지(承旨)를 역임./ 민상백(閔祥伯; 중현조)에 8대손, 부는 민충좌(閔忠佐)中宗朝에 와서별좌 중직대부(瓦署別坐 中直大夫), 조부는 민계점(繼點) 현감(縣監), 증조부는 집의(執義) 민회삼(懷蔘)의암공파(義菴公派)시조.
※ 화순군지 (전시대의 인물1)
蔭仕 ◇同福◇ 민사종(閔嗣宗) : 驪興人, 義庵 懷參의 后요 瓦署別坐 中直大夫 忠佐의 子이다. 明宗朝에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 승지(承旨)를 하였다.
전라도 능주읍지 음사(蔭仕) 명종(明宗)
민사종 여흥인 좌승지(閔嗣宗 驪興人 左承旨)
민사중(閔思中)
민사중(閔思中) 본 여흥(驪興)
영주 문화유적 > 정각 향서당(鄕序堂)
구성산 남쪽에 있었다. 군수 하륜이 건립하였고 1433년(세종 15)에 군수(郡守) 반저(潘渚)가 보수하였고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증축(增築)하였을 때 그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군수 김한진(金漢珍) 군수 권득경(權得經) 군수 송원창(宋元昌)이 각각 출자(出資)하고 지사(志士) 10여인이 목재와 도와(陶瓦)를 염출(捻出)하였으며 집의 송인창(宋仁昌) 현감 권경행(權景行) 선무랑(宣務郞) 민사중(閔思中) 부사(副使) 권흠(權欽) 통찬(通贊) 김홍지(金洪之)가 공력(工力)을 맡아 4칸을 증축하였으니 신구(新舊) 합하여 9칸이 되었다고 한다. 증축 낙성연(落成宴)에서 송인창(宋仁昌)이 시를 읊었다.
향서당은 당규를 약정(約定)하고 향사(鄕士)들을 모아 기강확립(紀綱確立)과 순풍진흥(淳風振興)을 강조하여 사회경화에 기여하는 한편 신구관원(新龜官員)을 영송(迎送)하는 업무를 관장(管掌)하여 관민 친선의 도(道)를 극진(極盡)히 하여 왔다.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모든 제도가 변경됨에 따라 자연 공당(空堂)을 보존하여 오다가 일본의 침약시대에 불가(佛家)의 소유가 되어 현 하망 1동(현 임무소)에 영주불교포교당(榮州佛敎布敎堂)으로 이건되었다. 그후 수차의 소유권 변동으로 지금의 대한석탄공사 영주 임무소(林務所)가 소유하다가 사옥(社屋) 신축으로 1986년 향서당 구 건물은 철거 되었다.
민사평(閔思平)10世祖,1295(충렬왕 25)~1359(공민왕8).
고려조 문관, 학자. 호는 급압(及압). 찬성사(贊成事) 민종유(閔宗儒)의 손자, 문순공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민적( 頔)의 큰아들. 중현조 민변(忭)과 중현조 유(愉)가 동생들이다, 정승 김륜의 사위이다. 고려충숙왕조 등과하여 산원(散員), 별장(別將)에 임명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충숙왕때 문과에 급제. 예문춘추관 수찬을 거쳐 응교(應敎), 대사성(大司成), 1344년(충혜왕 5)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뒤 여흥군에 봉해졌다. 일찌기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 갔던 공으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공신에 호를 받고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으며 찬성사(贊成事) ,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아하며 친인과 화목하고 교유를 잘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도 일을 처리하는데 모나지 않았다. 시서(詩書)를 즐기고 학문에 뛰어 났으며 이제현(李齊賢), 정자후(鄭子厚)등과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다. 문집(文集)급암집(及庵集) --문헌;--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事節要)
1. 민사평(閔思平)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제영 최설출현재(崔薛出賢材) :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계림에 옛적 나라를 일으켰을 때 최씨와 설씨에 어진 인재 나왔네. 예악(禮樂)은 중국을 배워 성대하게 문채가 났네. 그 임금 고려에 국토를 바친 뒤로는, 분사(分司)로 막부(幕府) 열었네. 백성들은 다 어진 이의 후손이라, 큰 갓에 위의(威儀)가 의젓하구나." 하였다.
2. 閔(민)氏 예산군지
민씨는 선대에 중국으로부터 나왔다고도 하고, 또는 여주(驪州)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으나 모두 분명치 않다. 본관은 여흥(驪興) 단본이다. 문헌에는 여흥 외에도 황려(黃驪), 영주(榮州) 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황려는 여흥의 옛이름이고, 영주민씨는 여흥 민씨의 지파로서 근세에 와서 여흥으로 통합되었다.
시조는 고려 때 상의봉어를 지낸 민칭도(閔稱道)인데 그의 상계는 전해지지 않고, 또 본관을 여흥으로 하게 된 연유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씨는 한말의 세도 가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역사상 3차에 걸쳐 크게 위세를 떨쳤다.
첫 번째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기간, 두 번째는 조선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세 번째는 한말 고종 때이다. 민씨는 조선조에서 왕비 4명, 상신 12명, 대제학 3명, 호당 6명,청백리 3명, 공신 7명, 장신 8명, 문과 급제자 249명을 배출한 명문으로 왕비 4명은 청주 한씨 6명의 다음이고, 상신 12명은 전주 이씨 22명, 동래 정씨 17명, 안동 김씨 15명, 청송심씨 13명의 다음으로 제 5위이다. 그리고 문과 급제자는 제 6위이다. 민씨는 시조의 증손 민영모(閔令謨)가 중앙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 첫 번째 융성기를 맞는다. 그는 명종조에 판이부사, 태자태사 들을 지냈고, 그의 아들 민식(閔湜)은 신종조에 형부상서, 민공규(閔公珪) 역시 진종조에 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지냈다. 식의 증손 민지(閔漬)는 충숙왕조에 수정승으로 여흥군에 봉해졌고, 지의 아들 민상정(閔祥正)은 찬성사를 지냈다. 민종유(閔宗儒)는 공규의 증손으로 찬성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민적은 충혜왕조에 진현관대제학을 지냈다. 적의 아들 민사평(閔思平)은 공민왕 때 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등을 지냈고, 아우 민유(閔愉)는 공민왕조에 제학을 지냈다. 이상이 민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 놓은 인물들로서 모두 10촌 안팎의 친족들이다.
문헌(文獻) ; 급암시집 ( 及菴詩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 권수제 及菴先生詩集 / 판심제 及集 / 간종 목판본
간행년 1370年刊 / 권책 5권 1책 / 행자 11행 15자 / 규격 17.2×12.7(㎝)
어미 上下內向黑魚尾
소장처 성암고서 박물관장본(4-529. 보물 708호)을 촬영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소장 마이크로필름
소장도서번호 /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3
저자 ; 성명 민사평(閔思平)
생년 1295년(고려 충렬왕 21) 몰년 1359년(공민왕 8)
자 坦夫 호 及菴 / 본관 여흥(驪興) 시호 文溫
민사호(閔士鎬)
驪興世稿(奎11466,奎 11467), 閔士鎬(朝鮮)編.
3卷 2冊 活字本 30×19.3cm./四周單邊 半郭:21×13.7cm.
有界 10行 20字./ 版心:上下花紋魚尾. 驪興 閔氏의 世稿로 1875년(高宗 12) 후손 閔士鎬가 편집 간행했다.
{권1}은 雙梅軒實記(閔齊淵), {권2}는 觀瀾齋遺稿(閔弘錫), {권3}은 桐塢遺稿(閔致永) 등으로 編次되어 있다. 閔齊淵(1632∼1720)은 호 雙梅軒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일생을 詩書로 보냈으며, 80세 때 老人職으로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閔弘錫(1685∼1772)은 호 觀瀾齋로 齊淵의 從孫이며 孝行이 지극하였고 詩로 嘉善에 올랐다. 閔致永(1796∼1842)은 호 桐塢 또는 暘谷이며 弘錫의 高孫이다. 학문에 孝行으로 이름이 높았다. {권1} 雙梅軒實紀:앞에 任憲晦와 후손 在南의 後序가 있다. 詩로 植雙梅言志 등 12수, 序로 雙梅詩序, 附錄으로 編年(年譜), 李宜朝가 쓴 行狀, 宋煥箕가 쓴 墓表 그리고 閔鎭厚 등이 보내온 簡牘을 모은 諸賢簡牘, 李健命 등이 보낸 시를 모은 諸賢遺贈, 閔鎭遠 등의 輓章 5수, 從孫 弘錫 등의 次韻을 모은 雙梅軒次韻 5수, 이 文集을 읽고 그 감상을 5대손 曦爀이 쓴 談實記有感, 閔璣容이 쓴 讀雙梅集有感이 있다. {권2} 觀瀾齋遺稿:詩로 次雙梅公詩 등 5수, 序로 觀瀾亭序, 附錄으로 鄭煥周가 쓴 行狀, 任憲晦가 쓴 墓碣銘, 閔翼洙 등이 보낸 簡牘을 모은 諸賢簡牘 3수, 次韻詩를 모은 觀瀾齋次韻 7수, 閔璣容이 쓴 讀實記有感 등이 있다. {권3} 桐塢遺稿:앞에 鄭冕敎와 鄭煥周의 序, 목륵, 詩로 過瓦坪 등 8수, 記로 師友見聞錄이 있다. 뒤에는 「暘谷遺稿」란 이름으로 戒家姪詩族, 大父掌令公梧溪行狀, 附錄으로 閔泰鏞 등이 보낸 簡牘 2편, 閔致亮이 쓴 行狀, 暘谷의 아들 夔鏞의 행적을 적은 慕窩行錄, 世稿 전체의 내력을 적은 후손 士鎬의 跋이 있다. 한편 <奎11467>의 1책에는 「雙梅軒實記」와 「觀瀾齋遺稿」, 2책에는 「桐塢遺稿」가 本書와 동일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후손들이 조상을 추모키 위해 만든 것 이외의 의미는 없다.
민사홍(師弘) 1710 ~ ?.
자(字)는 강중(剛中). 부(父)는 민선(閔선), 조부(祖父)는 민진환(閔震煥)이고, 증조부(曾祖父)는 민정백(閔挺栢) 이다. 영조(英祖)14년 식년시(式年試)급제 병과(丙科)급제, 통덕랑(通德郞), 별검(別檢)을 지냈다.
<국조 문과 방목>
민사홍(閔師弘) 영조(英祖)14년(1738년), 식년시(式年試) 병과3(丙科3)
민사화(斯和) 자는 민석(碩), 손은 민희순(希舜), 증손은 민구(球)부사?승지(府使/承旨)
민산해(山海) 제창병원(濟昌病院)을 설립하고, 부상입은 독립군들을 무로료 치료
민상(閔祥) 16世祖,
부는 민의(義),조부는 판의금부사 민효증(孝曾)공목공파(恭穆公派)시조,우의정 민몽룡(夢龍)에 아버지이다. 조선조 좌윤(左尹) 현감(縣監) 역임
민상동(閔相東)24世祖,화순군지 (전시대의 인물1)
贈職 ◇同福◇
민상동(閔相東) : 驪興人, 字는 몽뢰(夢賚) 號는 사월헌(沙月軒) 執義 懷參의 九世孫 司僕寺正 濟益의 子이다. 재지(才志)가 총혜(聰慧)하여 향시(鄕試)에 十中하니 文章經學이 위세추중하였다. 道儒가 ○路鳴寃하여 學行卓異로 高宗己巳에 童蒙敎官을 除하고 孫 ?顯의 貴로 좌승지(左承旨) 兼經筵參贊官을 贈하였다.
전라도 능주읍지 증직(贈職) 영조(英祖) / 민상동 여흥인 좌승지(閔相東 驪興人 左承旨)
민상록(閔相祿)전라도 능주읍지 증직(贈職) 영조(英祖)
민상록 여흥인 예식원장례(閔相祿 驪興人 禮式院掌禮)
민상백(閔祥伯)9世祖, 중현조,
대사헌(大司憲)민휘(閔輝)의 손자로,수정승(守政丞)민지(閔漬)의 둘째 아들,행신(幸臣)을 역임,
민상성(閔相成)전라도 능주읍지 증직(贈職) 영조(英祖)
민상성 여흥인 좌승지(閔相成 驪興人 左承旨)
민상섭(相燮)
부는 민백흥(百興), 자는 민치오(致五), 손은 무위영도총제(武衛營都摠制) 민규호
민상순(閔相舜) 증참판(贈參判)
민상신(閔相愼)전라도 능주읍지 증직(贈職) 영조(英祖)
민상신 여흥인 좌승지(閔相愼 驪興人 左承旨)
민상안(閔祥安)15世祖,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국서(國瑞). 판결사(判決事) 정(貞)의 아들이다. 조부(祖父)는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 민징원(閔澄源; 호참공파 시조(戶參公派) ) 이고, 증조부(曾祖父)는 형조참판민심언(閔審言; 유수(留守)공파 중현조)이다.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의 한림(翰林)으로 들어갔다. 1487년 부수찬으로 지방수령의 치적을 살피기 위하여 연기(燕岐)에 파견되었다. 그뒤 1489년 지평, 1494년 장령을 거쳐, 1504년 사간·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 대사헌을 거쳐 1511년 공조참판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513년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 1515년 평안감사로 제수되었으나 우찬성 신용개(申用漑)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듬해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인사권 행사에 적격자가 아니라는 대관(臺官)들의 주장으로 체직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한성부좌윤으로 조광조(趙光祖)를 비호하였다. 1523년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세견선(歲遣船)증액요구에 관한 의논에서는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후환을 예방할 것을 건의하였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中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李鳳來〉
<국조 문과 방목>
민상안(閔祥安) 성종(成宗)11년(1480년), 식년시(式年試) 병과6(丙科6)
민상안(閔상안) 자(字)는 상우, 해남(海南)읍지(邑誌) 문행(文行) / 재기탁월 문사정통.
