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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 하였더라 (에스더 10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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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국은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네 명의 왕이 보위에 오른 후에 멸망합니다. 마지막 네 명의 왕들은 제대로 나라를 이끌어가지 못하고 강대국인 애굽과 바벨론에 침공당하여 왕위를 위협받는 비참한 시대였습니다. 당시의 유다 주변의 강대국은 애굽이었고, 바벨론이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을 하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애굽이 유다를 침공하면 자기들이 맘에 드는 사람을 왕에 앉히고, 바벨론이 침공하면 자기들이 맘에 드는 사람을 앉히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유다의 멸망 직전의 과정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침략 시절에 제국열강들 속에서 강대국들에의 힘의 논리에 놀아난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요시야 왕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17번째 왕이 됩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애굽왕 느고의 침공을 받고 애굽으로 끌려가고, 애굽왕 느고는 엘리야김 이라는 요시야의 장남을 여호야김 이라고 개명을 하여 18번째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그는 11년간 왕위에 있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의 침공을 받고 포로로 잡혀 갑니다. 이때를 바벨론 1차 포로(주전 605년)라고 부르는데, 여호야김 왕과 함께 포로로 잡혀간 성경 인물이 다니엘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를 여호야긴이라고 개명하여 19번째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석 달 만에 다시 침공하여 그를 왕위에서 내려 포로로 잡아가고, 그의 숙부인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로 개명하여 20번째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이때 포로를 바벨론 2차포로(주전 597년)라고 부르며, 여호야긴 왕과 함께 잡혀간 성경의 인물이 에스겔입니다. 또한 추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오늘 성경의 주인공인 에스더, 그리고 그의 삼촌인 모르드개의 선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가 완전하게 멸망하기 10년 전에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온 포로들입니다.
에스더가 처녀로서 잘 성장하여 바벨론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어, 하만의 음모를 물리치고 유다 백성을 구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책의 제목이 ‘에스더서’이고, 왕후가 된 에스더가 중심인물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에스더서의 전체 기획자이고, 각본자이고, 연출자는 에스더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입니다. 에스더는 연출자 모르드개에게 발탁된 주연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굳건한 신앙을 기반으로 완벽한 협력관계를 이루어 유다 민족을 위기에서 구합니다.
‘에스더서’는 두 사람이 사랑과 신뢰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때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면서, 내가 모르드개라면, 내가 에스더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깊은 사랑과 변함없는 순종의 관계였습니다.
이스라엘 포로들은 본명을 버리고 바벨론의 우상이나 점성술에 관한 이름으로 개명해야 했습니다. 이름을 바꾸게 한 것은 포로들이 망한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하고 빠른 시일 내에 바벨론 생활에 동화시키려는 주요 정책이었습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한글말살 정책을 펴고, 창씨개명을 한 것과 흡사합니다.
포로의 대표적인 인물인 다니엘의 이름 뜻은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이었는데 포로로 잡혀가서 ‘벨드사살’ - 벨이여 생명을 보호하소서-로 불려졌습니다. ‘벨’은 “주인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말로 바벨론의 주신(主神)인 ‘마르둑(Marduk)’을 부르는(호칭) 말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여호와를 빼고 자신들의 신 벨을 넣어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대개 이런 식으로 유대 민족의 고유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강제 개명을 당했습니다.
에스더의 본명은 히브리식 이름인 ‘하닷사’로, ‘늘 푸른 떨기나무’라는 뜻입니다. 에스더라는 이름은 바사(persia)식 이름으로 ‘별’이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의 여신 ‘이슈타리’에서 온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일월성신에게 소원을 비는 바벨론식 점성술에 따라 지어진 이름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모르드개의 이름도 바벨론식 이름으로, ‘므로닥에게 바쳐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므로닥’은 마르둑 신의 이름을 모음을 달리하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다니엘, 에스더, 모르드개 모두 개명된 이름과 그 뜻만 본다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바벨론 우상 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바벨론은 국가가 제국으로 성장하자 각종 지역에서 포로로 잡혀온 인질들을 모두 바벨론식의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의복, 문화, 음식, 그리고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바벨론의 통치방식에 따르도록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2장 7절에,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는 아버지는 ‘아비하일’이라는 것만 알 뿐, 부모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모르드개가 양육했다는 것으로 보아, 에스더가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에스더는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그에게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자기 딸과 같이 양육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양육했다’라는 말은, “신실하게 하다, 확고하게 하다, 도덕적으로 진실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는 말씀 중에, ‘믿었다’는 말과, ‘양육했다’라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오직 여호와를 신뢰하는 딸로서 자라도록 사랑으로 양육했고,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가르쳐 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신뢰했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비록 사촌지간이지만, 부녀간의 관계처럼,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처럼 사랑과 순종의 관계로 지냈습니다. 