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쪽지 예수사랑 가족사랑 2012년 9월호
표적(標的)과 족적(足跡)
미국 시골의 통나무 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 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to move the rock)말 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to push again the rock)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그는 거울 앞으로 갔는데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었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하나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에 생겼습니다. 삶에서 ‘바위를 옮기는 표적’보다 ‘바위를 미는 족적’이 더 중요합니다. 족적보다 표적을 중시하면 내리막길 인생이 되고 표적보다 족적을 중시하면 오르막길 인생이 됩니다. 나는 지금 표적을 중시하면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족적을 중시하면서 살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성적스캔들로 한국교회에 큰 아픔을 주었던 유명 목회자가 홍대앞에서 교회를 개척했다는 말을 듣고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김 영 근 목사<예수사랑, 가족사랑 발행인>
2012년 9월 가족치유회복중보기도
상담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비밀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상담자가 비밀을 지켜주어야만 내담자가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가 있습니다. 내면의 이야기는 부끄러운 치부이거나 체면이 손상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하고 싶지만 쪽팔리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치유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권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는 쪽팔리는 이야기를 사람들하고 나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내담자에게 안정자아를 선택하지 말고 모험자아를 선택하도록 권면합니다. 모험자아를 선택하는 내담자는 자신의 속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치유를 경험합니다. 기도의 제목을 나눌 때도 우리는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도의 제목을 나누면 좋아요. 노출을 두려워하면 기도제목조차도 추상적으로 나누게 됩니다. 인터넷 강국인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빠르고 편리한 인터넷이 사람들에게 중독증세와 주의력 결핍증을 가져오고 사람들 사이에 건강한 교제를 방해합니다. 컴퓨터로 인한 청소년 나홀로족이 증가한다는 서글픈 이야기도 듣습니다. 어떤 것도 지나치면 그것은 득이 아니라 해가 된다는 진리를 다시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빠른 인터넷 문화를 절제하고 식구들끼리 대화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중보기도자가 됩시다
1. 가족중보기도는 개인•교회별로 정해진 시간에 하루 1회 이상씩 합시다.
2. 이웃 가정을 위해 중보하기를 원하는 여러분이 참된 중보기도 사역자입니다.
3. 내가 살고 있는 <시ㆍ군ㆍ구>에 있는 가정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합시다.
<일반기도제목>
첫째, 가족식구들의 상한 마음을 건강한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옵소서!
둘째, 내가 먼저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가족 안에 용서를 실천하게 하소서!
셋째,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하소서!
넷째, 가족식구들의 생각이 합리적인 생각과 성경적인 생각으로 바꿔지게 하소서!
<특별기도제목>
첫째, 이 땅에 성추행과 성폭력과 살인행위가 사라지도록 하소서!
둘째, 학교사회가 경쟁으로 전쟁터가 아니라 사랑과 배려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셋째, 인류가 탐욕을 버리고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는 지구촌에 회복을 주소서!
넷째, 일본사회의 지도층이 양심을 회복해서 역사앞에 진정한 참회를 하게 하소서!
김영근의 가정행복교실9
순종의 미덕(美德)
현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순종입니다. 현대인들은 순종은 구시대의 유물로서 자신의 인격과 가치관과 자존감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순종을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미덕으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의 처인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나의 주’(主)라고 호칭하면서 존경을 표시했습니다(창18:12; 벧전3:6). 시어머니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서 힘든 생활을 시작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 지역의 유력자인 보아스의 침실에 들어가서 그와 동침하라는 말에 순종합니다. 정숙한 여인 룻이 보아스와 동침하라는 나오미의 권면은 순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자신의 죽은 남편의 가문을 이어주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믿고 룻은 순종합니다(룻4장). 불순종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태도에 실망하고 있는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순종의 모델로서 레갑족속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선조인 요나답의 지시에 순종합니다. 그 지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고 파종도 하지 말고 포도원도 만들지 말고 오직 장막에서 양을 치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렘35:1-19). 조상의 명령이지만 세속의 재미를 포기하고 문명의 편리함을 거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레갑족속은 여러 세대를 거쳐서 선조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고(엡6:1-3)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엡6:22-24) 말씀합니다. 성경은 자녀들에게만 일방적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권면하지는 않고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도록 권면합니다(엡6:4). 또한 아내에게만 남편에게 순종을 강조하지 않고 남편도 아내를 예수님의 교회 사랑처럼 사랑하도록 권면합니다(엡5:25).
많은 가정에서 순종이 떠나간 뒤에 불순종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순종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자녀들은 왕자병과 공주병에 걸려서 부모들이 왕자와 공주의 몸종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자녀들의 비위를 거스리면 부모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될 지경입니다. 부부관계는 어떠합니까? 아내가 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옛날 일이 되었고 남편이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도 흔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반사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에서 있어야 할 순종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순종이 채우고 있습니다.
마땅히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 반항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경우를 성경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서를 보면 다윗왕의 처인 미갈은 법궤의 예루살렘입성을 기뻐하는 남편 다윗을 저주하면서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권력을 빼앗고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순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인생행로는 불행합니다.
