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시작
2003년 6월 14일 등산학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렀다가 게시판에서 유럽최고봉이라는 엘브러즈등반계획이 발표된 것을 보았다 처음에 나완 상관없는 해외원정등반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곳을 드적이다가 다시한번 엘브러즈 등반계획안을 읽어보고 호기심에서 유병문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그날 저녁 한국산악회사무실에서 첫모임을 가질 예정이니 관심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록 등산학교 6기과정을 수료하였고 9기에도 재수강을 하였으며 여름의 설악산계곡등반이나 가을의 천화대 릿지등반, 겨울의 동계등반을 한번씩은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나의 등반실력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듯이 아직은 초보수준의 비기너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저 일년에 인수봉도 한번정도 후등으로나마 겨우 올라가는 정도이고 지난번 대둔산 릿지등반때에도 마지막 직벽 크라이밍에서 올라가지를 못해 결국 먼저 올라가 있던 조남형, 김영호, 한수봉들이 줄을 당겨주어 겨우 직벽을 오를 수 있었던 정도이므로 고산의 해외원정을 꿈꾼다는 것은 무대뽀의 똥뱃장을 부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슬슬 호기심이 생겨 강경원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자기도 엘브러즈등반계획안을 보았다고 하면서 저녁때 산악회 사무실에 나가보겠다고 하므로 나도 안심을 하고 일단 모임에 참석하였더니 김영호도 참석한 것이었다
위 모임에 참석하였던 여행사의 최사장으로부터 등산일정과 등반예정지인 엘브러즈에대한 간략한 소개를 들으며 등정의 성공여부는 고산적응에 달려 있고 고소를 어떻게 극복하는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선배 경험자들의 말을 들었으며 유병문대장은 앞으로 매주 일요일 서울인근의 산에서 등반훈련을 하겠다고 하였는데 그때까지만 하여도 내가 엘브러즈원정등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완전히 결정을 하지 못한채 유대장에게 일단 원정대 참가를 산청하면서 가기 전까지 참가여부를 확실히 결정을 하겠다고 한 것이었으며 이렇게하여 나의 해외원정등반의 첫경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Ⅱ. 준비
엘브러즈원정등반을 신청한 후 첫 번째 일요일은 북한산에서 훈련등반을 하였고 두 번째 일요일은 도봉산에서 훈련등반을 하였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훈련등반을 마치고 하산을 한 후 맥주 한컵을 시작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하면서 소주를 마시고 그 이후 다시 3차 4차로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신 후 만취하여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집의 식구들이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해외원정등반을 위하여 대원들이 함께 훈련등반을 하는 것이 체력관리의 면에서 뿐 아니라 대원들 상호간의 이해심과 단결심을 높이기 위하여 공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내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였다
결국 나는 내 스스로 체력관리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전까지 주당 2 - 3 회정도 8킬로미터의 조깅을 하던 것을 주당 4 - 5회씩 8 - 10킬로미터의 조깅으로 한강고수부지를 뛰기로 하였으며 고산에서의 적응력을 높이기 위하여는 결국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담배를 끊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담배도 끊기로 작정을 하게 되었다
약 한달동안 내 나름대로 한강고수부지를 아침마다 뛰어다니고 담배를 끊어 마음가짐을 조절하다가 8월 7일 (목요일) 저녁 6시에 사당동에 있는 시골봇쌈집에서 원정대원들의 마지막 준비모임을 가지면서 해외원정의 결의를 굳힐 수 있었다
Ⅲ. 출발
8월 8일 (금요일) 오후 두시쯤 종로 6가 등산장비점에서 강경원을 만나 필요한 등산용품을 구입하였다
그동안 한국산악회 등산학교에 입교하여 등산을 시작한 후 해마다 등산용품을 구입하여 이제는 더 이상 등산용품을 사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등산장구가 더 필요할 것 같아 경원이에게 동대문에서 만나 필요한 장비를 같이 사자고 한 것이다
