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거
김한석∣金漢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리창(琉璃廠) 거리가 있다. 옛날 자금성을 역사(役事)할 때 기왓장이나 유리 제품을 만들어 조달해 주던 곳이라고 한다. 이제는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골동품 가게만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곳은 서울의 인사동과는 달리 점포와 거리가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골동품같이 느껴진다.
이곳 저곳을 천천히 돌아보며 긴 거리를 빠져나오자 인력거꾼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그중 복장이 고풍스러운 한 늙은이의 수레에 올라탔다. 그는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을까, 신이 난 듯 부지런히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옛날에는 이 골목에 찻집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보다도 길게 늘어선 홍등가와 목조로 된 여관들이 더 눈길을 끈다. 나는 지금 인력거를 타고 뭇 사내들이 편력했을 그 길을 밟으며 당시의 환락가 풍속도를 머리 속에 그려본다.
옛날 번화했던 이 거리에는 내로라 하는 한량들과 난봉꾼들이 득실거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세도가들이 여러 명의 여자를 차지하던 풍습하에서 평생 장가 한번 가보지 못한 나이든 총각들도 눈요기로 이 홍등가를 배회했으리라.
좀 넓은 길로 나서자 어느 큰 집 앞에서 인력거가 멈춘다. 무슨 기방(妓房)이었다는데, 어쩌면 이토록 호화롭게 집을 꾸몄을까 하고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다. 이 곳에서는 유료로 내부를 구경할 수 있어서 집안으로 들어간 나는 구석구석을 기웃거리며 다녔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어린 시절, 자주 놀러 다녔던 친구 집에 누이가 있었다. 누이는 내게 공부를 잘한다며 늘 칭찬해 주었고, 가끔 용돈도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나 돈을 주어서가 아니라 나는 웬일인지 그 누이가 좋았다. 아이들이란 귀여워해 주는 것만큼 따른다는 옛말이 있으나 나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누이에게서 혈육과 같은 포근한 정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이가 머리를 곱게 빗어 올리고 말끔한 한복 차림으로 인력거를 타는 것을 보았다. 그 아름다운 자태는 내게 마치 선녀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오랫동안 그 모습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 뒤 친구는 멀리 이사를 갔고 그 후 영영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한동안 그 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허전하였다. 초등학교 이삼학년 때의 일이니 까마득한 옛 이야기다.
오랜 세월 속에 잊혀져 가던 기억도 영화나 소설 속에서 인력거가 등장하면 그 누이가 생각났고, 그런 가운데 자연스레 인력거와 기생이 연결되어짐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성장하여 사회인이 되면서 가끔 요정을 드나들 때면 이따금 이런 자리에서 누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그 옛날의 기생은 지금의 통념과는 전혀 달랐다. 지조가 굳어 가볍게 처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창(唱)과 가락을 익혀 예술의 소양을 쌓았으며, 예절을 갖추어 정중하게 손님을 응대하였다. 특히 내 고장 진주의 기생이라 하면 그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기에 친구의 누이도 그저 허허롭게만 세상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고 싶은 것이다.
인력거를 타던 누이는 어린 시절의 내게는 그저 하염없이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비치었을 뿐, 그 신분이 기생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 세상사를 알고 나서야 이 모두가 가난이 빚은 숙명이었음을 알고 연민의 정을 느꼈지만 그 누이인들 어찌 남들처럼 한 남정네의 아내로 살아가고픈 소박한 꿈이 없었겠는가. 우리들에겐 이렇듯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아 한(恨)을 지닌 민족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어린 시절의 막연하고 미성숙했던 애정이 따뜻한 느낌으로 긴 세월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다가 이곳에서 불쑥 그리움으로 나타난 것일까. 그리하여 환상(幻想) 속에서나마 누이와 재회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집을 나와 흔들거리는 인력거 안에서 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내 주변에서는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지워져 간다. 그런 속에서도 잊혀졌던 옛 얼굴들을 추억함으로써, 아니 재현해 냄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다시 만나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혹 그 누이와 스쳐 지나갔던들 서로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오랫동안 마음속의 연인이었던 누이가 어디에서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기를 바랄 뿐….
첫댓글 천안문 광장 옆의 유리창을 나도 한번 샅샅이 뒤져보고 싶습니다.
그 인력거 저도 한번 타보고싶습니다 시장님의 생동감있는글 가슴에 담고갑니다 글속에는 시장님의 활달한 기가 느껴지고 세상을 품에 안은 큰 그릇이 보입니다 건강하세요 안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