노아에게 셈, 함, 야벳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술이 취한 아버지에 대해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면서 순종의 길을 걸었는데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놀려대는 불순종의 길을 걸으면서 저주를 받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가정이 해체위기를 겪는 것은 권위의 인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순종이라는 의(義)에 권위를 드려 예수님에게 순종의 삶을 살 것인가 불순종이라는 죄(罪)에 권위를 주어 사탄에게 굴복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가정에 순종이 없다면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되고 혼돈이 일상이 됩니다. 혼돈이 일상이 된 가정에는 방향성과 목적성이 상실됩니다. 혼돈된 상태의 가정에서 부부생활이 이루어지고 자녀교육이 이루어지면 불안정으로 인해서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됩니다. 혼돈이 계속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위기를 경험하게 되고 그 공동체에서 건강한 관계는 상실되고 그 가족공동체의 자녀들은 건강한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미국 뉴저지에서 이민교회를 섬길 때 두 딸을 둔 여자 성도는 딸들의 중학교에는 일본인 학생들도 있어서 그 학부형들과 만남을 종종 가졌답니다. 일본인 학부형들은 한국학부형들이 자녀들을 가정에서 심부름이나 집안일을 협력하는데 동참시키지 않고 공부만 강요하는 태도의 위험성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지적은 청소년기에 가정일에 협력하는 태도보다 개인의 학업성취에 우선을 두는 것은 자녀들의 건강한 인격교육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답니다. 일본인 학부모의 지적에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자녀교육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답니다. 자녀들이 순종을 배울 시기에 그들의 성적향상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것은 인격성장의 큰 상실입니다.
치유목회칼럼 13 나의 치유목회 /예종규목사(성도교회 원로)
힐링(Healing) 목회 - 전인(全人) 치유(治癒)
우리는 마음에서 오는 질병의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부릅니다. 이 스트레스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심리 현상이기 때문에 약으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과거 바이러스성 질환일 때는 병원에서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스트레스성 질환은 고치는 대신 대증요법(對症療法)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20C 후반부터 심리 치료, 내적 치유, 상담 치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 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상담교사로 임명받으려고 상담교사 양성 세미나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로 인간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가져다주는 것은 죄책감(罪責感)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격심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면 신체상에 여러 가지 병적 증상이 나타나는데 죄책감이 없는데도 꼭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즉 죄의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체상에 발병하는 것은 인간의 죄의식이 무의식 속에 들어가 그 속에 있는 죄의식이 사망(죄의 삯)의 독소를 뿜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유연상법(自由聯想法)을 사용하여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죄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불러내어 이 죄책감을 없애 주면 신체상의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기초입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을 해소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혼외정사를 한 사람의 간음죄의 죄책감을 논해 보자면, 무릇 죄라는 것은 인간이 정한 법이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성립되는데 이 때 죄책감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심리학에서는 이 법이나 윤리는 신이 내려주신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이 정한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임을 강조 합니다. 실제 지금부터 100 년 전 만하더라도 남자가 외도를 하든가 첩을 두는 것은 당연한 행위로 봤습니다.
과연 20C 후반부터 사회 윤리는 설자리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 윤리는 소멸되고 심지어 동성애를 합법화 하는 추세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상담 심리학이 교회에 들어와서 무분별하게 힐링(Healing) 목회에 오용되는 경우가 있음은 안타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학 공부를 하던 중 "기독교 상담학"을 공부하다가 깜짝 놀랄 일을 발견 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상담학이 일반 상담학과 달리 죄의식을 해소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혼외정사를 볼 때 무의식에 숨어 있는 죄책감을 찾아내어 윤리의 상대성을 부각시켜 죄책감을 소멸시키는 일반 상담 방법과는 정 반대로 기독교 상담은 혼외정사는 간음죄이고 이 죄를 범한 자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음으로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된다는 진리를 알게 하고 회개를 하게 하면 일반 상담 보다 더욱 강력한 힘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전인치유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인치유"란 한 인간이 영적, 정신적, 신체적 차원의 전인적 치유를 의미합니다. 영과 마음과 몸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합해서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성서가 의도하는 우리의 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16-23)
약과 의학은 몸의 병을 치료하고, 심리학인 내적치유는 마음(혼)의 병을 치료하여 이로 인하여 생긴 몸의 병도 함께 치료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영의 병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영의 병은 오직 성령의 능력과 말씀으로만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여도 영이 병들면 마음도 몸도 병들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표준 새번역 요삼1:2) 이 말씀대로 영혼이 평안하면 전인(영, 혼, 몸)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이제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과거 바이러스성 질환일 때는 약과 의학이 치료에 효과적이었으나 스트레스성 질환 시대인 지금은 영혼이 평안해야 전인치유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성령과 말씀으로 전인치유가 가능한 힐링(Healing)목회를 할 때입니다.
김희라의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자(31)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
몇 해 전 9월이다. 왠지 그동안 살아온 삶이 다 헛것 같고 늘 예배와 일상의 일과 봉사들을 해내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때에 상담자원봉사자선생님들과 함께 음성꽃동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글귀가 있는 벽 앞에서 멍해졌다. 원하면 음식을 언제든 만들어 먹고, 사먹고 그리고 가족과 교회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던 나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밥 동냥을 해 18명의 병든 다른 거지들을 먹여 살리는 최귀동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이야기는 감동이었다. 안내하는 분을 따라 서로의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곳으로 갔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어떤 이는 눈과 귀가 되어 주고 또 어떤 이는 기저귀를 차고 가만히 돌봄만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하늘의 평안과 소담스럽게 웃는 여유가 넘쳐났다. 나는 그들이 못 가진 눈과 귀, 손발, 못난 마음으로 인해,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다.
나는 행복합니다
배 영 희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수 있는 죄악
피해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남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 한편을 남기려면 대필을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한다. 열아홉 살에 뇌막염을 앓아 앞도 보지 못하는 전신마비 중증 장애인이었던 시인은 충북 음성군 꽃동네에 들어가 살다가 서른일곱 살에 하늘나라로 갔다.
가진 것이 없어. 성공을 이루지 못해 불행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베풀지 못해서 사랑받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요 감사 감사이다.
문형욱의 젊은 청춘을 향하여 9
짝!
짝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 짝 > 둘 또는 그 이상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 또는 그중의 하나. 짝은 한 쌍을 이루는 것이다.
