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 12. 22 황해 봉산~ 1914. 7. 27 서울.
국어학자·국어운동가·교육자.
호(일명이기도 함)는 학신(學愼)·한힌샘·일백천(一白泉)·백천(白泉)·한흰메·태백산(太白山).
12세에 서울에 있던 작은아버지 면진(冕鎭)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문을 배웠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1898년 6월 역사지지특별과를 졸업하고 1900년 6월 보통과를 졸업했다. 배재학당시절 독립신문사에서 서재필의 언문조필로 있으면서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1896년 국문동식회를 신문사 안에 설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했으며, 같은 해 7월 학부(지금의 교육부) 내의 국문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안을 작성·제출·토의했다.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된 하기(夏期)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유지들을 규합하여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한 후 2년 동안 이끌었다. 국어연구학회는 1911년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13년 학회의 이름이 한글모로,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이 한글배곧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 단체들의 회장이자 강사로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1909년에는 J.S.게일, 다카하시[高橋亭] 등과 더불어 한어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학교·융희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배재학당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과 여러 강습소를 중심으로 국어 강의를 전개했다. 1900년 상동사립학숙에 국어문법과를 부설하고 1907년 여름에 상동청년학원의 국어강습소, 같은 해 11월 같은 학원에 설치된 국어야학과, 1908~09년 국어강습소, 1910년 재령 나무리강습소 등의 많은 강습소를 통해 음학(音學)·자분학(字分學)·격분학(格分學)·도해학(圖解學)·변체학(變體學)·실용연습 등을 가르쳤다. 그에게서 직접·간접으로 배운 사람들은 김두봉·이규영·최현배·김윤경·권덕규·신명균·장지영·이필수·김원우·정열모·이윤재·이병기·김두종·백남규 등이다.
연구활동과 학설
1890년 15세에 국문을 처음 배워 토 '과·와'의 구별을 깨닫고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7세에 한문과 영어를 배우면서 어려운 한문 대신 국문을 쓰고, 알파벳을 국문에 적용해서 자모음을 풀었으며 모음이 분합(分合)됨을 알았고 아래아( )가 'ㅣ'와 'ㅡ'의 합음(合音)일 것이라고 깨달았다. 1893년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1898년 12월 개성(槪成)했다(이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 주시경의 연구분야는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첫째, 문자론과 표기법, 둘째, 음학(소리갈)과 문법론(기난갈과 짬듬갈), 셋째, 사전편찬이다. 이 세 분야의 연구는 어문생활을 바로잡고 교육할 목적으로 행해진 것으로서 그 필요성은 이미 1897년의 〈국문론〉에서부터 강조되어온 것이었다. 첫번째 것은 특히 〈국문론〉·〈국문연구〉를 통해서, 2번째 것은 〈대한국어문법〉·〈국어문전음학〉·〈국어문법〉·〈말의 소리〉 등을 통해서, 3번째 것은 현재 원고 상태로 그 일부가 전하고 있는 〈말모이〉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그가 17세에 모음의 분합을 깨우쳤다는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국어 현상에 대한 그의 서술방식은 원소적인 단위가 모여 더 큰 단위를 이룬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음학·기난갈·짬듬갈 등에 두루 적용되었다.
