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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시적인 것에 대한 탐색과 자아들 -오원량 시집 『서로는 짝사랑』, 성덕희 시집 『별자리에서 길을 잃다』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1. 감각적 전위로 소환된 시어들
시의 지향을 우리가 사는 삶의 진전을 위한 정신적 위로와 정서의 충족이라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너무 상투적인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상투적인 말을 꺼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먼저 정신적인 위로는 어떤 방법으로 이뤄질 것인가와 정서의 함양이라는 난해한 개념은 어떻게 볼 것인가 까지다. 둘의 요소는 자아와 타자로 분리된 현실적 대상을 시적 인지를 통해 동일한 인식으로 공감하려는 때에 가능하다. 시의 형식으로 실존에 관한 질문을 수시로 던지지만, 명료하게 답할 수 없는 모호성에 대한 간극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런 것마저 소모하지 않고 내면에 잠재된 자아 확인을 위한 긍정의 페이소스를 끝없이 고민하며 시적 형상화를 추구하려는 사람이 시인이다. 오원량 시인은 시를 쓰면서 의식하였든 의식하지 않았든 간에 보편적인 욕망으로 표출되는 정념에 쉽게 침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 상황을 유머로 전환하는데 능청스러움도 시적인 매력으로 작용한다. 특히 우리가 사는 사회의 개인주의적 심화와 소통 부재로 인한 경직성을 완화하는 데 있어 문학이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오원량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서로는 짝사랑』(책펴냄 열린시) 시들을 읽다 재밌는 시를 발견했다. 이 시가 전체적으로 주는 느낌은 시적 대상으로 다가온 풍경을 익살스럽게 시적으로 소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살펴보자.
춘분에 눈발 성성하다 창녕 들녘 양파 잎이 이제 살 좀 쪄 보겠다고 연어살 같은 햇살을 흡흡 빨아먹고 있으니 눈바람이 귀싸대기를 때리며 지나간다
맵다 아니! 저 바람이 미쳤나? 지나가던 바람이 그 소리를 듣고 되돌아와서 또 때리고 지나간다 씩씩거리며 바람에게 삿대질하는 양파 잎 주먹을 쥐고 벼르고 있다
지나가던 뭉게구름이 산꼭대기에서 부딪쳤다 산등성이 위 눈발로 흩어져 내린다 나무들이 구름을 탈탈 털고 있다 내 눈에도 들어서는 진눈깨비 눈이 가렵다 -「겨울 틈새」 부분
주변에 무관심한 냉소적인 사회에서 일상의 사건들이 모두 심드렁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은 입체적인 연극처럼 시적인 대사가 필요하다. 마침맞게 시인은 획획 부는 바람소리를 대사처럼 적어 나가고 있다. 곧바로 무대에 올려서 역할 연기만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 무대는 창녕 들녘이다. 춘삼월 때 아닌 눈발이 소복하게 들녘을 덮었고 시절이 하도 수상하다는 네레이터가 된 시인이 일인 다역까지 능청스럽게 소화해낸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바람’까지도 신통하게 볼 수 있고, 바람이 하는 말까지 들을 수 있다. 거기에다 농사꾼도 요즘에는 잘 모르는 24절기를 꿰고 있는 듯하다. 그중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기 때문, 일 년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는 마음부터 바빠지는 시기이다. 그런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술 사나운 꽃샘추위와 함께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2월 춘분 바람은 매섭고 찰뿐만이 아니라 드세다. 시인은 봄의 초입인 그 날 창녕 들판에서 예상치 못한 풍경과 맞닥뜨리게 된다. “춘분에 눈발 성성하다/창녕 들녘 양파 잎이 이제 살 좀 쪄 보겠다고/연어살 같은 햇살을 흡흡 빨아먹고 있으니/눈바람이 귀싸대기를 때리며 지나간다”며 봄이 코앞인데 눈 덮인 들녘을 거칠게 할퀴며 지나가는 바람을 본 것이다. 사실 바람은 형체가 없다.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물들의 흔들림으로 바람의 세기를 가늠할 뿐이다. 