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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 문학회 특강(2014년 12월 6일)
신동엽과 아시아, 대지의 상상력*
고 명 철(광운대)
1. 문제제기: 신동엽의 문학을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이유
21세기에 시인 신동엽(1930~1969)은 어떠한 모습으로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동엽을 수식하는 ‘민족시인, 4․19시대정신, 민족문학’ 등은 신동엽 개인의 문학에 바쳐진 헌사가 아니라 20세기의 한국문학이 힘겹게 쟁취한 역사적 산물인바, 신동엽을 이 같은 수식어와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신동엽의 문학 전반을 횡단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20세기 한국문학의 주요 화두인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민족문제의 해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한국문학의 주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족문제의 해결을 20세기의 한국문학, 특히 저항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리얼리즘 계열의 민족문학의 문제틀로써 궁리하는 것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듯, 민족문학은 온전한 자주민주적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해 분단극복과 민주회복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왔습니다. 여기서 쉽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민족문학의 기저에는 일국적(一國的) 시각이 작동되고 있으며, 민중적 파토스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민족문학의 문제틀로는 복잡다변한 현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문제적 현실을 야기하고 있는바, 종래 우리에게 낯익은 일국적 시계(視界)에 의해서는 새롭게 불거지는 현실의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동엽의 문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집니다. 신동엽의 문학을 우리에게 익숙한 20세기 민족문학의 관점으로 읽어내는 것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신동엽의 문학이야말로 20세기의 민족문학을 갱신한, 일국적 시계 안에 갇혀 있지 않은 보다 지평이 확대된 시계(視界)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오늘 심포지엄에서 신동엽의 문학을 아시아와 연관시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종래 신동엽의 문학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그 논의들은 앞서 제가 언급한 바처럼 민중적 파토스에 기반한 리얼리즘 계열의 민족문학의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춘 게 대부분이었지, 아시아와 연관시킨 집중적 논의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최근 서구중심주의가 낳은 심각한 폐단인, 서구가 창안해낸 근대만이 곧 세계 전체의 근대라는 ‘단수(單數)의 근대’에 대한 발본적 비판이 제기되면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을 주목해볼 때, 신동엽과 아시아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이 같은 서구중심주의 ‘단수의 근대’가 갖는 문제를 성찰하고, 더 나아가 아시아가 지닌 서구와 다른 근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차원에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신동엽과 아시아의 관계를 통해 신동엽의 문학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데, 신동엽 문학의 핵심인 대지의 상상력이 지닌 비의성을 아시아와 관련시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신동엽의 문학은 일국적 시야를 넘어 아시아의 현실과 부딪치는 가운데 서구중심주의의 ‘단수의 근대’를 극복하는 선진적 문제의식을 보이고, 그에 대한 문학적 실천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2. 신동엽과 아시아의 만남
2.1. 아시아의 ‘식민지 근대’에 대한 역사 인식
신동엽에게 아시아는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역사적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삶의 현실입니다. 아시아는 서구의 문명을 지탱하기 위한 자원 착취의 현장입니다. 서구 문명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서구에게 쉼 없이 피를 수혈해야 할 고달픈 처지입니다.
쉬고 있을 것이다.//아시아와 유럽/이곳 저곳에서/탱크 부대는 지금/쉬고 있을 것이다.//일요일 아침, 화창한/도오꾜 교외 논 뚝 길을/한국 하늘, 어제 날아간/異國 병사는 걷고.//히말라야 山麓,/土幕가 서성거리는 哨兵은/흙 묻은 생 고구말 벗겨 넘기면서/하루삔 땅 두고 온 눈동자를/회상코 있을 것이다.//순이가 빨아 준 와이샤쯔를 입고/어제 의정부 떠난 백인 병사는/오늘 밤, 死海가의/이스라엘 선술집서,/주인집 가난한 처녀에게/팁을 주고.//아시아와 유럽/이곳 저곳에서/탱크 부대는 지금/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해바라기 핀,/지중해 바닷가의/촌 아가씨 마을엔,/온 종일, 上陸用 보오트가/나자빠져 딩굴고,//흰 구름, 하늘/젯트 수송편대가/해협을 건느면,/빨래 널린 마을/맨발 벗은 아해들은/쏟아져 나와 구경을 하고.//동방으로 가는/부우연 수송로 가엔,/깡통 주막집이 문을 열고/대낮, 말 같은 촌색시들을/팔고 있을 것이다.//어제도 오늘,/동방대륙에서/서방대륙에로/산과 사막을 뚫어/굵은 송유관은/달리고 있다.//노오란 무꽃 핀/지리산 마을./무너진 헛간엔/할멈이 쓰러져 조을고//평야의 가슴 너머로./高原의 하늘 바다로./원생의 油田지대로./모여 간 탱크부대는/지금, 궁리하며/고비 砂漠,/빠알간 꽃 핀 黑人村./해 저문 순이네 대륙/부우연 수송로 가엔,/예나 이제나/가난한 촌 아가씨들이/빨래하며,/아심 아심 살고/있을 것이다.