그는 소리를 적는 문자(記音文字)와 뜻을 적는 문자(記事文字)를 나누고 기음문자가 훨씬 훌륭한 것이니 한자 대신 국문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신문〉에 연재한 〈국문론〉에서 이미 그는 통일된 표기법의 사용을 역설했다. 먼저 말의 '경계'를 찾아 적어야 하는 것(즉 連綴을 하지 않고 分綴을 해야 함)을 여기에서는 명사류와 조사류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지만, 〈국문문법〉·〈대한국어문법〉부터는 용언의 어간과 어미 사이에서도 이루어져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심화는 이미 중세국어 단계에서부터 근대국어 단계를 거쳐오면서 우리 선인들이 국어 표기법을 발전시켜온 전통에서 나타난 것이었으나 그는 자기만이 그러한 생각을 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그는 'ㄺ·ㄻ·ㄼ' 외에 'ㄷ·ㅅ·ㅈ·ㅊ·ㅌ·ㅍ·ㅎ·ㄲ' 등도 새 받침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논의했다. 이와 같이 말의 경계를 살펴 특히 어간은 본음(本音)을 가지는 형태로 고정시키되, 'ㅊ·ㅍ·ㅎ' 등의 새 받침도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본음의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마지막 저서 〈말의 소리〉에 가면 단순화되는 변모를 겪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식상 다소간의 변모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ㅏ·ㅓ·ㅗ·ㅜ·ㅡ·ㅣ'를 모음의 단음(單音)으로, 'ㄱ·ㅇ·ㄷ·ㄴ·ㅂ·ㅁ·ㅈ·ㅅ·ㅎ·ㄹ'을 자음의 단음으로 보고 그밖의 것들은 이런 기본단위들이 합성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모음 ''는 'ㅣ'와 'ㅡ'의 합음으로, 'ㅿ'은 'ㄹ'과 'ㅎ'의 합음으로 보았는데, 이는 차서(次序)와 규모(規模)를 중시하는 그의 철저한 수리적(數理的)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공시적인 것과 통시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러한 통시적 현상에 대한 고려는 1914년의 〈말의 소리〉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된다. '철·코·탕·풀' 등의 어두 자음들은 결코 ',,,' 등으로 재음소화(再音素化)되어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만 음절말의 'ㅊ·ㅋ·ㅌ·ㅍ' 등은 위와 같이 재음소화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좇고·깊고' 등이 '[좃고], [깁고]' 등으로 실현되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기난갈'의 기본단위는 '기'(후에 '씨'로 고침)이다. '기'의 종류는 처음에 7개에서 9개로 바꾸었다가 나중에 6개로 수정했다. 이 '기'는 어휘형태소적인 것에 약간의 문법형태소적인 것을 포함하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분석적인 서술방법은 '기'를 분석하면서 '기난갈'의 가운데에 '짬듬갈'을 두고 설명한 점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기'가 단어적 측면과 문장적 측면에서 모두 기본단위가 됨을 인식한 데서 이러한 방식이 취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가 모여 문장을 구성하면 '드'가 된다. '드'와 '드'가 모이면 더 큰 '드'를 이루게 된다. '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듬난'을 두고 문장의 '듬'을 분석해야 한다. 복합된 문장 가운데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숨은 뜻'이나 '속뜻'으로 있는 것인데 '말'을 그것이 표현하는 '일'과 관련시켜 그림으로 도해하여 풀고 그것도 잘 안 될 때는 말한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조선광문회에서 〈신자전 新字典〉의 국어풀이를 제자 김두봉과 함께 맡아보았으며,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 역시 제자인 김두봉·권덕규·이규영 등과 더불어 편찬했다. 1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어휘수집에서 주해까지 진행되었으나 1914년 그가 죽자 출판되지 못하고 원고 상태로 있다가 현재 전하는 것은 첫권밖에 없다. 그의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후에 조선어학회로 개칭됨)를 설립했다. 그의 초기 표기법 이론인 본음이론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공표하여 시행하게 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상당히 독창적인 것이었는데, 특히 〈말의 소리〉에서 제안된 음의 기본단위인 '고나', 〈국어문법〉에서 시편 의미를 바탕으로 한 정밀한 구문도해, 형태의 기본단위인 '늣씨', '씨'와 '씨'를 구분하는 표지인 중권점과 우권점, 합성어의 단위들을 잇는 표지인 '벌잇', 문장의 심층적 성분이 반영된 '숨은 뜻'과 '속뜻' 등의 개념은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고나'·'기'·'드' 등을 일종의 기호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일부만이 그 후계자들에 의해 수용되었을 뿐이다. 그의 독창적인 연구는 제대로 계승·발전되지 못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외래이론에 기댄 국어연구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그를 추모하는 정도에 머물다가 1970년대 이후 그의 연구업적들을 많이 발굴해내고 종합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새로이 조명하게 된 것은 단지 그가 국어학의 선구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연구가 독창적이어서 현대적 관점에서도 되돌아볼 만하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상
