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계간지의 정기 구독자에게 주어진 보너스로 두 권의 시집을 얻게 되었다. 그 중 한 권이 나희덕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냥 여기저기를 들춰보다가 이건 아무렇게나 심심풀이로 읽을 만만한 시들이 아님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떤 경우 그의 시는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애절하리만큼 섬세한 서정이 전율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희덕의 시를 잡지에서 이따금 한두 편 볼 때마다 아, 재능 있는 시인이구나 하고 가볍게 지나쳤었다.
그의 상당수의 시 가운데 묘사적 서술성을 띤 것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긴장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결코 그는 저지르지 않는 것이었다.
고픈 잠이 아직 남아 있는지
녹슨 캐비닛보다 더 굳게 잠겨 있다
그는 땀조차 흘리지 않는다
잠시도 잠들지 않는 시장 입구에서
그는 어제부터 잠 말고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무 많이 먹은 사람처럼
이따금 입 밖으로 흰 액체를 흘려보낸다
그를 둘러싼 공기들이 석회질처럼 굳어간다
― 「잠을 들다」의 후반
푹푹 찌는 듯한 삼복 더위에 솜잠바를 입고 시장 입구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 자가 있다. 어제 아침부터 그 자세로 자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내쳐 그는 잠에 골아 떨어져 있다. 잠시도 잠들지 않는 시장에서 땀조차 흘리지 않고 이틀째 계속하여 잠자고 있는 사내. 그는 어떤 사람일까. 병든 사람? 아니면 죽어 가는 사람?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밤낮없이 한 댓새 철야 작업의 힘든 노동 끝에 한 이틀 푹 자기로 작정한 사람?
시인은 여기서 냉정한 관찰자로 아무런 감정의 개입도 없이 녹슨 캐비닛처럼 비정한 시선으로 대상을 그려낼 뿐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입 밖으로 침을 흘리고 잠자는 그 사내의 주변 공기만이 왠지 수상한 낌새를 느끼게 한다. "그를 둘러싼 공기들이 석회질처럼 굳어간다"는 결구가 그것이다. 슬며시 시적 화자는 세계 밖의 석회질처럼 굳어지는 공기에서 비정한 시대 상황을 읽어내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방치되는 오늘의 세태. 며칠 전 무더위로 몰려든 수영장 안에서 한 아이가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떠오른다. 시인은 비록 산문적 묘사를 이용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시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약간 위태로운 느낌을 주지만 그는 오히려 천연덕스럽다. 나희덕은 천성적으로 시적 언술을 타고난 시인인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이 시의 제목이 「잠을 들다」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잠에 들다'도 아니고 '잠들다'도 아니다. '잠을 들다'라고 한 것은 '들다'가 '먹다, 마시다'와 같은 의미의 동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관찰자의 눈에 비친 사내는 지금 잠을 먹고/ 마시고 있는 중이다. 석회질로 굳어지는 공기 속에서 그 역시 조금씩 석회질(죽음)이 되어 가면서.
산문적 서술 또는 묘사로서 술술 풀어져 나온 시로 「만화경 속의 서울역」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하도를 거의 올라왔을 때 계단에 앉아 등 긁는 대막대기를 파는 사내가 보였다 음산한 눈빛과 질겅거리는 입술, 그가 나를 향해 뱉은 말이 껌처럼 얼굴에 달라붙었다 떼어내려고 할수록 더욱더 들러붙는 이 낯선 물컹거림, 한 여자의 불룩하게 드러난 가슴이 붉은 물감 덩어리처럼 울컥 눈 속으로 쏟아져내리고 그녀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던 중년 남자의 지팡이가 갑자기 뱀이 되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껌처럼 달라붙는 말의 낯선 물컹거림, 붉은 물감 덩어리처럼 쏟아져내리는 한 여자의 가슴, 뱀이 되어 꿈틀거리는 지팡이 등의 풍경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이 시의 힘이다. 초현실주의 혹은 야수파의 그림에서처럼 불길한 징후가 여기저기에 교묘하게 장치되어 있다. 특히 장사꾼 사내가 나에게 던진 말이 껌처럼 달라붙고, 그 낯선 물컹거림의 징그러운 감각적 이미지가 시를 읽는 독자까지 진저리치게 만든다.
