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18일 설교 >
또 다시 꿈꾸는 부활
성경 / 누가 복음 24:13-35, 벧전 1:18-25
지난 주간에 광명지방회 서기로 일하던 은광교회 곽규만 목사님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곽목사님은 협성신학교를 나와 안양과 광명에서 2교회를 개척하면서 그간 숫한 어려움을 견뎌내온 사람입니다. 이제 교세제법 성장하여 교인수도 100명정도 되고 교회 예산도 1억정도되어 일할 만하게 되었는데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남겨진 사모님과 두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최대 진리는 누가 뭐라해도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속빈 강정과 같아서 그 안에 생명력을 찾을 수 없는 죽은 부활입니다. 반대로 부활이 보장되지 않는 십자가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에 이르려면 자기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역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절도요 강도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예수를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 언젠가 큰 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 믿고 있었던 이들에게 십자가는 청천 벽력과도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죽음에 대해 누차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였지만 제자들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던 모양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앞에 놓고 그에 반응하는 제자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적 태도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요?
마가 10:35-37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그날이 오면 하나는 보좌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41절에 보니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열제자가 분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귀절을 보면 제자들의 관심은 새로 꿈꾸는 독립된 나라의 권세를 쥐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예루살렘을 동경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의 왕좌에 오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왕위에 올라 세상을 호령하고 로마를 진멸하고, 그동안 쌓였던 자신들의 한을 풀어주고, 허기졌던 배를 채워주고, 천대받던 자리에서 영화로운 자리로 옮겨주길 바랬던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 얼마전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던날 군중들은 예수께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줄 것을 극성스럽게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희망은 물질적인 풍요입니다. 소위 출세하여 떵떵거리고 살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새나라를 이야기 하면서도 사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은 가진자들이 누리는 복락에 기울어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마음속 깊은곳에 몰래 감춰두고 있었던 거지요. 언제라도 기회가 되면 출세를 위해 돌진하려는 마음을 짐짓 감추고 있었을 뿐이죠. 그러니 십자가 죽음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실제의 예루살렘이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진리와 자유, 사랑과 정의 , 평등과 평화를 거부하고 반대하는 곳입니다. 폭력과 탐욕이 가득찬 부정부패의 온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면서 그곳을 동경하는 이율배반이 숨겨져 있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자기 살길 찾아가는 사람들
예루살렘을 동경했던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자 큰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슬픔과 허탈과 두려움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꿈도 희망도 모두 잃어버린채 자기 살길 찾아 가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도 그들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왜 이땅에 오셨는지, 왜 그분이 십자가에 죽어야 했는지, 그분이 꿈꾸던 세계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지... 등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 보다는 자기 성취, 출세에 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아주 담담한 심정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와는 별 관계없는 사람처럼! '예수는 선지자인데 우리 대제사장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달리게 했고, 우리는 그가 세상을 구원하길 바랬는데 일이 그렇게 되었노라'는 설명이 전부입니다. 이 말속에서 어떤 비통이나 원수들에 대한 적개심 같은것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어도 믿지 못한채 실망하여 자신들의 갈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함께 가면서도 자신들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계획대로만 가고 있습니다. 다른 출세의 길을 꿈꾸며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십자가가 14대 대통령선거의 패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권의 무참한 패배로 진보 운동세력은 사분오열되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냥 흩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출세를 꿈꾸며 가진자들의 치맛폭으로 숨어들어가고 있군요. 노동자 신문의 시사평론 난을 보니까 광명시 보궐 선거에 대해 평가해 놓은 것이 있었습ㅈ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야가 바뀌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민자당 손학규 후보의 사무실에는 젊고 참신한 운동권 출신 석박사와 민교협교수들, 재야 인사, 오랜기간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일해왔던 교계인사들이 줄을 잇고 있는데 비해 민주당 최정택후보 사무실에는 보수 정객들만 드나든다는 거지요. 도대체 야당을 하려는건지 말려는건지 한심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목격했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시대도 예수를 배반하고 영화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꿈꾸는 부활
자기 길만 열심히 가던 이들의 눈이 다시 뜨였습니다. 예수를 알아보게 된거죠. 부활의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눈뜨게 하고 또다시 부활을 꿈꾸며, 전하며 살게 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축사하며 떼어주시던 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고난의 의미를 새삼 발견하게 된거죠. 고난의 의미가 깨달아지니 왜 예수가 십자가를 져야만 했는지, 그 십자가가 왜 미래의 희망과 구원이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들은 자기가 가던길에서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부탁하십니다.(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시는데는 여러가지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뜻은 현실이 괴롭고 힘들찌라도 그 현실과 역사를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출세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서 불의와 대항하고 진리를 사수하라는 것입니다. 타협해서 성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신길을 따르고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낡은 것에 대항하여 새로운 것을 전파하라는 말입니다. 썩은 것을 쫓지 말고 썩지 아니할 길을 가란 말입니다. 절망에서 새로운 희망을 창조하며 살란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벅찰 정도 입니다. 패역과 반역의 시대에 다시 미래를 꿈꾸는 일이 소중합니다. 다시 부활을 꿈꾸는 자들에 의해서 미래는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2재발견 한다면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