특히 나는 오바 트라우저를 구입할 마음이 있었는데 가게에 나와 있는 마운틴 하드웨어의 제품을 입어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엉덩이는 뒤로 쑥 빠지게 되어 있고 더군다나 허리싸이즈가 맞으니 길이는 약 10센티미터이상 길어 아무리 내가 허리는 굵고 짧은 다리의 몸매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그 물건을 사기가 망설여지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길이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바지 밑단의 조임줄을 조이면 눈이 바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바지 길이가 긴 것은 상관할 것이 아니고 오바 트라우저가 수입제품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오바 트라우저를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한참이나 살까 말까를 망설이다 고산의 눈구덩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큰마음 먹고 오바 트라우저와 겨울용바지 1벌, 양말 두켤레를 사고 릿지화도 새로 한 켤레를 구입하니 60여만원의 돈을 지불하게 되었는데 누가 등산이 돈 않드는 운동이라고 했는지 원망스럽다
저녁때 사무실에서 퇴근한 후 다시 경원이를 만나 집 사람을 대동하고 양재동에 있는 할인매장인 “코스트코”에 들렸는데 그 이유는 원정대원들의 마지막 준비모임에서 조병욱선배님께서 “코스트코”에서 파는 수입제품인 “트레일 믹스”가 행동식으로 그만이라고 하는 바람에 총무인 경원이가 단체로 “트레일 믹스”와 약간의 행동식을 준비하기로 하였으므로 집사람을 “코스트코”의 회원으로 등록을 시키고 “트레일 믹스”라는 것과 대원들에게 나누어 줄 먹거리를 사러 갔던 것이었다
8월 9일 토요일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여 앞으로 사무실을 비우는 동안 문제될 만한 업무를 정리하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하루종일 배낭준비를 하였다
갈아입을 옷과 장갑등 등산의류와 행동식, 수면제 15알정도, 진통소염제와 근육이완제를 혼합하여 조제한 약 20봉지정도, 후시딘 연고와 대일밴드, 소화제등을 비상약으로 준비하고 배낭을 쌓았다 풀었다를 여러번하며 나의 마음은 유럽 최고봉 엘브러즈등반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고 있었다
8월 10일(일요일)집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나는 나 혼자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하여 가족들에게 내심 미안해하고 있는 차에 마침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장에 가겠다고 하므로 아내에게 수영장 가는 길에 공항버스가 서는 정류장까지 태워 달라고 하여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 공항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였고 가족들에게 잘 다녀 오겠다고 인사를 하며 차에서 내리려는데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둘째 딸이 내가 산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려면 몇일 걸린다고 하자 그제서야 아빠가 몇일동안 집을 비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빠 가지 마”라고 하며 영 아쉬운 표정인데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뒤로 하고 막 도착한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경원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Ⅳ. 산 아래까지
인천공항에서 러시아국적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형편없는 구형비행기였다 내가 외국여행을 많이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행기를 타면 의자마다 모니터와 이어폰이 달려 있어 몇편의 영화를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소음의 피해를 주지 않고 음악을 들을 수 있었으며 비행기가 비행중인 항로표시가 모니터에 표시되어 언제쯤이면 도착할 수 있는지를 알아 볼 수 있었는데 이번 비행기는 승객의 편의를 위한 아무런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승객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는데 그렇다면 항공사측에서는 한국인 승객을 위하여 한국인 승무원을 한명이라도 배치시켜 주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덩치 큰 러시아 승무원들과 버디 랭귀지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으며 다만 항공사에서 한국인을 위하여 배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은 맛없는 기내식에 그나마 고추장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의 현지시각으로 저녁 시간쯤(일정표에 의하면 현지시각으로 오후 5시 10분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정확히 시간을 메모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에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의 입국 심사를 받을때 나와 김영호가 입국 저지를 당하며 잠시 대기하는 소동이 있었는데 아마 영호는 너무 얼굴이 시커매서 혹시 러시아 마피아가 고용한 동남아 조폭으로 오해를 하였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나를 입국저지하며 대기시킨 이유는 아마 당시 입국심사를 하던 여직원이 매우 용모가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내가 아무래도 잘 생겼으니까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고 했던 것이라고 보아 참고 넘어가기로 하였다