이 사랑과 순종의 관계가 에스더서에 벌어지는 온갖 상황을 지혜롭고 담대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포로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도 굳건하게 지키며, 에스더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가르치고 믿음을 온전히 성장시킬 수 있도록 양육한 모르드개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라는 왕후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후를 간택할 즈음에 에스더도 예비 후보로 선택되어 궁에 들어갑니다. 궁에 들어가기 전에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포로 된 백성의 후손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후보자리에서 쫓겨날까 염려함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궁으로 보내놓고,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면서 에스더가 어떻게 될지 안부를 알고자 했다”고합니다. 이때의 모르드개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무슨 일이 있는지 하루라도 보지 않고는 못 견디어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는 애틋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한 결 같이 우리들을 위해 날마다 바라보시고, 말을 건네시고,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에스더는 예비 왕후 후보로서 1년을 꼬박 궁에서 지냈습니다. 궁중 생활은 힘들고 엄격하고 준비해야 되는 것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에스더는 왕후가 되려는 마음 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모르드개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녀는 왕후가 된다는 생각보다 지금 궁에서 지내고 있는 시간을 순종의 시간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오랜 동안 모르드개의 사랑을 배우며 순종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힘든 궁중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순종하는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탁월한 용모와 자세로 모르드개는 결국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순종하는 자에게 사랑을 더하시고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왕후가 된 후에도 모르드개가 가르쳐 준 대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자신의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2장 20절 하반절에,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고 한 것을 보면, 왕후로서 고귀한 신분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모르드개의 집에서 해온 대로, 모르드개에게 양육 받은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순종의 모습은 상황이나 여건이 좋고 나쁘고 상관없이 일관되게 하는 행동입니다. 에스더의 모습은 우리가 배워야 하는 지극히 온전한 순종의 모습입니다.
모르드개의 사랑과 에스더의 순종은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초 작업 이었습니다. 사랑과 순종의 시작이 향후 민족을 구하는 엄청난 큰일을 해 낼지는 모르드개도, 에스더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켜나간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사랑과 순종의 관계입니다. 이 기본이 지켜지면 상상하지 못한 큰일을 감당하겠지만, 기본이 무너지면 아무런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야, 내 자녀에게 사랑을 주려는 마음이 일어 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이 되어야 내 자녀에게 순종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제대로 이루는 사람이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욱 더 사랑 받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그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주십시오.
또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모든 상황 속에서 순종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자녀들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말과 행동으로 솔선수범하고 모범으로 보여줌으로서 양육하십시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과, 또한 우리 자녀들과 더욱 더 사랑과 순종의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서, 환경과 상황에 굴하지 아니하고 맡겨진 사명 잘 감당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모르드개와 에스더서는 아픔을 함께하고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관계였습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이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성경의 아하수에로 왕의 페르시아 역사에서 실제 이름은 크레스크세스 1세(Xerxes) 였습니다. 그는 영화 300에서 나오는 그리스를 침공한 왕이었는데, 그리스 원정에서 패하고 난 후 더 이상 전쟁에 흥미를 잃고 페르세폴리스 라는 궁전을 건축하는 일과 유흥을 즐기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살았습니다. 이 와중에 와스디 왕후가 폐위 되고 에스더가 왕후에 오르게 됩니다.
국정을 다스리는 일에 관심이 사라지자 아하수에로 왕의 내시였던 ‘빅단’과 ‘세레스’가 원한을 품고 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런데 이 일이 공교롭게도 모르드개가 알게 되었고, 이를 동생인 에스더에게 말하자, 모반자들은 색출되고 왕은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살해 음모를 막는 큰 공을 세웠지만 당시에는 왕에게 어떠한 상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나중에 엄청난 반전을 이루는 계기가 됩니다.