민상언(閔相彦) 증통정(贈通政)
민상일(相一)1686 ~ ?.
자(字)는 덕함(德涵), 부(父)는 민우완(閔宇完)이고, 조부(祖父)는 민영(閔濚), 증조부(曾祖父)는 민전(閔銓) 이다. 영조(英祖)2년 식년시(式年試)급제 갑과(甲科)급제, 감찰(監察)을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상일(閔相一) 영조(英祖)2년(1726년), 식년시(式年試) 갑과2(甲科2)
민상일(閔相一)화순군지 (전시대의 인물1)
贈職 ◇綾州◇
민상일(閔相一) : 驪興人, 字는 내경(乃卿) 號는 월봉(月峯). 義庵, 懷參의 后이다. 渼湖 金元行의 문인(門人)이니, 學行薦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사정(司僕寺正)을 贈하였다.
전라도 능주읍지 증직(贈職) 영조(英祖) / 민상일 여흥인 사복정(閔相一 驪興人 司僕正)
민상정(閔祥正)9世祖,1281(충렬왕7)~1352(공민왕1).
대사헌(大司憲)민휘(閔輝)의 손자로, 수정승(守政丞) 민지(漬)중현조의 큰 아들이고, 중현조 상백(祥伯)이 동생이다. 문희공 이언충(李彦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7남을 낳았다. 문희공 이언충(李彦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7남을 낳았다. 민순(珣)은 상서(尙書), 민후(珝)는 평리(評理), 민숙(琡)은 낭장(郎將), 민선(璿)은 판도판서(版圖判書), 민서(瑞)는 별제(別提), 민현(玹)은 여성군(驪城君)이다.01년(충렬왕27)문과에 급제, 이듬 해 다시 중전시(中殿試)에 급제하여, 보성(寶城, 강화(江華)등을 다스리고 서해도(西海道), 양광도(楊廣道)를 안무(按撫)했다. 청렴하고 공평하여 이름이 높았고, 충숙왕 때 사헌장령(司憲掌令)을 거쳐 32년 (충숙왕 복위 1)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으며, 이 해 윤석(尹碩), 손기(孫琦)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원나라에서 파견된 객성태사(客省太史)도치(都치)에 의해 행성(行省)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전주(全注)를 총재(摠栽)하고, 관직(官職)의 수를 줄여 고제(古制)를 부활 시켰다. 성품이 강직하여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다. -- 문헌;--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事節要)
민상천(閔相天) 증참의(贈參議)
민상혁(閔尙爀)
菊坡遺稿(奎15669), 閔百忠(朝鮮)著.
2卷 1冊(56張) 古活字本(後期木活字) 30.3×21.3cm. / 四周雙邊 半郭:23×16.4cm.
10行 20字 注雙行. / 版心:上花紋魚尾.
閔百忠(1835∼1885)의 詩文集이다. 1909년(隆熙 3)에 그의 仲子 閔尙爀과 季子 閔鍾爀 등이 간행하였다. 閔百忠의 字는 乃恕, 號는 菊坡 本貫은 驪興, 贈司憲府監察 閔銖의 아들이다. 天性이 至孝하여 여러 일화를 남겼다. 孝誠과 友愛 또한 지극하였으며 자손들을 가르침에 두루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鄕人들이 그 至行으로 薦擧하려 했더니, 이를 알고 그 薦擧狀을 뺏아 불에 태워 버렸다. 德이 있어 사람들이 서로 해결짓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判決을 부탁하였는데, 한 마디 말이면 服從하고 돌아가 뒷말이 없었다. 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ㅡ生 「小學」, 「家禮」에만 힘을 써 이에 조예가 깊었다. 책머리에 1899년(光武 3)에 쓴 崔益鉉의 序文이 있고, 책 끝에 1901년에 쓴 宋秉璿의 跋文을 비롯하여 1893년(高宗 30)에 쓴 金顯玉의 跋文, 1898년에 쓴 鄭冕圭의 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總目錄이 있다. {권1}:詩 2수, 書 14수, 遺事 1수(皇考槐軒府君遺事), 雜著 1수(先祖農隱公閔安富歲一祭儀式). 書에는 閔璣容, 鄭載圭, 宋民用, 朴肇鉉 등과의 往複書翰 12수와, 喪·祭禮에 대하여 물어 온 宋民用, 朴肇鉉, 朴承鉉 등에게 답한 글 2수가 실려 있다. {권2}:부록으로 書信을 抄錄한 知舊書 簡節略 16수, 挽章 33수, 祭文 8수를 비롯하여 敍述, 遺事, 言行쇄錄, 家狀, 行狀, 墓碣銘, 墓表 등이 수록되어 있다.
민상현(象鉉) 1868 ~ ?
부(父)는 민재천(閔載天) 이다. 고종(高宗)29년 별시(別試)급제 병과(丙科)
민상호(商鎬) 27世祖, 1870(고종7)~1933.
구한말의 정치가. 외교관. 민광훈에 손자 민유중에 다섯째 아들 민치수에 4대손이다. 본래 치억(致億)의 아들이나 민 치덕에게 입양 되었다, 오랫 동안 미국에서 배우고 91년 (고종28)문과에 급제. 호조. 형조. 이조의 참의, 궁내부 참서관(宮內部參書官, 제용원장(濟用院長)을 역임. 94년 심순택(沈舜澤) 내각의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중국측과 동학혁명으로 인한 일본의 개입 처리를 의논했다. 96년(건양1)외부교섭국장. 중추원의관. 학부. 농상공부등의 협판(協辦)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 조직에 위원으로 가담. 97년 영국. 독일 .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등의 주재 공사관 참서관(參書官)으로 있었고, 예식원부장(禮式院部長),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찬정(贊政)을 거쳐 잠시 강원도,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제도국총재(制度局). 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 수학원장(修學院長)등을 역임. 한일합방(10년) 뒤 일본의 남작이 되고 조선 총독부 중추원의관으로 있었다. ~--문헌;--선조실록(宣祖實錄)-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민상호(閔商鎬) 여주인
仕進記
奎 26358 / 通信院 편, 1902년(광무 6). / 1책(6장), 필사본, 36.6×24cm.
1902년(광무 6) 1월 1일에서 5월 31일까지 宮內府通信院總辦 閔商鎬 이하 局長 姜寅圭, 參書 崔文鉉 외 2인, 技師 金澈榮, 譯官 崔鎭濚 외 1인, 主事 李南圭 외 9인, 補佐員 尹泰榮 외 2인 등 통신원 관리 21인의 출근부이다. 장부의 오른편에 양력 월일을 적고, 왼편에는 음력을 병기하였다. (이경구)
<국조 문과 방목>
민상호(閔商鎬) 고종(高宗)28년(1891년), 증광시(增廣試) 병과40(丙科40)
민상호(閔상鎬)전라도 능주읍지 음사(蔭仕) 고종(高宗)
민상호 여흥인 도정(閔尚鎬 驪興人 都正)
민상호(尙鎬) 청주(淸州)출신/자는 민영회(泳會)승지(承旨)
◎ 민서(瑞)10世祖,평의사공파(評議事公派)시조.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민지(閔漬; 문인공(文仁公)파 중현조)에 큰아들인 민상정(祥正)에 6째 아들, 호조판서 민여익(閔汝翼;중현조)에 6째 큰 아버지, 별제(別提), 고려 때 都評議事(도평의사)를 지냈다.
민서(閔瑞)
진위현령명단(振威縣令名單)
민 서 계사(1593) ∼갑오(1594) 읍지(1899), 실록 閔 瑞 癸巳(1593) ∼甲午(1594) 邑誌(1899), 實錄
민서각(犀角) 태종 8년 감찰 방주(監察房主), 1411(태조11) 장무(掌務) 판관(判官)역임
민석(碩) 부는 민사화(斯和), 자는 민희노(希老), 손은 민구(球)부사/승지(府使/承旨)
◎ 민석(釋)13世祖,직장공파(直長公派)시조.
찬성사 민유의(閔由義; 문인공;중현조)에 손자, 여절교위(勵節校尉) 민사건(師騫; 감사공파(監司公派)시조)에 작은 아버지, 공에 아버지는 민호문(好問)이다.
민석규(錫圭) 부는 민사연(思淵), 자는민유(游)승지(承旨)
민석기(閔錫基)
민석기(閔錫基) 본 여흥(驪興)
영주문화 > 내고장인물 > 충.효.열
충의 - 충로각(忠奴閣)
문수면 만방리에 있으며 민석기(閔錫基)가 관리한다. 충로고만석(忠奴高萬石)은 민조현(閔祚顯)의 노비로서 상전인 민조현의 처(妻) 박씨부인이 청상과부로 간통(姦通)하려던 김조술인 자가 허무맹랑한 말을 유포(流布)함으로 억울함을 수차 관가(官家)에 호소하였으나 올바른 판단이 없으므로 관가에서 자인할복(自刃割腹)을 하였다, 그래도 판단이 없기에 고만석이 적수공권을 한양(漢陽)을 다니면서 육도명쟁(六度鳴錚)하여 결국 1825년(純祖 25)에 나라의 하명(下命)으로 김조술의 일당(一黨)을 처형(處刑)하고 박(朴) 열부의 정여(旌閭)와 고충로의 정여를 내려서 만방리 국도 옆에 비각을 세웠다. 그후 1983년 도로포장으로 한정마을 앞산으로 옮겼다.
민석재(閔碩才)조선 때 節制都尉(절제도위)를 지냈다.
민석호 27世祖,
부는민치응, 자는 민영돈(泳敦)청국공사(淸國公使) → 생부는 민건호(建鎬) , 손은 영친왕 약혼녀 민갑완
민석훈(奭勳) 부는민종빈(種斌), 조부는민영세(永世), 자는민재진(載晋)장령(掌令)
민선(閔璿)10世祖,
字(자)는 중옥(仲玉), / 찬성사 민상정(閔祥正)의 다섯째 아들로, 찬성사 민유의(閔由誼;중현조)의 아버지, 중현조 민상백(祥伯)이 공에 작은 아버지가 된다. 나이 20여 세에 중국에 가서 성균생(成均生)이 되었다. 충혜왕(忠惠王) 경진에 과거에 급제, 봉익대부 판도판서 증문하찬성사(奉翊大夫 版圖判書 贈門下贊成事)역임,,민선의 딸은 조선조 태조(太祖)의 넷째 아들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에게 시집갔다.
민선(閔旋)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세조 6년 경진(1460, 천순 4) / 5월 25일(경자) / 이조에 졸한 이천·민심언·고득종 등을 원종 3등 공신에 기록할 것을 명하다
민선(선) 부는 민진환(震煥), 조부는 민정백(挺栢), 자는 민사홍(師弘)별검(別檢)
◎ 민선(璿)13世祖,우후공파(虞候公派)시조.
두문동 72현중에 한분인 예의판서(禮儀판서)민안부(安富; 중현조)에 증손. 아버지는 민유현(惟賢)으로 유의(惟義) 갈전공파(葛田公派)시조가 작은 아버지 된다. 세종(世宗)11년 식년시(式年試)급제 병과(丙科)급제, 조선 때 虞候(우후), 동지중추(同知中樞) 를 지냈다.
민선(瑄) 15世祖,
자(字)는 가진(可珍)./ 부(父)는 일명:민규(一名:閔奎), 조부(祖父)는 찬성사 민오(閔悟)이고 증조부(曾祖父)는 찬성사 민호례(閔好禮)이다. 찬성사 민오(閔悟)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효창(孝昌;사용공파(司勇公派)시조)이 큰 아들이고, 효순(孝舜;현감공파(縣監公派)시조)이 둘째이고, 효증(孝曾;공목공파(恭穆公派)시조)이 셋째 아들이다. 일명 민규가 세 아들 중 누구인지 확인이 안됬다. 중종(中宗)17년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급제, 정자(正字)를 역임.
민선(善)16世祖, 1539(중종34)~1608(선조41).
호는 우천(牛川). 부(父)는 민세량(閔世良)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부(祖父)는 민구(閔球)이고 증조부(曾祖父)는 민예달(閔禮達)이다. 선조1년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82년(선조 15)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발탁되고, 전적(典籍)과 공조. 형조. 호조, 예조의 낭관(郎官)을 지냈다. 이어 지평(持平), 숙천부사(肅川府使, 서흥부사(瑞興府使), 형조 참의를 역임. 02년 좌승지때 앞서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무고(誣告)로서 최영경(崔永慶)을 탄핵하여 옥사(獄死)케 했다는 죄로 파면 되었다. --문헌;--선조실록(宣祖實錄)-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 문과 방목>
민선(閔善) 선조(宣祖)15년(1582년), 식년시(式年試) 병과8(丙科8)
민선적(閔선적)17世祖, 해남(海南)읍지(邑誌) 음사(蔭仕)
자(字)는 응선. 충정공 신의 현손(玄孫)으로 참봉(參奉)이다.
민선호(善鎬) 校理(교리)/민익호(益鎬)에 자,민영철(泳轍,泳喆)군무총장,철로총재(鐵路總裁)의생부
민선호(善鎬)1848 ~ ?.
거주지(居住地)는 경(京)으로, 부(父)는 민치서(閔致序) 이다. 고종(高宗)13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급제, 옥당(玉堂), 교리(校理), 한림(翰林)을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선호(閔善鎬)
고종(高宗)13년(1876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丙科2)
민선호(璿鎬) 자는 민영만(泳晩)승지(承旨)
민선호(宣鎬) 자는 민영완(泳完)孝子
민설(閔渫) 태종 8년에 필선(弼善),태종9년(1409)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민설(閔說) 19世祖,
울진군지
제3장 관안(官案) 제1절 울진군
2. 조선조
민설(閔說) / 1591년(선조 24년) 4월에 부임하여 다음 해 정월에 군수로 승진 발령받아 전출함 , 자는민광숙(光숙)남원부사(南原府使)-생부는 민근(根), 자는 민광소부사(府使)
민성(晟)18世祖,
정략장군(定略將軍) 行 의흥위부장(義興衛部長) 역임./ 효행이 급복(孝行以給復)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좌윤 동지중추부사(漢城左尹 同知中樞府事)로 증직(贈職)된 민경호(慶虎)가 公에 장남(長男)이다.