모스크바 공항은 시설수준이나 입국수속을 하는 직원들의 업무처리 숙련도나 여러면에서 낙후된 것으로 보였으며 지루한 입국수속을 마치고 우리나라의 1960년대에나 타 보았을 버스를 한시간 정도 타고 모스크바 시내의 “코스모스”호텔에 도착하여 러시아에서의 첫 밤을 지낸 후 다음날 러시아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여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2시간 비행을 한 후 “미네랄 버디”라는 도시의 공항에 도착하였고 다시 그곳에서 약 4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우리가 가려고 하는 “엘브러즈”가 있는 산의 아랫동네 “박산 밸리”에 도착하여 “이트 콜”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청소년 수련원장이나 유스호스텔 같은 곳에 숙소를 마련하였다
모스크바에서 “박산밸리”의 “이트 콜”까지 가는 동안 몇가지의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첫째로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미네랄 버디”라는 곳의 공항 수준이 또 한번 웃기는 짜장이었다
1980년대 초반의 국내선 비행기보다 더 고물처럼 보이는 러시아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미네랄 버디”라는 곳의 공항에 도착하였는데 도착한 곳의 공항 터미널은 우리나라 어느 시골의 시외버스터미널에 와 있는 것 같았고 터미널 밖도 나무와 숲사이로 드문 드문 서있는 낡은 건물들과 택시와 승용차 몇 대, 우리를 태우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고물 버스등 도저히 공항이 있는 도시라고 보기 어려운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더욱이 용변을 보기 위하여 찾아간 곳은 내가 1970년대에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 갔을 때 용변을 보았던 화장실을 떠올리게 하는 시설이었으며 그 공항이라고 하는 곳이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활주로가 있기 때문에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그곳의 햇볓은 작열하고 있어서 뜨거운 햇볓아래서는 잠시도 서 있거나 앉아있을 수도 없어서 우리 대원들은 그늘 진 담장밑이나 나무그늘아래서 거의 한시간 이상을 기다린 것 같았는데 위와같이 기다린 이유도 비행기에서 짐이 나오지 않아서였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공항의 직원들이 비행기가 도착할 때마다 짐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비행기가 3대정도 도착한 후 한꺼번에 짐을 내리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다고 하며 막무가내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지루하게 짐을 기다리다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중 ‧ 후반에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타고 다니던 버스도 그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에어컨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버스 안은 찜통이었고 퀘퀘한 냄새를 참아가며 가는데 오호라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러시아의 대평원은 이러한 모든 불편을 참을 수 있게 하며 여행의 피로한 마음을 청량하게 하여 주는 것이었다
버스로 4시간을 가는 동안 거의 3시간 이상 대평원지역을 지나가는데 끝없이 보이는 지평선을 두고 널따란 초지와 옥수수 밭 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러시아의 해바라기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는 동안 재미있었던 일 중의 하나는 박산밸리를 거의 다 와서 버스를 잠시 쉬고 우리들이 차에서 내려 있을 때 우리의 영원한 산지기 김용호가 공원의 땅에 떨어져 있는 어떤 씨앗을 주어와 돌로 깨더니만 아몬드 쵸코렛이라고 하며 먹어보라고 하기에 먹어보았더니 보신탕가게에서 먹어 보았던 살구씨였던 것이었다
Ⅴ. 등정준비훈련
서울에서 출발하여 모스크바에서 일박을 하였고 모스크바에서 박산밸리로 이동하여 이트 콜(이곳은 박산벨리에서 우리가 묵었던 호텔의 이름인 것으로 보였다)에서 둘째 밤을 지낸 후 셋째 날부터 4일동안 고산지대를 등반하면서 고소적응훈련을 하였으며 다섯째날 엘브러즈 봉우리 정상에 등정을 한 것이었다