시를 포획해낸 순간도 바람의 난분분亂粉粉함에서 찾아냈다. 평상시처럼 평온한 창녕 들녘이었다면 잘 자란 양파가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것처럼 몹시 흔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억울하게 한 대 맞았다면 양파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제대로 싸움판이 붙었다. 아니다. 시인이 싸움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외려 싸움판을 키우고 있다. 그럴 리 없는 양파밭의 풍경을 사람들의 이기심이 개입한 일상으로 환기하고 있다. 매번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을 통해 삭막해진 세상에서 주관적인 감정의 나르시시즘과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발현된 시 한 편이 즐거움을 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을 벗어나는 상상력에 있다.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시적으로 대상화하고 시인만의 개성으로 사물을 상징화한다. 「할퀴고 싶다」는 것에서 “게의 본성을 닮고 싶다”는 시인은 기질적으로 자기 방어를 위해 매우 공격적임을 알 수 있다. 누군가를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불편한 마음으로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공격적인 각오인 것이다. “누군가 가까이 오면 날카로운 집게발로 무조건 할퀴어 위협을 주는 게,”를 보면서 그런 행위에 대하여 공감한다. 시인이 벼르고 있는 대상은 자신에 대한 존재감을 무시해 버린 사회를 향하고 있다. 게는 집게발이 최대의 무기이고 시인은 이성과 감성으로 무장된 시의 상상력이다. 시인은 잘 벼린 ‘칼’을 대하듯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늘 소중하게 다루는 칼은 예리하여 아무거나 잘 썰리지만 정도에 뛰어나 칼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듬직한 무를 베어 본 적이 없고 속이 꽉 찬 배추를 온 힘을 다해 베어 본 적이 없고 양파나 마늘 고추 파가 맵다고 함부로 썰어 열탕에 던진 적이 없다 내 칼은 정말 썰려 없어져야 할 곳만 베었다
-「베어야 할 때」 부분
시는 몸의 감각으로 자극받아 쓰인다고 말한다. 꼭 그렇지만 않은 오원량 시인의 시는 감각으로 충동된 상상력보다 이성으로 각성한 엄결성까지 함의하고 있다. 사실 시는 감각적으로 수용된 사유 그 이상을 요구하고 충족될 때 시적 우위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베어야 할 때」는 시인의 이성적 사유와 정신적 고도를 통해 감각된 사유도 포함됨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늘 소중하게 다루는 칼”의 상징이 이성이라면 “듬직한 무”와 “속이 꽉 찬 배추”는 감각적인 사유로 시적 상상력과 연동하고 있다. 시인은 사물을 소중하게 다루듯 사사로이 사람을 단정하지 않는다는 신중함으로 볼 수 있다. 무나 배추는 단순히 생각하면 요리하는 재료에 불과하지만, “질긴 입을 잘라버려야 할 때”와 “속이 썩은 창자”라고 치환될 때는 물질감으로 소비되는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까지 확장하고 있다. 자기 삶의 지향인 시비是非와 맞지 않고 청결성과 다를 때는 “말없이 바람의 소리로 와서 베어 버리”겠다는 확언이 매섭도록 당차다. 아무리 당차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자신과 무관하게 찾아오거나 스며드는 것들은 시인의 내면이 아니라 외피처럼 무른 곳으로 침투해오는 노화에 필수인 세월이 문제다. 세월의 전위병처럼 수시로 침범해오는 시간의 더께를 이성으로도 막을 수 없다. 「수묵화 한 점 받다」에서 거울 속 얼굴에 낀 ‘기미’를 보게 된다. 그것은 얼굴의 미세한 변화까지 신경 쓰게 된 시인의 나이 들었음을 실토하고 있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흩뿌려진 침묵들이/척박한 문장으로 그려져 있다”라며 얼굴에 예민한 여성적 상심을 놓지 못하지만, “외출해서 돌아와/거울 속에 든 기미 낀 얼굴/자세히 들여다보니/수묵화 한 점, 걸작이다/”라며 이내 유머 있는 평상심을 회복한다. 시인에게 이성과 감각으로 상승하는 상상력은 풍부한 일상에서 능청스런 유머로 치환하여 시적 감성을 매력적인 화인火印으로 전환해내는 데 있다. 