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지장기도 도량
유명한 지장기도도량으로는 보개산 심원사 ·도솔산 도솔암 · 상왕산 개심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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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보개산 심원사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1리 72번지에 위치한 심원사는 ‘생지장보살 도량(生地藏菩薩 道場)’으로 불린다. 애초에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심원사에서 서남쪽으로 약20km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寶蓋山)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주산(靈珠山, 보개산의 옛이름)에 흥림사(興林寺, 심원사의 옛 이름)로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사로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지로 주석하며 삼창(三創)하고 산 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절 이름을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이후 수많은 영험이 생기며 사세가 확장되었으며 근세에까지 금강산 유점사에 딸린 말사(末寺)로 석대암 · 지장암 · 남암 등의 산내암자와 250칸의 당우, 1609위의 불상 ·탱화 ·탑이 있었던 대찰의 면모를 지니고있었다.
6 · 25 전쟁의 참화로 본당인 천불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천불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석대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원래의 절터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부도 12기와 아미타불 입상 · 사적비 · 공적비 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부도 가운데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의승군을 이끌었던 제월당 경헌(霽月堂 敬軒)스님의 부도는 옥개석 운룡문(雲龍紋) 조각 솜씨가 빼어나며, 아미타불입상을 포함해 사지(寺址)에 대한 전체적인 문화재조사가 시급하다는 것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옛 절터는 군부대 안에 있어 순례하려면 미리 군부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심원사에는 ‘지장영험비’가 있으며, 지장보살의 영험함을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사냥꾼 형제의 출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17년(720)의 일로 보개산 아랫마을에 사냥꾼인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제는 사냥에 나서 보개산 너머 담터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고, 순석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마치 금란가사를 두른 듯한 누런 멧돼지는 왼쪽 앞다리에 화살을 맞고 보개산 정상인 환희봉 쪽으로 달아났다. 형제는 핏자국을 따라 멧돼지가 멈춘 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금빛 멧돼지는 볼 수 없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돌로 된 지장보살상이 맑은 물이 넘쳐나는 샘물 가운데 상반신만 내놓은 채 있었다.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석상은 태산 같은 무게로 꿈적도 하지 않아 크게 놀란 형제는 깨달은 바 있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대성(大聖)이시여! 저희들을 죄에서 구해 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마땅히 출가하여 수도하겠나이다.” 다음 날 형제가 그곳으로 가보니 과연 석상이 돌 위에 있으므로 두 사람은 바로 300여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출가하였다. 샘 옆의 숲 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고 항상 그 위에 앉아 정진하였으므로 그곳을 석대암(石臺庵)이라고 불렀다. 암자에는 자신들의 화살에 맞은 석상을 모셨다.
견불령(見佛嶺)과 대광리(大光里)라는 지명도 지장보살석상의 영험에서 유래한다. 고려 초의 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 심원사 아랫마을에 어려서 열병을 얻어 장님과 앉은뱅이가 된 이덕기와 박춘식이라는 사람이 살고있었는데, 두 사람은 심원사 대종불사를 하기 위해 마을에 내려온 화주스님에게 “대종불사에 시주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재앙이 소멸되고, 현생에서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화주가 되기로 약속했다. 3년여 동안 이들은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시주를 하였으며, 마침내 대종불사의 타종식 날이 되었다.
첫 타종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앉은뱅이 박춘식은 오색구름을 타고 밝은 구슬을 손에 지닌 지장보살님께서 하늘에서 심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앉은뱅이는 “지장보살님이 보인다”고 소리치며 장님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두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덕기 또한 “어디! 어디!”하고 소리치며 눈을 비비자 앞이 보였다. 그들은 산마루 위의 오색구름에 쌓여 큰 빛을 발하고 있는 지장보살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절하였다. 마침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었다. 그들이 지장보살님을 본 고개를 견불령, 그들이 살던 마을을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라 불렀다.
고창 도솔산 도솔암

도솔암은 선운사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선운사사적기>는 전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선운사의 왼쪽 굴(지금의 진흥굴)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깨뜨리고 나오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받아 중애사(重愛寺), 선운사, 도솔사 등의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부인의 이름이 중애였으며, 딸의 이름은 도솔이었다. 진흥왕 당시에는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둘러싸고 심한 대립에 있었던 때라 그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산과 암자의 이름을 도솔이라고 하고 미륵삼존이 꿈에 출현하였다는 것은 이곳이 미륵신앙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도솔암 마애불상이 554~598년(백제 위덕왕 재위기간) 사이에 검단선사(黔丹禪師)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이곳은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상도솔암은 1511년(조선 중종 6)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도솔암은 1658(효종 9), 북도솔암은 1703년(숙종 29)에 각각 창건되었다. 1994년 부여문화재연구소의 도솔암 인근 지역조사에서 ‘도솔산 중사’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돼 예전에는 중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검단선사에 읽힌 일화 가운데 도적의 무리들을 절복시킨 이야기는 절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고있다. 선운사와 도솔암이 창건되기 전의 이 지역은 도적들의 소굴이었다. 검단선사는 이들에게 도적질을 하지말고 참되게 살라며 소금 굽는 법과 제지기술을 가르쳐 생업으로 삼게 하였다.
