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민 숨결 따라, 금강송 기세 좇아
2019. 8. 2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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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백두대간 경북 봉화·울진 80㎞ 탐사기
옛길 따라 걷다보면 인간·자연 공존 흔적
경북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와 울진군 금강송면 전곡리 사이의 낙동강 비경길.
마지막 오지를 탐사했다. 배낭을 짊어진 청년들이 5일 동안 첩첩산중을 걷고 또 걸었다. 백패킹 동호인 15명과 전문웹진·여행사 대표 등으로 구성된 스태프 4명이 ‘화이브데이스’(five days-5일)라는 이름으로 뭉친 자발적 프로젝트였다. 8월14일부터 18일까지 5일 동안 80㎞ 남짓을 걷고 야영했다. 산속을 굽이굽이 파고들면서 옛길과 마을 길 그리고 임도를 걷고 또 걸으며 탐사했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생태 환경과 문화·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길 위에서 길을 물었다.
탐사는 또한, 수백 년 동안 자연과 인간이 공존했던 흔적을 관찰하는 과정이었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인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석포면을 거쳐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까지 숲속을 걸었다. 태백산을 중심으로 구룡산, 각화산, 청옥산, 비룡산, 낙동강 그리고 백병산까지 해발 1천m 넘는 산들이 이어진 이곳이야말로 국내 마지막 오지다.
풀숲 우거진 옛길 따라
출발은 백두대간 서쪽 지역에서 시작했다.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일대다. 이곳에서 백두대간 구룡산 자락을 넘어서 각화산 자락인 춘양 애당리를 파고들었다. 애당리는 백두대간 주능선과 지능선이 여러 골짜기와 가지 능선을 형성한 곳이다. 지금의 애당리 마을 위 골짜기마다 곳곳에 옛길이 있었다. 탐사팀은 첫날 애당리 참새골에서 석문동으로 이어지는 옛길을 찾아서 골짜기를 넘었다.
옛길은 풀꽃과 키 작은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처음에는 길 찾기가 쉽지 않았으나, 발걸음을 거듭할수록 길 윤곽이 탐사객 눈에 들어왔다. 돌로 쌓은 길의 테두리와 하나하나 쌓아올린 돌담의 흔적이 이곳이 길이었음을 말해주었다.
옛길은 산업화 이후 대부분 자연으로 돌아갔다. 현재 남은 옛길은 구룡령, 대관령, 문경새재, 울진 십이령의 조령과 너삼밭고개 정도. 아무도 찾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이 길에 사람의 발걸음이 더욱 뜸해지면 십수 년 안에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탐사객들이 찾은 깃대배기봉과 고직령 사이 능선에도 옛길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 종주 등산로가 옛길을 따라 이어진다. 대부분의 백두대간 종주길은 주능선 한가운데를 그대로 지나지만 태백산~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종주길은 주능선을 살짝 비켜 이리저리 사면 사이를 횡단하듯 길이 연결돼 있다.
옛길은 능선과 봉우리의 비탈을 수직으로 오르지 않는다. 지그재그 팔자 형태를 그리며 오른다. 옛사람들이 이 길로 지게를 지고 등짐을 지며 물건을 날랐기 때문이다. 길이 경사면에서 직선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탐사객들 역시 다소 느려 지칠지언정 퍼지지 않고 옛길 위를 걸을 수 있었다.
옛길은 골짜기 안에 터전을 만들었던 화전민에게 삶의 통로이기도 했다. 5일 동안 발걸음이 닿는 골짜기마다 예외 없이 화전 터를 마주할 수 있었다. 화전민들은 산속에서 구할 수 있는 돌과 나무, 흙으로 집을 지었다. 집터와 밭은 돌을 쌓아 경계를 만들었다. 수십 년이 지나 집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지만, 일정하게 쌓여 있는 이끼 낀 돌들이 이곳이 화전 터였음을 말해줬다.
조선 후기부터 수탈과 학정을 피하려 민중이 산속에 들어가 밭을 일구며 자연의 일부로 살았다. 구한말 동학 농민전쟁에서 패배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충북을 거쳐 강원도와 경북으로 대거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화전민 수가 5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화전민은 산속에서 궁핍하게 연명하듯 살아갔다. 동시에 자연의 일부가 돼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해방 뒤 1960년대 말까지 백두대간 태백산 자락에서 낙동정맥 줄기까지 경북 봉화~울진~영양 그리고 강원 남부 영월~정선~태백~삼척의 많은 골짜기에 화전민이 살았다.
화전민 삶의 터전 골짜기를 지나
그러나 백두대간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분단은 화전민의 삶을 아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1968년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북한군 특수부대 120명 남짓이 울진과 삼척의 경계인 울진 고포마을로 들어와 울진 북면과 금강송면을 거쳐서 봉화 석포·소천·춘양면으로 파고든 것이다. 국군이 두 달 남짓 작전을 벌여 대부분의 무장공비는 사살됐고, 5명이 붙잡혔고 2명은 자수했다. 2명은 백두대간을 따라 북진해 오대산과 설악산을 넘어서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대간첩 작전 과정에서 무장공비들이 산속 화전민 마을을 거점으로 국군을 피해 은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화전민이 무장공비를 신고하지 않고 먹을 것을 주거나 잠자리까지 대준 사실을 확인했다. 정부는 화전민의 실체를 달리 보게 됐고, 사건 직후 화전정리법을 만들어 화전민을 산자락 아래로 이주시켰다.