농밀하고 은근하게 당부하는 간절함도 삶의 한 부분이라면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화질 좋은 그대 쌍 렌즈 카메라 모습과 마음이 일치되게 저를 담아 주실래요 예쁘게 딱 한 장만 찍어 주세요 요리조리 재며 찍지는 마세요 다양한 컷 촬영도 사양입니다 초점을 너무 정확하게 잡지도 말아주세요 예쁜 꽃과 함께 찍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플래시는 되도록 사용 안 했으면 좋겠어요 당신 가슴에 새겨진 필름으로 오랜 세월 지나도 진득하게 붙어 있는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남고 싶어요
-「그대 눈」 전문
시인의 긴장된 삶은 일상이어서 어느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자기애에 대한 감정적인 것도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사진 한 장 찍는 것 정도는 흔한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일상적인 것에서도 자기애에 대한 철저함이 극성 같지만,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카메라가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기계적으로 포착하는 것에 대한 염려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카메라의 눈을 통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대상에게 조리개를 좁히듯 간절함을 주문呪文하고 있는 것이어서 그렇다. 시인의 모습을 찍고 있는 타자는 시인에게 다시없는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피사체의 형상을 감상과 정서가 배제된 채 무감정으로 담아내는 카메라를 통해 냉소주의적 현실 사회를 환기하는 데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시인이 당부하는 대로 모든 사람을 바라본다면 하는 바람은 사람에 대한 존중감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시인처럼 마음 한 자락에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대 눈」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인의 눈높이로의 지향을 의식할 수 있다. 농촌에서 풀을 뽑는 일은 흔한 풍경으로 특별하지 않지만, 시인에게 「풀」은 그렇지 않다. 농부의 마음으로 “콩밭에 쭈그리고 앉아/지슴을 뽑고 있으니/오히려 풀이 나를 뽑아/콩밭에 심어 놓는다” 며 풀의 변주를 통해 시인은 “풀”로 둔갑한다. 사실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의 질서를 훼손하는 위치를 점유해버렸다. 콩밭에 난 풀을 뽑는 것을 통해 시인은 인간의 남용한 행위들을 반성하고 자각한 것이다. 뽑은 풀을 다시 흙에 심어주는 행위야말로 본래의 모습인 자연의 한 부분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제부터 풀로 살고자 한다. 그 풀이 몸 안에서 무성한 시로 자라고 있다. 시인의 상상 속 변주는 거듭된다. 호두알 크기의 작은 <동고비>라는 새가 날아든 곳이 하필 가시가 유독 많은 피라칸타사스 나무다. 모든 나무가 겨울이면 잎사귀를 털어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지만, 피라칸타사스 나무는 열매가 붉어 자태도 독특하다. 동고비에게는 그 피라칸타사스 나무가 삭막한 겨울을 나는 데 있어 중요한 식량 보급처인지 모른다. 동고비의 작은 눈은 빨갛게 달린 열매가 언젠가는 다 사라질 시간들까지 기억하고 있다. 한가하게 놀이나 즐기면서 지저귀는 울음소리가 아니라 절박함인 동시에 고된 삶의 일상인 것이다. 농부가 고달픈 생애를 얹어 목 놓아 부를 때 따라붙는 삼박자라는 것이다. “붉은 노래에 새벽이 와서/벌판에 안개 걷히면/논두렁을 가는 하얀 농부가/강물 소리로 깊어질 때/세 박자로 움직이는 새//눈으로 모이 찾는 한 박자/모이를 찾아 날아가는 두 박자/입으로 모이를 쪼아 먹는 세 박자”는 생에 대한 강한 애착과 부단한 자기 삶의 진전을 향한 치열한 생존 행위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동고비의 울음소리가 작고 처연하다 해도 시인의 귀에서만큼은 세 박자의 울림이 깊어 애달픈 가슴을 파고드니 청승과는 멀다.