민성(誠)15世祖,
일명(一名) 민함(閔함), 부(父)는 민효건(閔孝건), 조부(祖父)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민환(閔渙; 전의감사공파(典醫監事公派)시조) 이고, 증조부(曾祖父)는 민위(閔偉)이다. 우문관대제학 민 지 (閔漬; 중현조)에 큰 아들 찬성사(贊成事)민상정(閔祥正)에 6대손이다, 찬성사(贊成事)민상정(閔祥正)은 7형제를 두었으나 큰 아들 대언(代言)민순(珣)으로부터 공에 조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민환(閔渙; 전의감사공파(典醫監事公派)시조)까지 독자로 이어져 왔다. 증형의(贈刑議) 성종(成宗) 3 년 식년시(式年試)급제 을과(乙科)급제, 부사(府使)를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성(閔誠)
성종(成宗)3년(1472년), 춘당대시(春塘臺試) 을과2(乙科2)
민성(閔垶)20世祖, ?~1637(인조15) .
자는 재만, 호는 용암이다. 민징원(閔澄源)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형조참판에 7세손으로, 증호조판서 여흥군 민종윤(宗胤)의 증손이며, 증순충적덕보조공신 우의정 여흥부원군 민사권(思權)의 손자, 평난공신 여양군 민인백(仁伯)의 아들. 대제학 여흥군 민유(愉)의 10대손으로 이때부터 충효가 세세로 이어진 명문후예다. 충좌위부사직을 지내다가, 광해군의 폐륜의 세상을 개탄하여 조정에서 일할 뜻을 버리고 통진 봉상으로 가시어 무예를 닦고 지엄한 가훈을 지키며 바른 것을 나타내고 사된 것을 배척하는 기개는 모든 사람이 따르게 하였다. 인조 정축년에 청나라 병사가 강화도에 쳐들어오니 분한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전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가 의거하여 전 가족이 싸움에 임하던 중 호적이 강을 건너 들어오는 것이 임박하자 중과부적이라 강화유수는 배를 타고 도주하니 도민에 대한 살상과 약탈이 목전에 다달았다. 낭배들이 공에게 해안에 조그마한 배기 있으니 빨리 타고 같이 달아나자고 권하였다. 이때 공이 노하여 말씀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의로운 일에 출진하여 어찌 달아날것이냐 하고 정족산 천등사의 한 구석에서 전 가족을 집합한 후 의관을 바로하고 앉아 말씀하되 내 어찌 더럽게 오랑케에 잡혀 죽을소냐 하고 전가족 13명이 동시에 순절하니 이때가 1637년(인조 15) 정월 24일이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움으로 한가닥 혈육이 남아있으니 공의 둘째아들(휘 之鈺)께서 부인과 더불어 강원도에 있는 처가에서 머무다가 난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합문지화(閤門之禍)를 통곡하고 상복을 입고 하늘을 보지 않는 상주의 예를 다하고 조정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칩거하다 목숨을 마치니 이 또한 하늘이 내린 효성이다. 그해 3월에 13정문을 내리고 정성지문(旌 之門)이라 명하고 그후 자헌대부호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의 벼슬을 내리며 여원군으로 봉하고 충민이라 시호를 내렸다. 순조 정축년에 강화 충절사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순절 당시 늙은 누이의 등에 업게하여 피신시킨 손자(휘 )는 숙부(휘 之鈺)의 양육을 받아 그 자손이 어질고 빼어나며 김포에 많이 살고 있다. 이러한 13인의 순절에 대하여 우암 송시열이 이사실을 기술하여 용암전이라 하여 전하고 있다 시호(諡號)는 충민공(忠愍).,--문헌;--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閔龍巖忠愍公實記(奎15601), 宋時烈(朝鮮)撰.
1冊(14張) 活字本(新式活字本) 30×19.6cm.
序:任憲晦, 金炳國.
跋:閔佑植.
龍岩 閔성의 行蹟을 기록한 宋時烈撰의 龍岩傳과 다른 附屬文件을 9代孫 佑植이 1906년에 수집 간행했다. 책머리에는 任憲晦의 序文(1874년)과 金炳國의 序文(1906년)이 들어있으며 책끝에는 佑植의 跋文이 있다. 閔성의 字는 載方, 號는 龍巖, 본관은 驪興, 仁伯의 아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鳳津에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힘썼다. 1636년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家屬을 거느리고 江華로 피난했다. 이듬해 敵軍이 江華를 침략하자 이를 막으려했으나 실패, 家屬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도피한 뒤 적군에 더럽힘을 당할수 없다고하여 家屬과 함께 殉節했다. 이때 殉節한 家屬은 子女, 婦人, 妾 등 모두 13人이었다고 한다. 戶曹判書에 追贈, 江華忠烈祠에 配享, 諡號는 忠愍. 1666년(顯宗 7) 宋時烈이 閔성의 傳記를 간략히 기재한 龍岩傳의 全文을 그대로 수록하였고 끝에 附錄된 「江華忠烈祠配享錄」에는 閔성이 配享된 江華 忠烈祠에 配享된 人名을 수록한 것이다.
민성길(成吉)19世祖,
창신교위(彰信校尉)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역임/ 마산종친회 주부공 민세구(世球)주부(主簿)에 증손으로 부는 민 희도 (熹道) 장사랑(將仕郞), 조부는 민균(筠) 통훈대부사헌부감찰(通訓大夫司憲府監察), 민심언(閔審言)유수(留守)공 중현조에게는 7세손, 민징원(閔澄源)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형조참판에게 6세손이다. 자는 민진영(震英)갑산부사(甲山府使),
민성복(閔聖復)
화순군 동복지(同福誌) 권1
□ 관안(官案)
○ 민성복(閔聖復) : 신사(辛巳 : 1641)년 12월에 부임하여 계미(癸未 : 1643)년 6월에 폄체(貶遞, 강등되어 떠남)되었다.
민성언(閔成彦) 8世祖,
정의공파 (定懿公派 )중현조 민공규(公珪)의 증손, 중현조 승지(承旨)민방(昉)에 네 아들 중 첫째이다. 고려에서 동정(同正)을 지냈다
민성징(閔聖徵)19世祖, 1582 ~ 1648.
聲徵(성징)은 초명으로 민성휘(閔聖徽)와 동일 인물이다,
<국조 문과 방목>
민성징(閔聖徵) 광해군(光海君)1년(1609년), 증광시(增廣試) 병과17(丙科17)
민성청(聖淸) 19世祖,
부는 민유경(有慶), 자는 민충량(忠亮), 손은 민주한(周翰)병조/좌랑(兵曹/佐郞)
민성현(閔誠顯) 증참판(贈參判)
민성호(閔成鎬) 1809(순조9)~1883(고종20)
자는 성화(聖和). 副摠管(부총관) 哲(철)의 손자. 무과(武科)에 급제 황해도 병마 절도사를 지내고 호군(護軍)을 역임, 저서 ; 황해수영계보록(黃海水營啓報錄), ~--문헌-;-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 --
민성훈(閔星勳)
조선시대 평택(平澤) 현감(縣監)명단 민성훈(閔星勳) 고종14(1877)∼고종17(1880) 외임안
민성휘(聖徽)19世祖, 1582(선조15)~1648(인조26),
자(字)는 사상(士尙) ,호는 졸당(拙堂), 시호는 숙민(肅敏). 초명은 聲徵(성징), 여절교위(勵節校尉) 민사건(師騫; 감사공파(監司公派)시조)에 5대손으로, 관찰사 민기문(起文;역암공파(擽菴公派)시조)에 증손이고. 부(父)는 호조정랑(戶曹正郞) 민유부(閔有孚), 조부(祖父)는 민리(閔涖)이다. 자는 통덕랑(通德郞)민사량(思亮)주부(主簿), 민진량(晋亮)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석성현감(石城顯監), 손은 민주면(周冕)부윤(府尹), ※ 민노행(魯行)군수(郡守)에 선조이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당숙 유경(有慶)敦寧府 都正(돈령부도정) 밑에서 자랐다. 1606년(선조39) 生員(생원)이 되고, 광해(光海) 1년 증광시(增廣試)급제 병과(丙科), 문과에 급제후 괴원(塊院)에 들어 갔으나 군흉(群凶)들이 날뛰는 속에 있기를 싫어하고 북평사(北評事, 강원도사(江原都事), 영변 판관, 금산 목사, 여주 목사를 지내고 인조반정후 동부승지, 가선을 거쳐 개성부 유수가 되었는데, 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 났을 때 상부에 보고도 없이 적당을 무턱대고 죽여서 파면 되었다. 같은해에 복직 되어 송도 유수로 나갔고 이듬해 호남 안찰사로서 치적이 많았으므로 형조 참판이 되고 28년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으로 다녀 온후 안동 부사로서 대지주(大地主)들의 밀린 세곡을 징수하여 공평한 행정을 하였다. 30년 평안감사가 되어 부체찰사를 겸하였는데 의주성(義州城)을 수축하고, 백마(백마), 검산(검산), 자모(자모)의 3城도 수축하였다. 평안감사로서 선치하여 평양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고, 34년에 병조참판, 영북 안찰사를 지냈으며 36년 병자호란 때 함경도감사로서 병사 서우신(서우신)과 함께 보병과 기병 1만3천명을 영솔하여 맹 활약 하였다, 1640년에 몇몇 재상들이 명나라에 마음을 둔다하여 김상헌(金尙憲)등과 함께 척화파로 청나라에 잡혀 갔으나 굿굿이 답변, 1642년 풀려 돌아 왔으며 , 호조, 형조판서를 역임한 후 47년(인조25)에 謝恩副使(사은부사)로, 사신으로 북경에 갔다가 거기서 사망.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문집(文集)송경방고록(松京訪古錄) -문헌;--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병자록(丙子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ㅠㄲ>文公家禮儀節(奎중 2275), 丘濬(明)輯, 靈光郡
8卷 6冊 木板本 30.8×19.8cm. / 四單周邊 半郭:19.9×14.7cm.
有界 9行 1行 17字. / 版心:上下花紋魚尾.
주자의 家禮에 儀節을 모아 주석을 붙인 책이다. 모두 6책의 목판본인데 編著者[≪大學衍義補≫ 해제 참조, 40p]는 明나라 憲宗 때의 丘濬이나 출판은 全羅道觀察使 閔聖徵이 1626년(仁祖 4) 여름 靈光郡에서 간행하였다. 春秋館의 編修官인 鄭良弼이 主監하고 生員 辛應純과 進士 奉景綸이 감교하였다. 編者는 自序에서 그 편찬 동기를 밝혔는데, "나는 未開한 지방에 나서 6세부터 禮學에 뜻을 가지고 海內에 문현이 있는곳에는 그 禮가 반드시 집집마다 행해지고 사람마다 익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中朝에 벼슬을 하게된 뒤에야 세상에서 이 禮를 행하는 자가 대개 드물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禮를 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으면 모두 禮文이 深奧해서 쉽게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어리석고 비천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서 가만히 ≪文公家禮≫를 취해서 本註를 요약해서 依節로 만들고 쉽고 친근한 말을써서 사람마다 쉽게 알고서 행하도록 하여 장차 이로써 여러 僻地의 淺學한 人士에게 보급하고 邑都에서 古經을 공부하는 인사가 스스로 ≪朱子全書≫를 참고하고 위의 古禮에 까지 進步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인용書目은 40여종이 기재되어 있고「文公家禮序」에 이어 이보다 一字를 낮춰서 黃幹, 陳淳, 李方子, 楊復, 黃瑞節 등 諸人의 말을 인용하였다. 小註에는 편자가 「濬按」이라고 해서 자기의 의견을 붙였다,
민성흥(性興)19世祖, 효종 을미(乙未)生,~현종 을사(乙巳)년 卒
贈 가선대부(嘉善大夫)한성좌윤(漢城左尹)./ 자(字)는 선재(善哉), 호는 곡은(谷隱), 부는 贈 호조참의(戶曹參議)민제(濟)로 공(公)이 차남(次男)이다, 묘 ; 평산 신암면 가정리,
민세거 (世琚)
참군(參軍) 역임/ 주부공파 시조 민세구(世球)에 형제중 셋째인 동생이다. 부는 민효손(孝孫)형조참의(刑曹參議), 조부는 민형(亨)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증조부는 민징원(閔澄源) 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자는 민절(節),민적(籍).
민세구(世球) 16世祖,
호참공에 증손으로 마산종친회 주부공파시조 주부공이다/부는 민효손(孝孫)형조참의(刑曹參議), 조부는 민형(亨)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증조부는 민징원(閔澄源) 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 자는 민간(簡)관선부관(官宣簿官), 민균(筠) 통훈대부사헌부감찰(通訓大夫司憲府監察), 손은 민사도(思道)현감(縣監),한림직강(翰林直講),
민세규(閔世珪)16世祖,
첨정(僉正) 역임, 贈職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형조참판민징원(閔澄源)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에 증손으로, 부는 민효성(孝誠)통훈대부(通訓大夫)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조부는 민형(亨)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이다. 자는 민종윤(宗胤)贈자헌대부호조참판, 여흥군, 손은 민사권(思權)사복시정, 민사정(思程)참판, 증손은 민인백(仁伯)평난공신, 고손은 민성(垶)(충민공)순절인이다.
