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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견(鄭錫堅) 1444(세종 26)∼1500(연산군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
윤성(允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攸)이고, 아버지는 유공(由恭)이며, 어머니는 육씨(陸氏)이다. 사림파 학자인 붕(鵬)의 작은아버지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안현감·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483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다음 해 사헌부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경서(經書)를 강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곧 이조정랑으로 옮겨 보덕 허침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刪定)하였다.
1489년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유자광(柳子光)이 장악원제조로 임용되자, 장악원제조는 덕망이 있는 자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했다가 성균관사예로 전직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밀양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강경서(姜景敍)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천거되었으며, 의정부사인의 직에 있으면서 사유에 뽑혔다.
잠시 김해부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해 제포(薺浦)에서 왜인과 본국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문제가 크게 되자 경상도경차관이 되어 제포에 파견되었는데, 그 때 본국인의 심문을 잘못하여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의 참지·참의를 역임했고, 2년 뒤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간행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김종직·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성리학을 강론했고, 성종 때 유도인(有道人) 13인을 천거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에 들었다. 청빈하여 전도(前導)가 없이 다니니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선산 경락사(景洛祠)에 제향되었다.
선성막에 부임하는 정자건을 보내며[送鄭子健赴宣城幙]
- 신종호(申從濩)
북쪽 오랑캐가 국은을 저버려 / 索虜辜國恩
무엄하게도 벌의 꼬리같은 독을 피우니 / 竊肆萬尾蠚
신병이 하늘에서 소리치며 / 神兵奮天聲
우뢰처럼 변방의 방울 소리 울리네 / 雷動振邊鐸
당당한 국가의 원로가 / 堂堂鼎軸老
군사를 독려하려 북으로 향할 제 / 視師向北洛
호쾌한 선비 한 분을 얻어 / 思得一快士
청유막에 데리고 갔네 / 盛以靑油慕
어화, 내 벗 정자건이 / 吾友鄭子健
늙었으나 기략이 풍부하고 / 雖老富奇略
가슴속에 삼척검을 지녀 / 胸藏劒三尺
담소하면서 천군을 물리치네 / 談咲千軍却
장한 담이 말보다 커서 / 壯膽大於斗
말에 올라 기력 좋음을 자랑하누나 / 據鞍誇矍鑠
높은 하늘에 맺혀 오르는 살기 / 殺氣結曾空
어젯밤에 모두성이 떨어졌으니 / 昨夜旄頭落
되놈들이 금시 패망할지라 / 胡亡在頃刻
질지 추장의 머리를 쉬 베니 / 郅支不難斮
감천궁에 달려 올리는 첩서 / 甘泉馳捿書
그대의 의마작을 비어야 하리 / 煩君倚馬作
공명이 이번 길에 놓여 있으니 / 功名在此行
활짝 트인 천운 길을 평보로 오르리 / 平步雲途廓
나와 같은 우활한 선비는 / 如吾一迂儒
태현이나 지키는 적막한 신세 / 守玄長寂寞
나라에 바칠 만한 촌능 없으니 / 許國無寸能
묶어서 높은 각에나 두어 둘밖에 / 袛可束高閣
[주D-001]청유막(靑油幕) : 장군의 막부(幕府)를 말한 것이다.
[주D-002]모두성(旄頭星) : 별 이름. 이 별이 떨어지면 적장이 죽는다 하였다.
[주D-003]질지(郅支) 추장(酋長) : 한(漢)나라 부개자(傅介子)가 서역(西域)의 질지왕(郅支王)의 목을 베었다.
[주D-004]감천궁(甘泉宮) : 한(漢)나라 궁궐의 이름.
[주D-005]의마작(倚馬作) : 궁중에서 말[馬]에 기대어 승전(勝戰)을 발표하는 노포(露布)라는 글을 빨리 기초하는 민첩한 재주란 말이다.
[주D-006]태현(太玄) : 양웅(楊雄)의 〈해조부(解嘲賦)〉에, “나는 공명(功名)을 구하지 못하므로 잠자코 홀로 나의 태현(太玄)을 지키겠다.” 하였다. 태현은 그가 《주역》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주D-007]묶어서 높은 각(閣) : 진(晋)나라 유익(庾翼)이 은호(殷浩)를 평하기를, “이 무리들은 〈난세(亂世)에는 쓸데가 없으니〉 마땅히 높은 시렁에 묶어서 엎어 두었다가 천하가 태평된 뒤에 천천히 쓸 것이다.” 하였다.
자건 배 김해 부사 서회 이증(子健拜金海府使書懷以贈)
신종호(申從濩)
혼자서 하늘 돌리려다 그치기를 아니하고 / 獨力回天未罷休
한 깃발 오늘에는 남녘 고을 향하였네 / 一麾今日向南州
그대를 만류하는 말 한 마디 없이 / 惜無一語留君去
녹록히 벼슬만 지키니 그 부끄럼 어이하리 / 持祿容容抵死羞
망우 김선원보 주) 애사(亡友金善源甫哀詞)
-김종직(金宗直)
선원(善源)은 나의 오랜 친구인데, 나보다 나이가 일곱 살 아래였다. 정통(正統)ㆍ경태(景泰) 연간에 나는 나의 백씨ㆍ중씨와 더불어 감문(甘文)에서 부친을 모시고 있는데, 선원이 흔연히 찾아와서 드디어 현(縣)의 별관에서 학을 강론하게 되었고, 그 후 또 나와 함께 황악(黃嶽) 능여사(能如寺)로 들어가 예전에 읽던 책을 다시 복습하였으니, 전후로 이택(麗澤)의 보익(補益)이 한두 가지로만 이를바가 아니라. 내가 영남에서 사귄 친구가 많지만 사람마다 교초(翹楚)라 칭하는 자는 선원이 제1이다. 그런데 나는 먼저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 벼슬살이를 하게 되고, 선원은 항상 낙방을 하여 20년을 그저 보내다가 최후에 병신년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여, 기성(騎省 홍문관)이나, 난파(鑾坡 한림원)같은 조정의 맑은 벼슬 치고는 참여하지 않은 바 없었다. 내가 일찍이 선산에 있을 적에, 선원이 언어의 사건으로써 고양(高陽)으로 귀양을 가서 3년을 지내는 동안에, 사방에서 책을 짊어지고 온 선비의 신발이 항상 문 앞에 가득하였다. 그때를 당해서 뜻이나 도가 나나 선원과 같은 자로는, 소유(少游)가 사관(史館)으로부터 함께 선원의 죄에 걸리어 산음(山陰)으로 역사(役事) 나가고, 극기(克己)는 거열(居烈)에서 원님 노릇을 하면서 항상 시만 짓다가 감사에게 파직을 당하여 천령(天嶺)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자건(子健)은 지례(知禮)에서 거문고를 탔었는데[鳴琴] 이윽고 친상(親喪)을 당하여 감문(甘文)에서 거려(居廬)하고, 나 역시 하느님께 죄를 얻어 어머니의 관(棺)을 붙잡고 응천(凝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수백 리의 안에 있게 되어 편지 내왕이 없는 달이 없었으나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상기(喪期)를 마치게 되자 그릇되게 성은(聖恩)을 입어 맨 먼저 조정으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선원과 그 밖에 세 사람도 선후는 다를망정 서로 계속해서 소환되어 모두 서울에 모이게 되니, 비록 직무에 얽매어 능히 아침저녁으로 수작은 못하나, 그 서로 기다리고 서로 의지하는 정은 어찌 남ㆍ북 촌에서 집만 따로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선원은 나와 함께 이조(李曹)의 동창[同官]이요, 태학관(太學館)의 동창이요, 또 여지(與地)의 국(局)에서 일을 같이하고 있으니, 떨어져 있는 날은 적고 만나는 날이 많다. 이 어찌 천행이 아니겠는가. 지난 해 가을에, 선원이 어명(御命)을 받들고 동도(東都) 여러 방면의 재해(災害)를 살피게 되었고, 이어 토호(土豪)의 옥사(獄事)를 심문하는 일로써 장계를 달리어 품달(稟達)하게 되어 몇 달을 끌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 잊혀지지 않아 자못 오래 못본 정회를 느꼈었는데, 이윽고 해가 바뀌어 봄철이 다 갈 무렵에야 선원은 겨우 복명(復命)하게 되었고, 나도 잠깐 상면한 적이 한두 차례 있을 따름이다.
