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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멸망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김 충 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 2019년 6월 8일 1. 로마제국 중흥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284-305)는 로마제국을 혼란에서 안정시킨 후 서기 293에 처음으로 로마제국을 4등분하여 네 황제로 분할통치를 실시한 이래, 로마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재위, 307-337)에 의해 재통일되었고 다시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 통치로 이어져 왔다. 이 때 기독교가 정식으로 허용되어 기독교는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친족 중 마지막 남은 율리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후 후계자가 없자 로마 장군과 관료들은 비밀회의를 열어 발레리아누스1세를 새 황제로 지명했다. 발레리아누스1세 새 황제는 서기364년에 친 동생 발렌스를 공동통치황제로 지명하여 발칸지역과 동방지역을 통치케 하고 자신은 일리리쿰과 서방속주를 통치했다. 동로마황제 바렌스(Vanlens; 364-378)는 동쪽 훈족에게 쫓겨 러시아 남부 자신들의 땅을 떠나 서남쪽으로 내려오는 서고트족에게 트라키아에 정착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현지 로마관리들의 탐욕과 착취에 견디지 못한 서코트족은 발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러 온 동방황제 발렌스를 서고트족은 동고트족과 합세하여 378년 8월 9일에 하드리아노플리스(현재 에디르네<Edirne>)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아드리아노플 전투 378년). 이 때 발렌스와 그의 고위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서방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us; 재위 379-395)는 379년 1월 19일에 스페인 장교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대제; 재위379-395)를 동방 속주의 황제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서로마는 383년에 브리티니아 군대가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황제로 선포하여 그라티어누스를 살해하고 재위에 올랐다. 그 또한 387년에 서로마(이탈리아)를 침공하다가 전사하여 뒤이어 발렌티아누스2세가 황제로 임명되었으나 그 역시 군사령관 아르보가스트(Arbogast)에게 살해당했다. 아르보가스트는 유게니우스(Eugenius; 392-394; 제위 찬탈자)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394년 동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에게 패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법령을 제정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391년에 이교도 숭배를 금지시키고 이교 신전을 모두 폐쇄시켰다. 그는 382년에 고트족과 4년 전쟁을 끝내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동로마 지역을 군사적으로 안정시켰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5년 밀라노에서 사망하기 전에 동로마는 17살 된 장남 아르키디우스에게 서로마는 열한 살 된 둘째아들 호노리우스(재위 393-423)를 임명했다. 2. 철학자의 국가안보 사상 데오도시우스 대제(Theodosius 1; 재위 379-395)가 사망한 직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그리스 철학자 슈네시오스(Synesios; 370?-413)는 군인사이에 만연한 치명적인 악습으로 시민들은 국방의무 면제를 돈으로 구입하여 만족들을 용병으로 대체하고 있어 국방을 용병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며, 영악한 젊은이들은 법률의 느즌한 집행을 기화로 국가방위를 경시하고 부를 모으는데 만 혈안이 되고 있다고 통탄했다, 그래서 그는 황제에게 권고하기를 “씩씩한 남자다운 모범을 보여서 신하들의 용기를 소생시키고 궁정과 병영에 사치를 추방시키고 만족들의 용병에 의지 하지 않고 자신들이 나라를 수호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태한 시민은 쾌락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농업을 지키기 위해 근면한 농민들에게 무기를 들게 하소서, 로마기상을 과시하는 군대의 선두에서서 만족과 대결하여 그들을 스키타이 변경으로 밀어 붙일 때가지 무기를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슈네시오가 만족타도를 외쳐서 일반 시민들의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알라릭을 동(東)일리리쿰지역(지금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발칸 반도 북서부에 위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칙령이 내려졌다. 서로마 말기 역사가 암미아누스-마르켈리우(Ammianus Marcellius; 330?