민세량(世良)15世祖, 1497(연산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덕보(德輔). 예달(禮達)의 손자로, 구(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영보(申永保)의 딸이다. 자는 민선(善)좌승지, 1525년(중종 20)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7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는데 이때 군율의 해이함이 조정에서 성토된 뒤 군기의 재확립을 강조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승지 이구령(李龜齡)·이현보(李賢輔) 등이 전강(殿講)의 내용을 누설한 일로 대간(臺諫)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검열로서 이들과 내통한 일이 있는가에 대한 추고를 당하였다. 1530년 주서(注書)로 있을 때 유례없는 흉년인데도 승지들이 기공(妓工)을 모아 성악(聲樂)을 즐겼다는 이유로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이들이 파직되자, 그도 이들과 함께 하였다는 이유로 추고를 당하였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532년 가인의(假引儀)가 되었으며 이어 석성현감(石城縣監)을 거쳐 1534년 우의정 김안로(金安老)가 득세할 때, 수찬으로 김안로의 득세를 비꼬다가 죄를 얻어 곽산으로 유배당하였다. 그뒤 곧 풀려나 다시 석성현감이 되었다가 또 다시 파직되어 직첩을 빼앗겼으나 1538년 직첩을 환급받았다. 1542년 경상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시강관(侍講官)이 되어 수원·해남 등 그 지명의 강복(降復)에 대하여 강(講)하였는데, 그 지방에 큰 변란이 일어난 시기가 멀고 가까움에 기준을 두지 말고 회복시키려면 모든 대상지역을 회복시키고, 깎아내리려면 모든 대상지역을 동시에 깎아내릴 것을 주장하였다. 같은해 다시 동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546년(명종 1)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서장(書狀)으로 보고하였다.
참고문헌 ; 中宗實錄, 明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趙炳魯〉 ※ 대종회에서 발간한 여흥민씨인물사집(驪興閔氏人物史集)에 15世祖로 기록되어 15세조로 기록은 하였으나, 기록대로라면 부 민구(球)는 14세조, 조부 민예달(禮達)은 13世祖,인데 확인 할 수가 없다. 어느 종파인지, 아니면 누구나 알수 있는 先祖 어느 분에 후손인지 알 수가 없어 기록으로만 남긴다.
민세류(世瑠)16世祖,
양천현령(陽川縣令) 역임, 贈職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춘추관사(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春秋館事/ 부는 형조참의(刑曹參議)민효손(孝孫)으로 5아들중 둘째이다. 조부는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 징원(澄源 ; 호참공파 파조(戶參公派), 증조부(祖父)는 호조참판 민심언(閔審言 ; 유수(留守)공파 중현조), 자는 민호(호)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민기(箕) 우의정, 손은 민종도(宗道)병판(兵判)
민세언(閔世彦)영주군 (효행) 효자
여흥인(驪興人)으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할 세가지의 기적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오얏 열매가 익었고 둘째는 뜰앞에 꿩이 날아와서 떨어진 것과 셋째는 민효자가 가는 길가에 노루가 누워 있었는데 이 모두가 봉양(奉養)을 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승지 김약련(承旨 金若鍊)이 이 사실(事實)을 청계(청계)하였더니 나라에서 곧 정려(旌閭)를 내리셨다.
◎ 민세영(世榮) 12世祖, 전서공파(典書公派)시조 ,
승지(承旨) 민방(昉;중현조)의 5대 손이고, 아버지는 승지(承旨) 민계(啓)이다, 손자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민승서(承序)이다.
민세원(世瑗)16世祖,
贈 호조참의(戶曹參議)/ 형조참판 민징원(閔澄源)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에 4대손으로, 부는 민효손(孝孫)형조참의(刑曹參議), 조부는 민형(亨)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이다, 손은 민홍도(弘道), 민수도(守道), 민안도(安道), 민열도(閱道)
민세정(世貞) 16世祖,
자는 민남(閔楠), 손은 민충길(忠吉)절충장군(折衝將軍), 증손은 민침(忱)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문의현령(文義縣令)
민세정(世貞)15世祖, 1471(성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정숙(正叔). 여흥부원군 제(霽;文度公派시조)의 아들인 여성군(驪城君) 무질(無疾)의 증손으로, 조부(祖父)는 민촉(閔矗)이고, 민흥(興)의 아들이다. 여성군 무질은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 세종대왕 어머니)에 동생이다. 1511년(중종 6) 효행으로 성균관으로부터 천거되었으며,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3등으로 합격하여 도사(都事)가 되었다.
참고문헌 / 中宗實錄, 國朝榜目. 〈趙炳魯〉
<국조 문과 방목>
민세정(閔世貞) More Info. 중종(中宗)14년(1519년), 현량과시(賢良科試) 병과23(丙科23)
민세주(世舟)
자는민영(閔영), 손은 민응협(應協)이조참판, 증손은 민희(凞)좌의정, 고손은민창도(昌道)大司成(대사성)
민세준(世俊) 자는 민해(海), 손은 민윤조(胤祖), 증손은 민진원(震元)통정대부(通政大夫)
민세창(世昌) 자는 민정(珽)승지
민세침(世琛) 자는 민수관(受觀)학유(學諭)
민세필(世弼)18世祖, 신사년생(辛巳年生)~병인년졸(丙寅年卒)
자(字)는 여용(汝用)이다,/ 부는 贈 승지(承旨)민우(遇)로 셋째 아들이다, 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증직(贈職) 되었다,
민세현 생원
자는 민우삼; 좌통례(左通禮), 손은 민전(詮)첨사(僉使), 고손자는 민광경, ※ 5대손은 민창윤(昌胤)참선대부
민세형(閔世衡)2世祖,
감찰(監察),검교태자소보(檢校太子少保), 민세형은 벼슬이 검교태자소보(檢校太子少保; 태자는 세자이고, 태자소보는 태자의 교훈을 맡았던 종2품의 벼슬, 검교는 고려말과 조선조 초기에 높은 벼슬자리를 정원 이외에 임시로 늘리거나 실지 사무를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에 그 벼슬이름 앞에 붙이는 말이다) 행감찰어사(行監察御史; 감찰어가 앞에 붙은 行은 품계는 높고 벼술이 잦을 경우에 붙이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품계는 낮고 벼슬이 높은 경우에 수(守)를 붙인다. 이를 행수법이라 한다.) 이다. 고려 때에 검교관(檢校官)이 되었는데, 상가(賞加; 공로에 대하여 상으로 주는 가자(加資) 및 증직(贈職; 공신, 충신, 효자 및 학덕이 높은 사람 등을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주는 일, 또는 그 벼슬)으로 공명(空名)의 벼슬(실제 벼슬이 아닌 이름 뿐인 벼슬을 말함)을 더했으니 검교태자소보는 증직인 듯하다. 이는 대개 문경공(文景公)에 대한 추은(推恩; 시종관(侍從官)이나 곤수(곤帥)의 아버지로 나이가 70세 이상인 사람에게 벼술을 올려 주는 것)인 것이다.
▶ 예종(睿宗) 초년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민세륜(閔世倫)이 공(公)과 더불어 이름과 자가 서로 비슷하고 세대도 멀지 않아 누구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다.
민세형(閔世亨) 생원(生員)
민세호27世祖,부는 민치은, 자는 민영국(泳國)중추원의관, ※ 민응수(應洙)감찰사4대손
민소생(閔紹生)12世祖,
중현조 상백(祥伯)의 증손. 이조참의 민근(閔瑾)에 손자로,아버지는 민중립(中立)이다. 의암공파(義菴公派)시조 회삼(懷蔘)의 할아버지 된다. 증참판, 부사(府使)
민수(閔銖)
菊坡遺稿(奎15669), 閔百忠(朝鮮)著.
2卷 1冊(56張) 古活字本(後期木活字) 30.3×21.3cm. / 四周雙邊 半郭:23×16.4cm.
10行 20字 注雙行. / 版心:上花紋魚尾.
閔百忠(1835∼1885)의 詩文集이다. 1909년(隆熙 3)에 그의 仲子 閔尙爀과 季子 閔鍾爀 등이 간행하였다. 閔百忠의 字는 乃恕, 號는 菊坡 本貫은 驪興, 贈司憲府監察 閔銖의 아들이다. 天性이 至孝하여 여러 일화를 남겼다. 孝誠과 友愛 또한 지극하였으며 자손들을 가르침에 두루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鄕人들이 그 至行으로 薦擧하려 했더니, 이를 알고 그 薦擧狀을 뺏아 불에 태워 버렸다. 德이 있어 사람들이 서로 해결짓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判決을 부탁하였는데, 한 마디 말이면 服從하고 돌아가 뒷말이 없었다. 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ㅡ生 「小學」, 「家禮」에만 힘을 써 이에 조예가 깊었다. 책머리에 1899년(光武 3)에 쓴 崔益鉉의 序文이 있고, 책 끝에 1901년에 쓴 宋秉璿의 跋文을 비롯하여 1893년(高宗 30)에 쓴 金顯玉의 跋文, 1898년에 쓴 鄭冕圭의 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總目錄이 있다. {권1}:詩 2수, 書 14수, 遺事 1수(皇考槐軒府君遺事), 雜著 1수(先祖農隱公閔安富歲一祭儀式). 書에는 閔璣容, 鄭載圭, 宋民用, 朴肇鉉 등과의 往複書翰 12수와, 喪·祭禮에 대하여 물어 온 宋民用, 朴肇鉉, 朴承鉉 등에게 답한 글 2수가 실려 있다. {권2}:부록으로 書信을 抄錄한 知舊書 簡節略 16수, 挽章 33수, 祭文 8수를 비롯하여 敍述, 遺事, 言行쇄錄, 家狀, 行狀, 墓碣銘, 墓表 등이 수록되어 있다.
민수(銖)
증사헌부감찰(贈司憲府監察),효행으로감찰추증/자는 민백충(百忠)학자, 손은민상혁(尙爀)과 민종혁(鍾爀).
민수(閔洙) 통덕랑(通德郞)
민수(粹)14世祖,
민수사옥(閔粹事獄)’의 장본인, 고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민종유(宗儒)의 6대손 이다. 형조참판 민심언(審言;유수공파 중현조)에 손자로, 회덕(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의 입향조인 민충원(閔충源)의 아들이다, 자(子)는 동복현감 민귀(구)손(閔龜孫)이고, 손(孫)은 좌찬성 민제인(閔齊仁; 입암공파(立岩公派)시조)이다. 세조 원년(1455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 세조(世祖) 5 년 식년시(式年試)급제, 을과(乙科), 예문관검열역임, 곧 인수부승(仁壽府承) 재직, 같은해 6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영은(李永垠)과 함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賜假讀書)의 혜택을 받았다. 그 뒤 세조대를 통하여 사관직(史官職)을 겸대. 1464년 천문, 풍수, 율려, 의학, 음양, 사학, 시학의 육성을 위하여 각 분야에 6명의 젊은 문신을 배치할 때 최경지(崔敬止)등과 함께 시학문에 배속 되었다, 69년(예종1) 세조실록을 편찬하게 되자 자기가 기록한 사초(史草)에 대신들에 비행을 직필(直筆)했다가 후환이 두려워 강치성(康致誠), 원숙강(元叔康)등과 이를 뽑아내어 삭제한 것이 발각 되어 제주도에 유배, 관노(官奴)가 되었다(민수의 사옥(閔粹의 史獄). 77년(성종8) 방환(放還), 봉교(奉敎)에 보직 되었고 응교(應敎)를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다~ --;- 문헌-;--에종(睿宗),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 문과 방목>
민수(閔粹) 세조(世祖)5년(1459년), 식년시(式年試) 을과2(乙科2)
민수겸(壽謙)14世祖,
자(字)는 백익(伯益). 부(父)는 민안손(閔安孫 ; 교위공파(校尉公派)시조)이고, 조부(祖父)는 민화(閔和) 이고, 증조부(曾祖父)는 호조판서 민여익(閔汝翼)이다. 공에 형(兄)은 헌납(獻納) 민수복(閔壽福) . 성종(成宗)17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급제, 정언(正言)을 역임 하였다.
<국조 문과 방목>
민수겸(閔壽謙) 성종(成宗)17년(1486년), 식년시(式年試) 병과15(丙科15)
민수관(受觀)1651 ~ ?,
해남(海南)읍지(邑誌) 문과(文科) - ㅇ민수관 : 여흥인 효종(孝宗) 병자(丙子)에 합격 관은 성균관(成均館) 학정.
부(父)는 민세침(閔世琛)이다. 숙종(肅宗)22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급제, 학유(學諭)를 역임하였다
<국조 문과 방목>
민수관(閔受觀) 숙종(肅宗)22년(1696년), 식년시(式年試) 병과7(丙科7)
민수구(閔壽龜) 화순군지 (전시대의 인물1)
孝子 ◇綾州◇
민수구(閔壽龜) : 驪興人, 字는 원부(元夫). 號는 양심당(養心堂). 義庵 懷參의 后, 교관(敎官) 崇慶의 현손(玄孫)이다. 사친(事親)지효(至孝)하여 가세(家勢)가 極艱하여 甘旨를 難繼하니 晝傭夜耕하고 樵漁로 供旨不乏하며 內外艱에 여묘(廬墓) 六年하니, 교관(敎官)을 贈하였다.
