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2010년대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바로, 불안이 아닐까. 여기서 교육현장은 단순히 초·중·고등학교만을 뜻하지 않는다. 대학교는 물론이고, 무언가를 가르쳐준다는 강연장과 누군가를 위로해준다는 힐링쇼와 삶의 이유를 알려준다는 동기부여 체험장 같은 곳에서 불안은 공기처럼 스며들고 있다. 불안이 일상이 될수록,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감각이 있다. 그것은, 용기다.
끔찍한 한 여름의 습기처럼, 만성적 불안이 눅눅하게 나에게 눌러 붙던 어느 날, 나는 <브레이브 스토리>라는 애니메이션을 봤다.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고, 그 저자는 미야베 미유키다. 2012년 강렬한 결말을 보여줬던 영화 <화차>의 원작 소설을 쓴 미야베 미유키 말이다. 내용은 여느 소년 판타지와 다르지 않다. 10대 소년 둘이 이세계(異世界)를 가게 되고, 그곳에서 여러 경험을 쌓고, 마침내 성장해서 현실로 돌아온다는 뻔한 스토리.
물론, 뻔한 이야기가 뻔하게 재밌다고 말하기 위해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은 아니다. 이 뻔한 이야기 속에는 언뜻 보기에 ‘이상한 모습’이 있다. 나는 바로 그 ‘이상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어쩌면, 바로 그 이상함이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용기’란 감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은 심증일 뿐이고,(왜냐면 내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불안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무지 기묘해 보이는 모습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용기인가?
흔한 판타지물이 그러하듯, 와타루와 미츠루라는 10대 소년은 이세계로 빠져든다. 흔한 판타지물은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다른 세계는 어떤 위험에 빠져있고, 우리의 10대 주인공이 그것을 해결하여 다른 세계를 지켜내고, 마침내 집에 돌아온다. 그런데, <브레이브 스토리>의 세상은 다르다. 애초에 와타루와 미츠루가 다른 세계에 간 것은 현실세계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세계의 평화가 아니라 마법 구슬 5개일 뿐이다. 그런 조건 속에서 미츠루는 거침없이 구슬 5개를 모아간다. 때로는 다른 세계의 숲을 모두 태우고, 그 속에 사는 동·식물과 사람들을 죽이기도 한다. 왜냐면, 그것이 구슬 모으기에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와타루는 미츠루의 그런 행동이 맞는 건지 혼란스러워 한다. 그런 와타루에게 미츠루는 한 마디 한다. “네가 여기에 온 이유가 뭐야?”
1999년, 신해철은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교육현장에서는 ‘네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라’는(방금 전 노래 제목과 비슷한) 마법의 주문을 달달 외운다. 그런 의미에서 미츠루는 ‘분명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인지하고 있고, 한 치의 의심 없이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한국의 (진보나 보수할 것 없는) 부모들이 좋아할만한 자녀인 셈이다.
그런데 미야베 미유키는 10대 소년들을 더욱 잔인한 선택 속에 빠트린다. 소원을 이뤄주는 5개의 구슬 중, 마지막 5번째 구슬을 얻게 되면, 그 구슬이 봉인하고 있던 다른 세계의 온갖 악들이 뛰쳐나와 다른 세계를 망하게 만든다는 조건을 건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츠루는 마지막 구슬을 손에 얻으려 하고, 와타루는 그것을 막으려 한다.
네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한국에서는 이런 질문을 속삭이는 것을 ‘교육’이라 한다. 10년도 훨씬 전에는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며 물어봐야 하는 시대였다면, 이제는 다들 원하는 것은 오래전에 합의한 듯 보인다. 만성화된 불안 속에서 ‘하고 싶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또렷하고, 그것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 정해져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해야 하는 것’에 복종시키기 위해 속삭이는 질문이, ‘네가 간절히 원하는 게 뭐야?’라는 물음이다.
혹, 미츠루의 소원에 비해 와타루의 소원이 절실하지 않은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그 둘의 소원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둘 또한 만성화된 불안 속에서 충분히 일어날만한 사회적 사건 속에 얽혀버렸고, 그 사회적 사건을 돌이키고자 하는 게 와타루와 미츠루의 소원이다. 그 절실함의 무게를 지면서 <브레이브 스토리>는 묻는다. 그럼에도, 네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세계를 무너뜨리겠냐고.
