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스물여섯째날(8월15일.금요일)
■오늘의 일정 = 마르세이유 관광 - 아비뇽으로 이동.
■오늘의 본격적인 일정도 낮 12시가 넘어서야 시작했다.
여행 일정 후반으로 올수록 피로가 누적되는 탓인지 늦잠이 많아져 기상시간이 늦어지고, 아침을 해먹고 호텔을 체크아웃을 하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당초 아비뇽으로 가는 길에 액샹 프로방스를 들렀다가 가기로 했으나, 마르세이유, 액샹 프로방스를 모두 소화할 경우 두 곳 모두 대충 맛보는 식으로 그칠 것 같아 오늘 오후 일정은 모두 마르세이유에 투자하고, 저녁에 아비뇽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프랑스 제2의 도시라는 규모보다는, 마르세이유가 지중해 최대의 항구로,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로 향하는 남프랑스 관문역할을 하는 지리적 위치에다,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7세기부터 항구로 사용했다는 그 오랜 도시의 역사가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르 꼬르뷔지에의 유니테>
민석 엄마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의 작품 'Unite d'Habitation'(집합 주택)을 꼭 보고 싶다고 해서 일반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이곳까지 들리는 일정도 추가했다.
우리가 갖고 온 정보로 'Unite d'Habitation'이 마르세이유에 있다는 사실만 있을 뿐, 정확한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호텔 프론트 직원에게 물어 찾아갔다.
"마르세이유 스타디움 근처에 있다"는 여직원이 말에 따라 근처까지 가서 주변을 차로 몇바퀴 빙글빙글 돌던중 눈에 두드러지는 육중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반세기도전인 1952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일종의 주상복합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건축의 문외한인 나로서도 건물의 외관은 물론이고 건물 내부와 옥상을 둘러보고는 그 건축가의 천재적인 발상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반 건물의 3층 높이 정도까지가 건물을 떠받치는, 원통형 콘크리트 기둥들이 떡 버티고 있고, 일반 건물에 비해 폭이 상당히 넓어 일상성을 확연히 탈피하고 있었다.
경비실이 있는 1층 로비로 들어가서도 그렇고, 각 층의 복도들도 벽과 천장이 이어지는 부분의 곳곳에 설치한 간접 조명장치로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건물 옥상도 미관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춰 입주자 가정의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보육원, 옥상 정원, 풀장까지 근사하게 설치돼 있었다. 건물 옥상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옥상에서 마르세이유 앞바다도 멀리 내려다 보였다. 건물 주변도 수목이 우거진 숲들이 조성돼 있어 경관도 그만이었다.
외관에 찬탄을 표시하고 있는 나에게 민석엄마는 이 건축물은 외관도 외관이지만, 르 꼬르뷔지에가 집합주택을 그 안에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갖추고 있는 조그만 도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그의 이념과 그를 바탕으로 한 개념들이 그대로 체현돼 있는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르 꼬르뷔지에는 근대 건축사에서 천재로 평가받고 있는 大건축가라고 한다.
왜 천재냐 하면 당시의 일반적인 건축가들의 발상을 뛰어넘어, 새로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이를 현실의 건축물이라는 공간에 현실화시켜 담아내기 때문이란다.
단지 멋있고, 근사하고, 예쁘게 포장된, 아름다운 건물, 그리고 규모면에서 사람들이 깜짝 놀랄 대형 건축물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발상을 뛰어넘어, 시대의 구획을 바꾸는 새로운 이념을 담은 디자인을 현실화시킨 건축가가 건축사에서 천재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
이해가 가는 얘기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게다.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내는 것. 곧 발상의 전환이다.
일상성으로 항상 벗어나려는 긴장감이 동반돼야 하고, 관성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의식적인 자기 강제가 없으면 당대의 흐름에 파묻혀 복제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지 않고, 당대의 흐름이라도 제대로 좇아가는 것도 보통사람으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하늘이 준 타고난 재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일일게다. 그래서 천재(天才)라고 이름붙인 것 아닐까.
건물 3층에는 별 두 개짜리 '르꼬르뷔지에 호텔'이라는 이름의 호텔도 있었다. 정보가 있었다면 어차피 마르세이유에서 하루묵기로 한 것, 어제 묵었던 호텔보다는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옥상 풀장 옆에 앉아 마르세이유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노닐며 시간을 보내다 나왔다.
<마르세이유 항구로>
이 건물이 시 동쪽에 위치해 있고, 바다쪽에 가까워 시내 중심부에 자리잡은 구(舊)항구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들어갔다. 해안도로도 드라이브 하기에는 만점으로 해안쪽을 따라 길게 공원이 조성돼 있어 잔디밭에 시민들이 나와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도 보였고, 해안 중간중간의 모래밭에서는 해수욕을 즐기는 광경도 보기 좋았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시내 중심부쪽으로 들어가 골목길같은 곳을 거쳐 다시 바다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드디어 그림같은 마르세이유 항구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르세이유를 상징하는 엽서 사진모습 그대로였다. 수천척의 요트, 어선이 항구 내항에 가지런히 빼곡히 정박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항구 연안부두를 따라서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관광객들이 입맛을 유혹하고 있었다.