― 「풍경」 전문
신동엽이 보는 아시아 전역에는 탱크부대가 있습니다. 지금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으나, 언제 또 다시 지축을 울리는 캐터필러의 굉음을 낼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탱크부대의 막중한 역할이 무엇인지 알 뿐입니다. 탱크부대는 “원생의 유전지대로” 집결하여, “동방대륙에서/서방대륙에로” 가는 송유관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탱크부대의 근처에는 아시아의 “예나 이제나/가난한 촌 아가씨들이/빨래하며,/아심 아심 살고/있”습니다. 다시 말해 탱크부대는 서구 문명의 번영을 위해 공급되는 송유관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아시아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애달프고 서글픈 것은 아시아의 자원이 속수무책으로 빼앗기는 그곳에서 삶을 연명해가야 하는(탱크부대에 기생해야 하는) 아시아의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신동엽은 이 풍경을 뚜렷이 목도하며 풍경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정치경제적 맥락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자원이 누구를 위해 약탈당하고 있는지, 그 석유 자원은 아시아의 가난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고, 아시아의 약소자를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서구중심주의의 ‘단수의 근대’를 전횡(專橫)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20세기 전반기 서구 열강과 일본의 식민지 침탈로 아시아의 민중은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시아=야만(혹은 미개)’라는 제국주의의 일방적 이데올로기의 억압 속에 아시아의 근대적 주체성을 정립하지 못했습니다. 아시아는 제국주의의 문명적 혜택을 입음으로써 근대를 추구할 수 있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론에 강하게 포획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경우 아시아에 대한 인식은 일제에 의해 주도면밀히 기획된 만주국(1932)의 민족협화(民族協和) 아래 왕도낙토(王道樂土) 및 선만일여(鮮滿一如)와 대동(大同)의 이데올로기의 비현실 속에서 온갖 민족적 계급적 수난을 겪어온 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로부터 환기되는 ‘아시아-만주’의 심상은 아시아의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신동엽의 시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松花江 끝에서도 왔다/구름같은 흙먼지,/아세아 대륙 누우런 벌판을/軍靴 묶고 행진하던 발과 다리,/지금은 어데 갔을까.
― 「발」 부분
옛날 같으면 北間島라도 갔지./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肥料廣告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도시락 차고 왔지.