2. 반복과 변주의 근원적 사유
시는 삶에서 발화된다는 것과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시적인 것의 양상이 달라진다. 자신의 일상이 배제된 시는 진정성에서 회의懷疑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대상으로 다가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동일한 사유의 결과로 존재하지 않은 일상적 사건들을 생각해본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상투적인 논의는 이미 진부한 물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가끔은 의외의 사건들이 시로 침윤浸潤되어 있다가 시적 세계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성덕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별자리에서 길을 잃다』(작가마을)에서 다양한 풍경들을 스펙트럼을 통해 보여주듯 내면화한 시인만의 시적 세계로 발현하고 있다. 시인에게 시적 대상으로 다가온 풍경은 시인만의 개별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불교적 사유로 바라보는 사물에 대한 천착은 서정의 근경에 대한 호기심을 원초적인 본성으로 빈번히 확인시켜준다. 시 「봄 그 언저리」에서도 시각을 통해 유입된 봄의 서정을 가볍지 않게 발화하고 있다. “몇 밤이 지나면/가슴 깃털 부풀리며 유혹하는/극락조의 춤으로/아찔한 꽃 사태가 올 것이다”라며 봄의 환장할 진전을 긍정하며 예감한다. 시인은 아름답게 핀 극락조라는 이름의 꽃을 보고 그 꽃을 닮은 극락조極樂鳥를 상상했을 것이다. 극락조는 동남아 지역에 산다는 천상의 새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극락조를 통해 천상과 같은 극락을 연상했을 것이다. 아미타불이 주관한다는 극락이라는 이상 세계를 인간이면 누구나 염원하듯 봄의 환희와 절정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구현된다고 상상한다. 시에 매복하고 있는 꽃은 단순한 계절 변화에 순응하여 개화를 반복하는 식물적 근성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해마다 낮은 풀꽃들의 봄이 북망산 어머니의 추억으로 젖어들 때 나이를 먹어가며 깨달았지요 서서히 무너질 시간 앞에서도 용기 있게 다가서야 한다는 것을
진달래꽃전과 두견주 한 잔으로 무르익어가는 봄날 한나절을 천자봉 풍경처럼 앉아 있었지요, 우리는 “어떻게 이 짧은 봄을 아껴서 보낼까” 어느 시인의 말을 중얼거려가면서
-「봄은 낮은 풀꽃으로 오고」 부분
봄은 꽃으로 온다지만, 처음부터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 자세는 인간이 오래전 잊어버린 자연의 모습이고, 봄을 통해 땅에 납작 엎드려 오체투지 한 몸 다 헤어진 뒤 풀꽃으로 다가온다는 시적 심상이 예사롭지 않다. 생명의 반복은 곧 불교에서 윤회에 의한 환생으로 해명이 가능하다. “청명 한식날 성묫길에서 만난/집배원의 낡은 가방에서는/와르르 옛 기억들이 쏟아”지듯 우연 같지만, 그것마저 인연으로 연기緣起되어 있다는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시인은 봄을 통해 끈질긴 인연의 시간을 반복하는 순환성에 주목한다. 봄마다 꽃으로 다가오는 인연들은 죽음과 생의 반복이라는 영원성을 확인하듯 윤회하여 봄으로부터 시작된다. 생명의 기원과 영원성을 담보하여주는 것은 이미 불교적 인연에 의한 연기緣起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한다. 「낙화落火 놀이」도 불교적 사유가 전화되어 나타난다. 낙화만을 보면 흔하게 꽃의 낙화로 읽어버릴 수 있어 불꽃임을 강조하기 위해 낙화落火라고 언급해놓았다. 하지만 불꽃이나 자연 상태의 꽃이나 시인의 의식 안에서 이미 꽃으로 인식되어 버렸다면 불가에서 말하는 유식론적 입장에서 같다. 시인은 주석을 달아 4월 초파일 아라가야 고도 함안 무진정에서 있었던 불꽃놀이의 신비감을 말해준다. 시인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은 신비로움을 더해 “심지마다 타오르는 불꽃 번뇌는/바람 타는 무진정 연못가에/흑요석 눈빛의 아라가야 왕녀가 놓쳐버린 목걸이/산산히 흩어지는 유리구슬”로 애환적인 연민을 고조시킨다. 안타까운 아라가야 왕국의 몰락으로 잊힌 인연의 고리를 환생이라는 실체로 재현한 ‘아라홍련’을 통해 실체를 유추해낸다. 700년 전 함안 성산산성 터 유적 발굴 중 수습된 연 씨앗을 발아시켜 지금의 아라홍련을 피워낸 ‘생명’의 영원성과 신비한 ‘아름다움’까지 불교적 사유로 충만하게 한다. 연꽃의 향기는 달빛 짙은 밤을 따라 침묵으로 잠들어 있었던 700년의 시간을 초월해 사방으로 진동할 것이다.