마르세이유는 지형적으로 바다로부터 육지쪽으로 만을 이루고, 바다로 향하는 만 입구는 좁으면서도 내항으로 들어오면 호수처럼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넓은 호리병 모양의 만으로 항구로서는 하늘이 내린 곳 같았다.
만 입구 양안의 곶에는 중세에 쌓았다는 요새, 남쪽으로 성 니콜라(St. Nicolas) 요새 , 북쪽으로 성 장(St. Jean) 요새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다. 바다쪽에서 섣불리 마르세이유 내항쪽으로 배를 타고 침입하기에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침입자들은 입구로 접근해오면 양안의 요새로부터 공격을 받아 엄청난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이 항구는 옛날 마르세이유의 본디 항구로 사용하던 곳이기 때문에 '구항'으로 불리고 있었고, 대형 선박은 구항 바깥쪽 연안에 조성된 항구를 이용하고 있었다.
마침 유로화도 다 떨어져 수중에 있는 미국달러화를 환전하기 위해 연안 부두쪽으로부터 시내쪽으로 이어지는 마르세이유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칸비에르 거리를 따라 걸었다. 오늘 8월15일이 성모 마리아 승천기념일로 프랑스의 휴일이라 은행도, 환전소도 문을 닫아 할 수 없이 처음으로 이번 여행길에 와서 신용카드로 유로화를 현금서비스로 인출했다.
칸비에르 거리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회전목마 놀이기구가 있어 민석이의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니스에서도 그렇고 프랑스에는 요충지에 꼭 이런 놀이시설이 있어 아이를 동반한 관광객의 주머니돈을 털어갔다.
<니스,칸의 지중해와 마르세이유의 지중해>
같은 지중해이지만 거쳐왔던 니스, 칸과 마르세이유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도시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니스, 칸의 바닷가에서는 맑고 깨끗한 에머럴드빛 바다, 젖가슴을 모두 드러낸 짧은 비키니 차림의 젊은 아가씨들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밝고 활달한 자유분방함, 유유자적하고 다소 사치스러운 유럽인들의 여유 등을 느낄 수 있었다면 마르세이유는 지중해에서는 얽힌 옛 상업과 무역, 그 투쟁의 역사가 진하게 배어나오는 느낌이었다.
마르세이유는 그 옛날 그리스 시대에부터 항구로 사용돼 왔던 만큼 기원전후의 전성기 그리스. 로마인들로부터 근세 프랑스인에 이르기까지 마르세이유는 지중해 확장의 중요한 거점이자 지리적 요충이었다.
지중해 건너편 아프리카로부터의 이민들의 유입 창구가 이곳이었고, 아마 그전에는 그들의 아프리카 선조들이 노예무역상에 의해 노예로 팔려와 대륙으로 건너온 곳이었을게다. 무역상등을 손짓하여 부르던 곳이었고, 이민과 무역을 통해 마르세이유는 도시로서 활기찬 번영을 구가해왔다.
마침 마르세이유 신항구에는 '튀니지아 페리'라고 적힌 대형 여객선이 정박해 있었다. 아프리카와 마르세이유를 오가는 여객선이었다. 지도를 보니 여객선편으로 알제리까지 18시간, 튀니지까지 20시간 걸린다고 표시돼 있다. 저 바다 건너가 아프리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마르세이유에는 지중해를 개척하기 위한 유럽인들의 진취적 기상과 투쟁의 정신이 깃들여있기도 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의 고난과 눈물이 젖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르세이유 앞바다에 있는 '암굴왕'이 탈출한 이프섬으로 가는 선상에서 마르세이유 해안가의 3-4층짜리 주택의 한 벽면이 프랑스의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의 얼굴 대형 초상화로 그려져 있는게 보였다. 워낙 큰 초상화라 마르세이유 항구를 드나드는 배에서는 멀리서도 반드시 보이게 돼 있다.
그러고 보니 마르세이유는 지단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지단이 차지하는 스타성은 가히 짐작할 만했다. 지단도 알제리 출신 이민의 아들이다.
지난해 월드컵 무렵 흥미롭게 읽었던 외신기사가 생각이 났다. 내가 지단의 팬인데다, 그가 정치적 견해까지 공개적으로 피력했던 일이어서 기억이 났다.
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프랑스 대통령선거가 실시됐었는데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의 극우 국민전선(NF)의 장 마리 르펜후보가 선전해 극우파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인구 90만의 대도시 마르세이유에서 르펜은 상당한 표몰이를 하면서 대선 1차 투표에서 이 지역에서 1위를 차지했었다. 프랑스내에서도 '인종 용광로'인 마르세이유에서 범죄와 실업이 증가하자 극우파들은 "이민자들이 범죄의 온상"이라며 노골족으로 캠페인을 벌였고, 그것이 마르세이유 유권자들에게 먹혀 들어간 것이다.