창건설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륵신앙지였던 이곳이 언제부터 지장기도 도량이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도솔천 내원궁에 지장보살상을 모신 고려후기부터가 아닐까 짐작 할 뿐이다. 도솔암은 본래 상. 하. 동. 서. 남. 북의 6도솔이 있었으나, 상. 북 두 도솔암은 마애불만 남고 나머지는 자취조차 희미해졌다. 지금 지장보살상이 모셔진 상도솔암은 도솔천 내원궁이고, 하도솔암은 마애불상이 있는 곳이며, 북도솔암은 대웅전이 있는 자리이다. 지금의 도솔암은 상 · 하 · 북 도솔암 이 셋을 합쳐 도솔암으로 부르며, 대웅전 · 나한전 · 도솔천 내원궁 · 용사 등의 전각과 마애불상으로 이루어졌다.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도솔암 지장보살상은 도솔천 내원궁에 모셔져 있다. 내원궁은 미륵부처님이 도솔천에서 수행과 교화를 펼치며 머무르는 곳이다. 내원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련도 붙어 있지 않은 작은 전각이다. 여느 사찰처럼 명부전이라 하지 않고 도솔천 내원궁이라 했음은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창건설화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을 배치하지 않고 지장보살상 뒤에 목각탱화로 시왕상을 배치하고 있다. 지장보궁이라 쓰인 문을 들어가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화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참배객을 맞는 지장보살님을 친견할 수 있다. 지장보살은 팔찌를 두른 오른손으로 엄지와 중지를 살짝 닿을 듯 모아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며, 왼손에는 둥근 보륜(寶輪)을 들었다. 내원궁 입구 왼쪽 자연암벽에는 거대한 마애불(보물 제1200호)이 새겨져 있다. 검단 선사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위 암벽 꼭대기에 공중누각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애불 머리 위에는 기둥을 박기 위해 뚫은 직사각형의 구멍이 뚜렷하다. 마애불은 낮은 돋을새김(浮彫)으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치켜 올라간 불거진 눈과 앞으로 내민 입술 때문에 전체적으로 거칠고 소박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수직의 바위 높이 13m, 너비 3m의 우람한 규모가 고려인의 깊은 신앙심을 짐작케 해준다.
도솔암 스님들이 조석으로 예불을 올리고있으며, 마애불 기도를 올리는 불자들이 많이 찾고있다. 마애불 가슴 주위에 구멍의 흔적이 있는데, 이 마애불의 배꼽 속에 신비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1890년 무렵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배꼽을 열어보니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자 두려워 책을 도로 넣고 봉해버렸다고 한다. 그 뒤 동학교도들 사이에 그 책에 세상을 개혁할 비방이 적혀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 때는 동학교도들의 집회처로 쓰이기도 했고 1892년 동학교도 손화중(孫和中)이 비결을 꺼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 일로 많은 동학교도들이 옥에 갇히고 그 중 세 명은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서산 상왕산 개심사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번지 상왕산 자락에 자리잡은 개심사는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사찰 이름을 가지고있다. 개심사가 창건된 것은 654년(백제 의자왕 14)이며, 13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의 풍랑을 겪어온 고찰이다. 당시 혜감(慧鑑)스님이 절을 짓고 개원사(開元寺)라 했다. 개심사로 불린 것은 1350년(고려 충정왕 2) 처능(處能)스님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1475년 중창, 1740년 중수하였으며, 최근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중심 당우인 대웅보전과 요사로 쓰이는 심검당(心劍堂) · 안양루(安養樓) 등 당우는 몇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지만 충남의 4대사찰로 불릴 만큼 가치 있는 절이다.
절 입구 돌계단에 발을 디디면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는 듯 늘어선 소나무 가지가 그늘을 드리운다. 계단을 다 오르면 직사각형의 연못이 보인다. 풍수지리에서 성왕산은 코끼리의 모양이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3단으로 쌓은 연못의 돌벽이 있다. 연못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해탈문, 안양루, 심검당, 대웅보전이 차례로 다가온다. 대웅보전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보물 제143호로 지정돼있다. 고려 말 화려했던 팔작지붕 양식에서 조선시대 맞배지붕의 양식으로 넘어오는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심검당은 대범함과 소박함을 함께 전해주는 독특한 분위기를 품고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도 그러하거니와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쓴 것이 그러하다. 심검당 또한 조선 초기의 요사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는 예서체의 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안양루에 오르면 절과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판의 글씨는 유명한 근세의 서화가 해강 김규진(金圭鎭)의 필체다. 안양루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음을 글씨에 그대로 담아낸 듯 하다.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조선 중기로 일찍이 이곳이 지장신앙의 도량임을 알려준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 안의 지장보살님의 단정한 모습이 근엄한 표정의 장군상과 매우 대조적이다. 개심사는 영험있는 지장기도 도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불교사의 큰 봉우리들이 주석하면서 수행했던 참선도량으로도 이름이 높다. 근대 한국불교 선종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鏡虛)스님(1849~1912)이 한동안 머물며 두문불출 정진하던 곳이 바로 개심사이다. 어느 날 생사의 절박함을 깨달아 동학사의 강사의 자리를 던지고 깨달음을 얻은 후 이곳에서 보림(保任)했다. 붉은 녹이 슨 함석지붕의 요연선원(了然禪院)은 일엽스님이 세워 비구니 스님들을 정진케 했던 곳이다.
출처 :대한불교조계종선혜사 원문보기▶ 글쓴이 : 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