요즘 한 방송사에서 데이트 관련 프로그램이 방송중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 프로그램에 푹 빠질 때가 있다. 이유는 이성간의 한 쌍을 만드는 짝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자신의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져가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어떤 이는 작은 이슈로 인해 짝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옳은가? 라는 이야기는 우문일 수 있다. 세상살이에 정답이 있을까?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못내 아쉬운 것은 이성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대부분 출연자는 첫인상에 반해서 그리고 잠깐의 자신을 소개한 이후에 마음을 정하곤 한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대쉬를 한다. 여성은 간접적으로 남성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적극 표현한다. 그리고 난 후 상처를 받는다. 눈물도 보이면서… 짝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 믿음의 지체들은 반드시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가 없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상처를 남기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옳을까? 많은 청년들은 이렇게 짝을 위해 기도한다. “주님, 저 자매(형제)의 마음을 움직여서 저를 이해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는 주님께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주님이 예비해두신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저의 눈이 예수님의 눈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눈으로 이성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상대방도 예수님의 눈으로 저를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를 한다. 그리고서는 혼자 확신을 갖는다. 기도한 후에 만난 형제(자매)이니 주님이 주신 배우자 일거야… 기도의 마음속에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고 오직 같은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말이다.
“짝”은 대부분이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선호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청년이 있다. 이유는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사람들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에게 끌리게 되어있다. 그래서 처음 교제 할 때는 매우 흥미롭고 즐겁지만 교제를 할수록 어려움이 느끼는 이유이다.
내 자신이 건강하면 건강한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청년들은 건강한 청년을 만남으로 하나님께 더욱 큰 영광을 돌릴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은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며 배우자를 만나려고 하는지 아니면 상처를 숨기며 나와 같이 상처가 많은 사람을 보며 이성적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하길 바란다.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상담사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을 받아 건강한 마음으로 짝을 찾길 바란다.
김영근의 마음치유여행 10
- 일상도의 행복 -
일상도를 사는 사람들
눈물의 선지자 에례미야는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가 구약성경 예레미야29장입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꿈은 오매불망 고국으로의 귀환입니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눈을 감아도 고국산천이 보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동포들에게 일상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렘29:5-7)
포로생활에서 탈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하여 들려준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평범한 일생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집짓고 그 곳에 살고 농토를 일구어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서 먹고 살며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살면서 그 자녀도 결혼시켜서 대를 이어 그곳에서 살고 특히 이웃사람들과 잘 지내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고국의 해방과 새로운 건국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권면대로 일상도의 삶을 살면서 독립된 안정된 나라없이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서 위대한 민족으로 변화됩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베들레헴으로 온 모압 여인 룻이 할 수 있는 일도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양식을 위해서 보리이삭을 줍고 그 이삭을 타작해서 가루를 만들고 그 가루로 음식을 만들어먹는 일이었습니다. 일상도의 삶을 사는 룻은 좋은 신랑인 보아스를 만나서 이스라엘의 명문가정인 다윗가문의 조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삶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도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면서 아버지를 따라서 목수의 일을 충실했습니다. 일상도에 충실했던 형님 예수가 집을 떠나 전도자의 삶을 시작할 때 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날 그날에 만족하는 생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일상생활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어부였다가 부름을 받았던 베드로와 안드레는 열심히 그물질을 해서 고기잡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도 열심히 그물질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제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평판이 좋지 않은 직업이었던 세리로 생활했던 마태도 세금징수원의 직업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시대의 기드온은 사사로 부름받기 전에 열심히 타작마당에서 일했던 농부였습니다(사사기6:11). 다윗왕도 부름받기 전에 열심히 목동으로 신실한 삶을 살았던 청소년이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선지자로 부름받기 전에 드고아 지역에서 면서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를 치면서 목자로 일했던 사람입니다(아모스1:1).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지난 8월 15일에 만났습니다. 저희들은 80여명이 졸업을 했습니다. 물론 입학할 때 학생들은 더 많았지만 여러 명의 친구들이 5, 6학년이 되면서 집안에 일손이 딸리니까 학교를 그만두게 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돈을 좀 번 친구들도 있었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시골에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주다가 도회지의 공장에 와서 적은 봉급을 받고 열심히 일하다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고 자녀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얼굴에는 인생의 경륜이 배어있었습니다.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입니다. 여전히 일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여자 동창들은 벌써 할머니가 되어서 손자ㆍ손녀들을 열심히 돌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종종 듣습니다. 이들은 중독된 사람들입니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도 있고 주식에 중독된 사람도 있고 돈에 중독된 사람도, 알콜에 중독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일상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일확천금을 꿈을 꾸었던 사람들입니다. 무엇인가 짜릿한 것을 경험하고 싶었고 자신의 생애에 쨍하고 해 뜰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일상도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이 지루할 뿐입니다. 무엇인가 자극이 있어야하고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합니다. 된장찌개만으로 안되고 특별메뉴가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행운을 기다리면서 부동산을 투기하던 남편이 있었습니다. 툭하면 사기죄로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러한 무책임한 남편이 떠난 자리를 부인이 채우면서 일상도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녀는 시장에 좌판을 놓고 장사하면서 가정을 꾸려갔습니다. 구치소에서 출감한 남편은 가정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성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남편의 무책임에 분노한 아내가 남편의 요청을 거절하자 사춘기딸을 성추행해서 가정의 비극을 만들어냈습니다.
혁명의 전사에서 일상도의 섬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평범한 전도대로 출발했지만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고 사람들이 몰려오자 특별한 변화를 원했습니다. 특히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서 이스라엘의 독립이라는 큰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권력행사의 자리에 앉게 되는 문제로 다툼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우편자리와 좌편자리를 요구했고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에 분노했습니다(마가10:35-45).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김을 감당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의 사람들이 바로 일상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영웅들이 위기에서 구해주고 특별한 시대를 열어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변혁을 가져온 한강의 기
적도 역시 일상도의 승리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1960년 말에는 일자리가 없어 양묘장(養苗場)에서 일했던 초등학교 여자 동창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한 달 임금이 삼천 원이었는데 이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양묘장 감독에게 잘 보여야 했습니다. 양묘장에 일이 없어지자 이들은 서울의 구로공단으로 옮겨갔습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용산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열악한 환경에서 소위 공순이와 공돌이가 되어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이들은 일확천금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 적은 수입이지만 하루 하루에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수고와 땀이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경제적 부흥도 따지고 보면 일상도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입니다. 일상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억울하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그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손해를 본다고 분노하면서 싸우지 않고 오히려 묵묵히 섬김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제몫을 분명히 챙기겠다는 사람들은 많아지면 세상은 삭막해지고 여유가 없어지고 재미가 없어집니다.