아, 선원이여.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구려. 지난 번에 극기(克己)는 노친(老親)을 봉양하기 위하여 문소(聞韶 안동)고을을 얻어 나가고, 선원은 이제 또 영영 가고 말았으니, 생사(生死)의 이별이 한 달을 넘지 않았다. 지난날 이른바 동지로서 연곡(輦穀)의 아래 있는 자는, 나와 소유(少游), 자건(子健) 세 사람 뿐인데, 이 세 사람 중에서도 나는 더구나 쇠하여 희연진 머리가 날로 벗겨지고, 흔들리는 치아가 날로 빠지고, 침침한 눈이 날로 어두어가니, 저 산림(山林)이나 강호(江湖)의 적막한 곳을 찾아서 수레와 말을 다 없애 버리고, 들앉아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가장 마땅한데, 능히 결단코 떠나지 못하는 것은 웬일일까. 선원은 해평(海平) 김씨다. 나와는 관향(貫鄕)이 같을 뿐아니라, 또 반양(潘楊)의 정호(情好)를 맺었던 처지다. 지금 그 과녀(寡女)가 울며 제 자친(慈親)을 따라서 관(棺)을 모시고 남으로 떠나니, 나 역시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심정이 또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드디어 애사(哀辭)를 지어 나의 서름을 푸는 동시에 황천으로 가는 선원을 위로하는 바이다. 그 사에,
우뚝한 그 외모여 / 嶷嶷其表兮
웅심한 그 중심일래 / 肫肫其中
학문으로 보익하여 / 輔以問學兮
소견이 넓고 통했구려 / 旣博而通
언어에 발로되니 / 發爲言語兮
아도 있고 풍도 있네 / 有雅有風
그 빛이 찬란함이여 / 其光燁然兮
인과 의가 들어 찼도다 / 仁義之充
적의하게 주고 받으며 / 取與以宜兮
간격을 두지 않네 / 破除崖岸
친구일수록 오래 공경하여 / 朋友久敬兮
안영과 같길 바라며 / 惟希齊晏
굉장한 문장으로 몸을 떨치어 / 宏詞奮身兮
명예가 더욱 빛나도다 / 名譽愈煥
청직을 내리 거치어 / 更歷淸要兮
크게 쓰일 가망이 있었네 / 庶大有遇
중간에 축출을 당했으나 / 中罹竄逐兮
어찌 본 마음이 변할손가 / 曷渝平素
조집이 더욱 굳건하니 / 操執之確兮
나는 이 점을 추앙했네 / 兹余所慕
두 번째 이조로 들어왔고 / 再入天官兮
아이도 아직 한창인데 / 年未遲莫
어느 뉘가 알았으리 / 孰云中途兮
갑자기 중도에 운명할 줄이야 / 遽殞厥靈
하늘에게 물을 수도 없고 / 天不可問兮
귀신에게 들을 수도 없네 / 神不可聆
백도가 아들이 없으니 / 伯道無兒兮
그 전령을 뉘랑 닮으리 / 誰肖典刑
외로운 아내 과부 딸이 / 孤妻嫠女兮
관을 따라 돌아가니 / 扶柩以還
고향이라 천리 길에 / 千里故原兮
장사 차비 오죽하랴 / 牆翣艱關
지지당은 공허한데 / 止止堂空兮
시냇물은 좔좔 흐르고 / 溪水淙潺
새는 날고 고기는 노는데 / 魚鳥翔泳兮
송계는 날로 자라나니 / 松桂日長
절후는 어제 같으나 / 物候猶昨兮
이 사람은 어디 갔는지 / 斯人何往
아 그만이구려 / 嗚呼已矣兮
마음만 애닮을 뿐이외다 / 心焉惝怳
(달수 주) 김맹성(金孟性)의 자는 선원(善源)이고 호는 지지당(止止堂)이며, 정통(正統) 정사년에 출생하였고, 해평인(海平人)이다. 조 매계(曺梅溪)가 선생의 시집(詩集)에 쓴 서문에 이르기를,
“성산(星山)의 가천(伽川)에 살면서 독서(讀書)와 저술(著述)하기를 좋아하였고, 시 짓기를 더욱 좋아하여 날마다 음풍(吟諷)을 일삼았으며, 가인(家人)에 대한 생활 영위의 일은 일삼지 않았다. 그리고 천성이 술을 마시지는 못하나 손이 오면 술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문득 거나하게 취하여,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았으며, 부귀(富貴)와 영리(榮利)에 담박하였다. 선원(善源)은 문벌 좋은 집에서 태어났으니, 고 재상인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의 외손이요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의 생질이었다. 그래서 내외손(內外孫)의 친당(親黨)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간혹 벼슬하기를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탐탁찮게 여기었다. 일찍부터 중한 명성이 있었고 개연히 세상에 나가볼 뜻도 있었으나, 누차 과제(科第)에 실패하고 나서는 가천 가에 집을 지어 지지당(止止堂)이라 편액을 걸고 시주(詩酒)를 스스로 즐기면서 장차 그대로 생애를 마치려는 뜻이 있었다.”
