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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하는 이유
삶의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를 하라.
세상에 쓸모없는 공부란 없다.
1. 스스로 공부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는 것이 진짜 공부의 시작이다.
2. 공부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3. 잠깐 열심히 하는 것보다 조금씩 오래 하는 것이 낫다.
하루에 3시간씩 공부하겠다고 욕심내지 말고 하루에 30분이라도 꾸준하게 1년 공부하는 것이 낫다. 그렇게 해야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오래 공부할 수 있으며 평생 공부를 가까이 하면서 살 수 있다.
당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공부를 향한 의지를 외면하지 말고 그 불꽃을 키워 나가길 바란다. 내면에 꺼지지 않는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큼 열정적이고 단단한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공부하는 사람과 공부하지 않는 사람의 미래는 완전히 다르다.
유능한 사람일수록 공부가 필요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가장 옳고, 더 이상 고칠 것이 없게 완벽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때때로 이런 편견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고 신념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긍정’이 밖으로 열려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나는 충분히 능력이 있지만 배우고 성장할 여지도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기만의 성에 갇혀 있는 꼴이 될 수 있다.
특히 당신이 어떤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 있다면 더더욱 공부를 가까이하길 바란다.
나는 그 누구보다 경험이 많고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을 경계하고 싶을 때 공부는 겸손한 학생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당신이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든 고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사람이든, CEO이든 신입사원이든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나는 앞으로 배울 것이 더 많은 사람이다‘라는 마음가짐을 잊지 마라.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점을 잊고 살기 때문에 반복해서 같은 실수를 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성장하고 싶다면 지금 공부를 시작하라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학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연구해온 켄 베인 교수는 『최고의 공부』라는 책에서 세계적 리더들과 교수들을 인터뷰해 창조적인 리더들은 어떻게 공부하는 지를 밝혀냈다. 여기에 등장하는 폴 베이커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고등학교 때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때와 똑같은 생각, 똑같은 가치관, 똑같은 답, 똑같은 감성과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사실상 전혀 변하지 않았죠.
나는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마음이 뜨끔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달콤함과 편안함이 커질수록 오히려 긴장하길 바란다. 자연이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듯, 나이가 들고 사회가 발전하는 속도에 따라 우리의 모습과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 안주하고 싶어질수록 과감하게 떨쳐 일어나 성장을 위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학문을 찾아 깊게 공부하거나, 경영을 전공했다면 과학이나 문학을 공부하는 등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자.
굳이 일과 관련짓지 않고 어느 분야든 원하는 공부를 하는 것도 좋다.
일에 도움이 되는 공부라면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줄 것이고, 전혀 새로운 분야의 공부라면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는 눈을 갖게 할 것이며, 하다못해 클래식을 듣거나 고전을 읽는다면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기쁨과 열정을 되찾아 줄 것이다. 절대 지금에 안주하지 마라. 그러면 당신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공부 써먹지 못하는 공부는 없다.
우물 안 전문가가 되지 마라.
더 큰 문제는 너도나도 전문가가 되는 것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문가는 한 분야를 깊게 공부한 만큼 그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과 비교하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분야에만 능통하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 외의 분야에는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전문가바보’가 되어 편협한 생각만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전문가바보라는 말은 자기의 전문 영역에만 빠져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전문가가 되려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다양한 나무를 심어라
공부는 자신의 내면에 나무를 한 그루 심는 것과 같다. 어떤 학자가 쓴 책을 읽고 그 안에 담긴 지식과 세계관을 공부하면, 나의 내면에는 그 학자의 나무가 옮겨 심어진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나무의 종류도 각양 각색할 것이고 숲의 면적도 넓을 것이다. 반대로 공부를 게을리 했다면 숲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면이 황량할 것이다.