1975년 봄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박정희의 유신정권에 도전하기 위해서 춘계학술강좌 마지막 강사로 김옥길 이화여대총장을 세웠습니다. 이 분의 강연을 듣고서 반정부데모를 거창하게 시작하겠다는 것이 총학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운동의 핵심인 연세대의 김동길교수가 이 분의 남동생이었기에 적절한 강사였습니다. 그런데 김옥길총장의 강연내용은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데모할 생각을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내기 대학생으로 민주화투사가 되겠다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김새는 강연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고인이 되었지만 이 분을 생각하면서 일상도의 가치를 종종 생각합니다.
일상도를 살아가는 지혜: ‘염려하지 말라’
사람들은 늘 누리면서도 일상의 귀한 걸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가끔은 그것이 귀하다는 걸 깨닫기도 하지만 곁에 있는 일상을 자꾸 잊게 되면서 일상적인 일을 건성으로 임하게 되고 매사 불만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일상도의 사람들은 늘 만나는 사람과 늘 하는 일들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걱정이 참 많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믿고 나서 어느 순간엔가 걱정거리가 많지만 그 걱정에 오래 머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다섯 명의 아들 중에 아들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까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감사로 살아갑니다. 저는 이것이 어머니가 믿는 예수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태6:25-27).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태6:33-34).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일부인 위의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생겨나고 우리 영이 쉼을 얻습니다. 많은 걱정과 근심거리에 사로잡혀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는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이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직원들 월급을 주지못한 기업의 사장이 자살하는 사건을 접할 때에 가슴이 아픕니다. 최근에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에서 집단 언어폭력을 당하고 숨진 강모(16)양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0여명의 학생들이 지난 6월 20일 강양을 카카오톡 '그룹 채팅'에 불러, 약 1시간 동안 집단으로 욕설 메시지 등을 썼고 그 결과 이 소녀는 자살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접하면 이 사회와 청소년들의 내일을 자연스럽게 걱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라고 한 것은 닥쳐올 미래를 신중하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덧없는 걱정에 사로잡혀 삶의 활력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걱정과 염려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을 마비시킵니다. 다시 힘써 고백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시편23:1).
일상도의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인생예술가!
송봉모교수는 일상도를 살아가는 지혜에 대해서 말합니다. “누군가가 반대 의견이나 비평을 해댈 때 그것을 잽싸게 받아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받지 않고 하루를 평온하게 보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문제를 던졌을 때 그것을 반드시 잡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은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방패이다. 일상도를 살아가려면 누군가 던진 공을 생각 없이 받지 말아야 한다.”
일상도의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고 이들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않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살아간다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이들은 매우 주체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 앞에서도 신중하게 결정을 내립니다. 한 번 결정을 내리면 작은 일에도 매우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적극적으로 기울이지만 그들의 평가에 송봉모교수의 견해처럼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담대함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병든 할머니를 간호하는 어머니를 가까이 지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며느리가 병든 시어머니를 간호하는 것은 요즘처럼 귀찮은 일이 아니라 마땅한 효로 실천하던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 시어머니를 간호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간호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힘든 농사일과 가사일을 하면서 견뎌온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신실한 일상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일 걱정을 하지 않고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온 가장 위대한 <인생예술가들>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늘 내일을 바라보고 살도록 유혹합니다. 내일을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기도록 유도할 뿐만 아니라 ‘내일내일’ 하면서 중요한 오늘 일들을 소홀히 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위대한 우리 조상들인 인생예술가들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오늘에만 충실했기에 힘들었지만 기쁨과 감사로 가정과 민족을 지켜왔습니다.
건강한 정신과 영혼을 보존하려면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매사추세츠 대학병원 긴장완화 병동과장인 카밧진(John Kabat-Zinn)박사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완전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감정과 성실과 가치와 건강을 다 누리고 싶다면 내 앞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입니다.”
일상도를 살아간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중국인보다 더 중국인이 되어 중국내륙선교를 감당했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두 가지 성경말씀을 선교현장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지요. 그 두 가지가 <여호와 이레>와 <에벤에셀>의 하나님인데 이것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사무엘상 7:12).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세기 22:14).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으면 모두 중국에 바칠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중국에 대해 애타하는 하나님의 심장을 품었던 허드슨 테일러였습니다. 그는 중국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변의 놀림에도 상관없이 중국인의 변발과 옷차림을 하며 철저히 중국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중국의 편한 항구도시보다 내륙을 선택해 들어갔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리라는 마음으로 좁은 길을 선택했던 그의 인생에는 하나님이 그분의 방법으로 놀랍도록 넘치게 채우시고 입히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그의 선교사역은 기적같은 이야기이지만 정리해 보면 일상도의 삶의 연속입니다. 일생도의 살을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지요.
