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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 . LAB l 차의 즐거움을 알리다 원문보기 글쓴이: T . LAB by 토나루
Q. 위에서 등장하는 동인도회사란 누구인가?
<일본인들이 남긴 동인도회사의 배의 그림>
요약 : 17세기 초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자국에서 동양에 대한 무역권을 부여받아 동인도에 설립한 무역회사의 통칭.
인도로 향하는 해상무역은 중상주의를 내세운 유럽 여러 나라의 사활을 건 상업전(商業戰)의 일환을 이루고 있었다. 1602년이전까지는 개별적인 무역회사들이 설립되었다가 1602년 3월 네덜란드에서는 여러개의 무역회사를 하나로 통합하여 국가가 관리하는 동인도회사를 출범시켰다. 영국에서도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으며 본격적인 무역에서는 네덜란드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604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무역에 나서지는 못했고 17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해상무역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의 여러 섬을 정복하고 직접지배 또는 그 지역의 지배세력을 통한 간접지배를 행했다. 이를 통해 특산품을 강제로 재배하게 해서 사들여 이 땅의 향신료무역을 독점했다. 그러나 1652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영국-네덜란드전쟁이 계속 되었고, 여기에서 심한 타격을 입은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상업전쟁에서도 지게 되었다. 또 18세기 이후 향신료무역이 부진하게 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경영을 주로 하게 되었으며, 1799년에는 영토를 본국정부에 이양하고 해산했다.
쪽·면직물을 중심으로 한 인도무역에 주력을 쏟아온 영국 동인도회사는 1600년 설립되었으며 18세기 유럽에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항쟁에 규제되면서, 인도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1604년 설립, 1664년 재건)와 격렬하게 다투게 되었다. 결국 플라시전투를 계기로 하여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무역을 거의 독점함과 동시에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사적 독점상업회사(私的獨占商業會社)인 동인도회사에 대해 영국 국내에서 비판이 일어나고, 또 경영난에 빠진 회사가 영국정부의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으므로 1773년 노스규제법에 따라 본국 정부의 감독하에 놓이게 되었다. 1833년에는 무역독점권이 폐지되고, 1858년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뒤에는 인도가 영국 국왕의 직접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어, 동인도회사는 기능이 정지되었다.
결국 동인도회사는 중상주의 시대의 전근대적 독점상업조직으로,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과 산업자본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그 역할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따른 이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본의 본원적축적(本源的蓄積)에 크게 공헌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874년에 국유화되고 2년 후인 1876년에 해산한다. 1978년부터 영국 문장원에서 문장사용 허가를 얻어, 현재의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져 홍차회사가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 東印度會社]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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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짚어보겠습니다. 영국와 미국사이에서 차에 대한 관세로 인해서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사건에 대한 대략적인 계기는 아래와 같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1660년에 왕정이 복고 되면서 종교상의 문제로 영국의 청교도들은 거주의 어려움을 겪고 미국으로 이민을 하게 됩니다. 1664년에는 미국의 일부 지역이 정식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이민자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 했습니다. 당시에 미국 개척민들은 영국 본토의 상류층 처럼 비싼 차를 마시고 동양에서 넘어온 그릇을 수집하는것을 성공의 상징처럼 생각을 해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1750년에는 뉴욕에는 티가든이 개업하기 시작합니다. 개척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가면서 개척에 성공한 사람들은 영국과 같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생활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보스턴 미술관' 에 가면 당시 개척자들이 사용하였던 아름다운 다기들이 아직도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북미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는데요. 영국은 승리를 해오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국가가 짊어지는 부채는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이 때문에 식민지에게도 세금에 대한 부담이 날로 커져만 갔는데, 설탕, 차, 커피 등의 고급품을 비롯하여 각종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 까지 과세에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과세는 해가 거듭될수록 커져만 갔고, 이러한 일방적인 과세에 불만을 품은 미국의 시민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없다!' 라는 표어를 내걸고 상품의 불패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다행이도 이러한 활동으로 과세는 철폐되긴 했지만, 유일하게 '차' 에 대한 과세만은 남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영국의 행동의 '차의 관세' 부분은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그래서 무분별하게 퍼져나간것이 바로 '밀수' 였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밀무역이라는 형태로 대량의 차가 수입되고 있었고, 본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발빠른 배가 필요하게 되어 홍차 운반에서 큰 시대를 풍미하게 된 '클리퍼선' 이 등장하게 됩니다.
<클리퍼선 / 출처 : GOOGLE>
사람들이 밀수된 차를 즐기게 되면서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은 동인도 회사였습니다. 당연히 큰 과세를 머금은 차를 수입하여 마실만한 사람들은 점차 줄어만 갔고, 그러한 재고를 떠안은 동인도 회사는 큰 골칫거리가 생기게된 셈입니다. 그로 인해서 영국은 새로운 차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1773년). 새로운 차법으로 제정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식민지쪽에서 관세를 피하기 위해 밀수입을 하고 있는 것을 전면 금지
2. 동인도 회사측에는 기존의 관세를 철폐하고 북미 식민지에 차를 판매할 수 있도록 인정함
이러한 새로운 차법은 막다른 골목에 놓인 동인도 회사에게 다시 한번 식민지에서 차의 '판매 독점권' 을 제공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인도 회사는 오히려 밀수된 차들보다 더욱 더 싼 값에 차를 팔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습니다. 영국의 계속되는 행동들에 대해 불신을 품은 미국인들은 새로운 차법에 대해서도 불신을 품게 되고, 식민지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는 영국의 횡포라 여기고, 이러한 행동들도 임시방편으로 제정하는 것처럼 여기는 국민들의 의식은 날로만 심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예상과는 반대로 결과는 초래되어 미국 시민들은 계속해서 불매운동을 벌이게 되고, 결국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턴의 정치 단체 멤버 약 50여명은 미국 원주민 모호크족으로 변장을 하고 동인도 회사를 습격하게 됩니다. 당시 그들이 배 밖으로 던져버린 차 상자는 342개에 달한다고 하며, 이를 보고 있는 시민들도 제지도 가세도 하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사건이 '보스턴 차 사건' 입니다.
그 이후, 영국은 자기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채, 보스턴을 군정 하에 두게 됩니다. 본국 조치에 화가 난 식민지 측에서는 1774년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 식민지 대표를 모아서 제 1회 대륙회를 열고 영국과의 경제적 단교를 결의하게 됩니다. 이후 1775년,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되며, 그 이듬해 독립선언이 발표되지만, 영국은 이를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프랑스가 미국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하면서 1783년. 영국은 마지못해 독립선언에 대해서 사인을 해주게 됩니다.
당시 영국의 국왕 조지3세는 이렇게 광대한 식미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차'에 대한 무분별한 과세조치와 영국의 무책임한 태도는 결국엔 미국이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 됩니다.
첫댓글 사진의 웨지우드사의 재스퍼는 폼페이의 고전으로부터 모트브를 얻어 그리스 로마신화의 이미지를 무광택의 백색문양으로 장식한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