나희덕이 세계를 대하는 눈은 예지와 서슬 푸른 상상적 감성으로 빛을 발한다. 어찌 보면 그건 천성적인 듯하다. 그가 여류시인이기 때문에 특별히 감성적이라고 보여지진 않는다. 오랜 경험 세계의 여과를 거친 끝에 사물과 세계는 그의 손끝에서 감성의 열매를 맺는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上弦」이란 시의 마지막 연이다. 여기서 달은 '그녀'라는 여성으로 인격화되고, 능선을 비추는 그 달빛은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달이 나무들에게 환한 상처를 입힌다는 발상이 무척 신선하다. '뜨거운 숯불'은 능선을 비추는 상현달, '이사야'는 능선에 서 있는 나무들로 비유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사야'가 성서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일반 독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사야'와 '숯불'의 관계가 풀리지 않고서는 이 시의 완전한 감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별 수 없이 그 대목의 성서를 찾아 읽어보았다.
…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문득, 훨훨 날아다니며 야훼의 영광을 외치는 천신(天神)들을 본다. 그를 본 이사야는 깜짝 놀란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므로." 그러자 천신 중에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숯불을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고(입술을 지지고) 말한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이제 네 악은 가셔지고 너의 죄는 사하여졌도다." (이사야 6장)
그러므로 상현달은 이 시에서 날개 달린 천신으로 몸을 바꿔 나무들의 입술에 묻은 어둠― 죄를 환하게 씻어준다는 의미의 표현인 것이었다.
나희덕이 사물을 감지하는 촉수는 대단히 섬세하다. 아니 예민하다.
나는 어제의 풍경을 꺼내 다시 씹기 시작한다[…]
벽오동의 풍경은 이미 단물이 많이 빠졌다
― 「벽오동의 上部」에서
가슴 붉은 새 한 마리가
휙, 내 앞을 지나 숲으로 들어간다[…]
아, 검은 입으로 새를 삼킨 나무
― 「새를 삼킨 나무」에서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 「빗방울, 빗방울」에서
종합병원 복도를 오래 서성거리다 보면
누구나 울음의 감별사가 된다[…]
그것이 병을 마악 알았을 때의 울음인지
죽음을 얼마 앞둔 울음인지
싸늘한 죽음 앞에서의 울음인지 알 수가 있다
― 「이 복도에서는」에서
그는 눈이 밝은 시인이다. 눈이 밝으므로 그 앞에 전개되는 세계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변용되고 아름답게 구현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옛날에 '병아리 감별사'라는 직업이 있었다. 양계장에서 막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를 보고 암수를 단박에 구별하여 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울음의 감별사'라는 패러디는 독자에게 웃음을 주기보다 이상하게도 전율 같은 감탄을 안겨준다.
어제의 풍경을 벽에 붙여 놓았다가 다시 떼어 입안에 넣고 씹기 시작한다든가, 검은 입(나무의 짙은 그늘)으로 나무가 새를 삼킨다든가, 바깥에서는 수직으로 내리는 비가 버스의 유리창 안쪽에서 볼 때는 사선을 긋는다든가 하는 식의 심상한 풍경들에 대한 심상치 않은 발견은 눈이 밝아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의 감성은 대상을 즉물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일단 눈에 보여지는 일차적인 현상을 치밀한 여과 장치를 통하여 놀랍도록 생생하게 해석하는 일에 성공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가 예외적으로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자연스레 풀어놓은 듯한 다음의 시 한 편을 본다.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힌 탱자 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표면에 드러나는 건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이라고 한 번 밖에 드러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그 어조는 무척 애절하다. 그리고 시적 화자가 대화를 건네는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도록 권유받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백여 년 전의 해미읍성을 찾아온 어떤 나그네라고 생각해야 한다.