거지들에게 아침 제공하는 사역을 하다 돈이 모자란 그 순간에도, 중국인을 위해 운영하던 병원 물자가 바닥이 났을 때도, 그리고 중국을 위한 24명의 동역자를 구했을 때도 하나님은 이 선교사에게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방법들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은 허드슨 테일러가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그의 일상적인 삶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는 하나님의 일은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했던 그의 평생의 고백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상의 삶을 성실하게 살면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입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어떤 일에 집착하고 성취에 목말라 하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학대할 때 우리들에게는 불면의 밤이 오고 건강에 이상신호가 생깁니다. 그런데 조금은 초라하게 보이고 가치없게 보이지만 우리가 일상도의 행복을 누리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일상도의 사람들은 들에 피어있는 노랗고 작은 들풀과의 만남에 행복해 하며 가족끼리 소박한 식탁과 과자 몇 조각을 나누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물론 일상도의 사람들에게도 위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프고 나면 키가 한 뼘이나 더 크는 것같이 일상도의 사람들에게도 위기는 가족들이 화합하는 자리이고 서로의 마음을 모으는 자리입니다. 바로 당신이 일상도 행복의 주인공입니다.
정광일의 영성 이야기 11
농사짓기 - 얼치기 농사꾼, 그러나 정말 귀한 것들을 배웠다.
시골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말에는 다른 무엇보다 논이나 밭을 일구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흙을 밟고 싶고 흙냄새를 맡으며 흙과 더불어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이런 정서적 욕구는 더욱 강하게 마련이다. 나 또한 대부분의 삶을 도시에서 보냈기에 시골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시골의 농부처럼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내 손으로 거두어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농산물을 직접 드리며 감사할 수 있었으면 했다. 해마다 추수 감사절을 지내면서 남이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을 수확물을 마치 자신의 것으로 드리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였다. 농촌에 들어오자마자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눌려 있던 이런 마음들이 한꺼번에 밀치고 올라왔다.
봄이 되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흙덩이들이 부슬부슬해지고 여기 저기 마을 사람들의 밭가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오랫동안 이 때를 기다려 왔다는 듯 나도 장에 나가서 호미며 괭이며 낫이며 이런 저런 농기구를 잔뜩 사왔다. 마침 윗집에 사는 분이 사용하던 경운기를 판다기에 헐값에 구입하였다. 경운기 운전법을 대강 배우고 시운전을 하는데 자동차 운전과는 달리 경운기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제동법이 다르다는 것까지는 잘 몰랐다. 겁도 없이 막내를 뒤에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아빠의 서툰 솜씨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지 어느새 이 녀석 두 손을 모으고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나의 농사는 경운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운기에 쟁기를 걸고 밭을 가는 내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뿌듯하다. 무슨 농사가 가장 쉬운가 물었더니 옥수수를 심어보란다. 흙 보다 돌이 더 많은 것 같은 산골 밭을 겨우 갈아내고서 옥수수 알을 심었다. 얼뜨기 농사꾼인줄 어떻게 알았는지 까치 떼가 몰려와 옥수수 알을 잘들 파먹었다. 이놈들을 내 쫓으려 허수아비도 세우고 햇빛에 반사되는 광택줄도 설치하고 야단을 떨었지만 결국 절반의 씨는 도난당해야 했다. 누가 있어 까치를 반가운 손님과 연계 시켜 노래했는가!
지팡이만큼 자란 옥수수 대를 보며 대견스러워 하기도 잠깐, 이번에는 멸구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마 그해 1990년은 우리나라에 유난히도 중국으로부터 날아든 명충나방 때문에 농가들이 곡식대란을 겪어야 했다. 이 나방은 곡식에 알을 낳으면 왕강충이로 불리는 성충은 손가락만한 푸르고 누런 구더기 같은 놈으로 줄기 안에 들어 앉아 양분을 죄다 빨아먹는 무서운 벌레였다. 그 덕에 한해 농사는 고스란히 망칠 판이었다. 농약가게에 들려 약 뿌리는 통을 사서 지게 지듯 짊어지고는 되는대로 열통 가까이를 뿌려댔다. 문제는 그날 밤이었다. 눈과 목 이어서 머리로 그리고 온몸으로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무섭게 앓았다. 농약중독 증세였다. 왕강충이는 잡으려다 나도 잡힌 격이었다. 농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그때 확실하게 온몸에 입력되었다. 지금도 어쩌다 농약을 사용하려 병마개를 열면 그날을 기억나게 하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나는 얼른 뚜껑을 닫아버리고 만다. 그중 제일 쉽다는 옥수수 농사였으나 농사군 데뷔 첫해 신고식은 이렇게 단단히 치러졌다. 그러나 힘든 그만큼 기쁨도 크다고 밭에서 막 딴 옥수수를 삶아먹는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다낚시로 건진 생선을 바로 회쳐 먹는 바로 그 맛이었다. 이래서 이듬해면 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되는가 보다.
고운 흙으로 덮은 밭에는 들깨 씨를 뿌려 싹을 낸다. 어른 손으로 한 뺨 남짓 자란 모종을 너른 들밭에 뿌리면 어떤 돌밭이라도 뿌리 내릴 만큼 강한 대로 자란다. 넓적하게 자리를 펼쳐 이웃집 아주머니 하는 대로 따라서 도리깨질을 해본다. 긴 막대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는 끝에 매달린 또 하나의 작은 막대기의 원심력을 이용해 사정없이 아래로 패대기질 하노라면 좁쌀만한 깨알들이 어느새 바닥에 까맣게 깔린다. 한 포대 너끈히 잘 나왔다. 방앗간에서 가져가서 빤 들깨가루를 한동안 잘 먹었다. 그때 도리깨질 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그려줄 한국판 밀레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남은 흔적이 없어 무엇보다 섭섭하다. 아무튼 그 뒤로 들깨는 우리 부부 제일의 영양식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해장국집이나 추어탕집의 식탁에 들깨가 놓여 있으면 한 두 숟갈 푹 떠서 국에 넣어야 성이 찬다. 그리고는 그날 그때의 손수지은 들깨 맛으로 재음미 해보는 것이다.