그는 당시 암울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민족적 자각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어·국문의 연구와 그 보급을 통해 국민을 계몽시키고 민족의 상징인 민족어를 통해 민족적 통일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어문민족주의를 표방한 애국계몽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사회·민족·국가를 온전히 보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바탕이 되고 힘이 되는 말과 글을 녹슬지 않게 수리(受理)하는 이언(理言:말을 갈고 닦아 다스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에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이 한국에 막 도입되던 개화기 때 그는 서재필·유길준, 중국의 양계초(粱啓超) 등의 영향을 받아 사회도 진화, 발달해 나간다고 믿고 있었다. 구역(句域)·인종(人種)·언어가 삼위일체로서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사회와 국가가 '천(天)이 명(命)한 성(性)'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에 한 사회·국가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요소 각각의 순수성[國粹]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구역은 민족과 국가 독립의 기(基)요, 인종은 그 독립의 체(體)요, 언어는 그 독립의 성으로, 그 가운데 독립의 성인 언어가 가장 중요하여 무엇보다 먼저 말과 글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과 글을 잘 수리하여 보전한 민족은 부강해지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빽빽한 공기가 성긴 공기를 침투해 들어가듯이 다른 나라에 국가를 빼앗기게 된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러한 사상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 그 여파로 고종황제가 양위하고 한일신협약이 맺어지면서, 일본의 차관정치가 시작되고 나서 한층 더 가열되어 실천으로 옮겨졌다. 이해에 중국 양계초의 〈안남망국사〉를 번역하여 〈월남망국〉로 간행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국어·국문의 연구와 그 보급에 더욱 힘쓰고 한글을 전용하며 한자어 용어를 한글로 된 새로운 용어로 대체하며 새로운 한글의 가로풀어쓰기를 시험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도 외래적인 그리스도교에서 민족적인 대종교로 개종했고, 이름까지도 한힌샘이라는 한글식 이름으로 고치게 된 것은 이러한 사상이 극단적으로 잘 나타난 것이다.
저서
저서로는 〈국문문법〉(1905, 필기본)·〈대한국어문법〉(1906)·〈월남망국〉(1907)·〈국어문전음학〉(1908)·〈말〉(1905~08)·〈한자 초습〉(1908)·〈국문초학〉(1909)·〈고등국어문전〉(1909)·〈국어문법〉(1910)·〈조선어문법〉(1911, 1913)·〈소리갈〉(1912경)·〈말의 소리〉(1914) 등이 있으며, 논설 및 논문으로는 〈국문론〉(독립신문, 1897. 4. 22~24, 1897. 9. 25~28)·〈말〉(1901)·〈사람의 지혜와 권력〉(신학월보, 1902. 2. 9)·〈국문〉·〈력〉·〈지디문답〉·〈평론〉·〈위〉·〈론셜〉(가정잡지, 1906. 6~1907. 1)·〈국어와 국문의 필요〉(서우, 1907)·〈필상자국문언〉(황성신문, 1907. 4. 1~4. 6)·〈국문연구안〉(1907~1908)·〈국문연구〉(1909)·〈한나라말〉(보중친목회보, 1910)·〈조선어에 관한 참고문〉(신문계, 1913. 1. 3) 등이 있다.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선생의 저작 [국어문전음학(1908)]중에서- | |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국어 연구, 어문 민족주의의 중심에 서다
1876년 개항 이후 우리 나라의 역사적 과제는 반(反)외세 자주화와 반(反)봉건 근대화의 문제였다. 외세의 침략과 수탈에 대항하여 민족 자주권을 사수하면서, 사회적 개혁을 단행하여 근대 민족국가로 거듭나려는 노력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왕실은 왕실 나름대로의 근대화 조치를 강구하였다. 또 보수적 양반유생들은 위정척사사상으로 무장하여 그들 나름대로 조국을 수호하여 갔다. 선각적 양반과 신진 관료, 그리고 새롭게 성장한 시민층은 개화와 개혁사상에 입각하여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민중들 또한 사회 경제적 변혁을 요구하며 밑으로부터 혁명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따라서 극소수의 부류를 제외하고는 조국 근대화와 자주화의 노력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 나아가 근대화와 자주화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혹은 어디에 초점을 둘 것인가에 대한 차이는 있었다. 이 같은 경중완급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개항 이후의 시기는 가히 전방위적 근대화 운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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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周時經, 1876. 11. 7~1914. 7. 27) 선생은 이러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리고 이 시기 우리 민족이 당면한 민족적 사회적 과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다. '힘이 있는 자는 힘으로, 돈이 있는 자는 돈으로, 머리가 있는 자는 머리로,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하듯이 선생은 한글 연구와 보급으로 역사적 과제 해결에 헌신하였다.
