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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오(咸吳) 세거지(世居地) (2) 영양으로 (移于英陽)
족보(族譜) 에 이르기를 6세(世) 觀察使公 휘(諱) 엄(儼)짜 어른의 증손(曾孫),
곧 시조(始祖) 함양군(咸陽君) 부터 9세(世) 되는 휘(諱) 필( 삼수변에 畢)짜 분이
진보(眞寶)에서 영양 원당(元塘)으로 옮겨 왔다고 했습니다.
(自眞寶于英陽縣東元塘里)
이 어른의 졸년(卒年)이 그전 무오보(戊午譜)(1978) 까지는
계축(癸丑)으로만 나오다가 이번 무인보 (戊寅譜)(1998) 에는
서력(西曆)을 병기하여 1493년 성종(成宗) 계축(癸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윗대와 아랫대의 연결상
이 분의 졸년(卒年)은 1493년 (成宗) 계축(癸丑)이 아니라,
1 주갑(周甲) 내려 간 1553년 (明宗 8년) 계축(癸丑)이어야
앞뒤가 맞을 것 같습니다.
족보 외는 아무 참고 기록이 없는 저로서는 더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만
혹시 방대한 기록을 일일이 손 보다 보니 착오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한자 적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 갑니다.
9세(世) 휘(諱) 필(滭)짜 분이 진보에서 영양으로 옮긴 것이
(自眞寶于英陽縣東元塘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돌아 가신 해 1553 년 (저의 짐작) 보다 이른 어느 해가 되겠지요.
그러니 우리 함오(咸吳)가 영양(英陽)서 살기 시작한 지는
아무리 내려 잡아도 450 년이 넘었습니다.
이 어른 산소 비릿골과 영양 어디로 옮긴지?
는 다음 제 3편글에서 다루겠습니다.
임하에서 진보 거쳐 영양 들어가는 길을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보겠습니다.
대동여지도 중 안동 영양 부분
좌하단에 안동이 있고 그 아래 영호루(映湖樓) 글씨 동쪽에서 물길이
둘로 갈립니다. 윗 물길이 지금 안동댐이요, 아래쪽이 임하댐입니다.
안동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에 눈금표시가 되어 있는 데
다섯번째 눈금에 책가(冊街)라고 쓰여 있으니 ‘책거리장터’ 라고
부르던 곳으로 지금은 임하호 물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책거리 장터를 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91년 가을 수몰직전 입니다.
‘책거리장터’는 이 지역에서는 대단히 중요했던 곳으로 옛날에는
안동보다 더 번화했다고 합니다.
책가(冊街)-책거리장터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 데 동쪽 길로 가면
추현(楸峴) 표시가 있으니 우리말로 ‘가랫재’ 입니다.
가랫재 는 우리나라에 이 말고도 여럿 있는 데, 가래나무는 별로 없으니
이름이 가래나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재에서 길이 갈린다고 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님 말고요 ^^
추현(楸峴) 가랫재를 넘으면 진보(眞寶)입니다.
진보(眞寶)는 지도에서 보다시피 동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 오는
중요한 길목으로 고대(古代)에는 중요한 곳으로 안동 보다 먼저 생겼습니다.
신라말기에서 후삼국(後三國)시대 각 지역에 군도(群盜) 군웅(群雄)들이
할거 할 때 진보성 (眞寶城) 장군의 이름이 나올 정도 입니다.
진보에서 남쪽으로 가면 청송(靑松) 이요, 북으로 가면 영양(英陽) 입니다.
입암(入岩)
대동여지도에 영양(英陽) 바로 못 미처 두 물길이 만나는 곳이 있으니
입암 (入巖) 입니다.
아래 사진은 제가 작년 고향 갔을 때 찍은 사진 입니다.
오른 쪽 물길은 일월산(日月山) 에서 나와 영양을 동쪽에서 휘감아 도는
장군천 (將軍川)이니 따라 올라가 대동여지도에 대천(大川) 글씨가 있는 곳이
영양4파의 대종가 (大宗家) 용계 (龍溪)공파 세거지 한내 입니다.