고추는 시골마을에서 기본이 되는 농사 가운데 하나다. 봄기운이 완연하여 제법 따가운 햇살을 느끼게 하는 5월이 되면 5일마다 선다고 해서 이름 부쳐진 오일장에 고추모(종)가 장바닥에 즐비하게 깔린다. 5월의 푸른 아이들만큼이나 싱싱한 모를 거의 모든 농가는 수백에서 많게는 천개정도를 사서 심는다. 우리도 삼백 개의 고추모를 사서 심었다. 이 녀석에게는 처음부터 정성이 요구 된다. 먼저 가로가 5-60 센티미터 되게 둔덕을 만든 다음, 바탕이 검고 가운데가 흰 비닐을 길게 덮는다. 그리고는 흰 부분을 따라가며 호미로 15 센티미터 정도를 판 다음 물을 흠뻑 주고는 뿌리가 하얗게 드러난 밑 부분을 심고 흙을 덮는다. 다음 날 따가운 햇볕에 축 늘어진 어린 고추모를 보며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이제 곧 제 힘으로 대지를 박차고 일어 설 터이니 말이다. 그래도 고추에는 꼭 고추대가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저 보다 두 배가 넘는 대에 매달린 신세처럼 보이지만 얼마 있지 않아 이 막대를 타고 쭈욱 자라 오르리라. 요즘은 검은 플라스틱 막대가 나와서 잘만 보관하면 수십 년도 쓸 수 있게 되었으나 전에는 이 나무 저 나무를 다니며 고추 막대기 자르는 것이 큰일이었다. 아무리 주위가 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지만 1 미터 되는 나무 막대 삼백을 어디서 다 해오나. 나만이 아니고 동네사람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이 마을에 들어와서 어느 한해 거르지 않고 고추 심기를 계속한 걸 보면 아마도 이 농사짓는 맛이 가장 쏠쏠한 것 같다.
고구마와 감자가 뿌리를 내려 흙 속에 알토란처럼 커가는 일은 무엇보다 신기하다. 그 어떤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뿌리의 어느 한 부분이 흙 속에서 둥그렇게 또 길쭉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흙살이 좋아야하고 거름도 풍족해야 한다. 위로 드러난 줄기나 잎이 너무 왕성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빈약해도 곤란하다. 적당하게 잘 자라나는 모양새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밑 부분의 결실을 짐작할 뿐이다. 봄에 심은 이 녀석은 한 여름 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쯤 그 자람의 끝을 맺는다. 어느 해는 바로 그맘때쯤 찾아온 어린아이들과 함께 고구마와 감자를 캤는데 어찌나 좋아하고 신나해 하는지 그 모습에 부모들도 절로 어깨춤 추듯 들썩인다. 저녁이 되어 장작불을 피워 두터운 돌판을 뜨겁게 데우고 그 위에 돼지 목살이나 삼겹살을 올려놓고 이글거리며 기름기를 빼낸 다음 노릿 노릿해진 살점을 상추에 싸서 집 주위 아무데나 나와 있는 씀바귀 곁들여 먹는 맛이란! 그래도 백미는 별 총총한 여름밤 뒷마당에 둘러 앉아 군불에 구워먹는 고구마와 감자의 맛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 그랬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인데 속까지 새카맣게 타버리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군불에 오랫동안 마냥 구워야 한다.
그동안 우리 집 경험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농사는 과일이다. 수박이나 참외 또 오이 같은 박과에 속한 식물은 자주 손을 봐 주어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았다. 수시로 곁순을 뜯어내어 한쪽으로 순이 뻗어 가도록 해야 했다. 열매도 하도 많이 달려 과감하게 따버려야 하는데 그 일도 말처럼 잘되지 않았다. 병에도 약해서 여러 번 약을 쳐주어야 한다. 특히 잘 생긴 오이는 약 버무림으로 의심해도 될 만하다는 게 일반 정설로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약을 치지 않고 해보려다 결국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삐뚤 빼뚤한 녀석들, 그래도 우리는 이들을 예술작품이라 했다. 먹기에는 너무 아까운 애들, 얼마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곡선이던가, 에쓰 라인이 따로 없다!
흐뭇했던 또 하나의 기억은 김장 배추. 보일까 말까 까만 씨알 하나가 푸른 잎사귀 되어 늦여름 굳어가는 흙덩이를 밀치고 올라오는가 하더니 어느 새 한 다발 통배추로 자란다. 봄에 뿌린 씨앗이 여름 내내 견디려면 수 없이 많은 병충해와 맞서 싸워야 한다. 이에 비해 늦여름에 심어 바로 가을로 이어지는 배추는 별다른 해충 없이 잘도 큰다. 어린 아이 두 팔에 그득한 배추통을 거두어 한 가운데를 툭 치면 노란 속살을 부끄러움도 없이 드러낸다. 예상 밖의 수확 덕택으로 자주 찾아오던 가정들이 모여서 김장 잔치를 벌였다. 남자들도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무채에 고추 양념 버무린 김장 속을 열심히 묻혀 담갔다. 한집에 족히 오십여 포기는 담아갔으리라. 아마도 그해 겨울만큼은 화목한 부부로 화기애애한 가정으로 잘 지냈으리라.
얼치기 농사꾼을 하늘과 땅이 많이 봐준 덕분인지 해마다 가을이면 적잖은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러나 보다 큰 결실은 자연이 가져다준 깨달음이었다. 하늘과 땅, 바람과 물, 산과 계곡 그리고 그 가운데 선 사람. 사람이 없어도 자연이 자연 되는데 아무런 지장 없건만 그래도 사람이 있어 이 둘을 연결 시켜준다면 자연도 함께 기뻐해 주리라. 영성! 자연이 없이도 가능할 수 있겠으나 자연과 더불어 깨우칠 수 있는 영성이라면 더욱 귀하리라. 그래서 자연 영성, 땅의 영성. 영성이란 본래 땅 보다는 하늘의 속성을 말함이겠으나 땅 없는 하늘이 어찌 하늘이겠으며 하늘 없는 땅이 어찌 땅일 수 있겠는가? 영성이 관계며 균형이며 통합일진데 어찌 어느 하나만을 고집함으로 영성의 신비를 말하려 하겠는가? 농사는 이렇게 도시 출신 먹물 먹사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알려주었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내가 ‘누구라도 지으라는 게 농사’라고 얼과 몸이 본디 하나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보다 큰 깨달음이 어디 있으랴!