우리가 투숙한 박산밸리지역은 해발 2,500미터의 고지대로서 양옆은 깍아지른 듯이 높은 산으로 이어져 있는 협곡지대이었는데 그곳은 목축업이 성한 곳이라서 방목되고 있는 소들이 아무 곳이나 헤집고 다니며 풀을 뜯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들이 투숙한 이트 콜에서 북쪽으로 계곡이 뻗어 내려가고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우리가 등정목표로 삼고 있는 엘브러즈 봉우리가 있는 카프카스 산맥의 위용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한여름임에도 멀리보이는 산등성의 윗부분이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산악은 우리를 환영하면서도 감히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듯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잡고 있었다
이트콜에서 3박을 하였는데 첫째날은 해발 3,600미터의 체게봉을 가벼운 마음으로 등정하였고 둘째날은 궤도차를 타고 3,700미터정도까지 올라 가 내린 다음 그곳에서 해발 4,200미터까지 등반을 하였으며 셋째날은 등반장비를 꾸려 오전에 해발 3,900미터에 있는 바렐산장으로 짐을 옮긴 후 오후에 다시 해발 4,500미터정도까지 등반훈련을 하였다
짐을 옮길 때는 궤도차와 케이블카, 리프트를 이용하였는데 특히 궤도차를 이용한 이유는 원래 그곳이 케이블카를 타고 가도록 되어 있었으나 케이블카가 고장이 나서 수리중이었는데 현지 가이드의 주선으로 케이블카 수선작업을 위하여 동원되었던 궤도차를 이용하여 짐을 옮기고 우리도 궤도차를 타고 간 것이었다 (궤도차는 탱크를 개조하여 위에 짐을 실을 수 있는 적재함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 적재함에 케이블카 수리용 자재와 골재등을 실고 우리도 함께 타고 올라간 것이었다)
위와같이 이트콜에서 3박을 한 후 바렐산장으로 숙소를 옮기고 고지대 적응 훈련을 하였으며 위 산장에서 하루 묶은 다음날은 마지막 적응 훈련을 하며 해발 4,700미터정도까지 등정을 하였고 그동안 우리의 등반장비는 스노우카를 이용하여 해발 4,100미터에 있는 프리유산장으로 이동되어 짐을 풀어 놓게 되었다
고지대 적응훈련을 하면서 처음에는 나 자신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니 차츰 고도가 높아지면서 힘들어지고 내가 뭐하러 이짓을 하고 있나 그동안 이곳에 와서 보아 온 것만 하더라도 충분하지 꼭 정상에 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마지막 등반훈련을 할 때에는 너무 힘이 들어 등정의 자신감을 잃고 있었는데 더욱이 몽블랑등 고산지대의 등반경험이 있다는 다른 분들이 고소적응 하는 것이 힘들며 고소적응여부가 등정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건이라고 하면서 최대한 동작을 느리게 하며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말씀들을 하시는데 내가 보니 그 분들은 평상시와 마찬가지의 속보(내가 보기에)로 걸어가고 있었으며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 갈 엄두가 나지 않으니 어떻게 그런 분들을 따라 등정을 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하여튼 마지막 고소적응 훈련을 오후 3 - 4시경 마치고 일찍 저녁식사를 한 후 다음날 새벽 2시에 산장을 출발하여 등정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어 나를 비롯한 모든 대원들은 다음날의 등정을 기대하며 긴장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등정전의 마지막 밤을 보낸 프리유산장은 널빤지로 만든 하꼬방으로서 직사각형의 가건물에 일부분은 현지 가이드들이 사용을 하였고 일부는 우리대원들이 숙식을 하였는데 주방기구가 있어 식사를 조리하는 곳에 탁자가 일자로 있어 한꺼번에 10여명이 양쪽으로 늘어 앉아 식사를 하였으며 그 뒤로 2층을 나누어 침상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침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 머리가 천장에 닫는 상태이었으므로 되도록 주저 앉아 짐을 꾸리거나 필요한 동작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2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삐걱거리는 베니다 널빤지에 눅눅한 요가 깔려 있었다, 산장지기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더라면 햇볕이 좋은 날 한두시간만이라도 요를 밖에 널어놓았더라도 상쾌한 기분으로 침상을 사용할 수 있었을 터인데 눅눅한 요에 천장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널빤지 가장자리로는 무엇을 하다 생긴 것인지 톱밥이 널려있어 침상위에서 조심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먼지를 먹거나 톱밥이 날리거나 하는 상황이 되었고 장도희와 최덕심누이들은 아예 침상위에 있던 요를 걷어치우고 침낭을 깔고 잔다고 하였다