왼쪽 물길은 청기천(靑杞川)으로 우재(愚齋) 취수당(醉睡堂) 두 파의 세거지
(世居地) 청기(靑杞)가 나옵니다. 옛날 걸어 다닐 때는 영양읍에서 재
(여름재 또는 예우름재 )를 넘어 청기 들어 갔습니다만, 요즈음은 보통
입암에서 자동차로 들어 갑니다.
대동여지도를 이 지역을 중심으로 잘라서 다시 한번 더 봅니다.
영양 (英陽)
영양(英陽)은 마치 배춧잎 벗기듯 한 겹 산 안에 다시 산이 있고
그 안에 또 산이 있어, 아무리 들어가도 계속 산인, 문자(文字)
그대로 첩첩산중 (疊疊山中) 입니다.
직년 고향 갔다가 새삼스레 깨달은 것은 안동 쪽으로 나갈 때는 그래도
얼마간 논이 있는 데, 봉화 쪽은 자동차로 수십 킬로 달려도 논 한 뙈기
없이, 산을 쪼아 만든 산전(山田) 뿐입니다.
영양, 봉화 일대가 심하지만 일반적으로 경상좌도 북부는 어려웠습니다.
특용작물 하기 전에는 제법 산다는 집도, 평야지대 사람이 볼 때는
거의 굶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치는 오묘하여 골이 깊으면 산도 높듯이
무슨 일이든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헝그리 스피릿( Hungry spirit)이 있지 않습니까 ?
옛날 어른들이 ‘아침 굶으면 글 읽는 소리 더욱 낭랑해 졌다”
고 꼽는 집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이런 사정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 좌도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비록 군색하게 살아도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 (左道則 土瘠民貧 雖儉嗇而多文士) “
이중환은 색목이 소론(少論)으로 노론(老論)에게 워낙 설음을 당해서 인지
남인(南人)과 친했고, 그러나 보니 남인(南人) 의 본거지 경상좌도에 대하여
위 글뿐 아니라 전편에 걸쳐 특별히 후하게 쓴 느낌입니다.
이렇게 메마른 땅이지만 많지 않은 인구라면 부양할 만 하고,
입암(入岩 선바위) 이라는 고인돌에서 유래한 지명이 있고 또 실물도 있으니,
아득한 옛날부터 영양(英陽)에 사람이 살았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인돌 이라면 석기시대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실은 청동기(靑銅器) 시대로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3500 년에서 2500 년 전 사이 입니다.
대략 서기 200 년 경 까지는 다른 경북일대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판도로
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 후 내내 신라 땅 이었을 것 같지만
고구려 팽창-남진정책 시기 그 영향권에 들어 간 적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광개토왕비문에 공취성(攻取城)과 왕릉 수묘인(守墓人)으로
이 일대 지명이 나올 정도 입니다.
다음 지도는 어느 학자가 재현한 광개토왕의 진격로 입니다.
고구려 공격로는 대략 오늘 날 중앙고속도로 또는 동해안을 따라서
들어 온 것 같습니다. 동해안 침투루트는 6.25 때 공산군도 썼고
그 뒤 무장공비가 심심찮았지요.
영양 (英陽)의 설음
영양은 군(郡)이 작다 보니 역사적으로 내내 이리저리 치였습니다.
면적은 821 제곱 km 로 서울의 약 1.3 배 이나, 인구는 1909 년에
38,000 명 가량 이었다는 데, 지금은 2만이 채 될까 말까 입니다.
군(郡)을 유지하려면 인구 2만 이상이다 라는 기준이 있는 모양으로
이러다가 혹시 폐군(廢郡)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들을 합니다.
과거에 실재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라시대 영양(英陽)은 고은(古隱)으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는 영양현(英陽縣) 과 청기현(靑杞縣)이 있었습니다만
이때 - 고려 때는 아직 지방행정조직이 미발달한 시기로
과연 실재로 현(縣)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아마 이름만 정해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현縣)이 있었다 없었다 다른 도호부(都護府)에 붙였다
말았다가 반복된 듯 한데, 조선 후기는 주로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에
속했습니다.