김은섭의 포대에서 보내는 글 8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학부시절 유교사상 관련한 교양수업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공자의 명언이다. 멀리서 오랜 친구가 온다면 정말 기쁘겠지? 라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그 감정을 느껴볼 기회는 딱히 없었다.
내가 춘천에 전입을 왔을 때 부대의 포대장님께서 내게 처음 하신 말씀은 ‘장교는 어항 속의 금붕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엇인지 감이 오질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 자체를 경험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행동을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는 유리로 막혀있다는 것이다.
25년을 친구들, 학교 선후배 등 격이 없는 수평적인 관계를 누리다가 본격적인 장교의 생활을 시작하니깐 많이 외롭고 답답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요에 한 가사처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는 그런 시간 중에 주님께 좀 도와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었다.
그러던 중 ‘은섭아! 춘천가면 닭갈비 사주나?’라며 대학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몇 번 지나가는 말로 친구한테 춘천 놀러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전화를 했다. 물론 나만 보려고 온 기특한 녀석은 아니었다. 여자 친구랑 데이트 코스로 춘천을 와서, 저녁에 나한테 닭갈비을 얻어먹고 가려는 속셈이었다. 커플이 와서 솔로의 지갑의 털어가는 것이 씁쓸하기는 하지만, 공자의 말처럼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그리고 여자 친구도 나랑 친한 친구라서 흔쾌히 오라고 했다. 그 친구들은 수요일에 오기로 했는데, 어찌나 기다려지던지, 요즘 시름시름 앓고 있는 월요병도 친구들을 본다는 설렘에 멀쩡하게 극복했다. 드디어 만난 친구들은 와서도 자기들 연애의 행복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시간을 보내고 갔다. 특히 몇 년간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그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혼자 있는 시간 중에 자신이 배운 것들과 경험한 은혜를 나누어 주었다.
내가 그날 저녁에 만난 사람은 친구들인데, 왠지 나는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이 찾아오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롭다고 징징거리는 아들의 기도에 주님이 친구들을 통해서 찾아오신 것 같아서 감사했다. 외로운 시간에 이 땅의 친구가 찾아오는데도 이렇게 힘이 나고 즐거운데,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찾아오실 때는 얼마나 반가울까! 또 내가 천국에 갈 때 우리 주님은 나를 얼마나 반가워하실까! 이보다 더 멀리서 찾아온 친구가 없으니 말이다. 나의 요즘 생활 중에 외로움과 심심함이 친구와의 만남을 더욱 귀하게 만든 것처럼, 예수님과의 만남도 이 땅에서 흘리는 눈물과 땀이 진할수록 기쁠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 자원방래 불역락호라!
“나의 좋은 친구되신 주님,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들이 우리가 만나는 날을 더욱 빛나고, 기쁘게 만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볼 때 주님께서 닦아주실 눈물이 내게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현장에서 김하기 칼럼 10
조선 르네상스의 두 주역, 세종과 장영실
영국의 과학사가 조셉 니담은 그의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15세기 중국의 과학은 유럽을 앞질렀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한 술 더 떠 ‘1434’의 저자 개빈 멘지스는 “정화함대가 중국의 앞선 과학과 문명을 이탈리아에 전해 주어 유럽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개빈 멘지스가 “중국함대가 이탈리아에 전해 주어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에 사용했다”는 지도는 중국이 만든 지도가 아니다. 그것은 조선의 권근이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다.
일본 도쿄대학의 한 연구진은 ‘15세기 초 조선의 과학수준은 중국에 앞서 있었다’고 발표했다. 도쿄대학이 발행한 ‘과학기술사 사전’에 15세기 초 중국이 발명한 세계적인 과학업적은 4개 실린 데 반해, 조선의 과학 업적은 무려 29개나 실려 있다. 우리 측의 연구에 따르면 세종조에 새롭게 발명, 발견된 아이템만 5천 개에 이른다. 세종조는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두 주역이 세종과 장영실이다. 세종은 조선 르네상스의 정책적 설계자였고, 장영실은 그의 설계도를 구현해 내는 실무자였다. 둘은 근본부터 숯과 얼음처럼 달랐다. 세종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왕 태종의 왕세자로서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익히며 자랐다. 반면, 장영실은 동래 관기의 태생으로서 노비였다.
신분상으로 세종과 장영실은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공학의 천재 장영실은 자신의 재능 하나로 신분사회의 벽을 넘었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관청이 필요로 하는 농기구, 무기류, 수차 등의 기기를 정교하게 만들어 공급했다. 그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외진 유배지였던 동래현에서 한양까지 알려지게 됐을까. 세종은 자신이 건설하고자 하는 유교적 이상사회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장영실과 같은 창조적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농본주의(農本主義) 사회에선 파종하고 물을 대고 수확하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세종은 역법과 시간의 정확한 수립을 위해 장영실에게 천문기구 제작 프로젝트를 부여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장영실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와 천문 관측기구인 대간의를 만들었다.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공중시계인 앙부일구,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 등도 만들었다. 이어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와 측우기 제작에 참여했다. 갑인자 발명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보다 20년 앞서고, 측우기는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선다.
개빈 멘지스에 따르면 중국 정화함대의 특사는 피렌체에서 교황 유게니우스 4세를 알현했다. 교황은 중국의 앞선 예술·인문지리·천문학·수학·인쇄술·건축술·철강제조술·군사무기 등을 보고 놀라 이탈리아에 이를 수용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중국 정화함대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와 유럽에 르네상스가 꽃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지도가 조선의 권근이 만든 것으로 밝혀졌듯이, 조선의 천문·지리·인쇄술이 중국을 통해 이탈리아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금속활자 인쇄술은 이미 고려시대 때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음이 밝혀지고 있다.