저녁식사를 한 후 오후 6 - 7시경부터 취침준비에 들어가며 다음날 새벽 1시 반에 기상하기로 하였는데 대부분의 대원들이 잠이 들것 같지 않아 고민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조병욱선배도 수면제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언제 수면제를 먹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를 머리 굴리며 고민하고 계시고 있었고 칸막이 건너편에 누워계시는 황청사선배가 “오늘 잠을 자지 못하겠는데”라고 한숨을 쉬자 그 옆에 계시던 형수님이 황선배님께 “그래도 잠을 자도록 해보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옅들으며 나도 빨리 잠을 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별하나 별둘을 세거나 하나에서 백을 세거나 별짓을 다하며 애를 쓰다가 어느덧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아마도 한 두시간 정도는 잠을 잔 것 같았다
Ⅵ. 등정(화려한 클라이막스)
8월 16일 (토요일) 새벽 한시경 나를 비롯한 모든 대원들이 기상하여 아침 식사로 곰탕 떡국을 먹었다 이양근회장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먹은 만큼 갈 수 있으니 많이 먹어야 한다”라고 하시는데 나는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속도 불편하여 여행사 최사장에게 반그릇만 달라고 하여 간신히 빈속만 달랜 후 등정준비를 하였다
이미 등정을 위하여 작은 배낭에 집어넣을 것은 그 전날 모두 챙겨 놓았으므로 입을 옷만 챙겨 입으면 되었는데 양말을 새로 갈아 신고 동내의 상하를 입은 다음 아래는 경원이와 함께 가서 산 오바 트라우저를 입었으며 위에는 방한 자켙과 그위에 다시 등산학교 교복인 고어텍스 자켙을 껴입었고 보온장갑과 덧장갑을 끼고 얼굴에는 바라크라바를 뒤집어 쓴 다음 다시 그 위에 귀를 덮는 겨울 모자를 쓰고 산장 밖으로 나갔다
새벽 두시경 우리를 산 정상 밑으로 이동시켜 줄 설상차 두 대가 도착하여 있었으며 그 설상차는 우리를 해발 4,800미터인 파투코프 바위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그곳에서 해발 5,642미터의 엘브러즈 서봉 정상까지를 우리가 등반해야 하는 것이었다
등반의 선두에는 우리를 미네랄 보디에서부터 안내하였던 현지인 가이더로서 미모에서도 빠짐이 없는 젊은 러시아 새댁 “루디”가 선봉에 서서 향도 하였고 그 뒤로 우리대원들이 한 줄로 서서 정상을 향하여 한걸음씩 걷기 시작하였다
나는 설상차에서 내린 후 내가 그래도 제일 믿을 수 있는 경원이 옆에 서 있었는데 경원이가 장도희에게 나의 앞에 서서 걸으라고 하며 도희 뒤에 내가, 내 뒤에 자기가 따라가고, 경원이 뒤에 김영호를 따라 오라고 하며 따로 도희에게 내가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최대한 천천히 걸으라고 하며 최대한 내가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대원들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나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면 경원이의 말을 따라 장도희의 발꿈치만을 보고 열심히 따라가는 것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며 해발 5천미터 카프카스 산맥의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정상도전의 결의를 굳히게 되었다
한걸음 한걸음을 힘차게 디디며 나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려고 마음을 다잡았고 그동안 이양근회장님이 우리대원들은 모두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하던 말씀을 생각하고 또 다른 대원들이 아무리 고산등반의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힘들면 저들도 힘든 것이고 저들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오기가 발동하며 등반대열을 따라 오르기 시작하였다
어느정도 오르면서 차츰 힘이 들기 시작하였으나 그래도 버틸 수 있었으며 도희가 뒤를 돌아보며 “영범이 형, 사이드 스탭으로 올라가는 것이 편하니까 한번 해봐”라고 나를 격려하였고 경원이도 뒤에서 수시로 나에게 말을 걸어 주며 나로 하여금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고 뒤따라 갈 수 있도록 마음을 써주기는 하였으나 점점 나의 체력으로는 대열을뒤따라 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오히려 나 때문에 장도희나 경원이, 영호가 정상을 오르는데 지장을 준다면 그들에게 더욱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정상을 향하여 출발을 한지 얼마나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나는 경원이에게 “너희들 먼저 가 나는 내 페이스대로 올라 가 볼께”라고 하며 대열에서 옆으로 물러서고 말았고 경원이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러면 형 천천히 와”라고 하며 앞서 진행을 하였는데 그 이후로 나의 고행이 시작이 되었다