당시 외세 침략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기에 국어, 국사 그리고 민족 문화는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담보물이었다. 그것은 민족은 공통의 언어 집단이고,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지닌 집단이며, 독자적 문화 집단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선생은 "자기 나라를 보존하며 자기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데 있고,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길은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어문 민족주의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망의 위기가 현재화되어 가면서 그에 대한 연구와 보급은 민족 정체성의 확립을 뛰어넘어, 그를 통해 민족의 보존, 수호, 발전을 지향하는 어문 민족주의로까지 승화되어 갔다. 그러한 어문 민족주의자 가운데 가장 우뚝 선 사람이 바로 선생이었다. | |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
선생은 개항되던 해인 1876년에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천산리 무릉골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학원(鶴苑), 모친은 연안 이씨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상주(尙州), 아명은 상호, 호는 한힌샘, 한흰메, 백천(白泉), 태백산(太白山) 등이 있다. 선생은 조선 중기 풍기군수로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13대손이었다. 부친 또한 학문이 있어 구암집을 내기도 한 시골 선비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선생이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산나물과 도라지를 캐어다가 죽을 쑤어 형제들의 나이 차례로 나누어 먹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갈" 정도였다. 이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 선생이 본격적으로 학문을 익히게 된 것은 중부(仲父) 학만(鶴萬)씨의 양자가 되어 1887년 상경하면서부터이다. 물론 향리에서도 부친과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을 익히게 된 것이다.
선생은 남대문 시장에서 객주업으로 재산을 모은 양부 후원으로 이회종 진사 서당에서 약 4년간 한학을 배우며 인격을 도야하였다. 이때 한학을 배우면서 선생은 한문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당에서 한문글을 배울 때 선생이 한문을 한문음대로 한 번 읽어 주는데, 이때 아이들은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해서 멍하니 그대로 앉아 있다가 다음에 선생이 우리말로 새겨주어야 비로소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이같이 우리말로 하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왜 하필 어려운 한문음을, 그것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을 왜 헛되이 되풀이하는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되었고, 또 우리글이 있는데 왜 이토록 어려운 한문만을 배워야 하며, 우리말을 쉽게 적을 있는 우리글은 왜 쓰지 않나 하고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선생이 한글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선생은 한문을 배우면서 역설적으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나아가 한글 연구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893년 6월 배재학당의 교사인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가 야학으로 신학문을 지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자국어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이 때부터 선생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면서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 |
서재필과 함께 한글 연구 운동의 초석을 세워
선생은 1894년 배재학당에 정식으로 입학하였고, 이듬해 7월에는 관립 이운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선생은 마산항지사장으로 임명됐지만, 곧 이어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갑오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사퇴하게 되었다. 사퇴 후 선생은 그 해 4월 배재학당의 만국지지역사특별과에 재입학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서재필을 만나게 된다. 1895년 12월 26일 갑오내각의 주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이때 <독립신문>의 창간을 준비하면서 배재학당의 만국지지학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 때문에 둘의 만남은 필연적이자 운명적이었다. 그것은 서재필이 새로 창간할 독립신문을 일반 민중과 부녀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국문전용으로 발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선생은 서재필의 귀국 이전부터 국문법을 연구하던 당시 유일무이한 국문전용론자였기 때문이었다. | |