마침내, 미츠루는 5번째 구슬을 손에 얻고, 소원을 빌러 탑에 오른다. 그곳에서 마지막 시험이 펼쳐진다. 바로,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자신과 꼭 닮은 이가 튀어나오고는 자신에게 덤벼든다. 미츠루에게는 미츠루가, 와타루에게는 와타루가 덤비는 것이다. 여기서 와타루는 한 번 더 고민에 빠진다. 와타루와 싸우는 와타루는 와타루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솔직히 정말로 중요한 것은 너의 소원이 아니냐고. 다른 세계가 멸망하든 말든, 미츠루가 가진 구슬을 빼앗아 네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 않느냐고.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에 자꾸만 망설이는 와타루와 달리, 미츠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또 다른 자신을 죽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자신도 죽는다.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 중 하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과 ‘자신을 이겨내라’라는 주문이다. 세상의 적은 자기 자신으로 축소되고, 모든 분노도 자기 자신을 향해 내던진다. 그렇게 죽어라 자신을 미워한다. 게으른 자신을. 나태한 스스로를. 약해빠진 자기를. 그렇게 해야, ‘간절히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츠루도 그랬다. 그래서 이곳의 부모들이 자랑스러워할만한 자식처럼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자신과 싸우는 자신을 죽였던 거다. 그런데 <브레이브 스토리>는 그 결과는 자신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미츠루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고, 그래서 자신도 죽었다.
와타루는 자신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세계도, 친구도, 신경 쓰지 말고 정말로 원하는 것만 생각하라는 자기 자신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또 다른 자신의 모습임을 받아들인다. 자기를 괴롭히는 또 다른 자신을 이겨내려는 게 아니라 쓰다듬는다. 마침내 와타루는 최후의 시험을 통과하고 ‘운명의 여신’앞에서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마치, 한국에서 무수한 시험을 통과하고 넘어서고 합격하여 마침내 어떤 기득권을 손에 쥐는 위치에 다다른 것처럼. 애초에 와타루는 간절히 원하는 게 있어서 다른 세계에 왔고, 여신을 만나기 까지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자신은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충분히 믿을 만하다. 그런데, 와타루는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와 친구들을 위한 소원을 여신에게 말한다.
결국, 와타루는 현실에 돌아오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여전히 부모님은 이혼 중이며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야 할 형편인 것이다.(와타루의 소원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원래의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타루는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가정을 받아들이고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여기서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인가! 우리는 흔히 어떤 위치에 올라서면 그것은 오직 ‘자신의 노력’ 때문이었고, 그렇기에 ‘노력의 대가’를 온전히 혼자서 가져가는 게 뭐가 나쁘냐는 식으로 되묻지 않았던가.
용기가 사라진, 불안만 남겨진, 옹졸함만 키워진, 이곳에서 <브레이브 스토리>의 이상한 모습은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각자의 간절함에 갇혀서, 오로지 다섯 개의 구슬로 이뤄낼 소원에만 정신 팔린 채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누구와도 나누지 않은 채로, 결국엔 세상과 자신을 망하게 만드는 풍경. 그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닌가? ‘네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너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는 언뜻 교육적으로 보이는 마법의 주문들. 그런데 실은, 이런 주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용기 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는 옹졸함에 빠지게 만드는 ‘악마의 속삭임’이 아니었을까.
불안한 시대, 사람들은 불안을 소거하기 위해 ‘간절함’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스스로의 간절함에 갇혀버린 이들은 옹졸해져만 갔다. 옹졸한 시대, 사람들은 용기를 ‘바보 같은 짓’이라고 읽은 지 오래다. 그러나 아무도 용기를 내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갈수록 괴로울 뿐이다. 미츠루는 끝까지 ‘영악’했지만, 그는 세상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망가져버린다. 정말로 바보였던 것은 누구였을까? 우리는 간절해질수록 용기 있는 게 아니라 옹졸해져만 간다. 그리고 옹졸함은 결단코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용기’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이것은 착해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희생이 필요해서도 아니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만이 불안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항상 불안에시달리며 살아가는
우리네모습에 참 안타깝기그지없지만 ..용기낸다는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네요
용기를 낼수있게 조금만 힘이되어주는
장치가 없을까요-소심한 소시민이 ㅠ
그래서 엄기호 씨가 용기는 개인이 내는 게 아니라 집단이 만드는 거라는 말을...원래 무언가를 작당할 때는 혼자는 떨리지만 여럿이 하면 해볼만 한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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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용기내서(..) 얼굴에 철판도 깔지요. 하핫.
용기내어 항상 글쓰며 또 용기 내며 자신을
쓰쓰로 격려 함니다 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