장영실의 발명품이 쏟아짐에 따라 지위도 올라갔다. 노비신분에서 상의원 별좌를 거쳐 마지막에는 당상관인 상호군(정3품)의 지위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세종과 장영실과의 인연은 마지막에서 틀어진다. 장영실이 만든 세종의 가마가 부서져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장영실은 곤장형에 처해지고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곤장을 곤죽이 되도록 맞고 죽은 것인가? 장영실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세종이 왜 그를 보호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세종이 중국으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려고 빼돌린 것인가? 작가인 나는 장영실이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으로 갔다고 상상해본다. 그곳에서 어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만나 조선의 르네상스를 전해주는 상상을.
가족치유상담연구원 상담 교육프로그램안내
<개인상담>
엘림상담실은 개인상담을 하는 곳입니다. 가족관계, 부부갈등, 자녀문제, 대인관계, 심리검사 등을 합니다. 지역교회의 위탁상담을 환영하고 전화상담도 가능합니다. 개인상담예약 02-3675-7368, 010-3290-1007.
<치유상담 아카데미>
치유상담전문가 훈련과정으로 이론학습과 그룹임상훈련을 실시합니다.
주제 : 쓴뿌리치유 일시 : 9월 5일-10월31일(수, 8회) 오전10:30-12:30
일시 : 9월 6일-11월1일(목, 8회) 오전10:30-12:30
주제 : 감수성훈련 일시 : 11월 7일-12월 26일(수, 8회) 오전10:30-12:30
<부부정서치유모임>
결혼한 부부들이 치유와 회복을 위한 1개월 4회기 과정의 그룹치유모임입니다.
9월 모임 일시 : 9월 4일-9월25일(화, 4회) 저녁7:30-9:30
10월모임 일시 :10월 9일-10월 30일(화, 4회) 저녁7:30-9:30
<집단치유상담모임>
매월 1회씩 마지막 주 <금, 토요일>와 <목, 금요일>에 1박 2일 동안 속마음을 나누며 치유와 회복을 찾아 떠나는 집단치유상담모임입니다. 장소는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 있는 가락재영성원(경춘고속도로 설악IC에서 10분 거리)에서 모입니다.
9월 모임 주제: 깨어나기 일시: 9. 21(금)저녁6시- 22(토)오후4시
10월 모임 주제: 행복으로 가는 길 일시: 10. 25(목)저녁6- 26(금)오후4시
<목민독서교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저녁에 읽은 책을 함께 나누는 식사를 겸한 독서치유모임
10월 모임 10월 25일 저녁7-9시 도서:김재진『삶이 아프다고 말할 때』시와
<교회초청세미나집회인도를 실시합니다.>
구역장(목자)교회학교교사 세미나 : 상담기술훈련, 대화법훈련, 감수성훈련
교회집회 : 예배설교, 쓴뿌리치유, 전인치유, 가정사역부흥회, 부부행복학교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가족치유상담연구원
지난 8월20-22일 동안 가족들과 함께 충북단양과 강원도 속초에서 보냈습니다. 설악산에서 흔들바위와 울산바위를 등반했는데 쉽지 않은 등반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스위스와 영국에서 온 두 부부를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자연을 너무나 사랑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속초해수욕장에서 비를 맞으면서 해수욕을 즐겼습니다. 바닷물이 너무나 따뜻했는데 온난화의 영향같아서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요. 산과 바다와 냇가와의 만남은 행복했습니다. 양양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섬기면서 청소년들을 사역하는 김진형선생님을 만나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8월 24-25일에는 가락재영성원에서 <더 깊은 샘파기>라는 주제로 집단상담모임을 가졌습니다. 참석했던 분들이 가락재영성원을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시냇물을 소리를 들으면서 새벽을 깨웠습니다. 일어나 보니 가까운 산등성이에는 산안개가 드리워져있었는데 우리의 마음도 함께 올라갈 것 같았습니다.
이제 9월이 되었네요. 또 분주하게 가을맞이를 해야겠네요. 경제지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울한 기분이 들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힘을 얻습니다. 휴가에서 돌아와 바쁜 일상에 들어가지만 일상도의 행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연구원을 위해 후원하는 교회와 개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형편에 따라 후원할 수 있습니다(1구좌: 만원).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김영근>
7월 후원 교회 : 동숭교회, 참빛교회, 한마음교회, 유성장로교회, 안동서부교회, 예향교회, 예성교회, 산정현교회, 일산은혜교회, 충신교회, 누산교회. 개인 : 주재철, 김태형, 김은섭, 류해룡, 이은혜, 이지은, 이정산, 이승룡, 한광용.
I 가족치유상담 연구원의 사역 I
►가정회복중보기도(기도역) ►지역교회위탁상담(협력역) ►다문화가정상담(긍휼사역) ►목민독서교실(독서치료) ►구역장ㆍ교사상담훈련 |
►엘림상담실(개인상담ㆍ집단상담) ►치유상담아카데미(상담교육) ►중국교회지도자상담교육(교육선교) ►월간쪽지<예수사랑ㆍ가족사랑> ►교회설교ㆍ세미나(치유ㆍ회복사역) |
주소 : 종로구 연지동 136-46 기독교회관 504호 / 02-3675-7368, (fax)7369
원장 : 김영근목사(010-3290-1007) 상담실장(010-3219-1097)
Cafe.Daum.net/familytherapy0191(daum 다음 카페→가족치유상담연구원)
메일 noksanlove@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351-0355-2650-43 김영근
찾아오는 길 : 종로5가역 2번 출구 대학로 방향 200m ⟶ 한국기독교회관 504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