이때 마르세이유 출신의 알제리 이민 2세인 지단은 시라크 지지를 호소하며 르펜 반대운동을 벌였다. 당시 지단은 물론이고 출신성분이 다양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선수중 일부는 르펜이 집권할 경우 "인종 차별적인 극우 정권이 집권한 국가 프랑스를 위해 뛸 수 없다"며 월드컵 출전 거부 의사까지 표명하며 시라크지지 운동을 편 적이 있었다.
마르세이유 앞바다 선상에서 지단의 대형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이곳 마르세이유를 무대로 전개돼 왔던 2천700여년의 역사를 더욱 자세하게 알고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만큼 풍부한 역사를 가진 마르세이유도 매력적인 도시이다.
<이프 성>
마르세이유 구항에서 왕복 배삯 9유로씩, 18유로를 내고 승선해서 이프성(Chateau d'if)으로 향했다. 배편으로 20분이면 가는 거리로 마르세이유 해안에서 보이는 가까운 이프섬에 있는 성이었다.
1516년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가 외부침략을 막기 위해 마르세이유 앞바다의 이프섬에 성을 쌓아 요새를 만들 것을 명령, 성이 세워졌다. 이프성이 축성되는 동안 우여곡절도 있었다고 한다. 1481년 프랑스에 합병되기는 했지만, 스스로 자위.자치권을 행사하는 특권을 갖고 있었던 마르세이유의 시민들은 중앙권력의 힘에 의해 성이 자기네 땅에 세워지는 것을 반대했었다고 한다. 반대투쟁까지 있었다고 이프성의 역사는 적고 있다.
하지만 이프성은 완공후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6세기 중반부터 감옥으로 사용됐다. 섬의 지리적 위치에다, 요새와 같이 쌓은 성의 건축방식 때문에 도저히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아주 이상적인 감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프성의 첫 수감자는 1580년 군주제를 무너뜨리는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붙잡힌 어느 기사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수많은 신교도들이 이프성의 독방에 수감됐다고 한다. 그 숫자는 3천5백여명에 이른다.
프랑스 혁명때의 거물 미라보도 한때 이곳에 투옥된적이 있다. 그런데 귀족이었던 아버지가 당시 반항아로 골치가 아팠던 아들을 길들이기 위해 왕에게 수감을 요청해서 이뤄졌고, 때문에 미라보는 이곳에서 호화로운 수감생활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때 이프성에 투옥된 사람도 적지 않는 등 주로 권력에 저항한 정치범들이 수용됐던 곳이 이프성이다.
이프성이 유명해진 것은 소설가 알렉산드로 뒤마의 소설에서 몽테크리스토 백작, 단테스가 투옥됐다 탈출한 것으로 설정된 곳이 바로 이 곳이기 때문이다.
성이 섬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로 조그만 이프섬은, 주변 바다가 너무 맑아 상당히 깊어보이는데도 바닥이 훤히 보일 지경이고, 일부 관광객은 섬에 배를 타고 들어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닷가 바위로 내려가 수영을 하기도 했다.
검게 그을린 개구쟁이 프랑스 아이들은 선착장에서 바다로 차례로 다이빙을 하며 마냥 즐거워한다. 민석이도 선착장에서 앉아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드는 아이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좋아한다.
"민석이도 물속으로 아빠랑 풍덩할래?"라고 했더니 민석이 왈, "형아 되면 나도 할래!. 지금은 무서워 안할래!"라고 한다.
마르세이유 거리는 지저분한 편으로 항구도시 특유의 어수선한 분위기도 있었다. 건물도 오래된데다 보존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인지 벽같은 곳에 금이 가고 일부가 떨어져 나간 곳도 보였다.
항구 주변의 레스토랑 건물들도 낡은 티가 두드러지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레스토랑 건물에 연한 거리에 테이블을 설치, 테이블보에다 꽃, 유리잔 등으로 그곳에서 먹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할 정도로 예쁘게 꾸며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음식 맛보는 것도 중요한 문화 체험인 만큼, 눈길을 끄는 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아 마르세이유의 명물이라는 해산물요리 부이에야스를 먹었다. 그렇게 맛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별로 비싸지 않고 생선스프의 맛이 독특해 괜찮은 편이었다. 레스토랑을 고르던 중 메뉴가 온통 프랑스어로 돼 있어 한 곳에 들러 영어 메뉴가 있냐고 물었더니 "영어 메뉴는 없지만 일본어 메뉴는 있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의 구매력을 또 한번 짐작할 수 있었다.
프랑스이면서도 프랑스와 다른 이국적 풍모에다, 도시의 정취에서 역사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었던, 예사롭지 않은 도시 마르세이유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저녁까지 먹으며 보내다 오후 9시가 넘어서야 출발,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아비뇽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