망월사 하루는 저녁예불 소리로 저물어 가고
낙가보전꽃 창살 무늬에 어둠 내리면 부지런히 달을 낚는 월조문을 지나 지혜를 밝힌 촛불방에서 무명초 고운님들은 하늘 부처를 만난다 긴 침묵 끝 망상을 몰아내는 장군죽비 소리
도봉산 진달래, 서럽던 세월만큼 만다라를 향한 아름다운 동행
-「고무신에 달빛 부서지고」 부분
시인의 사유 속에 온존한 불교적 시어들은 시 전반을 통어하고 있다. 찾아간 곳도 망월사라는 사찰이다. 절이 갖는 의미는 불교적인 신앙심을 공고히 하는 장소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성덕희 시인은 시 속에서 낯설지 않게 불교적 의미가 강한 시어들을 발심하고 있다. 사물이라는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을 두드리며 시작되는 “망월사 하루는/저녁예불 소리로 저물어” 간다는 시인의 심상은 도리천을 맴돌고 있다. 33천이라 하는 도리천은 불교에서 일컫는 불자 대중이라 하는 수평적 불심에 대한 염원으로 발현한 것이다. 도봉산의 망월사 낙가보전 앞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떠올린다는 주석처럼, “부지런히 달을 낚는 월조문을 지나/지혜를 밝힌 촛불방에서/무명초 고운님들은/하늘 부처를 만난다/긴 침묵 끝/망상을 몰아내는 장군죽비 소리”를 인간의 몸으로 감당하려 했지만, 꿈꾸는 화엄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문山門을 나서며」도 그런 인간적인 욕망의 내면을 엿보게 한다. 산사로 찾아든 곳이 지리산 화엄사다. “삼백 살 흑매화 피는 봄이면/화엄사도 시름시름 꽃 몸살 앓는다지/때늦은 그 향기 만날 수 없어/각황전 앞 석등에다/마음자리 밝힌 등불 하나 걸어두고/발걸음 돌린다” 는 자조 섞인 발음이 독백처럼 발길에 매번 차인다. 유달리 붉어 핀 매화에다 흑매黑梅라 이름 붙여진 삼백 년 묵은 흑 매화도 한순간이다. 생명으로의 시적 주체로 각인된 흑매黑梅도 영겁의 세월을 건너려다 찰나를 방심하고 말았다. 못 맺은 인연에 대한 회한의 정념을 극한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코 앞 화엄의 뜨락에서 낙화로 시들어 갈 뿐이다. 해마다 죽음의 바깥세상으로 환생하듯 피지만, 기어이 죽음 안으로 시들고 마는 흑매黑梅 흩날리는 것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과 불교적 정진의 난망에서 오는 번뇌는 더 깊어지고 말았다. 스님의 화두처럼 성덕희 시인은 되레 인간의 시름 한 바랑을 떠 얹고 화엄사 산문을 나서고 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다면 여기저기 떠돌며 탁발 수행하는 스님처럼 마음 수행을 떠나야 한다. 바다 한가운데 바람 불어 작은 파랑이라도 일면 뱃길조차 끊기는 섬. 요즘에야 배가 좋아 어지간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마음속으로 수천 번을 상상해야만 가볼 수 있는 섬이 청산도다. 온통 하늘과 바다가 파랑으로 물들어 있는 「청산도를 걷다」에서 “먼 수평선까지 동참했던 물결도/발자국 풀어 갯벌에 드러누울 때쯤/진도아리랑 곡조가 녹아 있는/청보리밭 이랑 따라/서편제 황톳길을 따라” 걷다가 저무는 “서해바다 일몰에 잠겨”보지만, 마음에 이는 파랑은 수평선으로 수렴되는 바다처럼 쉽게 평상심을 이룰 수 없다. 생명의 원시성을 간직하고 있는 바다가 차마 범하지 못한 곳이 뭍의 원형인 청산도다. 수많은 해풍과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남기고 간 고독을 업보業報처럼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가는 섬이다. 세상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더 느려지고 작아지다 낮아져서야 온전해지는 청산도를 본다. 청산도는 태초 이후 지금껏 하늘보다 한치도 높아지려 탐한 적 없고, 한시도 뭍이 되는 꿈을 꾼 적도 없는 그냥 파도와 바다의 섬으로 남고자 하는 무욕의 섬이다. 시인은 당리 포구를 따라 “유채꽃 출렁이는 돌담 사잇길”을 걸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걸어야/오늘 같은 이 그리움, 걷어낼 수 있을까요”라며 되묻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무관한 청산도에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조차 민망한 일이다. 시간을 초월한 청산도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벗어던지면 된다. 풍경을 압도한 그리움이 커 사뭇 쓸쓸해 보이지만, 파도가 인간의 욕망과 고뇌마저 말끔히 씻겨가 버렸다. 시인은 언제나 고독을 무병처럼 앓고 산다. 고독과 그리움은 이종 세트다.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이 꼭 인간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독수리 별자리에서 길을 잃은 그날 내 깜빡이는 심장으로 들어 와서 저런 맥박을 짚어준 그대는 길잡이 목동, 나의 견우별이 되고