― 「鐘路五街」 부분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특수(滿洲特需)’에 혹하여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주해갔습니다. 만주로 가면 가난을 탈피할 수 있을 듯 했습니다. 비록 황무지라 하더라도 피와 땀을 흘리며 황무지를 개척하여 일제의 위협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듯 했습니다. 그곳은 일제의 강압적 지배가 덜하여 다른 민족들과 어울려 사는 세상을 살 수 있는 꿈을 실현시켜주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민중은 만주의 끝(북간도)도 멀다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20세기 전반기 만주의 근대적 삶을 동경하던 식민지 민중이 그렇듯, 1960년대에 고향을 떠난 한 소년은 서울의 근대적 매혹 속에서 고단한 꿈을 키워나갑니다. 소년에게 서울의 근대는 만주의 근대처럼 소년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투성입니다. 따라서 흥미로운 것은 신동엽에게 1960년대의 현실(4․19와 5․16의 근대 기획)에 대한 인식은 20세기 전반기 만주의 근대로부터 비롯한 아시아에 대한 상념과 무관하지 않은 채 신동엽의 역사인식의 지평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아시아는 신동엽에게 제국주의의 식민화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간과해서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2. 아시아의 대지로부터 뻗쳐온 산맥, 그 생명의 율동
신동엽과 아시아의 관계를 살펴볼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신동엽에게 아시아는 관념의 사유 대상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시아는 신동엽의 문학에서 산맥의 구체적 심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맥은 아시아의 대지로부터 힘차게 뻗어나와 한반도를 가로질러 바다 건너 제주에까지 이르는 심상지리(心象地理)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잔잔한 바다와 준험한 산맥과 들으라/나의 벗들이요/마즈막 하는 내 생명의 율동을
―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부분
구름이 가고 새 봄이 와도 허기진 平野, 낙지뿌리 와 닿은 선친들의 움집뜰에 王朝ㅅ적 투가리 떼는 쏟아져 江을 이루고, 바다 밑 용트림 휘 올라 어제 우리들의 역사밭을 얼음 꽃 피운 億千萬 돌창 떼 뿌리 세워 하늘로 反亂한다.
― 「阿斯女의 울리는 祝鼓」 부분
四月十九日, 그것은 우리들의 祖上이 우랄高原에서 풀을 뜯으며 陽달진 東南亞 하늘 고흔 半島에 移住오던 그날부터 三韓으로 百濟로 高麗로 흐르던 江물, 아름다운 치마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三 ․ 一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阿斯達 阿斯女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구비의 燦爛한 反抗이었다.
― 「阿斯女」 부분
아시아의 고원에서 뻗쳐나오는 산맥은 신동엽에게 “생명의 율동을” 실감하도록 합니다. 산맥은 평야와 계곡을 만들고, 강을 흐르게 하며, “역사밭을” 일궈냅니다. 신동엽은 “바다 밑 용트림 휘 올라” 솟구치는 동적인 심상을 통해 바다로 그리고 한반도로 내달리는 산맥으로부터 역사의 활력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솟구치고 내달리는 험준한 산맥의 역동성에 ‘3․1운동-4․19혁명’에 깃든 역사의 활력을 포개놓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러한 산맥이 “하늘로 반란”하는 “찬란한 반항”의 시적 의미로 포착되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신동엽에게 산맥은 새로운 대지를 생성하는 생명의 힘이며, 낡고 구태의연한 것을 제거하는 역사적 의지로 충만된 ‘반항’의 시적 메타포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산맥이 신동엽에게 아시아 대륙에 그 시원(始原)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가볍게 지나쳐서 안 될 터입니다. 말하자면 신동엽 시에서 중요한 역사적 상상력은 아시아 대륙에 시원을 둔 산맥의 역동적인 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을 좀 더 설득려 있게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신동엽의 제주 기행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신동엽은 1964년 7월 31일부터 8월 7일까지 약 일주일 간 제주를 여행하는데, 여행의 목적은 한라산을 등반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한라산을 등반하기까지 신동엽이 방문한 곳에 대한 그의 기록은, 신동엽이 이와 같은 심상지리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선, 주목되는 기록은 8월 1일자 기록입니다. 신동엽은 제주의 동쪽에 위치한 세화 마을을 지나면서 “시커멓게 탄 석탄똥 같은, 일푼의 여우도 주지 않는, 강하디강한 쇠끝 같은 돌덩어리들”인 현무암을 봅니다. 신동엽에게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이 현무암에 새겨진 “열녀사비국묘지문(烈女私婢國墓之門) 등등. 집의 수효보다도 많은 비석들”인데, 이 비석들을 보자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급기야 식중독 증상을 보이며 “대륙의 황토흙이 그립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동엽은 왜 느닷없이 대륙의 황토흙이 그립다고 할까요. 그것은 바로 현무암에 새겨진 ‘열녀사비국묘지문(烈女私婢國墓之門)’ 때문입니다. 이 비문은 조선조 유가(儒家)의 완고한 세계관이 반영된 것으로, “李朝 5백년의/王族,/그건 中央에 도사리고 있는/큰 마리 낙지.”(「금강」)의 폐습을 단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신동엽이 제거해야 할 봉건적 유산입니다. 이 봉건적 폐습 아래 억압 당한 제주 민중의 삶을 신동엽은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동엽이 그리워하는 ‘대륙의 황토흙’은 이 같은 낡고 부패한 세계관이 반영된 대지의 기운이 아닌, 이런 부정한 것들을 모조리 일소해버리는 대지의 역동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륙의 황토흙=산맥’의 기운, 즉 역사의 활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제주에 대한 이 같은 역사적 인식은 그 당시 금기시된 4 ․ 3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관덕정(觀德停) 앞에서, 산(山)사람 우두머리 정(鄭)이라는 사나이의 처형이 대낮 시민이 보는 앞에서 집행되었다고. 그리고 그 머리는 사흘인가를 그 앞에 매달아 두었었다 한다. 그의 큰딸은 출가했고 작은딸과 처가 기름[輕油] 장사로 생계를 잇는다.