1914년 신문관(新文館)에서 간행된 선생의 저서 [말의 소리] 표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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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서재필은 갑신정변 시기의 혁명적 개혁론자가 아니라 점진적 계몽운동가로 변신해 있었다. 이러한 점은 국어 연구와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중을 계몽하려던 선생의 어문(語文) 민족주의적 관점과도 닿아 있었다. 따라서 선생과 서재필은 상호 필요성으로, 그리고 근대 민족운동의 관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녀 동지적 결합을 이룰 수 있었다. 선생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회계 사무 겸 교보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독립신문사 총무 겸 교보원으로, 국문담당 조필(助筆)로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천하여 갔다. 그리하여 서재필과 선생의 국민 계몽적 논설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층에도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특히 서재필의 근대 인권과 민권 사상, 그리고 남녀평등 사상 등은 일반 민중의 의식과 사상을 변혁시켜 이들이 이후 근대 민족운동의 주력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그 해 5월 ‘국문동식회’를 <독립신문>사내에 조직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의 단초를 열었다. 이 회는 독립신문을 제작에 있어 맞춤법을 정리 통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선생의 한글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 1907년 1월 설립된 지석영 중심의 국문연구회, 역시 그 해 7월 학부 안에 설치된 국문연구소, 그리고 1908년 8월 선생이 국어강습회 졸업생들과 함께 조직한 국문연구회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나아가 이 전통은 일제시기 선생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와 1931년 1월 확대 개편된 조선어학회,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계승되면서 한글 연구․정리와 보급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 |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운동을 이끈 실천 지식인
선생의 국민계몽운동은 독립신문의 발행과 한글 연구에만 그치지 않았다. 1896년 11월 서재필의 지도로 양홍묵, 신흥우, 이승만 등과 함께 배재학당의 학생과 교직원들을 중심으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였다. 이 회에서 선생은 처음 전적(典籍) 겸 <협성회회보> 저술위원으로, 후에는 제의라는 간부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협성회 주최의 토론회와 회보 발행을 통해 봉건적 악습과 적폐를 타파하고 일반 민중을 계몽하여 근대적 사회 개혁을 이루어 갈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로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선생은 여기에도 동참하여 활동하였다. 그것은 이 회를 결성하고 실제적으로 주도한 서재필과 선생이 관계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듬해 12월에는 약관의 나이로 일약 독립협회 지도부의 일원인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8년 5월 서재필이 제국주의 열강의 사주를 받은 수구파 정권의 탄압으로 재차 도미하고, 11월에는 이상재, 정교, 남궁억 등 독립협회의 간부 17명이 ‘헌의 6조’의 실행을 요구하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반 민중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종로 네거리에서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반정부, 반침략 투쟁을 펼쳤다. 이들은 피검된 독립협회 간부의 석방과 ‘헌의 6조’의 조속한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외세의 침략과 수구파 정권의 실정을 규탄한 것이다. 이 때 선생은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수구파 정부의 기습적인 무력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이 강제 해산되고, 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됨에 따라 선생은 부득이 향리로 피신하여 은신하게 되었다.
향리에 은신하면서도 선생은 한글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때 그간 5년 동안의 연구를 정리한 [국어문법]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다시 상경한 선생은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까지 5년여 동안 한글의 연구와 교육, 그리고 국문 연구의 과학화를 위한 개인 학습에 온 힘을 쏟았다. 정동에 와 있던 미국 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으로부터는 영어와 자연과학의 이치를 배웠고, 수진동의 흥화학교에 입학해서는 측량술과 도해법을 익혔다. 그리고 한성외국어 학교에서 일어청국어 등을 청강하고, 습득한 지식을 응용하면서 한글 연구를 심화시켜 갔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 들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한일의정서’가 강제되었다. 일제는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제하여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여 갔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을 준(準)식민지 상태로 만들어 갔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에서 우리 민족은 각기 역량에 따라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한편에서는 즉각적인 항일 무장투쟁인 의병전쟁으로 맞섰고, 다른 한편으로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인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국권회복을 지향하여 갔다. 선생 또한 국망의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량을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집중하였다. | |
큰 보자기에 책을 넣고 강의 위해 동분서주하여 생긴 별명, ‘주보따리’
이 시기 선생의 노력은 크게 네 방향으로 경주되었다. 첫째, 한글 연구 성과의 간행과 보급 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활동이다. 선생은 1906년 학생용 교재인 [대한국어문법]을 발간, 보급하였다. 이 책은 우리말과 글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한 글자꼴과 맞춤법의 본보기 규정 및 음운 이치를 논술한 것이다. 그리고 1908년에 음성론과 소리갈 등의 국어 문법에 관한 연구서인 [국어문전음학]을 간행하였다. 나아가 1909년 2월에 초등 국어교과서인 [국문초학]을, 1910년 4월에 [국어문법]을 상동 박문서관에서 발간, 보급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 국권회복운동의 역량을 키워 갔다.