문제는 영해부(寧海府) 가 상당히 멀 뿐 아니라,
영양 -영해 사이에는 전에 태백산맥, 요즈음 다시 유행하는 산경표 상
낙동정맥(洛東正脈)에 걸려 있는 험한 재를 넘어야만 합니다.
이 재가 얼마나 험한지 이름이 ‘울팃재’ 한자로 읍령(泣嶺) 입니다.
구글 위성지도에서 이 재를 보겠습니다.
현재 영양에서 영해 가는 918번 도로 중간에 있는 재 로서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청춘’ 에도 이 재가 배경으로 나옵니다.
소설 본지가 오래 되었는 데… 소설상 이름은 아마 하늘재 인가 그럴 것입니다.
아.. 영양사람 중 유명하기로는 한양 조씨 조지훈 시인과,
재령 이씨 이문열과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총무가 있습니다.
우리 함오(咸吳) 에는 아직…..
제 나이는 틀렸고 어린 후손들의 분발을 빌 뿐입니다. ^^
이 울팃재를 넘다가 짐승에게 물리거나 도적 만나거나 얼어 죽는 일이
많았고, 그렇게 까지는 아니라도 그 어려움이 말도 못한 모양입니다.
청기에서는 영양 사이에 여름재 또는 예우름재가 더 있습니다.
이러니 관청 일을 보거나 부역을 하거나 공물을 가져가 바칠 때
가기도 전에 다 진이 빠지는 판 입니다.
게다가 영해부(寧海府) 본부 사람들이 텃세까지 부린 듯 합니다.
당시 영양 사람들 표현에 “府人奴視縣人“ 영해부 사람들이 영양사람
보기를 종놈같이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 보면 웃깁니다만 제 군대생활 할 때 다 같이 영장 받고 와서
어쩌다 본부중대 있다고 예하 말단부대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영양(英陽 사람들은 인조 4년 (1633) 부터 숙종 9년 (1683) 까지
50년 간 조정에 복현(復縣)해 달라는 상소(上疏)를 줄곧 올립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중 하나를 봅니다.
(조선왕조실록사이트 :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에서
원문(原文), 국역(國譯) 어느 쪽이나 쉽게 검색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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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년 (1675) 9월 19일 (갑진)
영해(寧海) 속현(屬縣)인 영양(英陽)의 유학(幼學) 조책(趙?) 등이
상소하여 옛 현(縣)을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기를,
“영양은 영해와의 거리가 1백 여 리(里)이고, 먼 곳은 또 8,90리를 더 가는데,
세 번이나 준령(峻嶺)을 넘고, 백 번이나 험한 여울을 건너며
범과 표범의 두려움과 도적의 경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이를 괴로와하여 산은 ‘읍령(泣嶺)’이라고 일컫고,
고개는 ‘행곡(行哭)’이라고 부르니, 까닭이 있습니다.”
하고, 또 영해의 침해하는 열 가지 폐단을 조열(條列)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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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영해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지 ?
당시 상소문이 저로서는 흉내를 내지 못할 정도 입니다.
직접 체험과 글로 느끼는 것에 차이인 듯 합니다.
이 여정을 대동여지도에서 한번 더 보겠습니다.
지도 2장을 이어 붙여 스캔 떳더니 이음매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영양-영해 사이 길을 나타내는 선에 눈금이 있는 데
한 눈금이 아마도 10리 일 것입니다.
세어 보니 10개라 100 여리라는 말이 맞고 그것도 험준한 산길 입니다.
대동여지도에는 읍령(泣嶺) 표시가 훨씬 아래 쪽으로 되어 있는 데
제가 한글로 다시 쓴 곳으로 와야 합니다.
한글 읍령 윗쪽 물길에 줄을 그었는 데 이름이 서읍령천(西泣嶺川 ) 입니다.
읍령(泣嶺) 서쪽의 개울이란 뜻이니 한글 표시위치가 맞지요.
아무튼 이런 영양사람들의 상소에 영해(寧海) 쪽 방해 공작이 들어 옵니다.
왜냐하면 영양이 빠지는 만큼 자기네 고을 세력이 줄 것 아닙니까 ?