‘다양한 나무가 자란 숲’을 키운 사람은 그 안에 괴테라는 나무도 가지를 뻗고 있고 도스토옙스키 나무, 플라톤 나무도 자라고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함께 살 수도 있다. 물론 전공이나 취향에 따라 숲의 기반이 되는 주종은 있겠지만 그 외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많이 자라 내면에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하나의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내일 죽는다 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법
예전에는 인생이란 “준비‘ 땅!” 하면 모든 사람이 일제히 뛰기 시작해서 정해진 거리를 뛰는 마라톤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더 빨리 달려서 결승점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병을 앓고 난 뒤 죽음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마라톤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도 죽는 순간은 각각 다르다. 즉,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반드시 뛰어야 할 정해진 거리나 목표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자기만의 인생 목표를 정해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결승점을 1등으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결승점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정하고 거기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럼 나만의 결승점을 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내 고민은 나는 언제 행복한가? 내가 진짜 원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성공해야 한다. 실패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무엇을 하든 그 과정동안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후회가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의 기준에 못 미치더라도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여유도 생겼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을 낯설게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스스로 내 인생의 의미를 묻고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공부’라고 생각한다. 공부는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져 낯설게 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보는 시각에 문제는 없는지,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없는지 등을 따져 보는 것이 공부의 본질이다. 이런 자세는 어떤 공부를 하든, 어떤 일을 하던 꼭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 인생을 충실히 사는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즉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는가? 와 같은 질문을 던져 낯설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공부는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취업을 잘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똑똑해지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공부를 삶을 바꾸는 ‘수단’으로만 여기느라 잘 몰랐을 뿐이다. 그러나 공부하는 자세로 일상에 질문을 던지고, 공부를 통해 얻은 새로운 자극을 내 삶에 녹이는 ‘공부하는 삶’을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인생의 방향도 변화한다. 공부로 인생의 내공을 키워라
삶의 호흡을 깊게 하는 공부를 하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것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스스로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공부에 뛰어들었으니 그 의지 자체는 긍정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해 왔던 공부, 지금 하고 있는 공부는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하는 공부이며, 이런 공부는 ‘인생의 호흡을 얕게 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인생의 호흡을 얕게 하는 공부’는 일정 목표를 달성하면 끝이 나는, 호흡이 짧은 공부다. 토익 900점 넘기기,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 따기 등이 그런 공부에 해당한다. 통상적으로 회사에서 요구하는 ‘능력의 증거’이기 때문에 취업할 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취직한 이후에도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런데 이 공부에는 한계가 있다. 자기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일시적인 만족감과 가시적인 성과는 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생각의 힘을 키워주고 세상을 꿰뚫어 보는 나만의 안목을 갖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깊은 호흡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뛰어든 많은 젊은이들이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느낀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니 미래에 대한 불안도, 일상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허무도 사라져야 하는데,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게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닌지 초조함은 더욱 커진다. 숨이 가쁠 때일수록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깊은 호흡을 해야 하는데, 더 짧은 호흡을 하니 계속해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이치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지금까지 해 왔던 공부와는 다른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를 해야 한다.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란 문학, 철학, 사학, 물리학, 수학, 음악, 미술 등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학문을 업으로 삼는 연구자나 교수 같은 사람들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공부를 하라는 게 아니다. 공부의 수준과 목표는 각자 자유롭게 정해도 되고, 단지 교양을 쌓는 정도의 공부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 공부들은 우리의 지식 체계를 풍요롭게 해 주고 생각하는 법을 길러 주며 더 나아가서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 지까지 고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사람에게는 분명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 내 마음과 머리를 자극하고 성장하게 하는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 갈증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은 분명 달라진다. 짧은 호흡에 헐떡이며 숨 고를 새도 없이 인생을 살지, 깊은 호흡으로 멀리 보며 단단한 인생을 살지는 이제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인생을 이끌어 줄 한 권의 책을 찾아라.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만의 인생을 만들고 싶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앞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다.
특히 ‘고전’이라고 인정받는 책들은 큰 도움이 된다. 고전은 오랜 시간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은 책, 인류에게 원대한 비전을 주었거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해 준 책이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살아남은 만큼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삶의 가치들이 담겨 있다. 최신 유행을 반영한 책도 물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80년은 족히 될 인생을 걸기에는 아직 검증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을 읽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내 인생의 책’으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자신의 책 『경영학』에서 “기업의 목적이 부의 창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여라는 것을 일본의 시부사와 에이치에게서 배웠다”라고 격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시부사와 에이치가 항상 곁에 두고 인생의 답을 얻고자 했던 책이 바로 『논어』다.
시부사와 에이치가 살던 시기에는 ‘상공업은 매우 천한 것이며 논어와 같은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상공업에 관심을 둘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래서 공자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실제 사회는 공자가 『논어』를 통해 강조한 인과 예가 기초를 이루고 있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상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인생의 정답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앞으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책 읽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년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만큼 나이가 몇이 되던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즐겁게 인생 2막을 열어야 할 시기에 사는 의미를 모르겠다며 뒤늦은 방황을 하는 중년이 많아지고 있다.