둘째, 국문연구기관의 조직과 참여를 통한 정렬적인 연구 활동이다. 선생은 이준의 추천으로 지석영이 설립한 국문연구회에 참여하여 한글 연구에 종사하였다. 이와 함께 선생은 세종대 언문청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국문연구 기관 설치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한 뒤, 거기에 참여하여 왕성한 연구활동을 벌였다. 즉 선생의 상소로 1907년 7월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그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국문의 연원, 자체와 발음의 연혁, 철자법 등 11개 항목의 [국문연구안]을 냈고, 이를 토대로 [국문연구의정안]을 만들어 내각에 제출하는 등 뛰어난 연구 성과를 냈다. 그리고 1908년 8월 선생은 상동 청년학원의 국어강습소 졸업생 및 유지들과 함께 국문연구회를 발족시켰다. 이는 한글연구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거기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국망 이후까지 내다보면서 결성한 민간 국문연구 단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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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저서 [말의 소리] 중. <출처: 독립기념관> | |
셋째, 국어, 지리, 역사의 교육을 통한 민족 정체성의 확립 활동이다. 선생은 1907년부터 상동 청년학원에 국어강습소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이 밖에도 선생은 공옥, 이화, 숙명, 진명, 기호, 협성, 보성, 배재, 중앙, 경신 등 20여 개의 각급 학교에서 국어는 물론 우리 역사와 지리 등을 강의하였다. 그리하여 '앉을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을 만큼' 분주하게 강의할 책을 큰 보자기에 싸서 이 학교 저 학교로 다녔기 때문에, 선생은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선생은 청소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우리말과 글, 그리고 역사와 지리 등을 교육하여 민족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자주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 |
여러 학교에서 늘 책 보따리를 들고 강의를 위해 동분서주한 선생. 그 때문에 선생은 ‘주보따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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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계몽운동 단체 참여와 언론을 통한 대중 계몽운동이다. 선생은 1906년부터 약 1년간 <가뎡잡지>의 편집인으로 활약하면서 논설을 통해 여성 계몽 활동을 벌였다. 선생을 활동 범위는 계몽운동 단체로도 이어져 서우학회와 대한협회의 활동에도 미쳤다. 그리하여 서우학회의 협찬원과 대한협회의 교육위원으로서 이들 단체의 기관지 발행과 학교 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서우>, <대한협회월보>를 비롯한 계몽 잡지에 각종의 논설을 발표하면서 대중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여 갔다. 특히 선생은 이 시기 종교까지 기독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방면에 걸친 선생을 비롯한 계몽운동가들의 노력과 전민족적인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1910년 8월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는 영구한 식민지 지배를 획책하며 민족말살정책을 자행하였는데, 그 표적은 국어와 국사였다. 따라서 제도적인 국사 교육은 봉쇄되고 국어 교육은 제한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일본역사와 일본어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1911년부터 박동의 보성중학교에 조선어강습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고, 그 밖에도 여러 학교에 출강하면서 국어 교육을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이때의 상황을 제자 가운데 한 분인 최현배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눈물을 머금은 '주보따리'는 언제나 동대문 연지동에서 서대문 정동으로, 정동에서 박동으로, 박동에서 동관으로 돌아다녔다. 스승은 교단에 서시매, 언제든지 용사가 전장에 다다른 것과 같은 태도로써 참되게, 정성스럽게, 뜨겁게, 두 눈을 부릅뜨고 학생을 응시하고, 거품을 날리면서 강설을 하셨다. 스승의 교수는 말 가운데 겨레의 혼이 들었고, 또 말 밖에도 나라의 생각이 넘치었다.” | |
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함은 물론,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선생은 더욱더 한글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함으로써 독립 쟁취의 기초를 닦아 갔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어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하고, 또 1914년에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한 것 등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몸도 돌보지 않는 한글 연구와 강의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선생은 1914년 7월 27일 서울 수창동 자택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급서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약력
1896 한글전용의 <독립신문> 발행에 기여 1897 독립협회의 중앙위원 1906-1914 한글연구 및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 발양 1908 국어연구회 조직, 한글연구의 기초 마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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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2.22 한글학자 주시경 출생
1914.04.13 말의소리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5937
1910.04.15 국어문법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5986
1914.07.27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9212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다.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다. 그러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 주시경
'겨레의 국어 선생님' 한힌샘 주시경(1876~1914년) 선생-네이버뉴스, 2001.10.2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3&oid=041&aid=0000008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