그러다 보니 두 고을 사람들 감정의 골이 엄청 깊어진 듯 합니다.
이런 경우는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당에서 세금 걷어다가 성남 구시가에 다 쓴다고 분당 사람들이
딴 살림 차리려고 아무리 청원을 넣어도 성남시에서 들어 줍니까 ?
그렇다고 중앙정부가 서뿔리 누구 편도 못 듭니다.
당시 조정도 영양 사람들 상소를 계속 기각 합니다.
실록기사 중 하나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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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 5年 (1664) 4月 6日 (戊戌)
상이 이조에 내려보냈다. 이조가 아뢰기를 (吏曹以爲)
“영양이 영해의 속현이 된 것은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英陽之爲寧海屬縣, 其來已久)
만일 관문(官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으로 말한다면
큰 고을의 속현으로서 이와 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則大邑屬縣, 如此者非一)
현의 백성이 진소한다고 해서 경솔하게 다시 설치하는 것을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若以距官門絶遠爲言, 不可以縣民之陳訴, 輕議復設
하니, 상이 따랐다. (上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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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관료들도 대략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
생기는 것도 없이 잘못 손 대었다가 괜히 다칠까 몸 사리겠지요.
이러니 속이 타는 것은 영양 사람들 뿐 입니다.
정 복현(復縣)이 힘들면 진보(眞寶)현에라도 붙여 달라고 청원 합니다.
1안은 독립된 현(縣) 이요
2안으로 진보(眞寶) 쪽이라도 붙는 것이 낫다는 것이지요.
지도를 보면 영양-진보 사이는 영해 보다 훨씬 가까울 뿐 더러
험준한 산맥이 없습니다.
이건 받아 들여져서 숙종 4년 (1678) 에 일시 진보현(眞寶縣)에 속했다가
숙종 9년 (1683) 년 소(疏) 를 올리기 시작한 지 50년 만에 드디어
대망의 복현(復縣) 즉 영양현(英陽縣)으로 독립을 이루고
더 크게는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관할이 됩니다.
오늘 날 영양 사람들이나 안동 인근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고향 말할 때
안동입니다. 안동 근처 입니다 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자세히 이야기 하다가 안동시가 아니면서 안동이라고 하다니 하고
머쓱해지는 일도 있습니다만 이 근처가 옛날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관할로 이 지역 사람들은 공통으로 안동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대구 사람이 경북이라고 하면 거짓말 입니까 ?
오늘 날 행정구역은 구별이 되고 있지만 !
이무튼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으니, 인구 적다고 혹시 폐군(廢郡)되지
않을까? 하고 영양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이상 이번 글의 행로를 구글 위성지도에서 나타내 봅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이런 것도 있습니다.
“ 당대에 타관에서 영양 (英陽)으로 들어오면 돈을 벌 수 있으나
당대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글쎄.. 듣느니 처음이나…
제가 고향이 영양이다 뿐 산적이 없어놔서..
고향 어른들한테서도 이런 말 들은 적이 없는 데…
워낙 산이 깊어 한번 들어오면 나가지 못한다는 뜻에서 생긴 것일까요 ?
그러나 그 옛날에 영양 들어와서 돈 벌 일이 뭐 있긴 했습니까 ?
자…. 다음 3편은 영양4파의 대종가(大宗家) 용계(龍溪)공파 한내(大川)
4편은 순서 상으로는 청기 이나 제가 필(筆)을 잡고 있으니
취은당 (醉隱堂)파 구도실(道谷)을 다루고
5편에서 우재(愚齋) 취수당(醉睡堂) 두 파의 세거지(世居地)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나는 상상이 안가요 그렇게 많은 내용을 수집한것도 그렇고 아는게 넘 많아서요 하여튼 수고 많으셔요 대단하구요 많은 함오 사람들이 와서 봐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햐 정말 대단하셔요 이렇게 많은 자료와 정보 놀랍기만하군요 많은
친님들이 함께 보면서 행복해지셨슴해요 오대댁손자님께서 우리 
친님이시라는게 너무나 자랑스럽구요
역시 선장님 안목은 그또한 대단하시구요 그쵸
^^*
시간.부족하여.대충보니..기대이상으로...함오씨의..역사의..한페이지가되겠읍니다..대단하고..앞으로..이글들..함오씨들..영양이..고향이신. 분들의..역사서가...되겠읍니다...전국적으로..이글완성되면..책한권.출판해도..되겠네요.. .