4 ․ 3사건 후, 주둔군이 들어와 처녀, 유부녀 겁탈사건.
일렬로 세워놓고 총 쏘면, 그 총소리에 수업하던 초등학교 어린이들 귀를 막고 엎드렸다.
하오 2시, 제주시에 내리다.
태풍 헬렌 11호 광란 절정에 이르다. 초속 40미터.
대낮인데도 거리엔 사람의 그림자가 없다. 광란하는 바람과 비뿐. 이따금, 흠씬 젖어 바람에 인도되며 끌려가는 여인네들. 그들의 몸뚱이. 자연의 위력 앞에 얼마나 초라한 짐승들인가.(1964년 8월 2일자 일기)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 한라산 등반이 미뤄진 후 신동엽은 관덕정을 들렀습니다. 놀랍게도, 신동엽이 관덕정에서 환기해내고 있는 장면은 제주인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국가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해온 4 ․ 3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신동엽은 제주인이 아닌 타지인이지만, 4 ․ 3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매우 간명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주둔군이 들어왔고, 제주인들은 억울하게 주둔군에 의해 온갖 비참한 굴욕과 죽임을 당했고, 제주인은 아직도 그 끔찍한 언어절(言語絶)의 참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때마침 공교롭게 제주를 엄습한 초속 40미터 태풍의 광풍과 연결시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록의 행간에 숨어 있는 신동엽의 전언을 짐작해봅니다. 기록에는 분명히 ‘주둔군’과 ‘겁탈사건’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신동엽은 제주를 대륙에서 떨어진, 다시 말해 한반도에서 격절된 변방에서 일어난 역사적 비극으로 보지 않습니다. 간명한 사실적 진술과 태풍의 위력을 서술하고 있는 문장들의 묘한 어울림을 통해 4 ․ 3사건은 신동엽이 경험했듯, 한반도에서 온전한 국민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중을 학살한 국가폭력이라는 것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후 신동엽은 태풍이 멎자 한라산을 등반합니다. 신동엽이 굳이 태풍과 같은 악조건 아래서도 한라산을 등반하고자 한 데에는, 아시아 대륙에 시원을 둔 산맥이 한반도로 내달렸고, 바다 밑을 통해 한라산으로 솟구쳤듯,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반도 전역을 그의 시적 영토로 다루고자 하는 것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을 듯 합니다. 특히 한라산의 등반 과정에서 신동엽은 산맥의 융기를 관념적 사유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온몸을 통해 체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주 기행은 아시아의 대륙과 연관된 심상지리로서 신동엽 문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3. 신동엽과 대지의 상상력
3.1. ‘중립’의 정치성과 ‘무정부 마을’
신동엽의 문학에 대한 ‘중립’과 관련한 논의는 그의 문학사상을 해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동엽의 문학에서 보이는 ‘중립’을, 신동엽 특유의 대지의 상상력과 연관시켜 이해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신동엽의 ‘중립’을 자칫 국제정치학의 개념적 사유로 국한시켜 논의할 수 있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신동엽에게 ‘중립’은 어떠한 시적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을까요. 가령, 다음과 같은 대표적 싯구에서 읽을 수 있듯,
꽃피는 반도는/남에서 북쪽 끝까지/완충지대,/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사랑 뜨는 반도,/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나부끼데.