하였다. 그리고 점필 선생(佔畢先生)이 지지당 선생과 정분이 가장 두터웠으니, 서로 왕래하면서 경학(經學)을 강론했고, 서로 수창(酬唱)한 시첩(詩帖)은 이루 다 기억할 수도 없다. 그리고 점필 선생의 아들 곤(緄)이 단정하고 신중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지지당 선생이 그를 사랑하여 마침내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성종(成宗)이 즉위한 처음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자 지지당을 불러 중부 참봉(中部參奉)으로 삼았다. 뒤에 병신년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나서는 간성(諫省)을 거쳐 금종(禁從)의 직에 올라 화려한 명성이 더욱 널리 퍼졌는데, 이윽고 어떤 일에 연좌되어 고령(高靈)에 유배되었다. 고령은 가천(伽川)과의 거리가 10여 리밖에 안 되었으나 한 번도 자기 집을 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로 여겼다. 오랜 뒤에 환조(還朝)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고, 정미년 봄에 서울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51세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요우(僚友)인 정자건(鄭子健)이 극력 주선해줌을 힘입어 무난히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한훤 선생(寒暄先生)이 지지당 선생을 사사(師事)하였으니, 지지당 선생의 간직한 바를 또한 상상할 만하다. 감히 공경하여 앙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점필 선생의 문집 가운데 지지당 선생과 서로 수창한 시만도 거의 30여 수(首)가 되니, 점필유고(佔畢遺稿)의 보존된 것을 이미 10의 2, 3이라 하였고 보면, 30여 수 이외에 그 망실(亡失)된 것이 아마 더욱 많을 듯하다. 그러나 선생의 문집 속에는 점필 선생과 왕복한 시는 하나도 없다. 지지당 선생의 문집을 신유년에 찬집하였는데, 이 때가 무오년의 천양지화(泉壤之禍)를 당한 지 4년 뒤이고, 또 신유년으로부터 4년째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있었으므로, 점필 선생의 명호(名號)는 의당 세상에서 크게 꺼리는 바가 되었기에, 그 화답하여 부친 시까지도 감히 편입(編入)하지 못했던 것이니, 그때의 풍색(風色)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지지당(止止堂)이 거처하는 정사(精舍)에는 한때의 명현(名賢)들이 와 놀면서 제영(題詠)을 남겼는데, 점필 선생의 시문(詩文)도 그 가운데 많이 있었다. 그런데 지지당 선생이 작고한 뒤에 한번은 별실(別室)의 꿈에 누가 와서 말해주기를, “빨리 당상(堂上)의 현판(懸板)들을 걷어 치우라.” 하므로, 별실이 놀라 깨어 그 꿈을 이상하게 여겨 즉시 제현(諸賢)의 제영들을 걷어서 숨겨버렸는데, 이윽고 중사(中使)가 서울에서 내려와 점필재 선생의 제영을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는 대체로 유자광(柳子光)이 자기가 함양군(咸陽郡)에 제영해 놓은 현판(懸板)을 점필재가 일찍이 발거(拔去)시킨 데에 원한을 품고 모든 점필재의 시편(詩篇)이 있는 곳은 끝까지 수색하여 극력 발거시킴으로써, 점필재의 현판이 있는 집도 또한 모두 화를 입었는데, 지지당 선생만이 유독 신후(身後)의 화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지지당집(止止堂集)》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1]이택(麗澤) : 이(麗)는 거듭된다는 뜻임. 《주역》의 태괘(兌卦) 대상(大象)에, “이택(麗澤)을 태(兌)라 하나니, 군자가 그 이치로써 친구끼리 강습한다[麗澤兌卦子以 朋友講習].” 하였다. 그래서 친구간에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이택이라 칭함.
[주D-002]교초(翹楚) : 제배들을 가운데 제일 뛰어난 사람을 교초라 하는데, 《시경》 소남(召南)에서 나왔다.
[주D-003]거문고를 탔었는데[鳴琴] : 수령이 되었다는 말인데, 《논어》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재(宰)가 현가(絃歌)를 했다.” 는 데서 기인된 것이다.
[주D-004]반양(潘楊) : 진(晋)나라 반악(潘岳)의 아내는 양중무(楊仲武)의 고모(姑母)이므로 대대로 친의가 화목하였다. 그래서 맹호연(孟浩然)은, “반양(潘楊)의 세호(世好)를 맺게 되었다[並爲結潘楊好].” 라는 시가 있는데, 세상에 좋은 인척간을 반양이라 칭한다.
[주D-005]백도(伯道) : 등유(鄧攸)의 자(字)이다. 진(晋)나라 양양(襄陽) 사람이데, 건흥(建興) 연간에 하동 태수(河東太守)가 되었었다. 그때 석륵(石勒)의 난리가 있어 아내 아들 및 조카를 데리고 피난 가는데, 도중에서 적을 만나 형세가 다 구원할 수 없으므로 아우는 일찍 죽고, 독자 밖에 없으므로, 자기 아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조카와 도망갔다. 그 뒤에 아내가 다시 태기가 없어 결국 아들이 없게 되니, 그 시대 사람들이 슬피여기며, “천도(天道)가 무심하여 등백도(鄧伯道)로 하여금 아들이 없게 하였다.” 하였다.
송 정감찰(送鄭監察) 석견(錫堅) 부 연경 서(赴燕京序)
-김종직(金宗直)
조회(朝會)와 교빙(交聘)의 사절에 반드시 서장관(書狀官)이 있으니, 곧 옛적 서기(書記)의 직무다. 만일 널리 알고 통달하며 민첩한 재질이 아니면 대체로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는 고려 이후로 그 책임이 경한 적도 있었고 중한 적도 있었다. 조송(趙宋) 때에는 우리를 대우하는 예절이 요(遼)와 금(金)의 다음이 되어서 사절이 국경이나 교정(郊亭)이나 관(館)에 이르면 황제의 위문이 계속하여 이르며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며, 황제의 친필 서한을 내려주면 곧 표(表)와 장(狀)으로 사례를 베풀었으며, 또 공경(公卿)이 사적으로 만난다든가 관반(館伴)이 주고 받는다든가, 계(啓)와 차(箚), 시부(詩賦) 등의 글이 그칠 사이 없이 왕복되는데, 이것이 모두 서기(書記)의 손에서 나온다. 인재가 전성(全盛)한 시기에 있어서 이런 것을 잘 해내는 사람으로는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 문렬(文烈) 김부식(金富軾) 등 몇 사람 밖에는 이름난 이가 없었다. 호원(胡元) 시대에 이르러 고려를 내지(內地)와 같이 다루어, 행성(行省)과 관료(官寮)를 설치하고 철을 따라 공헌(貢獻)하는 것은 비록 과거의 관습대로 하였으나, 외국인으로 접대하는 예절에 있어서는 실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였으므로 서기(書記)가 된 사람은 또한 할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선비로서 염치도 없고 학술에 몽매하면서 상품주는 것을 재미로 생각하는 자들이 모두를 이를 희망하여 속이어 가게 되었다. 아, 중국 자체가 그 경중(輕重)의 권형을 잃게 되자 사절의 일도 이렇게 엄청나게 달라졌으니, 여기에서도 세상이 변해가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명(明) 나라에서 천하를 차지하여 제도가 모두 새롭게 되었으니, 먼 지방을 다루는 방법을 위로 주(周)의 제도를 따라서, 비록 국내와 국외의 구별은 엄하게 하나 보내는 것은 후하게 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경하게 하여, 정리와 예문이 모두 구비하여 그 나라의 사점을 대우하는 것을 모두 중도를 참작하여 관사(館舍)에 은사[恩賚]가 이미 풍족하고, 답례로 들이는 것에 대하여는 따지지 아니하니, 이것은 곧 헛된 형식을 싫어하고 외국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고 마음으로 복종[心服]시키는 것이다. 옛적 양촌(陽村) 선생이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유가(遊街)를 시키며 제목을 주어 시를 짓게 하고 마침내 황제가 자신이 시를 지어 주었으니, 이것은 또한 한때에 환영[顚倒]하여 심히 즐겁게[鼓舞] 하던 특수한 은전이었다. 그 뒤로부터 여러 황제는 그 옛 관례에 대하여 더하거나 주린 것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지금 서기(書記)가 된 책임이 가벼운 듯하지만, 우리 전하께서 황제에게 대한 정성이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일행의 사신과 차석(次席)을 반드시 적당한 사람을 택하였다. 하물며 서장관(書狀官)은 검찰(檢察)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로 사신으로부터 통역과 하인에게 이르기까지 여러 잘못된 일을 모두 규탄 처리할 수 있으니, 비록 문필의 책임은 없지만 임무가 이미 중하지 않은가. 만일 이 선발에 뽑혔다면 흐리멍덩하게 남이 하는 대로 휩쓸려서 중국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하다. 남대(南臺) 정자건(鄭子健) 씨[甫]는 점잖은 사람이다. 이제 천추사(千秋使)인 박건(朴揵) 씨[公]를 따라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나에게 와서 떠남을 고하였다. 나는 곧 그의 옷을 잡으며 말하기를, “선비가 먼 지방에 나서 나이가 늙도록 서울에 가서 조정의 대신도 만나보지 못하는데, 이제 그대는 훨훨 왕국에서 천자의 황태자에게 하례를 드려서 해와 달과 같은 반짝이는 빛에 접근하게 되었으니, 일생을 헛되어 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남자로 태어나서 먼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려던 당초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할 수 없으리로다. 천자에게 후한 예물과 친근히 하는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정(參政 박인량)이나 문렬공(文烈公 김부식)과 같은 수고는 없으니, 그대의 영광과 다행함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문학을 숭상하는 모임이나 조정의 관료들의 좌석에서 만일 글 잘하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거든, 구주(九州) 이외의 나라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다.”고 하게 하라. 이것이 곧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이다. 나라의 초상[國恤]이 바야흐로 있게 되므로 술잔을 잡아 서로 권하지 못하고 우선 서기 (書記)의 임무의 경중(輕重)을 서술하여 송별의 인사에 대신한다.