전라도 능주읍지 증포(贈褒)
(숙종)민수구 자원부 여흥인 증교관숭경현손 효양이친가세극간감지난계주용경야렵어이공친주모병잠불리측수륭한기서종불소폐내외간여묘삼년 증교관
(肅宗)閔壽龜 字元夫 驪興人 贈敎官崇慶玄孫 孝養二親家勢極艱甘旨難繼晝傭耕夜獵漁以供親廚母病暫不離側雖隆寒祈暑終不小廢內外艱廬墓三年 贈敎官
민수구(洙耉) 민수봉(洙鳳)에자,민희식(羲軾)별시(別試)급제에 생부
민수도(守道)18世祖,
상서원부직장(尙瑞院副直長)역임→生夫는민순(筍)/ 민징원(閔澄源)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형조참판에 5대손으로 부는 문경공(文景公),우의정 민기(箕), 조부는 양천현령(陽川縣令)민세류(世瑠)贈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증조부는 민효손(孝孫)형조참의(刑曹參議), 자는 ①대인(大仁), ②대륜(大倫)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 ③대수(大脩)성균생원(成均生員), ④대숙(大俶) 네 아들, 손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민진원(震遠), 진흥(震興)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보은현감(報恩縣監)진경(震慶),
민수범(閔守範)
전라도 능주읍지 음사(蔭仕) 중종(中宗) / 민수범 여흥인 습독(閔守範 驪興人 習讀)
민수복(壽福)14世祖.
부(父)는 민안손(閔安孫 ; 교위공파(校尉公派)시조)이고, 조부(祖父)는 민화(閔和) 이고, 증조부(曾祖父)는 호조판서 민여익(閔汝翼)이다.정언(正言) 민수겸(壽謙)이 공에 동생이다. 자는 민정(閔정), 손은 민운서(雲瑞), 증손은 민돌(閔돌)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다. 성종(成宗)16년 별시(別試)급제 병과(丙科), 1492(연산2) 승의랑 수사헌부지평(承議郞, 守司憲府持平), 1496(연산2)사헌부장령(守司憲掌令), 1498(연산4)사간겸승문원참교판교학정예문관시교사간원대사헌(司諫兼 承文院參校判敎 學正藝文館侍敎司諫院 大司憲) 역임. 贈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 관상감사겸세자좌빈객(觀象監事兼世子佐賓客)
<국조 문과 방목>
민수복(閔壽福) 성종(成宗)16년(1485년), 별시(別試) 3
민수봉(洙鳳)
조부는 민무현(懋鉉), 증조부는 민언주(彦周), 자는민희식(羲軾)별시(別試)급제-생부는 민수구(洙耉)
민수산(閔壽山) 12世祖,
위양공파(威襄公派)시조 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민발(發)에 아버지, 중현조 함계(閔咸啓)의 손자로, 아버지는 지문하상의(知文下商議) 민백훤(閔伯萱)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서흥부사(瑞興府使) 역임, 贈 좌찬성, 여강군(驪江君)에 봉해졌다.
민수생(壽生)11世祖,
이조판서(吏曹判書) 역임/ 조부는 문순공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민적(頔)이고. 부는 민유(閔愉) 고려조 대제학(大提學)이다. 민유는 두문동 72현중 한분이다. 다섯 아들중 차남으로 덕생(德生)한성공파(漢城公派)시조가 형이고, 경생(慶生)공안부윤공파(恭安府尹公派)시조가 공에 아우다. 6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 약손(若孫)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진주목사(普州牧使)를 지냈고, 손자인 약손(若孫)에 둘째 아들 민근(謹)이 이참공파(吏參公派)시조이다.
민수언(洙彦) 1686(숙종 12)∼?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인(聖寅). 치중(致中)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42년 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을 지내면서 언로(言路)의 창달을 주장하였고, 1744년 관리기강의 쇄신을 상소하였다가, 부교리 오언유(吳彦儒)로부터 협잡이라고 탄핵받아 장령에서 파직되었다. 1748년 다시 정언 및 장령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충청우도감시도사(忠淸右道監試都事)로 파견되어 그곳 향시(鄕試)를 주관하였으나 과거시험에 부정이 개입된 것을 막지 못하여 문책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趙啓纘〉
<국조 문과 방목>
민수언(閔洙彦) 영조(英祖)11년(1735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5(丙科25)
민수영(洙永) 부는 민심현(心鉉), 조부는 민병주(秉周), 자는 민희태(羲泰)승지(承旨)
민수원(閔守元) 15世祖,
전라도 능주읍지 음사(蔭仕) 중종(中宗) / 민수원 여흥인 헌릉참봉(閔守元 驪興人 獻陵參奉)
민수원(壽元) 15世祖,
자(字)는 기백(耆伯), 자(字)는 기백(耆伯), 부(父)는 대사헌 민휘(閔暉), 조부(祖父)는 민형손(閔亨孫), 증조부(曾祖父)는 민신지(閔愼之)이다. 고조부는 민공생(閔公生)소경공파(少卿公派)시조, 형(兄)은 민수천(閔壽千)大司成이다. 자는 민지란(芝蘭), 민춘란(春蘭)예참(禮參), 손은 민정명(定命)목사(牧使)-(생부는 민형란(馨蘭)). 중종(中宗)6년 별시(別試) 병과(丙科)급제, 집의(執義)를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수원(閔壽元) 중종(中宗)6년(1511년), 별시(別試) 병과5(丙科5)
민수정(守貞) 부는 민귀은(貴殷), 자는 민원(瑗)전주부윤(全州府尹)
민수지(綏之)10世祖, 부는 민현(玄), 자는 민계(啓)승지, 손은 민세영(世榮)전서공파(典書公派)시조
민수집(洙集)1694 ~ ?.
부(父)는 민치룡(閔致龍), 조부(祖父)는 민몽석(閔夢錫), 증조부(曾祖父)는 민태승(閔泰升)이다. 영조(英祖)39년 기로정시(耆老庭試) 을과(乙科)급제, 첨지사(僉知事) 역임.
<국조 문과 방목>
민수집(閔洙集) 영조(英祖)39년(1763년), 기로정시(耆老庭試) 을과1(乙科1)
민수천(壽千)15世祖, ?∼1530(중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기수(耆수). 대사헌 휘(暉)의 장남으로 집의 수원(壽元)의 형이다. 조부(祖父)는 민형손(閔亨孫), 증조부(曾祖父)는 민신지(閔愼之)이다. 고조부는 민공생(閔公生)소경공파(少卿公派)시조이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반정(反正)후 중종이 처음 실시한 식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이어서 11년중시(重試)급제 병과(丙科),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저작·박사를 거쳐 1515년 홍문관교리에 올랐다. 이때 북도에서 이정호(李挺豪)의 무고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선유경차관(宣諭敬差官)으로서 이를 회유하고 돌아왔다. 그뒤 사헌부집의를 역임하며 경연관과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152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어 흉년과 도둑으로 흉흉한 민심을 위무하고 돌아왔으며, 이어서 사간·홍문관직제학을 역임하였다. 사림의 신망을 받으며 언관활동에 충실하던 그는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편에 서서 그를 두둔하였으며, 1524년 김안로가 파직, 폐출되자 심언광(沈彦光)형제와 함께 수시로 방문, 위로하는 한편, 조정에 나아가서는 그의 재등용을 주장하였다. 그 때문에 반대파의 견제로 강원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 등 외직과 대사성(大司成) 과 같은 한직으로 물러났다. 온후하고 문장에 능하여 사유(師儒)의 직임을 오랫동안 담당하였으나, 인물을 잘못 파악하여 권신 김안로에 의부하였다고 하여 사림으로부터 신망을 잃었다. 학문에도 해박하고 행정실무에도 능하였다고 하여 그가 죽자 나라에서 치부(致賻)하였다.
참고문헌 / 中宗實錄, 國朝榜目, 新增東國輿地勝覽. 〈崔完基〉
<국조 문과 방목>
민수천(閔壽千) 중종(中宗)11년(1516년), 중시(重試) 3(3)
<남양주시지>
제2권 문화재와 인물 | 제2편 성씨와 인물 | 제2장 고려·조선조 인물*
민수천 閔壽千 ?∼1530(중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기수(耆?)이고 본관은 여흥이다. 대사헌 혼(暉)의 아들이며, 집의 수원(壽元)의 형이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에 있었던 반정 후 중종이 처음 실시한 식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저작·박사를 거쳐 1515년 홍문관교리에 올랐다. 이 때 북도에서 이정호의 무고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선유경차관(宣諭敬差官)으로서 이를 회유하고 돌아왔다. 그 뒤 사헌부집의를 역임하며 경연관과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152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어 흉년과 도적으로 흉흉한 민심을 위무하고 돌아왔으며, 이어서 사간원사간·홍문관직제학을 역임하였다. 사림의 신망을 받으며 언관 활동에 충실하던 그는 이 때 김안로의 편에 서서 그를 두둔하였으며, 1524년(숙종 19) 김안로가 파직되어 폐출되자, 심언광 형제와 더불어 김안로를 수시로 방문하여 위로하였다. 한편 조정에 나아가서는 그의 재등용을 위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후 그는 이러한 김안로 구명운동 때문에 반대파의 견제를 받아 강원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 등 외직이나 대사성 같은 한직으로 물러났다. 그는 성품이 온후하고 문장에 매우 능하여 사유(師儒)의 직임을 오랫동안 담당하였으나, 김안로와 같은 권신을 두둔하는 등 인물의 성격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하여 사림으로부터 신망을 잃었다. 그는 또한 학문에 박학다식하였고, 행정실무에 능하여 그가 사망하자 국가에서 치부(致賻)하기도 하였다. 진건면 배양리에 묘가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 『국조방목』; 『신증동국여지승람』.
민수현(閔修顯)
언양현감 무과, 가선대부. 경신년(1800) 정월 12일에 부임하여 임술년(1802) 3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감.
민수홍(閔守弘)화순군지 (전시대의 인물1)
蔭仕 ◇綾州◇
민수홍(閔守弘) : 驪興人, 字는 사심(士心). 號는 망암(望庵). 義庵 懷參의 后, 後庵 忠信의 子이다. 好古力學하여 不求聞達하고 先美를 克繼하였다. 明宗朝에 훈련원(訓練院) 習讀官을 지냈다.
전라도 능주읍지 음사(蔭仕) 인종(仁宗) / 민수홍 여흥인 습독(閔守弘 驪興人 習讀)
민숙(塾) 부는 민진정(震炡),조부는 민정매(挺梅), 자는 민사선(師宣)승지(承旨)
민순(珣)10世祖,
여흥군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민지(漬)의 큰 손자로, 찬성사 민상정(閔祥正)의 첫째아들이다, 고려조 대언(代言)역임,
민순(閔純) 16世祖, 1520(중종15)~ 1591(선조24),
조선의 유학자(儒學者). 호는 행촌(杏村). 자는 경초(景初), 부는 장사랑(將仕郞)민학수(鶴壽). 낙봉(駱蜂)신광한(申光漢)과 화담(花潭)서경덕에게 사사(師事). 경학역리(經學易理)에 밝았다. 선조 초에 孝行(효행)으로 천거되어 孝陵 ?奉(효릉참봉)이 되고 主簿(주부)를 거쳐 형조·공조의 郞官(낭관), 兎山 縣監(토산현감)을 지내다 遂安 郡守(수안군수)에 이르러 사퇴했다.1575년(선조 8) 仁順王后(인순왕후)의 喪(상)에 禮官(예관)들이 오목흑대(鳥● 黑帶)로 상복을 정하자 상소하여 宋(송)나라 孝宗(효종)의 白帽 三年(백모삼년)의 제도를 준수하도록 건의하여 실시케 했다.그뒤 龍岡 郡守(용강군수)·淸風 郡守(청풍군수)·掌令(장령)·工曹 正郞(공조정랑)·禮賓寺正(예빈시정)·左通禮(좌통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 교육과 학문 연구에만 전심했다. 開城(개성)의 花谷書院(화곡서원), 高陽(고양)의 文峯書院(문봉서원)에 祭享(제향)되었다. . 문집(文集)행촌집(杏村集) -- 문헌;--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 대종회에서 발간한 여흥민씨인물사집(驪興閔氏人物史集)에 16世祖로 기록되어 16세조로 기록은 하였으나, 어느 종파인지, 선조분중 알만한 선조 기록이 없어 16世祖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기록대로라면 부 민학수(鶴壽)는 15世祖가 된다.
사 상
그는 평소에 이동의 희노애락미발(喜怒哀樂未發)의 설을 즐겨 외웠으며, 주정(主靜)의 수양을 강조하였다. 주정한다면 총명함이 자연히 발(發)하게 되어 한 번 본 문자라도 외울 수 있게 된다고 말하였다.
민순 여흥인
지 정 번 호: 향토 유적 제 8 호
지정년월일 : 1986. 6. 16.
시 대: 조선시대
소 재 지: 현천동
소 유 자: 여흥 민씨 종중
관 리 자: 민갑식
규 모:
재 료: 토분 및 화강암 석물
민순 선생 묘 및 묘갈
고양시 현천동 거무내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 숙인(淑人) 평양 조씨와 숙인(淑人) 전주 이씨가 함께 3기의 봉분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민순의 봉분 앞에는 '통훈대부 통례원 우통례(右通禮) 습정선생 민공지묘' 라고 쓰여진 묘비(墓碑)가 있으며 우측에는 오석의 묘표가 1983년 9월 18일 종중(宗中)에 의해 건립되었다.
묘 앞에는 석물로 망주석(望柱石), 상석, 향로석이 갖추어져 있다. 묘소(墓所) 아래 50m에 있는 묘갈명(墓碣銘)에는 '습정선생 민공묘갈명'이라는 전자만 확인 될 뿐 비문(碑文)은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이 심하다. 비문(碑文)은 문인(文人) 홍가신이 짓고 글씨는 김현성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노직이 썼다. 흰 대리석(大理石)으로 된 이 비의 규모는 높이가 220cm, 폭 80cm, 두께 25cm이다.
민순은 조선 중기의 학자(學者)로 문봉서원에 제향(祭享)된 고양 팔현의 한사람이다. 중종 14년에 출생(出生)하여 선조(宣祖) 24년에 돌아갔다. 자(字)는 경초, 호(號)는 행촌, 도는 습정으로 본관(本貫)은 여흥이다. 저서(著書)로는 행촌집이 있다.