―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부분
피다순 쭉지 잡고/너의 눈동자 嶺넘으면/停戰地區는/바심하기 좋은 이슬젖은 안마당.
― 「새로 열리는 땅」 부분
그리하여, 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부분
‘중립’과 연관된 시적 표현들(완충지대, 정전지구, 중립의 초례청)은 모두 시인이 추구하는 어떤 정치적 공간이면서 유토피아적 충동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립’의 공간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곳일까요. 신동엽의 시적 주체들인 아사달과 아사녀가 부끄럼 없이 알몸으로 맞절할 수 있는 ‘중립의 초례청’은 어떠한 정치적 성격을 띤 곳일까요.
황량한 大地 위에 우리의 터전을 마련하고 우리의 우리스런 精神을 영위하기 위해선 모든 이미 이뤄진 왕국․성주․문명탑 등의 쏘아붓는 습속적인 화살밭을 벗어나 우리의 어제까지의 의상․선입견․인습을 훌훌이 벗어던진 새빨간 알몸으로 돌아와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전(反戰), 반폭력, 반정(反政) 데모들이 세계 여러나라에서 잇따라 터지고 있다. 데모하는 사람들의 성분, 그들의 구호야 어떻든간에 그 데모를 충격주고 있는 핵심적인 힘은, 인간 속에 잠재하고 있는 ‘무정부’에의 의지이다.
인간의 순수성은, 인간의 머리 위에 어떠한 형태의 지배자를 허용할 것을 원하지 않는다.
(중략)
민주주의의 본뜻은 무정부주의다.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 이것은 사실상 정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인민만이 있는 것이다. 인민만이 세계의 주인인 것이다.
신동엽에게 ‘중립’은 “황량한 대지 위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인바, 그것은 기존 그 어떠한 정치체(政治體)에 구속되지 않는 민주주의, 즉 ‘무정부주의’임을 표방합니다. 신동엽이 추구하는 ‘중립’의 정치성은 “인민만이 세계의 주인인 것”입니다. 민중 위에 그 누구도 군림해서 안 되는, 그 어떠한 형식의 정치적 이념도 민중을 강제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정치경제적 권력도 민중을 지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동엽이 꿈꾸는 ‘중립’의 정치성이며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뜻’이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신동엽의 이러한 ‘중립’의 정치성은 “廣漠한 原始林”(「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이슬 열린 아직 새벽 벌판”(「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내ㅅ물 구비치는 싱싱한 마음밭”(「香아」)이란 대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문시 1」에서 보이는 신동엽의 ‘중립’의 정치성을 향한 강렬한 시적 욕망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 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로 가더란다.
― 「산문시 1」 전문
기실, 「산문시 1」과 같은 ‘중립’의 정치성은 현재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완벽히 구현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민중의 무한한 자기긍정, 그리고 ‘석양 대통령’이란 최고 권력자의 별칭에서 떠올려지는 한없이 친숙하고 겸허한 모습, 전쟁 없는 평화로운 일상, 문화적 충만감으로 가득 찬 민중 등 이 모든 것들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아 신동엽이 간절히 추구하는, 신동엽의 문학에서 ‘중립’이 갖는 정치성입니다. 신동엽은 이 같은 ‘중립’의 정치성을 민주주의의 평등과 분배의 측면으로 시적으로 구체화시키며 이러한 정치체(政治體)를 시적 득의(得意)의 표현인 “無政府 마을”(「금강」)로 호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동엽이 꿈꾸는 ‘중립’, 즉 ‘무정부주의’의 정치성은 무질서와 혼동을 일으키는 “비현실적인 상상의 시대를 불러오자는 게 아니라, 일상의 삶에 책임을 지는 가운데 복잡한 현대 사회에 맞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를 만들어가는 과제를 짊어지자는 것”입니다.
3.2. 서구중심의 ‘단수의 근대’를 지양하는 전경인적 귀수성세계
그러면, 이제 이러한 ‘무정부 마을’은 어떠한 문학적 실천으로 가능할까요. 신동엽이 간절히 욕망하는 ‘무정부 마을’은 모든 부정한 것들을 일소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멈추지 않고, 부정한 것들을 대지의 힘으로 삭혀내 신생의 삶을 창출해내는 데 있습니다.
