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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제기
손옥자
프라하 카를교
얀제포무츠키 성상 앞에 소원을 비는 사람들
그때 나는 카를교를 지나고 있었고
-저기요
7번 석상이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는데
볼타바 강물은 눈을 내리깐 채 모른 척 흐르고
나도 못 본 체 지나가기로 하였다
프라하성은 내 발자국 수대로
제 몸에 하나 둘 불을 켜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불 켜진 프라하성을 향한 그 때
어둠은 슬쩍,
들고 있는 손을 덮어 버렸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무시되는구나
어쩌면
중세부터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저 손을
세상은
조직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에필로그의 슬픈 얼굴에게 프롤로그 창 달아주기
죽음이 부활하는 방이 있어요
생명은 있는데 날개가 없는
손은 있는데 발이 없는
안녕, 떠나려는 세상을 다시 엮는 방이에요
에필로그의 슬픈 얼굴에게 프롤로그의 창을 달아주는 방이죠
밤새 헐은 걸음으로도 물조리개를 놓지 않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방이에요 빛을 기르던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늙은 소설가 시인 기자들이죠 그들은 웅크리고 있어요 연필 속의 흑심처럼 옴짝달싹 못하구요
몇 개의 문장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이내 오그라들어요 가끔 행간과 행간 사이 여백을 두어 숨통을 트지만요 여백은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서 허공에 잘 흩어지고 무한대로 날아가는 이야기를 잡을 수가 없어요
가벼움은 가벼움이 아니라서 가볍다는 걸 혹시 아시나요?
어스름이 되면 개미떼 같은 언어들이 행렬을 이뤄요
앞서간 언어가 맨 뒤 언어의 궁둥이를 물어요
스멀스멀 행간과 행간이 늙은 인생을 끌고 가요
늙은 인생이 20도로 기운 지구를 끌고 에필로그방에 들어가요
끝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한 에필로그방
그 방에 오시려면 물조리개를 가지고 오세요
그래서 잿빛을 햇살밭으로 옮겨 심은 이야기에게 물을 주어야 해요
그러면 잔인했던 땅도 숨막혔던 지구도 비린내 나는 떡잎의 허리를 세우겠죠?
어린 나비 날아와 주름진 꽃잎의 이마에 입맞춤 하겠죠?
따스한 계절이 들판에 깔리겠죠?
프롤로그의 막이 열리겠죠?
어느 병사의 스키드마크
956부대 안 깊숙이
감나무 밑에 떨어진 감 두 개
따뜻하게 양 볼을 맞대고 나란히 누워있다
어떻게 저렇게 붙어 있을까?
아스라이 먼 저 곳에서
손을 잡고 뛰어내리지는 않았을 터
감 하나를 줍는다
아뿔싸-
강하고 선명한 이빨자국
스물한 살 건강한 윗니가 그대로 화석이 된 듯
진한 스키드마크
떫은 맛 한 방 제대로 얻어 맞고
황급히 제 자리에 돌려놓았나?
둘 사이에 끼어든 것에 대한 복수로 날린
강력한 펀치
사랑은 그렇게 달달하지 않다는 거
감 없이 달려들지 말라는 거
진하게 알려주고
다시 순하게 엎드려 있는 감
부름부름 부르음
오늘은 나뭇결 무늬를 가진 우드 타일로 바닥을 깐다
이제는 세상과 일 밀리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리 정확하게 기준점을 잡고 가늘게 뜬 줄눈으로 세상을 가늠한다 불평등한 세상의 높낮이를 조절하기 위해 톱니흙손으로 나무의 뿌리를 고른 후 타일 속 나무 우듬지가 꺾이지 않도록 먼저 자리 잡은 타일 옆구리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타일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각진 세상의 아귀를 맞추는 일은 언제나 초긴장의 정수리를 가져오는 일 틈새가 너무 벌어져도 너무 붙어서도 안 된다 당신과 내가 지키지 못한 적당한 간격, 그것은 필수
바닥을 벗어나려는 나뭇결을 다독이며 A씨는
더 이상 세상에 흔들리지 않도록
타일과 타일을 핀으로 고정시킨다
이만하면 됐어, 단단히 뿌리를 내릴 거야
A씨는 핀을 뽑는다 마감이다
대문을 나서려다 A씨는 흘낏,
엎드린 바닥의 등을 본다
한때, 좌절한 자신을 조용히 업고 있던 바닥
세상의 좌절들에게 등을 내밀고 기다려 주었던 바닥
하여, 따뜻한 바닥에 업힌 나무들은 곧 초록을 낼 것이다
A씨는 남은 나무들을 트럭에 싣고
열쇠를, 봄의 배꼽에 정확히 꽂고
힘차게 시동을 건다
부름부름 부르응~
그리움, 숨통을 끊어 놓겠다구요?
당신은 밭이랑마다 까만 비닐봉지를 쳐 놓습니다
긴 이랑은 길게
짧은 이랑은 짧게
비닐 중간 중간 동그랗게 구멍을 뚫어놓고
현실에 충실한 싹만 올리겠다는 거겠죠
비닐 밑으로 무성하게 차오를 그리움은
아예 싹뚝
잘라 버리겠다는 거겠죠
비도 빛도 일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아예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거겠죠
노력은 가상하나 어림없는 소립니다
그리움은 비나 빛과는 상관없음을
처음부터 숨통은 갖고 있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리움은 이미
당신 가슴 저 밑바닥에 뿌리 단단하게 내렸음을
그리하여 장소 불문 어디서고 불쑥불쑥 고개를 들고
어느 깊은 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영화 한 편 상영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그리고 다시 안개처럼 뿌옇게 일어나 시야를 가리고
발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래서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게 그리움이라는 거
모르셨나요 당신?
풍경? 사랑!
지리산 자락에 밀려난 섬진강이
그래도 쭈삣쭈삣
산자락을 놓지 못하고 따라 간다
저 만큼서
강으로 내려서는 매화꽃 행렬
사랑에 빠진다
강인지 꽃인지
꽃인지 강인지
강물 속에 몸을 묻고
엎치락뒤치락
저 멀리
얼굴 붉히며 딴청하는
서녘하늘
단추들의 집
손을 놓쳤다
찰나였다
그가 나를 힐끗 쳐다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주워 단추 상자에 넣어버렸다
거기는 고만고만한 이유로 밀려난 이들이 많이 있었다
모양과 이유는 다 달랐다
낡은 인연으로 떨어져 나온 이는
그만큼 같이 살았으면 됐지……
당한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푸른 색 보석을 몸에 지닌 단추는 달랐다
우리는 늦은 나이에 만났고 서로에게 반했고 빠졌고 서로를 소유하기로 했는데
그가 돌연 태도를 바꿨다는 것이다
튄다는 이유였다
얼굴이 푸르락푸르락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쪽 귀퉁이 장애를 가진 단추는
여기 함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13년을 여기서 고스란히 늙은 단추는 나에게 물었다
-여기 요양원여?
-집여?
-쓰레기통여?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역시 선생님 최고!!!
이전글과 완전히 다르고 새로워요
손옥자선생님 우리선생님!
축하드려요
언제나 환한 미소 선생님 생각하며
큰 박수를 보내드려요 ~
선생님 축하 드립니다 ^^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최고이십니다
명시를 세상에 내놓으셨으니 제자로서
교과서 처럼 읽고 또 읽고 새기고 또
새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