[주D-001]관반(館伴) : 외국 사절을 접대하는 관직.
[주D-002]유가(遊街) : 과거에 합격한 뒤에 선생과 선배와 친척들을 방문하며 거리로 돌아다는 것.
지례(知禮)의 정 사군(鄭使君) 석견(錫堅) 을 보내다
-서거정
집안은 대대로 옛 광문의 집이라 / 家世廣文舊
재주의 명성이 지금까지 전하는데 / 才名傳至今
소장 받고 기뻐할 줄 누가 알았으랴 / 誰知報檄喜
의려의 마음을 위로하고파서였지 / 欲慰倚閭心
날을 아끼자면 백년이 짧을 텐데 / 愛日百年短
구름을 바라보니 천리가 아득하네 / 望雲千里深
그대의 계획을 스스로 이루고 나면 / 如君計自得
이제는 유자음을 아껴야겠네그려 / 可惜遊子吟
[주C-001]정 사군(鄭使君) : 정석견(鄭錫堅 : ?〜1500)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이다. 1483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 좌랑에 올랐다. 허침(許琛)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刪定)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선산의 경락사(景洛祠)에 제향되었다.
[주D-001]집안은……집이라 : 광문(廣文)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정건은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뛰어나서 현종이 일찍이 그에게 ‘정건삼절(鄭虔三絶)’이란 어필을 내리기까지 하였고, 또 그를 위해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그를 박사(博士)로 삼았던 데서 그를 광문이라 일컫게 되었다. 전하여 여기서는 정석견(鄭錫堅)의 성씨가 정건과 같은 정씨이므로 그를 정건에 빗대서 광문이라 칭한 것이다.
[주D-002]소장(召狀)……알았으랴 : 소장은 수령 임명장을 가리킨 것으로, 후한 때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모의(毛義)가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므로, 일찍이 부(府)에서 내려 보낸 수령 임명장을 받고는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희색이 만면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3]의려(倚閭)의 마음을 위로하고파서였지 : 의려는 어머니가 자식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이른 말로, 전하여 어머니를 가리킨다. 전국 시대 제나라 왕손가(王孫賈)가 일찍이 민왕(閔王)을 섬기다가 어느 날 민왕이 달아나 버렸는데도 왕손가는 왕의 소재를 알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가 왕손가에게 이르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거든 내가 문에 기대서서 너 오기를 기다렸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는 내가 이문에 기대서서 너 오기를 기다렸다.〔女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戰國策 齊策》
[주D-004]날을……텐데 : 날을 아낀다는 것은, 양웅(揚雄)의 《법언(法言)》〈효지(孝至)〉에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 스스로 부족함을 알았던 이는 오직 순 임금이신저. 마음대로 오래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 섬기는 일을 이름이니, 효자는 날을 아끼는 것이다.〔事父母自知不足者 其舜乎 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구름을……아득하네 : 당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병주 법조참군(幷州法曹參軍)으로 나가 있을 적에 자기 어버이는 하양(河陽)에 있었으므로, 그가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하양을 돌아보다가 흰 구름이 외로이 나는 것을 보고는 좌우에게 말하기를 “우리 어버이가 저 밑에 계신다.” 하고, 한참 동안 슬피 바라보다가 구름이 사라진 뒤에야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흰 구름은 곧 어버이가 계신 고향을 의미한다.《舊唐書 卷89 狄仁傑列傳》
[주D-006]이제는……아껴야겠네그려 : 〈유자음(遊子吟)〉은 맹교(孟郊)의 시제(詩題)인데, 그 시에 의하면 “인자하신 어머님의 손에 쥔 실은, 길 떠날 아들의 옷을 짓는 거라네. 떠나기 전에 꼼꼼히 꿰매시며, 행여 더디 돌아올까 염려하시네. 한 치의 풀과 같은 마음을 가져서, 봄볕 같은 어머님 사랑 보답키 어려워라.〔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였다.
자건에게 화답하다[和子健]
-김종직
어려운 살이 삼 년에 헤어짐을 탄식하노니 / 艱虞三載嘆睽離
깨끗한 돌 맑은 내에 의당 함께 따랐어야지 / 白石淸川合共隨
응당 웃었으리 못난 사람이 숙원을 버리고 / 應笑陳人抛夙尙
흰 수염 다 뽑고서 시세에 붙좇는 것을 / 霜髭鑷盡要趨時
자건에게 화답하다. 군의 관사에서 태수와 즐겁게 마시는데 자미도 왔다[和子健在郡舍與太守歡飮子美亦到]
-김종직
봄비가 문득 장마처럼 사람을 가두는지라 / 春雨關人便當霖
금당에서 서로 즐겁게 술 마시며 읊는데 / 琴堂靑眼把杯吟
어찌하여 못가에 홀로 꼼짝 않고 앉아서 / 何如兀坐池塘上
한가히 푸른 수초 속에 노는 고기만 보는고 / 閑看魚游碧藻深
이부의 풍류와 백중의 사이이니 / 吏部風流伯仲間
총총히 작별하기는 아마 응당 어려웠으리 / 悤悤爲別想應難
큰 잔의 벌주 마시고 인하여 조소하노니 / 坐浮太白仍調笑
누가 서생을 일러 가난하다고만 말했던고 / 誰道書生只帶酸
[주D-001]금당 : 공자(孔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재(單父宰)가 되어, 거문고만 타고 몸은 당(堂) 아래를 내려가지 않고도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즉 지방관의 집무(執務)하는 곳을 가리킨다. 《呂覽 察賢》
[주D-002]이부의 풍류 : 이부는 진(晋)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풍류가 뛰어났고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오래 지냈던 산도(山濤)를 가리킨다. 또는 진(晋) 나라 때 주호(酒豪)로 이름이 높았고 일찍이 이부랑(吏部郞)으로 있으면서 밤에 남의 술을 훔쳐 먹다가 술 관장하는 사람에게 붙들려 결박당한 일도 있었던 필탁(畢卓)을 일러 필 이부(畢吏部)라고도 한다.