민순(閔純) 字는 景初, 호는 杏村 또는 習靜, 본관은 驪興
習靜閔純墓碣銘
奎 28001
洪可臣 撰, 金玄成 書, 盧稷 篆, 1611년(광해 3)
1매, 탁본, 185.0 x 76.5cm.
소재지: 京畿道 高陽郡 神道面 玄川里
조선 중기의 학자 閔純(1519-1591)의 墓碣銘이다. 탁본 윗부분에는 習靜先生閔公墓碣銘이라고 篆字로 씌여져 있다. 묘갈명의 내용에 의하면 민순의 字는 景初, 호는 杏村 또는 習靜, 본관은 驪興, 아버지는 鶴壽이다. 어려서 申光漢에게, 자라서 徐敬德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1) 孝行으로 천거되어 孝陵參奉에 임명되었다가 학행이 알려져 典牲署主簿, 兎山縣監 등을 지냈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심하였다. 1575년 司憲府持平으로 다시 조정이 있을 때 仁順王后의 상을 당하였을 때 禮官들이 ≪國朝五禮儀≫에 의거하여 烏紗帽.黑角帶로 상복을 정하자 白帽 3년의 古制를 따를 것을 주장하였여 실시되었다. 이후 龍岡縣令, 淸風郡守, 司憲府掌令, 遂安郡守 등을 지냈다. 延安.成川의 府使와 工曹正郞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墓碣을 찬한 洪可臣(1541-1615)은 그의 문인이다.(김지영)
민순(閔恂)호남인물지(湖南人物誌) 영암(靈巖)
여흥인 사인(舍人) 덕봉(德鳳)의 아들이다. 선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조(宣祖)가 의주(義州)에서 피란하는데 식량(食糧)이 핍절(乏絶)되었으므로 순(恂)은 기효회(奇孝會) 등과 함께 양곡과 음식물과 기구(器具)를 모아 의주(義州)에 보냈기에 감찰(監察)을 제수했다.(흥지도서)
민순(筍)17世祖,
자는 순지(筍之), 부사(副司)역임, 贈 호조참판(戶曹參判)/ 형조참판 민징원(閔澄源)호참공파(戶參公派)시조에 5대손으로, 부는 贈 호조참의(戶曹參議)민세원(世瑗), 조부는 민효손(孝孫)형조참의(刑曹參議), 증조부는 민형(亨)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이다, 자(子)는 ①민홍도(弘道) ②민수도(守道) ③민안도(安道) ④민열도(閱道) 네 아들을 두셨다, 둘째 민수도(守道)는 종형 민기(箕)우의정에게 출계, 상서원부직장(尙書院副直長)이 되었다,
민순량(閔純良) 15世祖,
현감(縣監) 역임, 부(祖父)는 민구(閔球), 조부(曾祖父)는 민예달(閔禮達)이고, 병조 참판 민준(濬)이 아들이다. 민계량(閔季良)에게서 입양한 아들이다.
嘉靖七年戊子二月二十四日生員進士榜目
古 331.306-B224s2
朴善敎 간, 1909년(隆熙 3).
1책(22장), 활자본(목활자), 27.5 18.2cm.
1528년(중종 23)에 설행된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단이다. 試官은 一所(禮曹)에 尹殷輔, 成世昌, 趙宗敬, 鄭萬鍾, 許磁, 朴世熙 등 5인이다. 二所(掌樂院)에 申公濟, 金謹思, 尹漑, 朴紹, 金光渾, 蔡安 등 6인이다. 生員試 1등은 朴忠元, 閔球,金鸞祥, 尹任鈞, 尹就 등 5인, 2등은 趙士秀, 尹渫, 閔純良등 25인이며, 3등은 金應凱, 李彦憬, 任枰 등 모두 70인의 명단이 적혀 있다. 進士試 1등은 尹 , 朴忠元, 閔球,李依蕃, 鄭麟厚 등 5인이고, 2등은 鄭箕齡, 韓鉤, 鄭希登 등 25인, 3등은 鄭麟德, 成泰國, 申順美 등 70인이다. 방목 기재 사항은, 성명 아래에 本貫, 거주지, 그리고 父의 관직과 성명 및 형제에 관한 기록들이다. 권말에 "隆熙 3년 기유 봄에 文景公(駱村 朴忠元)의 14세 후손 박선교가 중간하다"라고 적혀 있어 간행의 시말을 알 수 있다. (김 호)
◎ 민순손(順孫)13世祖,이판공파(吏判公派)시조.
대광보국여천부원군 민여익(汝翼; 중현조)에 손자. 안손(安孫; 교위공파(校尉公派)시조)이 형이 된다. 아버지는 민화(和)이다. 세종(世宗)29년(1447년), 친시(親試) 정과4(丁科4) 급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을 역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
<국조 문과 방목>
민순손(閔順孫) 세종(世宗)29년(1447년), 친시(親試) 정과4(丁科4)
민순식(閔舜植) 29世祖,
의병유격장(遊擊將),1986년 문경(聞慶)에서 이강연(李康년) 등과 함께 가재를 털어 의병을 규합하는 한편 일본군의 밀정인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경 이치윤, 김인담(金仁覃)을 붙잡아 죽인후 마성면 마고성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자 단양(丹陽) 산골로 피신했다. 1905년 이강연과 다시 의병을 일으켜 원산, 연풍, 영주, 강릉, 봉화, 충주, 안동, 문경 등 14개 지역에서 1907년 7월 제천에서 일분군 5백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이강연이 체포되자, 김상태와 함께 3년간 유격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는 동안 가산은 일경에 몰수되고, 전세가 불리해져 다시 단양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민순호(舜鎬) 27世祖,
자는 봉래(鳳來), 호는 우초(愚樵). 1895년 민비학살사건과 단발령 실시로 반일기운이 높아지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전재산을 군자금으로 삼아 의병을 모았다. 일제에 협력하는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치윤(李治允), 김인담(金仁覃)을 생포해 효수했다. 그후 마성면 마고성(麻姑城)에서 적과 싸웠으나 졌다. 한편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연합부대가 결성되자 이에 호응해 돌격대장이 된 이강년의 종사(從事)로서 서상렬(徐相烈) 부대와 함께 조령에서 적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군과 정부군이 제천으로 공격해왔을 때 날씨가 나빠 화승(火繩)이 젖어 총을 쏠 수 없어서 주요의병장들이 전사하고 이강년 부대도 해산되자 단양 산중으로 피신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활동을 시작해 이강년과 함께 단양·제천·원주·연풍·영주·강릉·봉화·충주·안동·문경 등 3도 14개 군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1907년 7월 제천에서 적 500명을 무찔러 충청도·강원도 일대에서 명성을 날렸다. 이에 고종은 이강년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했으며, 이후 이강년은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되고 민순호는 후군소모장(後軍召募將)으로 임명되어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閔肯鎬)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는 등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해 12월 전국의 의병이 서울을 공격할 때 가평 광악산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뒤 인제·강릉·양양 등지의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도 중군장(中軍將) 김상대(金尙臺)와 태백산 일대에서 3년여 동안 계속 투쟁했다. 〈운강선생창의일록 雲岡先生倡義日錄〉의 간행에 참여했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문헌 ; 백과사전
문경(聞慶) 금석문(金石文)
향토사료 제18집(2006년도 12월 발행. 문경문화원)
독립지사 민순호의 묘표(獨立志士閔舜鎬의 墓表) : 가은읍 완장리 54-1(법흥산)
救國貞忠의 大義를 爲하여 丹心으로 生平을 마치신 閔公의 諱는 舜鎬요 字는 鳳來니 號를 愚樵라 하시다. 그 先은 驪興人으로 始祖의 諱는 稱道니 麗朝에 尙衣奉御이시고 그 後에 諱漬는 壁上三韓功臣으로 諡가 文仁이니 公의 十九代祖이시다. 朝鮮純祖朝에 諱祖榮은 司諫院正言慶尙道都事를 歷任하시니 公의 高祖이시다. 曾祖의 諱는 豊照요 祖의 諱는 光顯이며 考의 諱는 致一이니 仁川蔡時萬의 따님을 맞이하여 檀紀四二一八年十月三日聞慶身北平川里 第에서 公을 出生하시다. 나면서부터 眉目이 빼어나고 聰明이 過人하여 七歲에 入學하고 十五歲에 能히 經學에 窮通하니 文名이 鄕內에 드날려 嶠下의 俊才로 囑望됨이 크시다. 때마침 島夷가 侵寇하여 時俗이 煩擾하고 士風이 頹落하여졌으므로 聞達의 뜻을 끊고 기우는 國運을 痛恨하여 奮然히 救國抗爭의 隊伍에 參劃할 決意를 굳게 하고 雲岡李康秊先生의 幕下에 文官從仕로 被任되어 秘密裡에 總參謀의 重責을 맡으시다. 志士를 糾合하여 義理를 鼓動함이 大事를 圖謀하는 急先務임을 主張하여 雲岡과 더불어 毅庵柳麟錫先生을 拜謁하고 大義를 講論하며 師弟의 誼를 맺으시고 家財를 틀어 大義名分을 밝히는 昭義新編을 刑行하시다 俊人을 모아 兵書를 가르치라는 雲岡의 뜻을 받아 主屹山萬壽洞에서 不避風雨스스로 數間第屋을 마련하여 同志와 더불어 講學에 專念中그 行跡이 드러나 危殆함을 일러주는 士友의 勸誘로 不得已同志를 解散하고 本第로 돌아오시다 厥後雲岡과 더불어 擧義를 熟議하고 原州隊長閔肯鎬와 秘密裡에 교섭하여 培養山石窟에 많은 武器를 갈무려 丁未義旅를 大勝으로 이끄는데 이바지한 功이 크시다. 戊申年에 雲岡이 殉義하자 同志와 더불어 復讐討賊을 會盟하고 戰時日記와 秘密文書를 分散保管하고 主屹山에 隱居하시다. 壬子年에는 賊徒의 눈을 避하여 完章里로 옮아와 里民의 禍를 免케 하고 山水에 自娛하며 樵夫로 自足하여 耕穡하며 樵夫歌一關을 지어 憂國衷情을 敍懷하고 後孫에게 訓誡하시다. 丁巳年冬에는 親患의 徵候를 嘗糞으로 徵驗하여 禱天文을 지어 平復을 빌어시고 臨終에는 斷指獻血의 精誠을 다 하시며 居喪三年에도 하루같이 省墓하는 至極한 誠孝는 이를 데 없으시다. 乙酉年光復後에는 雲岡先生紀念事業推進에 專念하여 戰史錄과 文集을 刊行하고 寤寐一念綱常과 彛倫을 바로잡아 社會의 秩序恢復과 祖國統一의 聖業成就를 祈願하다가 光榮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채 己巳年十一月十八日完章里第에서 恬然히 逝世하시니 完章里法興山麓에 安葬하시다. 戊申年三月一日에 獨立有功者로 推選되어 大統領表彰狀이 追贈되시다. 枇는 全州李康寅의 女를 娶하시니 泳禑泳沂泳弼의 三男을 두시고 泳禑는 伯氏諱仁鎬에게 出系하여 完植正植享植京植忠植孝植洪植의 七男一女이오 泳沂는 昌植天植東植의 三男三女이오 泳弼은 禹植榮植辰植의 三男一女이니 後孫이 繁衍하시다. 噫라 公은 風塵亂世에 大義를 밝히고 綱常을 바로잡아 祖國을 匡復하려고 義旅의 陣頭에서 愛國貞忠의 丹誠을 다 하시고 끝내 節操를 지켜 樵夫의 生平을 마치시니 그 높고 거룩한 뜻을 우러러 기리고 되새겨 길이 빛내고자 復昆의 至誠으로 墓表를 세우고자 함에 글을 請함으로 菲才로써 辭하였으나 갸륵한 精誠을 欽仰하여 僭越하나마 敢히 家狀에 憑據하여 이에 拙文을 씀에 다만 後日의 据蹠을 바랄뿐이다.
檀紀四三○七年十月日
缶林 洪在烋 謹撰 / 子 泳禑 謹書
민순호(舜鎬)
광주(廣州)출신, 자는 민영서(泳序)고종(高宗)17년(188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57(丙科57) 급제.
민순효(順孫)세종(世宗)29년 친시(親試)급제 정과(丁科)
민순휴(舜휴) 상주(尙州) 출신/자는 민영서(泳序)교리(校理)
민술용(閔述鏞)
관(官) 참봉(參奉)
배(配)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직필(洪直弼)의 여(女), 자(字) 백응(伯應) 호(號) 매산(梅山), 처남(妻男) 홍일순(洪一純) 남양(南陽) 관(官) 현령(縣令), 처남(妻男) 홍일한(洪一漢) 요(夭)
민술호(閔述鎬)
赤城誌(奎1708,奎 11665), 趙秉瑜(朝鮮)等編.
5卷 2冊 地圖 筆寫本 33.1×21.1cm.