-400?)는 다음과 같이 당시 로마시민 분위기를 분석했다. 로마의 위대성은 덕행과 거의 믿기 어려운 정도의 협력으로 확립된 것이다. 로마 유년기는 적들과 전쟁으로 지새운 나날이었으며, 청년기는 힘과 열의로 정복군을 보내어 승리한 군대를 맞았다. 노년기에 접어들어 때로는 로마라는 이름만으로 위협하여 정복했으나 안락과 평온 그리고 복락을 원했다. 지도층 귀족들은 국토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무사안일 속에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남녀 누구나 갈 수 있는 공공시설에서 목욕과 쾌락을 만끽했다. 나태한 민중의 가장 강렬한 즐거움은 검투사의 격투, 전차경주 등이었다. 그들에게는 국가 안보는 눈금만큼도 없었다. 3. 서고트왕 알라릭 로마침공(서기 410년) 동로마에서 아르카디우스가 408년 31세로 사망하고 일곱 살짜리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450)가 승계했다. 이 시기에 서고트왕 알라릭(Alaric, 재위395-410)의 군대는 발칸지역을 침공하고 뒤이어 베네치아를 점령하여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반달족 출신 스틸리코로 하여금 이를 저지토록 했으나 호노리우스 고관들은 알라릭에게 돈을 주고 협약하여 알라릭은 포강 북쪽으로 철수 했다. 혼 이난 20세 호노리우스황제는 성벽과 소택지로 엄호되어 있는 라벤나(Ravenna)로 수도를 옮겼다. 뒤이어 반달족, 수에비족, 부르군드 족 그리고 알라니족 등 혼합 민족의 지도자 로도가스트(Rhodogast)가 피렌체를 포위하여 위기에 직면했을 때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가 그리스도 신앙으로 시민들의 용기를 불어 넣었는데 스틸리코가 구원하여 결국 로도가스트는 406년에 참수되고 전쟁포로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 「신의 나라」에서 이 기적적인 승리를 스틸리코와 군인들의 용맹성 보다 신의 섭리로 돌렸다.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를 반역의 누명을 씌워 참수하자, 알라릭은 기세를 올려 로마를 포위했다. 로마귀족들은 다시 협약을 시도하여 로마측 인사가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자 알라릭은「목초는 무성할수록 베기 쉬운 것이다(The thicker they, easier it is mowed」 라고 응수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협상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었다. 결국 서기 410년 알라릭은 세 번째로 로마성을 압박하여 성을 점령하였다. 로마 건설 이래 1163년 만에 고트족과 훈족에게 점령당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록에 의하면, 알라릭은 종교규칙을 고려하는 포교를 내려 성인 베드로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식기류를 발견하여 이를 고트병들이 대열을 유지하고 신자들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뒤를 따라 바디칸으로 옮겨 이 소리가 시가지를 울려 퍼졌다. 로마를 빠져 나온 피난민들은 이집트와 소아시아 일대로 흩어졌다. 그러나 공포와 약탈이 며칠 간 계속된 뒤 6일 만에 알라릭은 로마를 빠져 나왔다. 서기 425년에 로마군대는 라벤나에서 바렌티아누스 3세(재위 425-455)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이때 바렌티아누스는 경우 여섯 살 된 어린아이여서 실질적 권력은 갈라 플라키디아와 아에티우스(Aetius)장군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서기 450년에 훈족의 왕 아틸라(Atila; 재위, 434-453)는 서방을 침입하기 시작하여 서기 451년에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및 테오도릭1세(재위 419-451)가 이끄는 서고트군과 아틸라 군이 갈리아 지방 카틸루냐 들판에서 전투(일명 살롱전투)가 벌어져 아에티우스는 아틸라군을 갈리아 지방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발렌티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의 군력이 커지자 그를 처형했다. 그러나 발렌티아누스3세도 455년에 아에티우스 장교 두 명에게 암살되었다. 이 시점이 로마제국이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이 영구히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었다.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으로 천년 이상 존속했다. 4. 가이세릭 로마 침공(서기 455년) 반달족과 알라니족의 지도자 가이세릭(Gaiseric; 390?-477; 재위 428-477; 라틴어 Gaisericus)는 탕지르(Tangier; 지금 모로코의 탕헤르 항)에서 진격하여 439년에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지금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Tripoli)까지 90여 일 간을 북아프리카 연안을 진격하면서 이 지역일대를 점령했다. 이 지역 기술자들의 조선술로 해군력을 창설했다. 이 해군력으로 시칠리아섬의 팔레르모와 이탈리라 남부 루카니아(Lucania) 해안을 습격하여 약탈했다. 발렌티아누스 3세 황제가 살해되고 시민들은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 재위 455년)를 서로마황제로 추대했다. 