자건에게 두 수를 화답하다. 자건이 더위를 먹은데다 또 비에 갇혀 금릉의 객관에 머물고 있다[和子健二首子健病暑且阻雨留金陵客館]
-김종직
장마비가 참으로 천주를 문드러지게 하리라 / 積雨眞成天柱爛
무너진 듯한 파도는 해문을 향해 흘러가네 / 崩濤却向海門歸
물가의 전답 절반은 응당 떠내려갈 터이니 / 湖田一半應漂蕩
보리가 금년엔 의지할 곳 잃게 되었네 / 甫里今年失所依
시인이 부질없이 매우에 막혀 있다 보니 / 詞客謾爲梅潦阻
해노는 시를 못 줍고말똥만 주워 왔네 / 奚奴拾得馬通歸
냉도 세 사발을 먹고 배를 문지르노니 / 冷淘三椀仍捫腹
금각의 맑은 바람이 절로 의지할 만하구나 / 琴閣淸風自可依
[주D-001]보리가 금년엔……잃게 되었네 : 보리(甫里)는 당(唐) 나라 때의 은사 육귀몽(陸龜蒙)의 호임. 육귀몽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손수 농사를 지어서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전답 수백 묘(畝)는 모두 아주 낮은 지역에 있었으므로, 장마가 지면 곡식이 다 떠내려가서 항상 굶주렸다고 한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주D-002]해노는 시를 못 줍고 : 당(唐) 나라 때 이하(李賀)가 명승지를 구경하며 지은 시를 해노(奚奴: 종)가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 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즉 장마비에 갇혀 명승지를 유람하지 못함을 이른 말이다.
이 군수·정자건과 함께 향교의 앞 산봉우리에서 벌창한 물을 구경하다[與李郡守鄭子健觀漲鄕校前峯]
-김종직
술병 갖추고 오산에서 함께 노니노니 / 携壺鰲背共倘佯
장마비 개이매 뜨거운 볕이 길기도 해라 / 積雨晴來畏景長
물결 넘실대는 한 못은 연잎이 다 덮으려 하고 / 瀲灔一池荷欲蓋
아득한 일천 골짜기엔 물이 끓는 듯하도다 / 微茫千壑水如湯
언덕마다 바구니 들고 시끄러이 고기를 몰고 / 笭箵岸岸驅魚鬧
집집마다 도롱이 쓰고 바삐 보리 이삭 줍누나 / 簑笠家家拾麥忙
금화전에 머리 돌리니 돌아갈 뜻 시들어 / 回首金華歸意懶
술자리 끝내게 하고 석양 앞에 서 있노라 / 玉舟揮罷立斜陽
사가재의 운을 사용하여, 이조 좌랑에서 지평에 승진되었다가, 간원이 전조 낭관을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승천시켜서는 안 된다고 아룀으로 인하여 마침내 형조 좌랑에 내려 제수된 정자건을 위로하다[用四佳齋韻慰鄭子健自吏曹佐郞陞持平諫院啓以銓曹郞官未箇滿而陞遷不可子健遂降爲刑曹佐郞]
-김종직
태양이 밝게 빛나고 천문이 활짝 열려 / 天日昭昭閶闔開
철관과 상간을 뛰어난 인재에게 맡기었네 / 鐵冠霜簡屬雄才
강방한 이가 기탄 받는 걸 이제 더욱 믿겠노니 / 剛方取忌今尤信
백 리 안 사람이 어찌 천둥을 무서워 않으랴 / 百里人何不畏雷
기성이나 난대가 모두 같은 것이거늘 / 騎省蘭臺都是春
어찌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도모한단 말인가 / 何曾捨舊更圖新
교묘히 공의를 가지고 어진이 진로를 우회시키니 / 巧將公議迂賢路
이 일은 참으로 사람을 불쾌하게 하누나 / 此事眞能不快人
금년에 도척은 사람의 간을 배불리 먹었는데 / 今年盜跖飽人肝
박봉은 화려한 그대 재능에 보답이 되지 않네 / 斗米難酬錦繡端
형조가 그대 얻은 건 도리어 축하할 만하니 / 秋部得君還可賀
가만히 앉아 간세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리 / 坐令姦細膽皆寒
[주D-001]철관과 상간 : 철관은 어사(御史)가 착용하는 철주(鐵柱)를 넣어서 만든 관(冠)을 말하고, 상간은 곧 어사가 혐의자를 탄핵하는 상주서(上奏書)인데, 또는 백간(白簡)이라고도 한다.
[주D-002]도척은……배불리 먹었는데 : 옛날 도척이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간(肝)을 꺼내어 회(膾)를 쳐서 먹으며 천하를 횡행했다는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탐학한 관리를 비유한 말이다. 《史記 卷六十一》
앞의 운을 사용하여 정 이랑(鄭吏郞) 석견(錫堅) 에게 기록하여 받들어 올리다 3수
-서거정
태평성대 인재 선발엔 공도가 열렸거니와 / 明時選用公道開
이조의 낭관은 더구나 준걸한 재주임에랴 / 選部郞官況俊才
일찍이 인재 공정히 선발하는 솜씨 있어 / 人物提衡曾有手
그 명성이 갑자기 천둥처럼 진동했었네 / 聲名一日動如雷
온화한 풍채는 흡사 다리 달린 봄 같아 / 醞藉容儀有脚春
태평성대에 드날려 성명도 새로워라 / 蜚英昭代姓名新
산공 시대는 멀어졌고 창려도 떠났지만 / 山公已遠昌黎逝
이부의 훌륭한 인재는 끊이지 않고말고 / 吏部才華不乏人
구름 자귀 달 도끼로 심간을 다듬었거니 / 雲斤月斧斲心肝
인재를 품평하는 일 또한 붓끝에 달렸도다 / 題品人才在筆端
전형 자리는 원래 광문처럼 썰렁치 않거늘 / 銓軸元非廣文冷
어이해 여전히 손의 털방석은 차가운고 / 如何依舊客氈寒
[주C-001]정 이랑(鄭吏郞) : 정석견(鄭錫堅 : ?〜1500)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이다. 1474년(성종5) 문과에 급제한 후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주D-001]온화한……같아 : 다리 달린 봄이란 바로 당 현종 때의 현상(賢相) 송경(宋璟)의 백성 사랑하는 덕을 아름답게 여겨,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일러 ‘다리 달린 봄〔有脚陽春〕’이라고 칭찬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산공(山公)……떠났지만 : 산공은 진대(晉代)의 어진 재상 산도(山濤)를 가리키는데, 그가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있으면서 인물을 선발하는 데 있어 각각 제목을 붙여 상주(上奏)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아서 공정하게 등용했다고 한다. 《晉書 卷43 山濤列傳》 창려(昌黎)는 곧 창려 백(昌黎伯)에 봉해진 한유(韓愈)를 가리키는데, 그 또한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03]구름……다듬었거니 : 전설에 의하면, 당나라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어떤 이가 숭산(嵩山)에 놀러 갔다가 보자기를 베고 자는 사람을 만나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그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저 달이 칠보로 합성된 것을 아는가.……항상 8만 2000호가 그것을 수리하는데, 내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다.〔君知月乃七寶合成乎……常有八萬二千戶修之 予卽一數〕” 하고서 보자기를 열어 보이는데, 그 속에 도끼와 자귀 두어 자루가 들어 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문장을 아주 잘하는 데에 비유한다.
[주D-004]전형(銓衡)……차가운고 : 광문(廣文)은 당 현종 때의 문인 정건(鄭虔)을 가리키는데, 현종이 일찍이 그를 위해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그를 박사(博士)로 삼았던 데서 그를 광문이라 일컫게 되었다. 《新唐書 卷202 鄭虔列傳》 그는 또 몹시 가난하였으므로 두보(杜甫)가 일찍이 그에게 장난삼아 지어 준 〈희간정광문(戱簡鄭廣文)〉 시에 “재주 명성은 삼십 년을 날렸으되, 빈객은 추워도 앉을 방석이 없네.〔才名三十年 坐客寒無氈〕”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정석견(鄭錫堅)의 성씨 또한 정건과 같으므로 정건에 빗대어 한 말이다.