좋은 일이 있은 후에 궂은 일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당시 하만 이라는 신하가 모든 대신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고, 왕은 모든 대신은 하만에게 절하고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합니다. 모든 대신들은 왕의 명령에 따랐지만, 모르드개는 꿇지도, 절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왕의 명령인데 모르드개는 왜 따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모르드개의 행적으로 보아서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여 화를 자초할만한 경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르드개는 성격적으로 자존심이 엄청 강한 사람이라 무릎 꿇지 않았을까요? 에스더도 왕후가 되고, 모함도 발견하여 알려주고, 좋은 일이 계속 되었는데, 모르드개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만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하자, 모르드개는, “나는 유대인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유대인 출신인 모르드개는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는데, 하만이 왕의 명령을 빙자하여 우상에게 절하는 방식 등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였기 때문에 절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은 이유가 “나는 유대인이다”라고 한 말 속에는 민족적인 이유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을 언급할 때 그의 출신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손자 하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각’ 이라는 말은 아말렉 족속의 왕을 부르는 칭호입니다. 애굽의 왕은 ‘바로’, 블레섯 왕은 ‘아비멜렉’으로 불려진 것처럼 아말렉 족속의 왕의 칭호가 ‘아각’이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이후에 가장먼저 대적을 해 온 족속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모세가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하였습니다. 전쟁 후 출애굽기 17장 16절에,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대로’로 라는 말은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진다’ 는 말로, 선택받은 민족을 처음으로 공격한 아말렉 족속은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대적자가 될 것임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은 사무엘하 15장에서 아말렉이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과 전쟁을 할 때도 계속 이어집니다. 사무엘하 15장 2-3절에, “아말렉에 애굽에서 나올 때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합니다. 또 민수기 24장 7절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면서 말하기를,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칭점에 아말렉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의 첫 대적자로서 영원토록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멸절시켜야 되는 족속이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대로 아말렉 족속과 싸우는 ‘여호와 닛시’의 전쟁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이행하려고하는 지조 있는 행동입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자 일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하만은 괘씸하게 행동한 모르드개만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족속을 전멸시키려고 합니다. 왕에게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청하면서,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국고에 넣어주겠다는 거래를 하여, 결국 왕의 승낙(조서)를 받아냅니다. 모르드개 뿐이 아니라, 에스더, 그리고 온 유대 민족에게는 전멸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의 음모를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했다”고 합니다. 옷을 찢는 것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도 갈갈이 찢기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몸져 누워있는 모르드개에게 내시 하닥을 보내 위로를 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닥 편에 전하여 에스더에게 말하기를,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 민족을 간절히 구하라”고 합니다. 에스더는 답변하기를, “왕에게 나아갖디 못한 것이 삼십일이 넘어서 마음대로 나가기 힘들다” 전합니다. 모르드개가 다시 전하기를,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합니다. 에스더는 이 말을 듣고 회답하기를, “모든 유다인들이 나를 위해 삼일 동안 금식해주면 나도 삼일 동안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이런 극한 위기상황 속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비록 몸이 떨어져 있었지만 아픔을 공유하고 문제를 대화로 풀어나갔습니다. 모르드개가 옷을 찢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이 신음하고 아파하는 소식을 듣고 에스더도 그 아픔을 함께 했습니다. 에스더가 죽을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인 것을 알면서도 모르드개는 지금의 상황을 담대함으로 돌파하는 것이 오히려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누고, 문제를 대화로 해결해 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내가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나를 찾아와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오랜 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내가 많은 문제를 안고 고민할 때, 그 문제가 해결 될 때 까지 상담해주고 격려해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내가 가진 그 무엇을 다 준다 해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서로 아파하고, 서로 대화로 해결해 나가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이 우리 신앙공동체에게 요구하는 행동입니다.
남이 내 고통, 내 아픔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내기 전에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해 주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고민이 있을 때 누구하나 내게 와서 대화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두고보자”하면서 증오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과연 나는 누군가의 고민이나 걱정을 얼마만큼 해결해 주려고 애써보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나 보다, 너 먼저, 그리고 너 보다, 우리 먼저, 우리 보다, 우리민족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이 마음이 누구의 마음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다 감당하셨고,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마음이 가슴에 남아있는 사람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와 같이 함께 아파하고, 함께 대화로 해결해 나가는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먼저 내 자신의 아픔과 고민을 주님께 다 말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가정과 이웃과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의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과 함께 하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극한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하여도 늘 주님과 함께 하면서, 그리고 신앙공동체 내에서 서로 아파하고, 서로 사랑으로 대화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참 평안과 위로 속에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끝까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관계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결심은 절망 속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하만의 음모를 말하고자 치밀하게 준비하고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대 합니다. 하만은 에스더의 계획을 눈치 채지 못하고 오히려 잔치 날에 모르드개가 왕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무릎 꿇지 않고 절하지 않은 것을 고자질하여 22m나 되는 장대에 달아서 죽이려고 계획합니다. 에스더와 하만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잔치 전날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왕이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서 궁중 일기를 보다가, 과거에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는데 그 일을 발견하여 알려주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모르드개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왕은 하만을 불러 내가 높여주고자 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묻습니다. 하만은 자기가 높임을 받을 사람 인줄 알고. 그 높임을 받을 사람에게 “왕이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주고 말을 타고 거리로 나가 존귀하게 여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왕은 하만이 말한 바와 같이하여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높여줍니다.