그는 아들 팔라디우스를 에우독시아와 결혼시켜려 했다. 데오도시우스2세의 공주이며 발렌티아누스 3세의 황후인 에우독시아는 눈을 카르타고로 돌려 남몰래 도움을 청했다. 막시무스의 치세는 3개월 되는 서기(455년)에 반달족 선단은 로마시를 흐르는 티베르강 하구에 닻을 내렸다. 반달족이 티베르강에 이르렀을 때 로마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막시무스는 도망가다가 갈가갈기 찢켜서 티베르가에 던져졌다. 반달족왕 가이세릭은 대담하게 티베르강 하구에 있는 로마시의 외항 오스티아에서 로마 성문을 향해 나아갔다. 로마 젊은이들이 출격에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경계하면서 성문을 향해 가는데, 로마 성문을 열고 조용히 걸어 나오는 것은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주교가 부하 성직자들을 대동하고 선두에 나선 성직자들의 행렬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교황 레오1세의 기개와 그의 능변으로 가이세릭의 난폭성을 진정시켰다. 반달족왕 가이세릭은 저항하지 않는 시민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건물은 방화하지 않았겠다고 약속을 하여 어느 정도 지켰다. 그러나 약탈은 14일간 밤낮 없이 지속되었다. 티투스(Titus; 재위 78-81) 황제가 예루살렘에서 빼앗아 온 전리품은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다음에 로마에서 카르타고로 옮겨졌다. 가이세릭을 끌어들인 에우독시아는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후회하고 비탄에 빠졌다. 가이세릭은 많은 전리품에 더하여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두 딸을 데리고 가르타고 항구로 되돌아갔다. 에우독시아의 장녀 에우도키아(Eudocia)는 가이세릭의 장남인 훈네릭(Hunneric)의 아내가 되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절한 금액을 지불하고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차녀 플라킬라(Placila)는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5. 서로마 멸망(서기 493년) 다음 황제는 서코트 왕인 테오도리크 2세가 지명한 그의 친구 아비투스는 서고트족의 수도인 툴루즈에서 455년 7월에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이후 지명된 황제는 전혀 역할을 못하다가 서로마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그스툴루스는 476년 9월 4일 강제 퇴위당하여 서로마제국은 망하였다. 그리고 게르만 용병의 지도자 오도아케르(Odoacer)가 권력을 장악했다. 오도아케르 통치 14년에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침입을 받아 489년 499년 2차에 걸친 전투에서 패하여 3년(490-493) 간 라벤나에서 포위되었다가 결국 493년에 라벤나가 함락과 더불어 체포되어 가족과 더불어 살해되었다, 동고트왕 테오도릭(재위 471-526; 니벨룽게의 노래에서 ‘베른의 디트리히’로 찬양된 영웅)은 이탈리아인은 기술 분야에 그리고 고트인은 군사적 임무에 묶어두어서 국가 방위를 하면서 동시에 국가 번영을 하도록 하여 33년간 이탈리아를 통치했다. 테오도릭왕은 아리우스파(예수는 하나님 아들이 아니다하고 주장) 두 사람이 교황직(당시 성 베드로의 좌)을 다투어 법정에 출두하자 왕은 로마인이 선출하기에 앞서 라벤나 궁전에서 페릭스4세(Flix IV; 526-530)을 지명했다. 당시 동로마(뒤에 비잔틴)황제 유스티아누스1세(Justianus I; 재위 527-565, 로마법 대전 편찬시킴)가 이단자를 절멸하면서 아리우스파를 형사 처벌을 하자, 테오도릭왕은 신자들에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면서 당시 교황 요한1세(Joannes I) 등 네 명을 콘스타니노플에 사절로 보냈으나 실패했지만 요한 1세는 콘스탄타노플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라 하여 인기가 치솟았다. 6. 유럽에 기독교 국가 건설 서로마제국이 망한 후 지금까지 이동을 거듭하던 종족들은 현지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하나 같이 기독교 국가를 건설했다. 갈리아는 프랑크족, 부르군드족, 서고트족 수중으로 들어갔고, 스페인은 서고트족과 수에비족으로 양분되었으며, 북아프리카는 반달족이 통치했고, 판노니아(지금 발칸반도 중북쪽 지역)에 동코트족, 프랑스와 독일에 프랑크족(이들은 고대부터 이곳에 정착해 있었다.) 그리고 영국에 색슨족이 기독교국을 건설했다. 테오도릭 왕이 사망한 후 서로마는 무주공산이었으나 카롤링가(Karolinger家)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재위 768-814)는 일명 카롤루스 대제로 갈리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레오 3세는 추기경이었던 795년 12월 26일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Hadrian I, 재위 772-795)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전임자인 하드리아누스 1세가 비잔틴 황제와 샤를마뉴 사이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독립된 교황자리를 지키려 했던 것과는 달리 레오는 교황이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샤를마뉴를 로마인의 아버지로 인정하여 최고의 권위를 내주었다. 