네 번째 앞의 운을 사용하다 3수
-서거정
회포를 어느 때나 좋이 토로할 수 있을꼬 / 懷抱何時得好開
나 같은 시 미치광이가 바로 거친 재주라네 / 詩狂如我是麤才
정건의 가문은 대대로 삼절을 겸했으니 / 鄭虔家世兼三絶
용문의 천둥에 변화를 입은 재주로구려 / 才調龍門變化雷
녹록한 공명 좇아 분주한 지 오십 년에 / 碌碌功名五十春
한 몸뚱이 병도 많아 백발이 새로워라 / 一身多病二毛新
토지가 있어도 안 가니 이게 무슨 면목일꼬 / 有田不去何顔面
출처를 망설인 꼴이 고인에게 부끄럽구려 / 出處依違愧古人
사소한 인간 세상은 한 쥐 간에 불과한데 / 些小塵寰一鼠肝
뜬구름 같은 변태는 또한 많기도 하구려 / 浮雲變態亦多端
지극한 사귐은 예부터 물보다 맑다 했거니 / 至交自古淡於水
세한의 지조 끝내 보전킬 서로 기약하세나 / 終始相期保歲寒
[주D-001]정건(鄭虔)의……겸했으니 : 정건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으로 시ㆍ서ㆍ화에 모두 뛰어나서 일찍이 현종으로부터 ‘정건삼절(鄭虔三絶)’이란 어필(御筆)을 받은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단지 정석견(鄭錫堅) 또한 정건과 같은 정씨이므로 빗대어 한 말이다. 《新唐書 卷202 鄭虔列傳》
[주D-002]용문(龍門)의……재주로구려 : 황하강(黃河江) 상류의 용문에는 세 계단으로 된 폭포가 있어, 강해(江海)의 대어(大魚) 수천 마리가 그 밑에 모이는데 그곳을 뛰어오르는 놈만 용이 된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용문의 천둥에 변화되었다는 것은 흔히 과거에 급제한 것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단지 뛰어난 재주를 의미한 듯하다.
[주D-003]녹록(碌碌)한 공명(功名) : 녹록은 범용(凡庸)하여 재능이 없음을 이른다. 전국 시대에 진(秦)나라가 일찍이 조나라를 쳤을 때, 조나라 평원군(平原君)의 문객 모수(毛遂)가 평원군에게 자천(自薦)하여, 초나라로 구원을 청하러 가는 평원군 행차의 일행 20인 중 가장 말석의 신분으로 가서, 일행 19인이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가운데 홀로 당당하게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초왕(楚王)을 위협하여 종약(從約)을 맺게 하였다. 그런 뒤에 계구마(鷄狗馬)의 피를 가져오게 하여 초왕과 평원군을 차례로 마시게 하고 다음으로 모수 자신이 마신 다음, 왼손으로는 피 담긴 그릇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머지 일행 19인을 불러 마시게 하면서 말하기를 “공들은 이 피를 당 아래서 마시도록 하라. 공들은 녹록하여 이른바 남에게 의지하여 성사시키는 자들이로다.〔公相與歃此血於堂下 公等碌碌 所謂因人成事者也〕”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주D-004]사소한……불과한데 : 쥐의 간은 아주 경미하고 비천한 사물을 말한 것으로, 여기서는 곧 세상만사를 매우 하찮게 여겨 이른 말이다. 육유(陸游)의 〈우회(寓懷)〉 시에 “성패는 달팽이의 양쪽 뿔과 같고, 귀천은 하나의 쥐의 간과 같도다.〔成敗兩蝸角 貴賤一鼠肝〕”라고 하였다.
[주D-005]지극한……했거니 : 《장자》〈산목(山木)〉에 “군자의 사귐은 물처럼 담박하고, 소인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콤하다.〔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若醴〕”라고 하였다.
[주D-006]세한(歲寒)의 지조 : 공자가 이르기를 “해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굳은 절조를 의미한다. 《論語 子罕》
태화루(泰和樓)를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
-서거정
내가 일찍이 남도(南道)를 유람하며 이름난 곳을 두루 찾아다닐 적에, 누각으로는 촉석루(矗石樓), 영남루(嶺南樓), 명원루(明遠樓), 영호루(映湖樓), 쌍벽루(雙碧樓)를, 누대로는 해운대(海雲臺), 월영대(月影臺), 관어대(觀魚臺)를 보았는데, 참으로 이른바 경관이 아주 특별한 명승들이었다.
맨 뒤에 울산(蔚山)을 가려던 참에 태화루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한번 시원스레 올라 보고 싶었다. 울강(蔚江)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누각 하나가 층암절벽 위에 우뚝 솟아 맑고 푸른 강물을 굽어보고 있었는데, 그 웅장한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물어보니, ‘태화루(泰和樓)’라고 했다.
강을 건너 배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걸어 누각 아래에 이르러 바라보니, 용마루와 지붕, 난간과 기둥이 모두 썩어 부러졌고 또한 층계를 딛고 오를 수도 없었다. 서성이며 서 있자니, 종사관 이공 세우(李公世佑), 유공 계분(柳公桂芬), 이공 인석(李公仁錫), 사천(泗川) 양희지(楊熙止), 지례(知禮) 정석견(鄭錫堅)이 나를 이끌고 애를 써서 올라갔다. 기둥에 기대어 잠시 앉아 눈길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니, 그 훌륭한 경관이 앞에서 말한 누대들과 서로 백중을 다툴 만하였고, 시원히 트인 전망은 이들보다 더 나았다.
이어, 설곡(雪谷) 정 선생(鄭先生)이 부(賦) 여덟 수[八詠]를 지었고 가정(稼亭) 이 선생(李先生)이 여기에 대한 화운시(和韻詩)를 지었으며 우리 외조부인 양촌(陽村) 권 선생(權先生)이 또한 기문을 지었던 사실이 생각이 나서, 현판을 우러러보았더니, 그 현판이 모두 없었다.
얼마 뒤에 다시 누각에서 내려와서 땅에 앉아 간소하게 주연을 열었다. 거정이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누각의 경관이 이와 같이 훌륭하고 앞뒤로 수령을 지낸 이로서 영웅호걸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한 사람도 누각을 중신(重新)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물며 설곡, 가정, 양촌 세 선생의 시와 기문은 이 누각의 영광으로 응당 등왕각(滕王閣)의 삼왕(三王)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터인데, 이제 어찌 차마 민멸하여 전해지지 않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거정이 또 웃으며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 황학루(黃鶴樓)를 때려 부수려고 한 이가 있었는데, 지금 이 누각이 중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허물에 걸린 것이 아니겠는가. 거정이 다행히 여러 선생들처럼 풍류스럽고 문아(文雅)한 분들과 이 누각에 왔는데도, 마치 희문(希文)이 악양루(岳陽樓)에서, 최호(崔顥)가 황학루에서, 조하(趙嘏)가 위남(渭南)에서, 왕반산(王半山)과 곽공보(郭功甫)가 봉황대(鳳凰臺)에서 했던 것처럼 올라가 시를 짓지 못하고, 붓을 던지고 돌아가니 또한 살풍경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하니, 제군들도 크게 웃었다.