해미읍성은 문화 유적 관광지요, 해미성지는 처참한 죽음의 장소로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과 해미성지라는 표현상의 차이는 늙은 나무가 거느린 시원한 '그늘'과 처참한 죽음을 앞둔 '형틀'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깝다.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해미 진영 안의 감옥 터 옆에는 지금도 늙은 호야나무(회화나무, 홰나무, 괴목)가 한 그루 서 있다.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머리채를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까지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줄에 움푹 패인 상처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병인 박해(1866년) 때에는 1천여 명의 처형을 짧은 기간 동안에 해치우기 위해서 한꺼번에 십여 명씩 생매장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처참한 살육의 역사 현장이 이제는 단순한 관광지로 전락해버린 것을 보며 수천의 비명을 운명처럼 몸에 간직하고 있는 시커멓게 늙은 홰나무. 시적 화자는 그 누군가 '당신'에게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고 말한다. 그 어둠이란 역사의 어둠이며 그것을 무심코 지나치지 말아달라는 부탁인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에서는 '어둠'의 이미지가 많이 보인다. 시집의 제목으로 내세우고도 있는 '어두워진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죄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며 그러한 인식은 '밝음, 곧 선의지(善意志)의 지향'이라는 아이러니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상처, 어둠, 기억, 과거― 이러한 '아픔'은 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저 낡은 소리는
어떤 상처를 읽은 것이다
바늘은
소리가 남긴 기억을
그 만져지지 않는 길을
천천히 되밟으며 지나간다
― 「축음기의 역사」 부분
그리고 건반을 다시 울리기 위해
아이가 뒷문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밖은 半音씩 어두워져갔다
― 「음계와 계단」 부분
어둠만 어둠만 밀려와
닫혀진 문 앞에서 나 오래도록 서성거리고
― 「새를 삼킨 나무」 부분
요즘은 오디오, 전축이라고 불리는 옛날의 축음기에서 시인은 과거의 소리가 남긴 기억을 상처라고 말한다. 추운 겨울의 예배당에서 피아노를 쳐보기 위해 아이가 오래도록 그 향기로운 도취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바깥 세상은 반음씩 어두워져 가고 있으며,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선 나무가 새를 감추어주건만 나무는 어둠 밖에 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둠으로 상징되는 삶의 아픔은 주로 과거와 관련되어 있고 그 과거 또한 현재와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나희덕은 이번 시집에서 '말'에 대한 사랑을 곡진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말/ 언어/ 시'에 대한 그의 진지한 자세가 가장 돋보이는 시가 바로 「오래 된 수틀」이다. 어쩌면 가장 극명하게 시인의 자화상을 각인하고 있는 시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이 역시 과거의 기억과 아픔을 환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 「오래된 수틀」 전문
수틀에 수를 놓는 것을 모티브로 한 시들로는 "보라, 옥빛, 꼭두서니,/ 보라, 옥빛, 꼭두서니,/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을 보자.//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라는 서정주의 「학」이 떠오르기도 하고 허영자의 「刺繡」도 생각할 수 있지만 나희덕의 이 시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절창이다.
먼저 이 시에서 수를 놓는 실은 '언어'이며 수놓는 대상은 '나'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수를 놓는 주체는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란 누구일까. 언어/ 시의 주관자인 뮤즈일 수도 있고 절대자로 볼 수도 있으리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나는 시를 쓰고자 간절히 노력하는 사람, 최초로 시를 썼을 때의 통증 또는 희열을 기억한다. 그렇게 보면 '나를 완성해' 달라는 말은 시인으로서의 완성 또는 자아의 완성을 소망한다는 뜻이리라. 사실 언어/ 시에 대한 그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은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이따금 봄이 찾아와」에서)라든지 "열매가 저절로 터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입술을 둥글게 오므렸을까/ 검은 숲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말소리"(「저 숲에 누가 있다」에서) 등에서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봄이 되어서 새로 햇빛을 받고 태어나는 '말'이 곧 그의 시이며, 상수리나무가 열매를 떨어뜨리기 위해 입술을 오므렸다가 열매를 던진다는 표현도 나무가 '말'을 한다는 것, 나무가 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각도에서 이 시를 본다. 오래 전에(어쩌면 시인의 여고시절이었을까) '나'는 팽팽한 수틀에 수를 놓았다. 그것은 미처 완성되지 않은 자수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수틀을 우연히 다락을 정리하다가 발견한다. 쓰레기로 버릴까 하다가 잠시 망설인다. 존재의 상실과 소멸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저민다. 꽃과 파도와 구름을 수놓다가 중단된 이후 실을 꿰어 수놓던 바늘은 헝겊에 꽂혀 녹슬어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을,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던 그 아름다운 시절은 거기 그대로 멎어버린 시간이었다. 그것을 보는 현재의 시적 화자는 아픔을 느낀다. 그게 서른 세 살의 엄연한 현실이다(서른 셋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건 어쩌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서른 세 살일까).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옛날의 고통이자 기쁨이기도 하였던 언어로 '나'는 자수가, 아니 시가 완성되기를 갈망한다.
이와 같이 「오래된 수틀」은 이중 구조를 지닌 뛰어난 시라고 할 것이다. 근래에 이런 시를 발견하는 것도 흔치 않다.
때때로 나희덕은 단순히 시의 현학적인 모호성과 예술성을 혼동하고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나비를 신고 오다니」, 「언덕」, 「눈의 눈」 등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계와 대상을 다스리는 푸르고 서늘한 감성이 그런 결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서른 다섯의 나희덕, 그는 아직 젊고 절정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시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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