여보세요 阿斯女. 당신이나 나나 사랑할 수 있는 길은 가차운데 가리워져 있었어요./말해 볼까요. 걷어치우는 거야요. 우리들의 포등 흰 알살을 덮은 두드러기며 딱지며 면사포며 낙지발들을 面刀질해 버리는 거야요. 땅을 갈라놓고 색칠하고 있은 건 전혀 그 吸盤族들뿐의 탓이에요. 面刀질해 버리는 거야요. 하고 濟州에서 豆滿까질 땅과 百姓의 웃음으로 채워버리면 되요./누가 말리겠어요. 젊은 阿斯達의 아름다운 피꽃으로 채워버리는데요.
― 「주린 땅의 指導原理」 부분
江山을 덮어, 화창한/진달래는 피어나는데,/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이 균스러운 부패와 享樂의 不夜城 갈아엎었으면/갈아엎은 漢江沿岸에다/보리를 뿌리면/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 「4月은 갈아엎는 달」 부분
여름철의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우리 인류, 차수성세계 문명수 가지나무 위에 피어난 난만한 백화를 충분히 거름으로 썩히울 수 있는 우리 가을철의 지성은 우리대로의 인생인식과 사회인식과 우주인식과 우리들의 정신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스런 몸짓으로 창조해 내야 할 것이다. 산간과 들녘과 도시와 중세와 고대와 문명과 연구실 속에 흩어져 저대로의 실험을 체득했던 뭇 기능, 정치, 과학, 철학, 예술, 전쟁 등, 이 인류의 손과 발들이었던 분과들을 우리들은 우리의 정신 속으로 불러들여 하나의 全耕人的인 歸數的인 知性으로서 합일시켜야 한다.
신동엽이 추구하는 ‘무정부 마을’은 그의 탁월한 문제적 평론 「시인정신론」(자유문학, 1961년 2월)에 상세히 드러나듯, 차수성세계(次數性世界)로부터 빚어진 온갖 부정한 것들을 묵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과감히 제거하거나 우주의 만유적(萬有的) 본성을 복원하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신동엽에게 차수성세계는 인류의 문명과 연관된 것으로, “분업문화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정치는 정치가에게, 문명비평은 비평가에게, 사상은 철학교수에게, 대중과의 회화는 산문 전문가에게 내어 맡기고 (중략) 시인의 임무는 언어의 순화에 있을 뿐”인 현실을 통렬히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차수성세계는 “맹목기능자의 천지”인바, 신동엽이 그토록 염원하는 전경인적 귀수성세계로의 합일은 요원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신동엽의 비판적 인식의 기저에는 서구중심 일변도의 ‘단수의 근대’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동엽도 비판한 것처럼 서구의 근대화를 앞당겼고, 서구 문명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업문화’에 있는데, 분업이 가져다 준 생산의 효율성으로 인한 생산력 증가는 서구의 근대의 속도를 가속화시켰습니다. 합리성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분업문화’의 사회 전분야에 대한 파장은 자못 큰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합리적 효율성은 서구 문명을 지탱시키는 제도로 안착되면서, 이것을 잘 따르기만 하면 근대적 성취를 앞당길 수 있다는 근대 문명인의 행동양태를 구조화하였습니다. 바꿔 말해 분업과 합리적 효율성 추구는 근대적 삶을 살아가는 근대인의 삶을 구조화하고, 그 구조 자체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그리하여 구조를 구조화하는 습속이 서구 문명의 ‘단수의 근대’를 전 세계로 퍼뜨렸던 겁니다.
그래서 신동엽은 이 ‘단수의 근대’야말로 차수성세계를 전횡하는 것이며, ‘단수의 근대’를 무조건 폐기처분하는 게 아니라 대지의 힘으로 충분히 삭혀서 귀수성세계(歸數性世界)와 합일하는 또 다른 근대, 즉 ‘복수(複數)의 근대’를 추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동엽에게 시인이란, 한갓 언어의 미의식을 탐구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차수성세계를 넘어 귀수성세계를 추구해야 하고, 이것은 달리 말해 서구중심의 ‘단수의 근대’를 지양한 ‘복수의 근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정신을 찾아 각고의 길을 헤매야 한다.