이튿날 개운포(開雲浦)를 향해 돌아오니, 절도사 능산(綾山) 구공 겸(具公謙)이 강에 나와 나를 마중하였고 절도사 설무림(薛茂林)도 왔다. 때는 바야흐로 보름 다음 날이라 달빛이 아름다웠다. 또한 제군들과 조각배를 하나 띄워 만경창파 위를 저어 가며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면서, 은근히 스스로 적벽의 놀이에 견주어, 일전에 누각에 올랐을 때의 불쾌했던 마음을 조금 풀었다.
서울에 돌아와서는 지난 일들이 생각이 나서 날마다 마음속에서 오갔다.
지난해에 사천 양희지가 거정에게 말하기를,
“울산은 저희 고을입니다. 지금의 수령 박후(朴侯)가 고을을 잘 다스려, 복잡한 일들을 잘 처리하여 정사가 이미 닦여지고 폐단이 제거되었습니다. 이에 관부(官府)와 누관(樓觀)을 점차 수리하여 태화루도 새롭게 다시 지었는데, 크고 넓고 툭 트였으며 새롭게 벽을 칠하여 이전에 비해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선생께서 이전에 이 누각에 대해 결함으로 여겼던 것이 이제 조금도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기문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거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박후의 현능함이 이전의 수령들보다 훨씬 훌륭하다.”
하였다. 그 뒤 남쪽에서 오는 자들이 모두들 울산이 아주 잘 다스려졌음을 칭송하고 또 이 누각의 장관을 찬탄하였다. 거정이 더욱 박후의 선정을 믿게 되었다.
아! 옛날에 등왕각을 중수했을 때에 한퇴지(韓退之)가 기문을 지었다. 지금 이 누각은 비록 명승이지만 거정의 글이 한퇴지에 미치지 못하는데, 뻔뻔하게 기문을 짓자니 외람된 짓인 줄을 알겠다. 그러나 거정이 태사(太史)의 장관으로 있고 박후의 덕정에 대해 들었으니, 그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각의 형승은 오늘날의 글 잘하고 반듯한 선비 중에 필시 잘 묘사해 낼 이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 거론하지 않는다. 거정이 혹시라도 다시 남쪽으로 유람 가서 박후와 함께 이 누각에 한번 오른다면 마땅히 술을 한잔 나누면서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것이다.
박후의 이름은 복경(復卿)이고 자는 세휴(世休)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치며 당시의 칭송을 받았다.
을사년(1485, 성종16).
[주D-001]양희지(楊熙止) : 1439~1504. 자는 가행(可行)ㆍ정보(楨父), 호는 대봉(大峯), 본관은 중화(中和)이다. 1478년(성종9)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천 현령(泗川縣令)으로 나갔다. 형조 판서, 충청도 관찰사,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대봉집(大峯集)》이 있다.
[주D-002]정석견(鄭錫堅) : ?~1500.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이다. 이조 좌랑, 지성균관사, 대사간,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주D-003]설곡(雪谷) 정 선생(鄭先生) : 고려 때 학자인 정포(鄭誧, 1309~1345)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이며, 설곡은 그의 호이다.
[주D-004]가정(稼亭) 이 선생(李先生) : 이곡(李穀, 1298~1351)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中父)이며, 가정은 그의 호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저서로는 《가정집》이 있다.
[주D-005]양촌(陽村) 권 선생(權先生) : 권근(權近, 1352~1409)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가원(可遠)ㆍ사숙(思叔)이다. 양촌은 그의 호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양촌집》이 있다.
[주D-006]등왕각(滕王閣)의 삼왕(三王) : 한유(韓愈)의 〈신수등왕각기(新修滕王閣記)〉에 그 내용이 나온다. 삼왕은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은 왕발(王勃), 〈등왕각부(滕王閣賦)〉를 지은 왕서(王緖), 〈중수등왕각기(重修滕王閣記)〉를 지은 왕중서(王仲舒)를 말한다.
[주D-007]옛사람 …… 있었는데 :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황학루(黃鶴樓)에 올라서 시를 지으려다가 최호(崔顥)가 지은 〈황학루〉를 보고 탄복하여 다시 시를 짓지 못하고, 봉황대로 가서 부(賦)를 지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두고 후세의 어떤 선승(禪僧)이 “한 주먹으로 황학루를 때려 부수고, 한 발길로 앵무주를 뒤엎으려 했네. 눈앞의 경관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 최호의 시가 최고 자리에 있었던 것이라.[一拳搥碎黄鹤楼 一脚踢翻鹦鹉洲 眼前有景道不得 崔颢题诗在上头]”라고 읊었다고 한다.
[주D-008]지금 …… 아니겠는가 : 황학루의 경우처럼, 선배들의 시가 너무 좋아서 후인이 차라리 누각이 없어졌으면 하고 바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누각의 중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9]희문(希文)이 악양루(岳陽樓)에서 : 희문은 송나라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자이다. 1044년에 등자경(滕子京)이 파릉군(巴陵郡)으로 좌천되어, 이듬해에 악양루를 중수하고 범희문에게 기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것이 〈악양루기〉이다.
[주D-010]최호(崔顥)가 황학루에서 : 당나라 시인 최호(?~754)가 〈황학루〉라는 시를 지었다.
[주D-011]조하(趙嘏)가 위남(渭南)에서 : 당나라 시인 조하가 선종(宣宗) 때에 위남 위(渭南尉) 벼슬을 하면서 지은 시에, “남은 별이 몇 개 반짝이니 기러기는 변방 하늘을 날아가고, 한 가락 긴 피리 소리 들리니 사람이 누각에 기대어 있네.[殘星幾點雁橫塞 長笛一聲人倚樓]”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이 워낙 절창이라 조의루(趙倚樓)라는 별칭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주D-012]왕반산(王半山)과 곽공보(郭功甫) : 반산은 송나라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호이고, 공보는 송나라 시인 곽상정(郭祥正)의 자이다.
[주D-013]구공 겸(具公謙) : 생몰년 미상이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5년(성종6) 7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주D-014]설무림(薛茂林) : 생몰년 미상이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8년(성종9) 9월에 경상좌도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지례 현감(知禮縣監) 정석견(鄭錫堅)을 임지로 보낼 때에 지은 시의 서문
-서거정
정후 석견(鄭侯錫堅)은 기축년(1469, 예종1) 사마과(司馬科)에 합격하였는데, 당시에 거정이 외람되이 주사(主司)가 되었으므로 처음으로 정후를 알게 되었다. 그 뒤 정후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들어갔는데 거정이 또 승문원 장관으로 있어서 그를 잘 알게 되었다. 근년에 거정이 《삼국사절요》를 편찬하고 《동문선(東文選)》을 선정할 때에 또 정후와 함께 그 일을 하여 정후가 문필을 도왔다.