1896년(建陽 元)에 당시 郡守 趙秉瑜의 발의에 따라 朴重浩·李敏敎·金直鉉·河泰洪 등 鄕老들이 편찬을 시작하여 후임군수 閔述鎬의 董·役에 힘입어 1898년에 완성한 전라북도 茂朱郡의 읍지이다. 책머리에 1897년 宋秉璿, 1898년에 郡守 閔述鎬와 河在晩이 쓴 「赤城誌序」 및 「赤城誌目錄」「凡例」가 있고 이어서 纂修·校正·公司員·監董·典書·監印·別任·鑄員 등 읍지 편찬에 종사한 23인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茂朱官府圖」 「茂朱幅員總圖」가 부착되어 있다. 卷末에는 1898년 朴祥浩가 쓴 跋文이 있다. {권1}에 沿革, 郡名, 疆界, 坊里, 結摠, 進貢, 조적, 田大同, 選武, 俸름, 場市, 橋梁, 堤堰, 形勝, 風俗, 山川, 土牽, 姓氏, 壇廟, 公해, 倉庫, 驛院, 寺刹, 衙舍, 樓亭, {권2}에 學校, 院宇, 時術齋, {권3}에 官案, 민순휴(舜휴) 상주(尙州) 출신/자는 민영서(泳序)교리(校理) 文科, 蔭仕, 武科, 生進, {권4}에 人物, 寓居, 學行, 忠臣, 孝子, 烈女, 孝婦, 遺逸, {권5}에 赤裳鎭, 冊板, 亭臺, 巖池 순으로 실려 있다. 凡例에서 條目 설정은 일차적으로 舊本을 따랐는데 舊本이 크게 소략하므로 ≪龍城誌≫의 예를 참고하여 보충해 넣었고, 舊本에 있는 조목은 每條의 밑세 '舊誌'라 표시하였으며, 새로 첨입한 조목은 '新增'으로 표기하였다고 밝혔다. 여기서 舊誌는 英祖代에 ≪輿地圖書≫를 작성할 때의 副本으로 보인다. 舊誌와 新增된 부분이 확연히 구별되어 그간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내용은 대체로 상세한데 「坊里」조에는 各面의 里名과 위치, 과거의 명칭, 氏族世居, 峙, 墩臺, 面別 人口·編戶가 실려 있다. 「結摠」조에는 舊誌에 이어 時起作夫結, 陞摠衙錄公須位結, 津夫位, 加耕, 宮屯, 內需司, 柳屯, 忠復, 津夫復, 驛夫復 등으로 구분 기재하였다.「學校」조에는 위치, 연혁, 건물, 神座, 祭享人物, 祭器, 祭服, 學位, 享需元會勘, 殖本錢, 書冊, 田畓의 위치, 校長이하 任員과 校生을 비롯해 鄕校移建上樑文(金夢臣), 大成殿上模文(河一洪), 鄕飮酒記, 鄕飮酒禮有司記, 執禮讀法, 藏書記, 典守節目 등의 記文이 모두 실려 있다. 「院宇」도 「學校」와 체제가 같다. 「烈女」와 「古蹟」에도 많은 記文·碑文이 기재되어 있다. 「古蹟」조에는 赤裳山城護國寺碑文(李植撰, 吳竣書·篆), 赤裳山城實錄謄校同苦錄記序(李尙眞記), 東築山城記(李宜祿述), 赤裳山安國寺記, 德裕山香積峯記(林熏·許穆), 風乎亭記(權時益), 捿碧亭記(韓章錫), 德業계序, 계案, 修계記 등이 실려 있다. 이외에 茂朱邑誌로는 ≪茂朱府邑誌≫<奎17419>, ≪茂朱府邑誌≫<상백 古 915.14-M896ju>, ≪湖南邑誌≫<奎12175>(제9책), ≪湖南邑誌≫<奎12181>(제16책) 등이 있다.
민숭경(閔崇慶)화순군지 (전시대의 인물1)
孝子 ◇綾州◇
민숭경(閔崇慶) : 驪興人, 號는 덕천(德川), 義庵, 懷參의 后, 참봉(參奉) 守元의 子이다. 事親誠孝하여 父病에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하니 井華水에 목욕(沐浴)하여 祝天願代하고 斫指延命하였다. 事聞에 敎官을 贈하고 命○하였다.
전라도 능주읍지 창의(倡義) 선조(宣祖)
민숭경 여흥인 참봉수원자 임진여참의김률창의 왕견도원수권률구획방책다유로적
閔崇慶 驪興人 參奉守元子 壬辰與參議金慄倡義 往見都元帥權慄區劃方策多有勞蹟
전라도 능주읍지 효자 정포(孝子 旌褒)
(조선성종)민숭경 여흥인 참봉수원자 사친성효부병백약무효 신욕정화상기북진상분험증작지주구과득회소사문 증교관 명정
(朝鮮成宗)閔崇慶 驪興人 參奉守元子 事親誠孝父病百藥無效 身浴井華常祈北辰嘗糞驗症斫指注口果得回穌事聞 贈敎官 命旌
민숭지(崇祉)15世祖,
부는 민흥림(興霖), 조부는 민효남(孝男)상의정공파(尙衣正公派)시조, 자는 민전 ; 승지(承旨)
민승룡(閔升龍) 1744(영조 20)∼1821(순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산청(山淸) 출신으로, 자는 홍원(弘遠), 호는 오계(梧溪). 민경(坰)의 아들이며, 조부(祖父)는 민제윤(閔齊尹) , 증조부(曾祖父)는 민인구(閔仁耉)이고, 어머니는 권형(權衡)의 딸이다. 사촌(莎村)박효삼(朴孝參)의 문하생으로 1780년(정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보안역승(保安驛丞)이 되었을 때 심환지(沈煥之)가 정치의 요체(要諦)를 묻자, 역관(驛官)으로서 말을 잘 기르자면 말에게 해를 끼치는 요인부터 먼저 제거시켜주어야 하듯이, 정치를 잘하는 비결도 이러한 이치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자, 심환지가 크게 감탄하면서 세상을 경륜할 참다운 인재가 우역관(郵驛官)으로 묻혀 있는 것을 아깝게 여겼다. 그는 항상 이러한 신념에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뒤에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 驪興世稿. 〈金昊鍾〉
<국조 문과 방목>
민승룡(閔升龍) 정조(正祖)4년(1780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2(丙科22)
민승서(閔承序) 14世祖,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 역임. 후에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議禁府使), 세자이사(世子二師),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總府都總官) 증직(贈織). / 승지(承旨) 민방(昉;중현조)의 7대 손으로, 증조부는 승지(承旨) 민계(啓)이고, 조부는 전서공파(典書公派)시조 민세영(世榮) 이다. 부는 민경(卿)감찰어사(監察御史)이다, 배(配)는 贈정경부인 강화 황씨(貞敬夫人 江華黃氏) 서운관 황정석(黃正碩)의 여식, 자(子)는 ①민순(諄) 세조조 용인 현령, ②민유(諭)세종29년 문과 중시 무과 급제 사저역임, ③민의(誼) 성종 2년 현감 겸 장령, ④민주(註), ⑤민함(諴)조봉대부(朝奉大夫)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⑥민흔(訢)등,6 아들을 두었고, 손은 민함(諴)의 아들 민 계증(季曾)돈녕첨정(敦寧僉正)이다,
진위현령명단(振威縣令名單)
민승서 1427 실록(閔承序 1427 實錄 )
민승석(承奭)16世祖,
자(字)는 주경(周卿), 가선대부행충좌위부호군(嘉善大夫行忠佐衛副護軍) 역임./ 고려조 형부상서(刑部尙書)민식(閔湜) 문경공의 12세 손으로, 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절충장군(折衝將軍)민희(熙), 조부는 숭정대부행용양위상호군(崇政大夫行龍양衛上護軍) 민을동(乙仝),증조부는 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민발(閔發) 위양공파(威襄公派)시조, 고조부는 좌찬성 여강군 민수산(閔壽山)이다. 자(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정략장군 행충좌위부사용(政略將軍 行忠佐衛副司勇)민관(寬), 손(孫)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지례현감(知禮縣監)민광린(光隣), 증손은 민척(滌)통훈대부(通訓大夫) 회덕현감(懷德縣監).
민승석(承奭) 자는 민관(寬), 손은 민광린(光隣), 증손은 민척(滌)현감(縣監)
민승세(承世)
부는 민사부(師傅), 조부는 민정(閔정), 자는 민종묵(種默)형조 판서-생부는민명세(命世)
민승호(升鎬)27世祖,1830(순조30) ~ 1874(고종11),
조선의 척신(戚臣), 명성황후의 오빠, 자는 복경(復卿), 치구(致久)의 아들로 민치록(致錄)에게 입양(入養)되었다, 호조참의 민광훈(閔光勳 ; 삼방파(三房派)시조)에 3째 아들 병조판서 민유중(閔維重)에 6대 손으로, 조부(祖父)는 민기현(閔耆顯), 증조부(曾祖父)는 민백분(閔百奮)이다. 고종(高宗) 1년 증광시(增廣試)급제 병과(丙科) 병판(兵判),대제학(大提學), 협변(協辨), 1866년 여동생이 왕비로 책봉되자 중용(重用)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1872년(고종 9)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병조판서에 올랐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명성황후를 도와 국정 전반에 참여, 민씨 일족의 거두로서 세도가 등등했으나, 1874년 한 수령(守令)이 보낸 선물로 위장한 폭약을 개봉하다가 폭발하여 어머니와 부자가 함께 차사했다. --문헌;-- 고종기사(高宗紀事)-
<국조 문과 방목>
민승호(閔升鎬) 고종(高宗)1년(1864년), 증광시(增廣試) 병과6(丙科6)
閔公(升鎬) 墓碣銘(奎10181), 撰者未詳.
1帖(13折 23面) 拓本 31×20.4cm.
閔升鎬(1830∼1874)의 墓碣銘을 탁본한 13折 23面의 拓本帖이다. 卷頭에 「?筆」이라고 쓰여 있고, 卷尾에 「大韓光武三年(1899) 十月 日立」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보아 1899년에 王世子로 있던 純宗이 쓴 碑石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撰者는 「…昔永壽?參西淸班聯奉餘光……今老白首獨存敍纂公德行之萬……」이라는 글로 보아 永壽란 사람이 늙은 나이에 쓴 것임에 틀림없으나 姓을 밝히고 있지는 않다. 卷頭에 「?筆 兵曹判書贈領議政諡忠正驪興閔公墓碣銘」이라는 篆書體의 碑題가 있고 이어서 楷書로 된碑文에는 그가 갑자기 죽은 후 禮遇하여 領議政에 증직하고 「廬國忘家曰忠 以正服人曰正」이라 하여 諡號를 忠正이라 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墓所를 蓮花峯에 정하였다가 安岩洞 龍仁으로 다시 옮겼던 내력 및 夫人들의 生沒年代 墓所 德行 后嗣관계 등을 밝혔다. 銘에는 그의 德業이 찬양되고 있다.
민승호(閔承鎬)
전라도 능주읍지 음사(蔭仕) 고종(高宗), / 민승호 여흥인 도정(閔承鎬 驪興人 都正)
민승효(閔承孝)
전라도 능주읍지 음사(蔭仕) 인조(仁祖) / 민승효 여흥인 예빈주부(閔承孝 驪興人 禮賓主簿)
민시식(時植) 29世祖
독립운동가(항일의병), 1906년 경북 영천에서 정환직 부자의 항일의병에 백여동지와 함께 만 3년간 태백산에서 진주에 이르기까지 수십 고을에서 80여회나 왜병과 항쟁하였으며, 상주땅 구두목골 등에서 숨어지내다가 1947년 영면하였다. 민홍기는 1909년 의병으로 투신하여 교육과 피신을 하면서 지병으로 요양 중 광복을 맞이하고 1947년 영면했다.
민시원(閔蓍元)
순흥의 씨족 이야기 . 순흥의 씨족(氏族) 분포
(3) 부석권(浮石圈)
○ 우수골(愚谷) 榮川 민(閔)씨 : 선조(宣祖)때 왕자(王子)사부(師傅)를 지낸 민응기(閔應祺)가 살았다. 지금은 그 후손이 살지 않는다. 응기의 아버지 민시원(閔蓍元)은 생원(生員), 아들 민흥업(閔興業)은 진사(進士)로 찰방(察訪)이었다.
민시중(閔蓍重)18世祖,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정(中正).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이었던 총(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조부(祖父)는 민계(閔季), 증조부(曾祖父)는 민함(閔함)이고, 손(孫)은 민응협(閔應協)이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48년 다시 사마시에서 진사가 되었다. 1549년 성균관에 등용되고, 그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65년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그해 교리가 되어 사대와 교린에 관한 문한(文翰)을 도맡아서 작성하였다. 이듬해인 1566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다시 교리가 되었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여주목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國朝榜目, 驪興閔氏族譜. 〈李在範〉
<국조 문과 방목>
민시중(閔時中) 명종(明宗)4년(1549년), 식년시(式年試) 갑과1(甲科1)
민시중(閔蓍重)21世祖, 1625(인조 3)~1677(숙종 3)
조선의 문신. 자는 공서(公瑞), 호는 인재(인齋), 호조참의 光勳(광훈 ; 삼방파(三房派)시조)의 아들. 우의정 鼎重(정중), 돈녕부영사 維重(유중)의 형, 손(孫)은 우의정 민응수(閔應洙), 자(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민진주(閔鎭周)이다. 宋時烈(송시열)의 문인. 1650년(효종 1) 生員試(생원시), 1664년(현종 3) 春塘臺 文科(춘당대문과)에 각각 장원, 持平(지평)·南陽 縣監(남양현감)·吏曹佐郞(이조좌랑)·校理(교리)를 거쳐 1669년(현종10) 水原 府使(수원부사)에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70년 禮曹 參議(예조참의), 이듬해 戶曹 參判(호조참판)·江華府 留守(강화부유수), 1674년(숙종 즉위) 대사헌을 지내고 告訃請諡 承襲 兼 謝恩副使(고부청시승습겸사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듬해 귀국, 형조 참판에 이르러 사직했다. 學行(학행)으로 이름났고, 인품이 忠厚(충후)했다.