거문고자리에서 오르페우스의 황금리라 대신 베틀에 올라앉은 나는 울음이 그리움을 뽑아 실을 잣는 직녀가 되었습니다
-「별자리에서 길을 잃다」
에서 절대적인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빌어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별자리를 통해 인간이 갖는 욕망을 구현하려는 천상 시인이다. 세속적인 욕망이 고스란히 투사된 계기는 “독수리 별자리에서 길을 잃은 그날”이었다. 시인의 가슴에 “깜빡이는 심장으로 들어”온 견우별이 평생의 가슴앓이가 되었다. 시인 자신은 견우별만을 오매불망한 직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별자리의 신화 속에 농도 짙은 인간적인 욕망이 개입되면서 영원한 그리움의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내면의 구체적 열망을 실감나게 묘파 해냈다. 인간의 영역 안에서 신비를 더해 절대적인 신앙으로 존재한다 해도 언젠가는 잘 짜인 털옷의 올이 허망하게 풀리듯 한순간 무너져버릴 때가 온다. 그런 것마저 예감하는 시인은 사랑의 상징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다. 그 대안으로 “더 촘촘한 손짓으로/하늘비단을 짜야겠”다는 각오를 마법을 빌어 다지고 있다. 그마저도 정념이라 치자. 그리움의 극한으로 이룬 사랑이지만 기약 없는 만남에 대한 회한의 상심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총총한 별도 그런 면에서 불교적인 신앙의 대상과 다르지 않다면 또 다른 변주일 뿐이다. 우주 속에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미답의 신비로운 공간에 영원을 상징하는 별이 있듯 달도 있다. 「정읍사井邑詞를 읊다」에서 드디어 돌아올 님을 손꼽아 헤아리던 정념이 꿈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구절초 향기 내려앉은 가을밤/문설주에 기대어/환하게 어둠 풀어놓는 보름달 마주합니다/마당을 서성이고 있던 휘영청 밝은 달은/귀가하는 남편의 마중 길에도 자꾸만 따라옵니다/길들여진 세월, 되새김질 하는 사이/나는 고대가요 속 백제 여인이 되어/ 천년의 기다림,/정읍사井邑詞를 낮은 소리로 읊어봅니다/--중략--/서럽도록 고요한 달빛을 밟고 그이가 돌아왔습니다”라는 과거 완료의 전언이 서럽도록 기쁘다. 그토록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한 것은 절대적 신앙으로 주문하던 그리움을 더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오랜 몽환의 잠에서 깨어난 ‘아라홍련’이나 ‘정읍사’를 통한 사랑하는 님의 귀환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적 사유의 천착에서 이룬 시인의 간절함이 현실로 기꺼이 재현되었다. 700여 년의 죽음의 시간을 건너온 아라홍련의 씨앗에서 움튼 생명의 발화나 정읍사에서 무사 귀환을 염원했던 사랑하는 님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성덕희 시인의 시 세계는 익숙한 시적 풍경을 통해 감성으로 공감한 상상력을 화자의 심리로 변주하여 애환적인 보편적 정서까지 아우르는 데 있다. 마치 그런 사유의 세계를 익숙하게 드나들 듯 시적인 것에 대한 탐색은 지속될 것은 당연하다.
짧은 시간 두 시인의 생애 같은 시집 속 시편들을 가볍게 보았다는 미안함도 있다. 하지만 그것마저 예견된 인연이고 업보業報라고 본다면 마음에 둘 일은 아닐 것이다.
박철영 1961년 전북 남원 식정리에서 태어나, 2002년 《현대시문학》 시, 2016년 《인간과 문학》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 『월선리의 달』. 『꽃을 전정하다』가 있으며 산문집 『식정리 1961』이 있다. 숲속시 동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