이제 정후는 승문원 박사에서 관례에 따라 경관(京官)에 제배될 터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정후는 대각과 육조를 두루 역임하고 청현직이나 측근의 직임에서 머지않아 이름을 떨칠 것이다.” 하였다. 그랬는데 어느 날, 정후가 연로한 어버이를 위해 외직에 보임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거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후는 연소한 나이에 남다른 재주를 지녔으니 어느 자리의 일이든 맡아서 해낼 것이다. 하물며 승문원은 문한을 다루는 중요한 곳인데 이때에 정후의 실력이 으뜸이었음에랴. 이전에 정부와 전조(銓曹)가 같은 의논으로 추천하여, 승문원의 직임을 오래 담당하게 하고 외직에 임명하는 것을 허용치 말기로 했었다. 그런데 지금 어찌 사친을 돌보기 위해 공의(公議)를 폐기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전조가 정후에게 사사로이 그렇게 하도록 할 수도 없고, 정후 또한 외직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얼마 후 정후의 말을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우리 어머니께서 연로하여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석견이 어려서는 유학하느라, 장성해서는 벼슬하느라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는 관직도 육품에 올랐고 벼슬살이에서 공명도 조금 이루었다. 비록 작은 벼슬자리 하나 받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큼지막한 관인(官印)을 차고 한 고을을 도맡아 다스리게 되어 소원하던 바대로 흡족하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직위의 높낮이와 공명의 이해를 따지며 거취에 연연하겠는가.”
내가 이 말을 듣고서는 정후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고 정후의 떠남을 만류할 수 없음을 알았다.
정후가 떠났다. 교분이 돈독했던 거정으로서,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거정이, 정후가 원대한 기국을 지녔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떠나는 것을 보니 그것이 더욱 증명된다.
대개 충효라는 것은 인륜의 큰 근본이다. 선비로서 우뚝한 관을 쓰고 홀을 꽂고 조정에 선 자라면 누군들, “내가 어버이에게 효도를 잘한다. 내가 군주에게 충성을 잘한다.”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 번이라도 공명에 마음이 더럽혀지고 부귀에 욕망이 동탕(動蕩)된 자는, 귀향하여 어버이를 봉양해야 마땅한데도 귀향하지 아니하고서 도리어 핑계 대기를, “오직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으니, 또한 어찌 자질구레하게 음식 봉양 잘하는 것을 일삼겠는가.”라고 한다. 이것은 귀향하여 봉양함과 그렇게 하지 아니함에 대해 어느 것이 중요한 일인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자기의 욕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보다 더욱 커서 그런 것이다.
아! 충성은 효도를 미루어 나간 것이다.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아니하고도 군주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지금 정후는 작은 관직을 낮게 여기지 않고, 어머니가 건강할 때에 곁에서 모시면서 아침저녁으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린다. 물러 나와서는 집에서 하던 그 효성을 미루어 나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시행하니, 어머니를 봉양하는 효도와 군주를 섬기는 충성을 거의 겸비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감동하여 흥기하게 되면, 어머니 된 자들은 모두 정후의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고, 아들 된 자들은 모두 정후 같은 아들이 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옛사람이 이른 바 “사람들에게 효도를 권장하고 사람들에게 충성을 권장한다.”라는 데에 해당하는 자가 바로 정후이다. 정후의 이름이 이로 말미암아 나라에 알려지고 주상에게 보고될 것이니, 오늘날의 떠남이 벼슬로 나아감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으며, 뒷날 이룰 공명과 사업의 원대함을 또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정후에 대해서 거정에게 묻는 자가 있으면, 응당 이것으로 거듭 말해 줄 것이다. 이로써 서문을 쓴다.
정유년(1477, 성종8) 12월.
[주C-001]정석견(鄭錫堅) : ?~1500. 본관은 해주,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이다. 1469년(예종1) 기축년 증광 생원시(增廣生員試)에 합격하였다. 1474년(성종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이조 좌랑, 사헌부 장령, 김해 부사, 병조 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다.
[주D-001]입신양명(立身揚名) : 《효경》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몸과 사체와 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침이다. 대저 효도는 처음에는 어버이를 섬기고 중간에는 군주를 섬기고 마지막에는 몸을 세우는 것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2]아침저녁으로 …… 드린다 : 《예기》 〈곡례〉에 “무릇 아들이 행해야 할 예법은,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봐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하여 안부를 살펴야 한다.” 하였다.
嘉善大夫吏曹參判寒碧齋鄭公行狀 -입재 정종로
公諱錫堅字子健姓鄭氏。寒碧其自號也。始擧國子。成廟朝以俊良被召。歷屢官出爲比安,智禮,金山。所至吏畏民懷。或勒石歌之。選淸白。入爲南臺。棘棘有諫臣風。成化癸巳。遣使賀千秋節。上妙簡書狀。公首膺以行。佔畢金文簡公餞之曰中國有賞音者。必知海外有斯人也。及歸槖裝蕭然。惟皇朝人韻語而已。甲午登上第。拜吏曹佐郞。有堅忮者在諫院文中之。左遷秋曹。已而入玉署。歷修撰校理至應敎。先是館無丘史。出入則借於他司。公獨不借。每以蠟牌皁卒。一導馬前而後隨一奴。公當中而高。狀如山字。見者目笑之。號爲山字官。同寀諸公戲問借一丘何害。而爲山字官。公曰從衛背後事也。吾所不睹。借丘眼前事也。吾豈苟哉。吾寧作山字官。在三司十數稔。自兩司亞長陞同副承旨至左。又遷大司諫。有讆言涉內而云自諫院。上震怒親鞫。左右侍臣皆股栗。公不少沮。從容斂膝而言曰臣老矣。就彼栲必難全命。無罪殺臣。恐爲明朝之累。又曰臣出入邇列。不能輔導聖主。有此過擧。臣之罪也。上遇公素異於衆。爲之改容而不之罪焉。屢轉爲諸曹參議。間出建節者一。及拜吏曹參判。公年已踰六十矣。力求退歸。以庚申正月。考終于第。四方識與不識皆來吊。越三月葬于開寧五指山某向原。鄭氏起於海州。大顯於高麗。麗季有諱初。累殈巨盜。官至大將軍。見時政紊。遯居崇善。卽公高祖。曾祖諱允成生員。祖諱希彥贈戶曹參議。考諱由恭端川訓導。贈吏曹參判。妣貞夫人沃川陸氏。配某氏祔公墓。有二女姜世卿,兪慶億。庶子鳧也。公氣專而容肅。襮順而裏方。自少律己以小學。動有儀則。博通經史。强記絶倫。至於洛建諸書。皆如誦己言。與二兄鐵堅,銀堅。征邁不輟。寒暄,佔畢,梅溪諸賢。望門願交。使節過者皆式。明於人倫鑑。嘗謂從子新堂鵬曰此吾家玉樹也。旣命束脩於寒暄門。俾聞行己大方。又攜入京師。授以性理書。提撕磨礱。終成大儒。當是時諸賢蔚興。幾乎有宋之淳煕。而信道直前。不戒貞厲。公甚憂之。戒新堂曰君子處世。雖不可詭隨。而亦不可捱異流俗。爲其所擠。盖慮夫東漢季也。其後果有三大密網。一時善類。皆被芟刈。或及泉壤。而新堂止於流竄。公屢典雄邑。又歷名藩。而冰檗之操。終始如一。及其罷歸。四壁蕭然如舊。每春夏之交。命鳧採烏蘚以自給。嘗有訪公者馹而至。家前澤畔則在在地墳而草祛若耕鋤然。異之詰吏。吏謾應曰某公近有乳猪。客拜公因語及之。公笑曰非眞猪也。乃豚兒爲耳。其貧如是。而常陶陶自適。畧無外慕。故人尤賢之。論當世高士。必以寒碧齋爲首。至於學問之精。造詣之深。則又有非人人之所能識。而立朝幾年。位不稱德。又無嫡子以世其家。而新堂亦早歿。平日之嘉言懿行。皆湮沒而無傳也。豈不惜哉。公之傍孫惟旭。持家狀來示余。乞一言以闡其幽光。辭不獲。遂爲之敍次如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