◎ 민식(軾 )11世祖,知敦寧公派시조, ?~1201(신종 4)
대광보국여천부원군 민적(閔적)이 할아버지이고, 아버지는 4형제 중 막내로 민환(渙)이다. 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 민사평(思平)이 큰 아버지이고, 대제학 민유(愉; 중현조)둘째 큰아버지, 좌사의대부전리판서 민변(忭;文度公; 중현조)이 셋째 큰 아버지가 된다, 민환(渙)의 둘째 아들이다, 知敦寧 府事(지돈령부사)를 지냈다
◎ 민식(閔湜)5世祖, 상서공파(尙書公派)시조, ? ~ 1201(고려 신종 4),
平章事(평장사) 민영모(閔令謨)공의 큰 아들,고려조 1167년(의종 21)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으로 급제, 선종초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時)가 되고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러 사망 했다. 부인 민씨(閔氏)는 예빈경(禮賓卿) 지영(志寧)의 따님으로 고려의 법에 같은 성(姓)을 피하지 않는 것은 당시 풍속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관향(貫鄕)이 같은지는 알 수 없다.
-문헌-; 고려사(高麗史)
1. 閔(민)氏 예산군지
민씨는 선대에 중국으로부터 나왔다고도 하고, 또는 여주(驪州)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으나 모두 분명치 않다. 본관은 여흥(驪興) 단본이다. 문헌에는 여흥 외에도 황려(黃驪), 영주(榮州) 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황려는 여흥의 옛이름이고, 영주민씨는 여흥 민씨의 지파로서 근세에 와서 여흥으로 통합되었다. 시조는 고려 때 상의봉어를 지낸 민칭도(閔稱道)인데 그의 상계는 전해지지 않고, 또 본관을 여흥으로 하게 된 연유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씨는 한말의 세도 가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역사상 3차에 걸쳐 크게 위세를 떨쳤다. 첫 번째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기간, 두 번째는 조선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세 번째는 한말 고종 때이다. 민씨는 조선조에서 왕비 4명, 상신 12명, 대제학 3명, 호당 6명,청백리 3명, 공신 7명, 장신 8명, 문과 급제자 249명을 배출한 명문으로 왕비 4명은 청주 한씨 6명의 다음이고, 상신 12명은 전주 이씨 22명, 동래 정씨 17명, 안동 김씨 15명, 청송심씨 13명의 다음으로 제 5위이다. 그리고 문과 급제자는 제 6위이다.
민씨는 시조의 증손 민영모(閔令謨)가 중앙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 첫 번째 융성기를 맞는다. 그는 명종조에 판이부사, 태자태사 들을 지냈고, 그의 아들 민식(閔湜)은 신종조에 형부상서, 민공규(閔公珪) 역시 진종조에 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지냈다. 식의 증손 민지(閔漬)는 충숙왕조에 수정승으로 여흥군에 봉해졌고, 지의 아들 민상정(閔祥正)은 찬성사를 지냈다. 민종유(閔宗儒)는 공규의 증손으로 찬성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민적은 충혜왕조에 진현관대제학을 지냈다. 적의 아들 민사평(閔思平)은 공민왕 때 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등을 지냈고, 아우 민유(閔愉)는 공민왕조에 제학을 지냈다. 이상이 민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 놓은 인물들로서 모두 10촌 안팎의 친족들이다.
민식 1741 ~ ?.
부(父)는 민주세(閔胄世)이다. 영조(英祖)49년 정시(庭試) 병과(丙科) 급제, 문헌 ; <국조 문과 방목>
민식(閔식)
해남(海南)읍지(邑誌) 음사(蔭仕)ㅇ민식 : 여흥인. 자(字)는 식연이며 충정공 후로 직장(直長)이다.
민신(閔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6년 경진(1460, 천순 4) 5월 25일(경자)
이조에 졸한 이천·민심언·고득종 등을 원종 3등 공신에 기록할 것을 명하다 .
민신(閔伸)13世祖, 충정(忠貞)공파의 시조, ? ~ 1453(단종1).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민변(忭 ;文度公,중현조)의 증손자, 대사헌(大司憲)민개(開 ;文度公중현조)의 큰 아들 불해(不害)가 아버지이다. 문종때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 수양대군이 연경(燕京)에 갈 때 그를 부사(副使)로 삼으려 했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김종서와 다섯 아들과 함께 현릉(顯陵)비역(碑役)을 감독하고 있다가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曹)에게 비역소에서 참살(斬殺)당했다..손자 민중건이 살아남아 해남에 뿌리를 두었다,공은 화를 당하신 후 수백년이 지난 정조(正祖) 5년(1781년)에 후손 민치상의 상소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충정공 시호를 받았다..- 문헌;--장릉지(莊陵誌)
호남인물지(湖南人物誌) 해남(海南)
민신(閔伸)
호(號)는 둔암(遯菴), 본관은 여흥(驪興), 청백리(淸白吏) 불해(不害)의 아들이다. 세종(世宗) 때 통예문봉예랑(通禮門奉禮郞)을 거쳐 이조(吏曺) 판서(判書)에 이르고 단종(端宗) 원년(元年)에 현능(顯陵)의 비(碑)를 세우는데 감독(監督)하다가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와 동일(同日)에 세 아들 보창(甫昌) 보해(甫諧) 보역(甫繹)과 함께 피화(被禍)하였다. 정조(正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증(贈)하고 시호(諡號)를 충정(忠貞)이라 했다. 해남(海南)의 충정사(忠貞祠)에 사부자(四父子)가 함께 향사(享祀)하고 그후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했다.(연여실기술. 장능지. 해남군지)
해남(海南)읍지(邑誌)
사화, 충절 - 충 절
ㅇ 민신 : 여흥인 청백리 불해의 자로 문종조에 병조판서 단종때는 이조판서에 있었다. 공은 계유정난때 현릉의 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모살을 계획하고 역사를 보내 현릉비석소에서 공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이때 보창 보해 보석 세아들도 함께 순절하였다. 숙종조 에야 후관되었고 정조5년에 시 충정을 증하며 장릉 충신천에 향사하고 불조묘와 정려를 명하였다.
민신동(信仝) 14世祖,
형조참의(刑曹參議) 역임. / 고려조 형부상서(刑部尙書)민식(閔湜) 문경공의 10세 손이며, 고려조 지문하상의 민백훤(閔伯萱)의 증손자이고, 좌찬성 여강군 민수산(閔壽山)의 손자이다. 부는 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민발(閔發) 위양공파(威襄公派)시조로 둘째 아들이다. 묘는 충북 음성군 금왕면 유촌리
민신지(愼之) 12世祖,
부는 민공생(閔公生)소경공파(少卿公派)시조, 자는 민형손(亨孫), 손은 민휘(暉)대사헌, 증손은 민수천(壽千)대사성(大司成), 민수원(壽元)집의(執義)
민신호(信鎬) 자는 민영순(泳純)수찬(修撰)-생부는민익호(翼鎬)
민심 18世祖, 1580(선조13)~1623(인조1).
자는 여징(汝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역임./ 민雲瑞(운서)의 아들, 1613년(광해군5) 성균과 유생(儒生)으로서 정인홍(鄭仁弘)등과 폐모론(廢母論)을 적극 주장했고, 161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18년 증광문과시(增廣文科試) 병과(丙科)에 급제,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거쳐 1622년 이조좌랑(吏曹佐郞),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역임 하였다가, 이듬해 인조반정(仁祖反正)에 폐모론에 가담한 죄로 사형되었다. - 문헌;--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민심석(閔心碩)
언양현감 무과, 가선대부. 처음 관직은 남해 현령, 남병 우후(南兵虞侯)였다. 을축년(1805) 12월에 부임하여 무진년(1808) 2월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감. 수원인(水原人).
◎ 민심언(閔審言)12世祖, 유수(留守)공파 중현조,
대제학 민유(愉;중현조)의 손자, 전농소윤 민지생(智生)의 아들, 조선전기의 문신. 4남을 두었으니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추증된 큰아들 민징원(閔澄源) 호참공파 파조(戶參公派), 둘째 충원(沖原), 그리고 김치기(金恥其)에게 시집간 딸은 큰 부인 송시(宋氏)의 소생이여, 셋째 아들 민준원(俊源) 단양공파(丹陽公派)시조, 넷째 아들 민담원(澹源) 사과공파(司果公派)시조, 그리고 이처공(李處恭)에게 시집간 딸은 막내 부인에 소생이다.(留守公(審言)墓表에서~), 정종초에 봉상시협률랑으로 재직하다가, 정희계의 시호문제와 관련,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뒤 1404년(태종 4)에 지평·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428년(세종 10) 첨지돈녕부사·동지돈녕부사를 거쳐, 같은해 진하사의 일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광주목사·함흥부윤·1434년 동지돈녕부사·전라도관찰사, 이듬해 중추원부사·호조참판, 1436년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개성유수도 역임하였다, 공은 당시 조정이 혼란 해 지자 관직을 버리고 통진에 돌아와 생을 마치니 향년이 90여이며, 병조판서의 증직이 내렸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고 한국인물대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에 기록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이 공의 시향일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6년 경진(1460, 천순 4) 5월 25일(경자)
이조에 졸한 이천·민심언·고득종 등을 원종 3등 공신에 기록할 것을 명하다
민심현(心鉉)부는 민병주(秉周), 자는 민수영(洙永), 손은 민희태(羲泰)승지(承旨)
민씨(閔氏)
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 광주(光州)
여흥인(驪興人) 이조(李朝) 때 예조정랑(禮曺正郞) 권극중(權克中)의 아내다. 남편(男便)이 죽으니 3년동안 여묘(廬墓)하고 마침내 머리를 깎고 여승(女僧)이 되어 묘(墓) 옆에서 일생(一生)을 지냈으므로 정여(旌閭)했다.(흥지승람, 동국신적삼강행실)
민씨(閔氏)
<울진군지>
제1장 인물 제6절 효부(孝婦)
적(籍)은 여흥(驪興)이며 민재호(閔在鎬)의 딸로 영양(英陽) 남이도(南履道)의 처다. 조선 고종 을묘년에 그의 남편이 과거에 불합격하고 병으로 귀가하여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므로 부인이 단(壇)을 설치하여 매일 새벽에 청수를 떠놓고 하늘에 빌어 중단함이 없었다. 그러나 9년 후인 정해(丁亥)년에 운명함에 손가락을 끊어 주혈(注血)하여 3일을 연명하고돌아가셨다. 민씨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어서 같이 묻히려고 맹세하였으나 가족들이 강력히 말려 죽지 못하고 홀로 빈소를 지키며 애통해 하였다. 또 그로부터 3년후에는 시아버지가 다리의 종기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매일 주야로 종기독을 빨아 다행히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또 등창이 나서 매일 3번씩 빨아 마침내 완치되었다. 이와같이 민씨의 병간호가 지극하니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였고 봉산(鳳山) 남목영(南穆永)이 행장을 지었다.
민씨(閔氏)
전라도 능주읍지 예천(禮薦) 순조(純祖)
민씨 적여흥 치오녀 남평문덕환처 전정유순효사 부모급자우귀목효구고경승군자 미불용극기구병극채삼득치이공자미병즉견효부처쌍효견칭
閔氏 籍驪興 致五女 南平文德煥妻 專靜柔順孝事 父母及自于歸穆孝舅姑敬承君子 靡不庸極其舅病劇採蔘得雉以供滋味病卽見效夫妻雙孝見稱
민씨(閔氏)
<밀양시 역사속의 인물>
성명 민(閔)씨 부인
한자 閔氏
시대 조선시대
비고 효부
민씨부인은 밀양시 하남읍 파서리 여흥(驪興) 5우선생의 5형제중 삼매당(三梅堂) 구서(九敍)의 딸로 태어났다. 장성하여서는 밀양시 상동면 가곡동에 사는 밀성(密城)사람 박희량(朴希良)에게 시집와서 탁월한 총명과 여자가 지켜야할 모든 분야에 막힘이 없어 한가문의 꽃으로 시댁 어른들에게 효행이 타의 모범이 되었고 행실은 전체 문중의 귀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들이 물밀듯 닥쳐오자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집뒤 바위 절벽에 올라 투신 자살 하였다. 이 민씨부인 무덤은 낙화암(落花岩)밑에 있고, 부인이 몸을 던진 바위를 지금도 낙화암이라 부르고 있다. 박씨 문중에서 세운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민씨(閔氏)
익산을 빛낸 근/현대 인물 소동 처(妻) 여흥민씨(麗興閔氏, 1572~1636)
조선후기의 순절인. 익산군 금마면 서고도리 출신. 임진왜란 때의 순절충신(殉節忠臣) 행진(行震)의 자부. 시아버지와 부군이 전사하고 아들 하나 역시 일찍 죽으니 의탁할 곳이 없어 통진의 친가로 가서 살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민씨일가가 강화도로 피난을 가서 움막을 치고 피난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월 23일 청나라 적선(敵船)이 강을 건너 강화도로 내습하였다. 이에 민씨 일가족 12명은 욕을 당하느니 죽기로 결심하고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민씨 부인도 뒤를 따라 죽었다. 1832년 순조 임진에 정문(旌門)을 명받아 현재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에 시아버지 좌랑공 행진(佐郞公 行震)과 함께 모셔져 있다.
민씨(閔氏)
진양속지 제6권/열행(烈行) ○ 여흥민씨(驪興閔氏) : 효부(孝婦). 민응교(閔應敎)의 딸이요, 거창(居昌) 신상범(愼相範)의 아내다. 시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순종하고 따를 뿐 어김이 없었다. 시어머니 하씨(河氏)가 마비(痲?)가 되어 눕고 일어나거나 옷을 입고 밥 먹는 것도 반드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했는데 효부가 지극한 정성으로 부축하고 간호했다.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매일 아침이면 반드시 머리를 빗질하여 씻고 늘 이부자리 등을 정결하게 했다. 8년을 하루와 같이 했고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었다. 동월(桐月)에 살았다.
민씨(閔氏)
본관이 여흥이며 이원의 처이다.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정표되었다.
민씨(閔氏)
전라도 능주읍지 열녀(烈女)
(고종)민씨 적여흥 치정녀 하동정승채처 효어고렬어부 명정
(高宗)閔氏 籍驪興 致精女 河東鄭勝采妻 孝於姑烈於夫 命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