책은 무신 잡문(雜文) 몇줄 가지고요... 그런데 중국 가신다더니 벌써 오신 겁니까 ? 아니면 중국에서 보시는 것입니까 ? 인터넷에서는 국경구분이 없어 놔서 ^^
어제왔읍니다...중국의..삼국지의..무대을..다녀왔어요..유비..현덕..장비..사당과..역사도..보고..사진도..630장..정도찍어왔읍니다...정리할려니..이것도..시간이..필요할것같네요...
내용이..방대한..역사의..종합판이라...한두번..보아서..이해할수..있는상황이아니고..시간..많을때..꼼꼼히..추적조사해야할..상황입니다..하여튼..대단한..일.. 함양오씨들...영양이..고향이신..종친들의...역사을..시원히..조명하고..밝혔으니...두고두고..후배..후손들이..보고..배울거라..봅니다...고향이영양이신분들...읽어보면...행복해..하시겠네요...내!1.. 그리운고향에...이런..역사가..숨어..있었노라고....
내..아버지의..고향...남원..대강면..입암..마을도..세덕편보니...임진난에...피난으로...오지..시골을..찾아..정착하였드라구요...약.450여년..전이드라구요...일치하는것보아...그때..당시..함양오씨들도..난피해...오지에..정착..한것같아요...
함양오씨들의...전체적인...연구에는...수년...십수년이..필요할거라..봅니다...많은량..모아지면...CD..저장하고..함양오씨들의..역사의..발자취란..책..발행..생각해도...기념이..될것같네요...개인에겐...기념과..영광이되고...후배..후손들에겐...길잡이가되고...알고..배우고자..하는이들에겐...너무좋은..선물이..될것이기에...이런..꿈!!..갖는것도...정신건강에..좋고...아들..손자들이...후손들이....책만든것..자랑스러워...할겁니다...영원히....
계속..기대합니다...많은것...배우네요....재미있고...그리고..영양이...함양오씨들의...선조의책들을..제일만이..보관하고..쓰셨으니...그책들..조사해보세요...오예원씨..말들으니...내모르는책들...많다든데...같이조사해..보고..싶네요..
#오박사님 책을 펴내셔야겠습니다 우리 오박사님 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요
왜 그생각을 못했나


^^*태풍피해 없으시죠
선장님말예요

허리아퍼...인터넷..오래못해요..더욱이..인터넷..왕초보라...다양하게못해요..뎃글외에는..기술없어요..그리고...시간이..없어요..
오대댁 손자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이렇게 방대한 자료 수집 하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 하신것 같네요...오늘에야 올리신걸 보고 무척 놀라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자료 많이 올려 주실것을 당부 드립니다.. 오박사님도 중국 무사히 잘 다녀 오셨다니 다행이구요 건강은 좋은신지요..자주 뵙기를 희망 합니다....^^*
총무님..이글.보셨다니..영양의..선조님의..발자취을..따라..선조님들의삶을..이해하고..생각해본다는것은..고향이라면..더욱. 진.할겁니다..이글.앞으로..쓰게될..용개공..우제공..취수공..취은공..문월공..선조님의..발자취와..삶과..덕을..함께배우고..읽어..기립시다..이길이..고향..영양을..아끼고..사랑하는마음이라봅니다... 어떻게하면..많은분에게..읽일수..있을지..전화하여..보도록하세요..영양분들에게...
며칠동안 서울에서 부재중이었더니 새로운 소식과 좋은 자료들 많이 나왔군요. 오대댁손자님 우리선조님 발자취찾아 내시느라 수고많습니다. 나는 청기에서 태어났은데도 처음접하는 것이많은데? 앞으로도 계속좋은 자료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