詩에서의 피나는 노력과 고심이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技巧나 修辭法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높은 경지에 이르려는 精神人의 求道的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水雲이 삼천리를 10여년간 걸으면서 農奴의 땅, 노예의 조국을 본 것처럼, 석가가 인도의 땅을 헤매면서 영원의 연민을 본 것처럼, 그리스도가, 그리고 聖書를 쓴 그의 제자들이 地中海 연안을 헤매면서 인간이 구원을 祈求한 것처럼 오늘의 시인들은 오늘의 江山을 헤매면서 오늘의 內面을 直觀해야 한다.
자기에의 內察, 이웃에의 연민, 共同言語를 쓰고 있는 조국에의 大乘的 관심, 나아가서 태양의 아들로서의 인류에의 연민을 실감해 봄이 없이 詩人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신동엽은 동학, 불교, 크리스트교에서 공유하고 있는 범인류적 구원을 실천하는 데 매진하는 ‘정신인-시인-종합인-철인(哲人)’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서구 일방의 근대가 아닌 비서구가 지닌 또 다른 근대가 시인에 의해 구현되어질 것을 희구하기 때문입니다.
4. 맺음말: 아시아의 미적 질서를 탐구하는
신동엽의 문학은 늘 새롭게 확장될 수 있는 대지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보았듯이, 신동엽의 문학은 일국적 시계(視界)의 협소함을 벗어나 있습니다. 신동엽의 문학은 국민국가의 경계에 갇히지 않은 문명적 감각의 지평을 넓고 깊게 하는 시적 진실이 용해돼 있습니다. 신동엽의 문학에는 “지배자의 용모를 준거로 편성된 미학적 질서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가 빚어낸 미학적 질서”가 곳곳에서 그 생명의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동엽의 문학에는 아시아의 창조적 상상력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양자강변에 살고 있는 한 소녀와 나와는 한 살[肉]이다.”에 배어 있는 아시아의 대지를 삶의 터전으로 공유하고 있는 아시아적 연대의 상상력은 신동엽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과소평가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신동엽의 시에서 곧잘 마주치는 ‘중립’의 시적 변주인 벌판, 고원, 황무지, 미개지 등은 서구중심주의에 기원을 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치경제적 이념의 대립과 무관한 ‘무정부 마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것인바, 이것은 아시아의 창조적 상상력이 꿈꾸는 민주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무정부 마을’은 차수성세계를 지양한 귀수성세계로 합일된 곳이며, 서구중심주의의 ‘단수의 근대’가 더 이상 전횡하지 않는 ‘복수의 근대’를 다각도로 추구할 수 있는 곳으로, “아침 저녁/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티 없이 맑은 久遠의 하늘”(「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동엽은 이러한 ‘무정부 마을’이 반도에서 성급히 구현되기를 재촉하지 않습니다. 그가 꿈꾸는 세계가 이뤄질 때까지 그는, “내 일생을 詩로 장식해 봤으면./내 일생을 사랑으로 채워 봤으면./내 일생을 革命으로 불질러 봤으면./세월은 흐른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고 자기인식을 정갈히 갈무리하면서 ‘좋은 언어’로 세상을 채워놓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외치지 마세요/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아래로 낮추세요.//그리구 기다려 보세요./모여들 와도//하거든 바닥에서부터/가슴으로 머리로/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言語들을 고되게/부려만 먹었군요.//때는 와요./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이야기할 때//허지만/그때까진/좋은 言語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 「좋은 言語」 부분
신동엽은 아주 단촐히 명명합니다. 신동엽이 꿈꾸는 세계를 가득 채우는 언어는 바로 ‘좋은 언어’입니다. 더 이상 차수성세계를 표징하는 온갖 쇠붙이 투성의 날선 언어들이 아닌, 아시아의 창조적 상상력이 충만한 대지의 역동성을 듬뿍 담고 있는 신생의 언어들입니다.
이후 신동엽의 문학에서 새롭게 발견된 아시아와 대지의 상상력을 보다 정교히 탐구하여, 신동엽의 문학사상은 물론 신동엽의 시적 미의식을 규명함으로써 서구중심의 미적 질서를 극복하고 아시아의 미적 질서마저 해명하는 과제를 남겨둡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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