이번 탐사의 마지막 경유 마을이었던 울진 금강송면 전곡리에는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는 화전민의 아들딸이 살고 있다. 이 마을 김달덕 이장은 “전곡리도 예전에는 대부분 깊은 골짜기에서 화전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울진·삼척 공비 사건 이후 지금 마을로 내려와 정착했다. 우리 마을에도 칠순 넘은 어르신들은 대부분 화전민의 아들딸로 산속에서 태어난 분들이다”라고 들려준다.
이런 소나무들을 일제가 수탈했음을 알리는 남부지방산림청의 표지석
능선 오르면 남한 최대 금강송 군락지
화전민의 흔적이 남은 골짜기를 타고 능선에 오르면 금강소나무가 나타난다. 봉화군 춘양면부터 소천면을 거쳐 울진 금강송면과 북면으로 이어지는 산림 지역은 남한 최고의 우량 금강소나무 군락지다. 가슴 높이에서 잰 지름(흉고직경)이 70~100㎝에 키가 15m 넘는 것이 숱했고, 수령이 100년 넘을 법한 것도 많았다. 대나무처럼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의 기세는 지친 탐사객들의 발길과 눈길을 붙잡았다. 금강산에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북쪽 백두대간의 소나무도 이 정도 될까 싶었다.
탐사 3일째는 이런 금강소나무가 당한 수난 흔적도 만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태백산 깃대배기봉~청옥산 능선과 골짜기에선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일제의 대대적인 벌목이 이뤄졌다. 그들은 금강소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갔다. 봉화군 소천면 고선리의 구마동계곡에 조선임업개발주식회사 주재소를 세워놓고 1928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17년 동안 원시림을 헤쳐가며 나무를 수탈했다.
주재소 사무실이 있던 곳엔 일제의 산림자원 수탈을 기록한 남부지방산림청의 표지석(2007년 7월 설립)을 볼 수 있다. 주재소에는 152㎡에 사무실 한 동과 일본인 주임의 사택 그리고 소나무 벌목에 필요한 장비를 보관한 창고, 벌목 차량과 벌목 장비를 위한 휘발유 저장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 주임 2명은 조선인 벌목공 300명을 동원해 금강소나무를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벌목공이 산비탈 소나무를 베면, 계곡에 소나무를 깔고 옆면에 소나무를 붙여 나무 운반용 홈을 만들어 작업했다. 경사를 이용한 벌목 수송로에는 물을 뿌려 미끄럽게 만든 뒤 소나무를 날랐다. 산비탈에서 내려온 소나무는 목도꾼들이 나무껍질을 모두 벗겨내고 1년 동안 말린 뒤 그 이듬해 봄 휘발유·목탄차로 날랐다. 수탈한 소나무가 워낙 많은 탓에 작업 차들이 원활히 움직이도록 조선인 도로 작업 노동자들이 수시로 길을 정비했다. 1943년부터는 금강소나무를 영주역에서 기차에 실어 부산까지 옮긴 뒤, 현해탄을 건너 일본까지 날랐다 한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 봉화~울진군 산림지대에는 지름이 70㎝ 넘는 금강소나무가 숱하다
사향노루 뛰놀고 살모사 꿈틀대는 곳
이렇게 벤 나무의 상당량은 일제 군함을 만드는 데 썼다. 실제로 일본 군인들이 벌목 현장에 와서 나무들을 검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썼던 항공모함과 대형 전함의 갑판에 금강소나무를 깔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나무는 나무 속에 켜켜이 송진이 배어 부식방지제 구실을 한다. 그래서 바닷물의 소금기에 잘 버티는 나무 가운데 하나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도 소나무로 만들었다.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그 시절 이야기를 기억한다. 이상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기록연구원은 “고선리 구마동 일대는 일제의 벌목에 관한 구체적 증언이 많았다. 금강소나무 대경목(사람 가슴 높이의 지름이 60㎝ 이상, 높이 20~30m인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고 그 밑동에서 인부 10명이 도시락을 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지 못한 사람은 믿기 힘들 것이다. 그 정도로 봉화 춘양면과 소천면 울진 금강송면의 금강소나무는 대단했다”며 원시림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일제의 수탈을 피한 금강소나무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듯 자란다. 주로 800~1300m 대능선에 남아 있다. 금강소나무 서식지는 생태적으로도 국내에서 손꼽힌다. 지리산, 오대산, 설악산만큼이나 생물다양성이 뛰어나다. 금강소나무뿐만 아니라 신갈나무와 굴참나무 천연림이 즐비하다. 군데군데 아름드리 물박달나무 군락도 펼쳐져 있다. 또한 사향노루·산양·수달·담비·삵·하늘다람쥐를 비롯해 천연기념물 열목어까지 야생동물의 낙원 같은 곳이다. 먹이사슬이 촘촘해 생태계 연결고리가 안정적이다. 탐사팀은 골짜기 개울가에서 물두꺼비와 북방산개구리를 마주했고, 풀숲에선 까치살무사와 살모사와도 마주쳤다. 살모사와 뱀들은 독이 있어 위험하지만 생태계의 건강성을 증명하는 깃대종이다.
봉화부터 울진까지 5일의 탐사 동안 걸었던 옛길은 발길이 끊기는 순간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옛길에 담긴 기억을 더 늦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금강소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깃든 크고 작은 생명부터 이곳에 터 잡은 사람들의 삶, 그들의 삶을 바꾼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했는지 설명해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옛길을 생태와 문화, 역사가 만나고, 도시 사람과 오지 사람이 만나는 지속가능한 길로 만들려는 고민 역시 필요하다.
*이번 탐사는 법정 탐방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부 옛길 구간은 마을 주민의 동의를 얻고 산림청에 입산 신고도 했다. 야영은 국립 휴양림과 마을 관리 야영장에서 했다.
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