엘브러즈는 두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동쪽봉우리는 해발 5626미터이고 우리가 등정하려고하는 서쪽봉우리는 해발 5642미터로서 두개의 봉우리가 연하여 서 있는데 서봉(서쪽봉우리)을 등정하기 위하여는 동봉의 능선 허리를 가로 지르며 올라가 동봉과 서봉사이의 안부를 거쳐 서봉을 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대원들의 대열에서 뒤쳐지며 혼자 오르면서 도희가 이야기 한대로 사이드 스탭으로 걷다가 경사가 아주 심한 곳은 아예 발목이 아파 뒤로 걷기도 하였으며 경사가 낮은 곳에서 제대로 앞으로 걷는 등 내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 궁리하며 한걸음씩 걷기 시작하였다
조금 앞에서는 우리 대원들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으며 조금만 힘을 내면 뒤따라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한 내 뒤로 다른 등산팀들이 계속 올라와 나는 그들에게 길을 양보하여 주어야 하였으며 자꾸만 대원들과의 거리는 멀어져 가는 것이었고 동봉의 옆구리를 끼고 돌때는 내앞에 우리의 대원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그무렵부터인지 고소증세가 나에게 온 것 같았다
우선 그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서였는지 몰라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졸리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으며 한걸음씩을 걸으면서 정신을 차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옆의 경사면으로 미끄러질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머리는 멍하고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때쯤 현지 가이드가 내 옆으로 다가와 산을 올라 갈 수 있느냐고 묻기에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오기를 부리며 올라갈 수 있다고 하였더니 그는 “슬로우 스텝, 슬로우 스텝”이라고 하며 천천히 올라가라고 하면서 내 뒤에 마지막으로 쳐져 있던 일행 (같은 여행사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동행하였던 장인식이라는 분)을 돌보기 위하여 쳐지는 것이었고 나는 비몽사몽의 정신상태에서 한걸음씩을 무의식적으로 내딛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이 미식거리며 토할 것 같았는데 누군가가 산에서 토하면 그 즉시 하산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나 최대한의 심호흡을 하여 속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내가 몇걸음씩을 걸었는지를 모르겠다, 나는 걸으면서 내 딴에는 복식호흡을 해 보겠다고 심호흡을 하며 걷기도 하였고, 더욱 힘이 들면 스톡에 몸을 기댄채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엄지 손가락이 마비되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에도 느낀 경험이었지만 처음에는 엄지 손가락의 끝부분만 저릿하던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엄지손가락이 손가락 끝에서 손목부분쪽으로 윗부분까지 감각이 없어지고 다른 손가락도 점점 마비되면서 이러다 동상이 걸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였다
아예 장갑을 벗고 양손을 비비며 마찰을 해 보았는데 잠깐 동안 비비는 것만으로는 효험이 없는 것 같았고 오랫동안 장갑을 벗고 있을 수도 없어서 장갑을 낀채 장갑 속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최대한 손가락사이에 혈액이 순환되도록 하는 것 뿐이었다
그날 설상차에서 내려 새벽 2시 반경부터 등반을 시작하였고 그곳의 일출이 대강 새벽 6시전이었는데 등반을 시작한 서봉의 옆구리는 해뜨는 곳의 반대편이었으므로 새벽 여명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계속 그늘진 곳의 추운 등반로를 따라 걸어야 하였고 나는 이미 고소증세에 겹쳐 몸도 차가운 냉기에 체력은 소진되어 가는 것 같았다
머리는 멍하였고 속은 느글거리며 비몽사몽간에 한걸음씩을 걸어가다 동봉의 옆구리를 휘감아 돌아서니 저 앞에 동봉과 서봉사이의 안부가 보이며 그곳에 몇몇의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는데 동봉의 그늘진 음지옆으로 햇살이 비치는 하얀 눈밭의 양지가 그토록 반가웠고 그 뒤로 짙푸른 구릉지대가 널리 펼쳐져 있는 것도 차츰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상을 올라가던지 말던지는 나중에 생각을 하기로 하고 일단 저 따뜻한 햇볕이 있는 곳으로 가서 몸을 녹여야 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만큼 온 것만 해도 장한 일을 한 것이며 정상에 올라가 보아야 별거냐라는 생각뿐이었다,
동봉과 서봉사이의 안부에 도착하였을 때 현지 가이드 “로만”이 나를 맞았는데 나는 처음에 그가 우리의 현지 가이드인지도 잘 몰랐다.