교황 레오3세는 799년 4월 로마 행진 중 하드리아누스 지지자들이 선동한 사람들로부터 피습을 당했다. 이 사람들은 레오가 그릇된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그의 눈과 혀를 잘라 더 이상 교황직을 수행할 수 없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레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후원자 샤를마뉴가 있는 파데르보른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를 보호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레오 3세는 무엇인가 은혜를 갚아야만 했다. 그는 전임자와는 다른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런 만큼 프랑크 왕국 좀 더 정확하게는 샤를마뉴의 권위를 높여서 적어도 동로마 황제와 대등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7. 유럽 초기 황제 대관식 서기 800년 12월 23일 레오는 샤를마뉴 앞에서 파벌 싸움으로 인한 자신을 향한 비난에 대해 정식으로 결백을 증명했다. 이틀 뒤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 1세의 서품식과 예수성탄대축일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성 베드로 성당에 모인 많은 군중들 앞에서 미사를 드리던 도중 참석한 로마 귀족 전원이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환호했고 미사는 곧 황제를 추대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그 자리에서 교황은 갑자기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웠다. 서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된 것이었다. 이 행동으로 레오 3세는 이전에 겪었던 대내외적 굴욕을 없애고, 교황만이 황제의 관을 수여할 수 있다는 법적 전례(前例)를 세웠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법적 절차 없이 혁명적으로 행해진 이 대관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동로마 제국과 나란히 서로마 제국을 건설하고자 한 교황 레오 3세의 의도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레오 3세 주도 아래 이루어진 대관식은 교황과 구 서로마 지역을 동맹관계로 맺어 교황의 세계적 권위를 세우는 데 샤를마뉴와 그 후계자들이 이전보다 더욱 깊이 관여하게 했다. 양측이 긴밀하게 엮어진 것이다. 샤를마뉴 즉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들은 자신의 정통성, 그리고 통치의 이익을 위해 교황권과 보다 긴밀한 연결을 꾀하게 되었다. 샤를마뉴가 전개한 새로운 세계(유럽)는 이제 황제와 교황이라는 두 개의 권력을 중심으로 해서 군사 및 정치권력에 대해 종교적 권위가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프랑크 왕국이 쇠퇴하자 오토 대제(Otto I der Grosse, 재위 962-973)는 이탈리아 북서쪽 변경국 베렌가리오 2세가 세력을 키워서 로마의 교황청을 위협하자 교황 요한 12세(Joannes XII, 재위 955-963)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탈리아로 진군해 962년 1월 로마에 도착했고 3일 후인 2월 2일 황제의 왕관을 받았다. 이 제국을 신성로마제국으로 부른다. 이렇게 유럽은 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 받아 황제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영국이 막강한 세력을 가졌어도 황제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어나, 프랑스와 독일은 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 받아 황제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참고로 황제라는 칭호를 제일 먼저 사용한 나라는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킨 키루스(성경 구약에 고레스) 대제는 바빌론을 점령하고 왕 중 왕 (Sha ham Sha; 황제라는 의미)라는 사용했는데 이때가 기원전 539년이었다. 둘째로 고대 중국 진왕 정은 전국 시대 6국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최종적으로 제나라를 점령하여 중국을 통일하고(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진나라 시황제(3황5제의 약자로 최초 왕중왕이란 의미)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셋째로 기원전 27년에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로마제국을 통합한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존엄자란 뜻이며 곧 Emperor이다.)로 호칭되었다. 이후 유럽황제는 로마황제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황제 위에 올랐고. 극동지역은 중국 본토를 점령하는 자만이 황제칭호를 가졌다. 중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정통칼리프(이슬람교 최고 권위자)시대를 지나 술탄(Sultan; 군사 및 정치의 최고 권력자)을 왕중왕 의미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