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선생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열단의 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복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문인으로써 새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선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하여 1935년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하였다. 다음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하여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작품과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비판> 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작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인문평론>, <문장> 등지에 게재하였고 이어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인문평론>, <문장>, <냉광> 등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되어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다. 한편 선생은 중국인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하였으나, 글을 발표하던 <문장>, <인문평론>지 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