왕은 아마도 이때에 심정이 교차 했을 것입니다. 모르드개 라는 비록 낮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지만 진정으로 왕의 목숨을 구한 충신이지만, 하만은 가장 높은 대신의 자리에 올라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 같지만 틈만 나면 언제든지 왕의 자리에 오르려는 음흉한 생각을 품은자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만도 자신의 속마음이 탄로 났다고 생각되어 번민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음 날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하만을 죽여 달라는 소원대로 하만은 장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합니다.
하만의 음모가 무산되고 에스더의 계획대로 된 것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치밀한 협력이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확실한 사실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모르드개가 신하들의 반역을 알렸을 때 그 당시 상을 받았다면 왕은 모르드개를 잊어 버렸을 것입니다. 왕은 하만이 음모를 꾸민 바로 전 날 궁중 일기를 읽고 모르드개라는 이름을 알 게 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모든 일을 앞서서 이루어 가신 것이 명백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만을 죽인 것으로 끝내지 않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일사천리로 확실하게 마무리 작업을 계속 합니다. 하만의 아들 열 명을 죽이고, 아달월(12월) 13, 14일 이틀에 걸쳐 나라의 각 지역에서 하만의 추종 세력들 8백 명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말렉 족속 아각의 후손들을 남김없이 멸절 시켰습니다. 큰 화를 당했지만 침착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후손들의 안위를 위해 적대세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대적이 사라지자 모르드개는 유다인들이 죽음에서 살아난 날을 기억하기 위해 아달월 14, 15일을 절기로 지킬 것을 글을 써서 각 지방의 유다인 들에게 알립니다. 모르드개는,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전합니다.
왕후 에스더도 화평하고 진실되게 글을 써서 유다인들이 절기를 지키되, 그 이름을 ‘부림(제비뽑다)절’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는데, 에스더의 이 명령이 견고하게 되고 책에 기록되어 지켜졌다고 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를 제거한 기쁨에 들떠서 남은 세력들을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최종 결과물을 얻을 때까지 좋은 협력관계를 이루어서 동역했습니다. 과거 사울 왕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잠깐의 승리에 도취해서 아말렉왕 아각을 죽이지 않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스더의 전체 스토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진행되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한 두 사람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한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한 마디로 ‘통하는 사이’였고, 환상의 조합을 이룬 파트너 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민족이 위기에 처한 이런 큰일을 앞에 두고서 마음이 나뉜다면 일을 해결하기는커녕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없었다면 에스더 혼자 이 일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에스더 왕후가 없었다면 모르드개는 이런 일을 계획하거나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앙공동체 내에서 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신앙공동체는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무리가 한 몸이 되어있다고 합니다. 몸이 하나인데 마음이 두 개 일수는 없습니다. 한 몸, 한 마음이 주님이 원하는 가장 중요한 성공과 승리의 요소입니다.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이미 그 공동체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보여준 것처럼, 중간에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고 기쁨에 겨워 일을 중도에서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최종적으로 승리할 때까지 한 마음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평안할 때 빛이 나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닥쳐 올 때 어떻게 행동하는 가를 보고 칭찬과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에스더서의 결론입니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모르드개라는 일개 무명의 포로가 대 제국에서 얼마나 귀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로 인해 유다 백성 모두가 ‘안위’를 얻었다고 합니다. 포로 된 자들 중에서 바벨론 땅에서 존귀함을 받은 사람은 다니엘과 모르드개 이외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르드개가 아무리 높아졌다고 해도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한 순간입니다. 왕이 바뀌면 언제 그 대우가 달라질지 모릅니다. 유다 백성이 안위를 받았다고 해도 그 곳은 포로로 끌려간 타국입니다. 하나님은 모르드개 개인을 높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르드개를 통하여 포로 된 가운데서도 계속 일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에 필요한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개인이 일을 처리하는 것 보다 모르드개, 에스더와 같이 사랑과 순종의 협력관계를 이루며 아름답게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혼자서 공동체를 이끌 수는 없습니다. 지도자이든, 동역자이든 모두가 주님 안에서는 평등한 동역자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순종의 관계, 아픔을 함께하고 문제를 대화로 해결해 나가는 관계,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모르드개와 에스더와 같이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 가정에게, 우리 이웃에게, 우리 민족에게, 나아가서 세계 모든 열방에게, 안위를 줄 수 있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고, 더 인내하고, 더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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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큰일을 감당하게 하신 것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우리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녀들을 더 많은 사랑으로 보살피게 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 교회 안에서 아픔을 겪고 고통당하는 이가 없는지 늘 살피게 하시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격려해주는 마음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평안을 얻을 때 주님께 감사하게 하시되,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올 지라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이 될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옵소서. 모르드개와 에스더와 같이 우리교회 모든 성도가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성령 하나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일하심을 믿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안위를 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 나이다. 아멘.
151021 수요설교.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에스더 10장 3절. 2015. 10. 21 수요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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