“로만”이 나에게 배낭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였다, 햇볓을 쬐며 몸을 따스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는 눈이 크고 코도 크고 키도 컸으며 시원스러운 얼굴형에 사람 좋게 생긴 것이 내 생각에는 꼭 강경원하고 인상이 비슷한 것 같았다
“로만”이 나에게 산에 올라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라고 대답을 한 후 앉아서 쉬면서 손바닥을 비비고 최대한 몸을 릴랙스하게 하여 쉬면서 “로만”에게 물었다 “정상까지 가려면 어느정도의 시간이 걸리냐”라고 하였더니 “로만”은 나에게 정상까지 한시간 반정도면 올라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그곳 안부에 도착할 무렵 우리의 대원들 중 일부가 서봉을 오르는 것을 내가 볼 수 있었고 그렇다면 내가 너무 늦은 것이 아니라는 안심을 하게 되었고 그곳 안부에서 내가 약 30분 정도는 쉬었으니 어느 정도 체력도 회복되어 한시간 반정도 걸린다고 하는 정상을 오를 수 있지 않은가라는 욕심이 슬그머니 생기기 시작하였다
안부지역에서 서봉정상까지는 비스듬한 경사로를 약 3 - 40분 올라가다 바위지역이 나오는 곳에서 안쪽으로 꺽어지며 안부쪽에서는 등산로가 보이지 않게 되어 있는데 나중에 올라가 보니 위와같이 꺽어지는 곳에서 위로 오르는 길이 장난이 아니도록 경사가 져 있었고 안부지역에서 내가 그곳을 보았더라면 등정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였을 지도 모르는 일 이었는데 결국 나는 정상등정의 마음을 먹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배낭을 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봉을 오르면서 꺽어지는 바위지역을 지나 힘겹게 오르면서 다시 한번 고소증세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때 내옆에서 또는 뒤따르며 돌봐주는 “로만”의 배려를 고마워하며 한걸음씩을 내딛다가 눈길의 한 모퉁이를 돌았는데 도희누이의 눈을 내가 보게 되었다
도희가 나에게 외쳤다 “영범이 형 올라 왔네, 형 혼자 올라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어” 그런데 이 여자가 그말을 하면서 엉엉 우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도 진짜 내가 되게 고생을 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펑펑 울음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창피하였다, 선그라스로 가려있었기에 망정이지 흐르는 눈물을 닥기 위해 잠시 선그라스를 젖히고 얼른 눈물을 한 줌 훔쳤다, 옆을 보니 경원이도 잠시 눈물을 비추면서 일부러 먼산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영호도 콧물을 직 흘리고 있었다
의리의 사나이 이창기 형이 내 배낭을 빼앗아 가며 허리와 어깨를 주물러 주었고 김영철형과 김호택씨도 나를 격려하여 주었다 이양근 회장님이 영호에게 나와 함께 정상에 올라갔다 오라고 하여 영호는 엘브르즈 정상을 두 번이나 올랐고 나는 그곳에서 약 15분 거리인 정상까지 영호, “로만”과 같이 오를 수 있었다, 조병욱 선배께서 나에게 다섯걸음 걷다가 쉬며 심호흡을 하고 다시 올라가라고 격려하여 주었으며 나는 엘브르즈 정상에 영호와 함께 올랐다, 그것은 우리 대원들 중에 제일 마지막 등정이었다
Ⅶ. 에필로그
등정을 마친 후 황청사선배가 나에게 나중에 에베레스트에도 함께 가자고 하였고 이창기형도 고산등정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고산 등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직 모르겠다 정상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고단한 등산여정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지 아직은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슴 뭉클한 뜨거운 경험을 이번에 겪은 것은 분명하다
이창기 형이 돌아오는 길에 산에서 어떤 여자가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린다면 자기는 평생 그여자를 책임질꺼라고 하며 나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진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이가 기뻐할 때 나도 좋아하고 누이가 괴로울때 나도 아파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영호야, 경원아 너희들은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들이다
유병문대장에게 감사드리며, 러시아대사관저에서 맛있는 캐비어와 보드카를 시음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최홍건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너무나 생생한 등반기가 이 더운날 내손이 시려오고 아침햇살에 눈녹는듯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부럽고 한편 감동에 내가눈물이 펑펑.....흑흑..!!! 영범형? 축하해.정말 멋져^^^그리구 배살 등짝에 붙었겠는데....
정상에서 하염없이 쏫아지는 눈물, 작년 몽불랑을 생각하면 더욱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수고 많으셧습니다.
저도 눈 가를 훔쳐 봅니다. 비 내리는 이 아침, 대원들의 땀방울인 양, 제 가슴을 적십니다. 엘 브러즈 등반 대원님들, 만세!
우와~~~~ 감동,감동의 물결이 팍팍 밀려옵니다. 영범형의 실감나는 글솜씨는 역쉬 변론을 업으로 하는(^^)변호사 답군요. 우리 동문님들의 그 따듯한 정과 뜨거운 의리에 감동하고 또 감동합니다. 장하다 영범형!!!!!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엘브러즈 등반대원님 승리의 등반을 축하드립니다.
정말 고생많았군요.설악 계곡산행때 후미에서 둘이 걷던 기억이나는군요.놀랍고 대단합니다.화이팅 입니다.26일 기 모입때볼수잇을지?......(송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