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행주산성 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2월 12일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전투.
권율은 왜란 초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1592년 7월 배티전투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는데, 관군과 명군이 평양을 수복한 후 남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수원 독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근거지를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하면서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긴 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견제하였다. 이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 변이중이 정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하며 권율을 도왔으며, 승장 처영도 승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이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 정도였다.
이에 왜군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성 안의 관군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와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로 무장하였고, 병사에게는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마침내 1593년 2월 12일 아침 일본군의 선봉 100여기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왔다. 그러자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총통 등을 쏘아대니 몰려들었던 적은 궤멸상태에 빠져 물러갔다.
그러자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직접 선두에 나와 지휘하니 그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전진하여 접근하자 관군은 한때 동요하였으나 권율의 독전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퇴진하였다.
그러나 남은 군사들이 뒤를 이어 화통으로 성책의 일부를 집중 발사하여 불이 붙게 하였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버리고 화살과 돌로 공격을 하는 한편, 차고 있던 재를 적의 진영에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이에 왜군은 마지막 남은 부대가 산성 서북쪽을 지키던 승군의 일각을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자 급박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대검을 빼어들고 승군의 총공격을 명하자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을 폈는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 적을 공격케 함으로써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적도 다시 기세를 올려 공격을 멈추지 않아 곤란한 상태에 빠졌으나 마침 경기수사 이빈이 수만 개의 화살을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니, 적은 당황하여 내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일제히 추격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이 전투는 권율의 효과적인 방어 준비 태세에 의한 승리로서 왜군의 서울 방어 작전을 교란시켜 조선군의 사기가 고양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2. 목민심서 정조 때의 문신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고금(古今)의 여러 책에서 지방 장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치민(治民)에 대한 도리(道理)를 논술한 책. 필사본. 48권 16책.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여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코자 한 것이다.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는데, 한국의 사회 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3.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도 고종의 회갑 해인 1912년 5월 25일이다. 속담에 ‘회갑 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어버이를 똑같이 닮는다.’는 말이 그대로 적중하여, 덕혜옹주는 아바마마 고종의 축소판같이 닮았다. 바로 그 전 해에 엄비를 잃고 울적하던 차에 덕혜옹주의 탄생이 노왕 고종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안겨 주었는가는 실록에 나타난 바로도 짐작할 수 있다. 아기를 낳자마자 즉시 그 산모 양씨에게 ‘복녕당’이란 당호가 내려지고, 그 다음날 왕이 산실에 아기를 보러 갔고, 3일째 되는 날에는 흥친왕을 비롯한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서 문안을 드리고, 다시 생후 일주일 되는 날에는 종척(宗戚:임금의 친족과 외척)들의 알현이 있었다. 그 다음날 6월 1일에는 순종 내외가 덕수궁에 부왕을 뵈러 와서 함께 산실인 복녕당으로 아기를 보러 갔다. 삼칠일 되는 날에는 종척 이하 칙임관 이상 직급에게도 왕이 축하의 내연을 베풀었고, 생후 약 2개월 후인 7월 12일에는 아예 아기를 유모를 딸려 침전인 함녕전으로 옮겼다. 실록에 나타난 바로는 왕녀가 태어나서 이토록 환영받은 전례가 없다. 4.허균 허균(1569-1618)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으로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썼다. 허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선조 27년(1594)에 문과에 급제,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 내외직을 역임한 후 벼슬이 좌참찬에까지 올랐고, 정부사로 명나라에 다섯차례나 다녀왔다. 시문에 뛰어났고 소설, 희곡, 비평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과 우리나라 최초의 시 평론집인 <학산초담>과 <성수시화>등이 있다. 20년 전의 병자호란 예언과 그 대비책 그리고 바른 피난길의 제시, 최초로 천주교 서적을 가져와 천주교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등 허균은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 사회제도의 모순과 정치적 부패상을 질타하고, 정치사회개혁을 주창하는 등 실천적 삶을 살다 정치적인 음해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다.
느낀점.... 바쁜 상태에서 숙제를 하다보니 그렇게보람찬기분은 받을수 없었지만 그래도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다시한번 볼수 있어서 좋았고 또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그 사전에 잘 나와있지 않아서 살짝 불편한 느낌도 받았다.
역사시간에 하나 맞혀서 4개 하였습니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main.asp?nil_profile=title&nil_src=cultured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