이때는 은퇴를 하고 자녀들이 가정을 떠나는 시기라 ’어쩌면 내 인생이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라거나 ’ 이 세상에서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식의 상실감과 허무함. 외로움을 느끼기 쉽다. 게다가 늙어 간다는 것, 막연했던 죽음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실질적인 두려움과 불안도 덮쳐 온다. 심지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 혼란스럽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 후반에 접어들어서며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정년을 맞은 후의 남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속한 조직과 직위만으로도 존경을 받고 필요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는데 은퇴를 하면 소속이 사라지고 나를 원하는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집에서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당연히 외롭다. 이 외로움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인생 그 자체의 고독이다. 돈이 많다거나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후회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살았든, 수많은 역경 속에서 힘들게 살았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의미와 남은 삶의 방향을 되짚어 보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다만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위기가 땅과 하늘이 뒤집히는 것 같은 대형 태풍이 될 수도 있고 여름철 소나기처럼 금세 지나갈 수도 있는 것뿐이다.
배움을 향한 열정은 사람을 빛나게 한다.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배운다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의 기쁨은 삶을 다시 충만하게 채워주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삶을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눈빛부터 다르다. 배우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의 눈빛은 항상 반짝이고, 허무함이나 고독은 찾아볼 수 없다.
나이 들어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을 배울 일은 뜸해지기 마련이고 철학이나 문학, 예술과 가까워지기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미 산전수전을 겪으며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봤기 때문에 배움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은 더욱 가치가 있다. 인생의 남아 있는 시간을 ‘공부’를 중심 삼아 살면 내가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자존감을 얻을 수가 있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시민 대학에서 많이 보았다.
시민대학에 오는 사람들은 나이와 성별, 공부를 하기 위한 목적이 다 제각각이다. 공부보다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놀러 오듯 오는 사람도 있고, 매일 책을 잔뜩 싸들고 와 노트 가득히 필기를 하는 열정적인 학생들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공부에 푹 빠진 학생들 중 대다수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라는 것이다. 학위를 따기 위해서라거나, 더 똑똑해지고 아는 것이 많아지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아니다. 은퇴도 하고 시간도 많아졌으니 집에서 놀지 말고 뭐라도 배워 볼까 하고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나오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배우는 기쁨에 흠뻑 빠진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매일 새로운 걸 배우니 너무 재미있어요.”라고 말한다. 배움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에 들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그동안 겪어 온 삶의 지혜가 공부와 합쳐져서 공부의 내용이 더욱 풍부해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번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가지고 독서 토론회를 한 적이 있다. 분량이 많은 책이라서 역시 무리가 아닐까 걱정을 했는데,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열띤 분위기가 되었다. 20년, 30년 동안 가정을 꾸리며 살아온 어르신들이 안나의 사랑과 인생에 할 말이 굉장히 많았던 것이다.
배우는 기쁨을 알면 혼자 남는 고독한 시간도 견딜 수 있게 된다. 현대인은 유난히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휴대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과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반면 공부는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혼자서 몰입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사람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닌, ‘충실한 고독’이라고 할까. 함께 공부를 할 동료를 만날 수도 있지만 결국은 혼자의 힘으로 가는 것이 공부다. 공부를 몰입하는 동안은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배움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공부하는 삶을 살게 되면 나만의 공부에 빠져들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반갑게 느껴진다.
또한 공부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효율적인 활동이다.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할쯤이면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줄어든다. 설령 여유가 있다고 해도 물질적인 소비로 인한 만족감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하나를 손에 넣으면 곧바로 다른 뭔가가 갖고 싶어진다. 최종적인 만족이란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공부는 문고본으로 한 권, 만 원 내외라는 적은 돈으로 시작할 수 있다.
약간의 돈과 시간만 있다면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확실한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 심지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부는 가장 효율적인 투자임이 틀림없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말년에 사광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다. 사광은 앞을 보지 못했지만, 실력이 뛰어나 그가 악기를 연주하면 새가 입에 물고 있던 모이를 떨어뜨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음악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외교 등 다양한 방면으로 지혜를 갖춘 인재였다. 진나라 왕 진평공은 이런 사광의 재주를 아껴서 가까이 두고 스승이자 친구처럼 대했다.
하루는 진평공이 사광과 이야기를 하다 이런 말을 했다. “내 나이가 이제 일흔이 넘었으니, 배우고 싶어도 나이가 많아 너무 늦었구나. “
이 말을 들은 사광이 답했다.
“날이 저물었으면 촛불을 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소년이 배우는 것은 해 뜰 때의 별빛과 같고, 장년에 배우는 것은 한낮의 햇빛과 같으며, 노년에 배움은 촛불의 밝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촛불이 밝은데 어두움이 어찌 함께 하겠습니까?
이렇게나 나이가 들어 무언가를 배우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더 어렸을 때, 혹은 한창 일을 하고, 성과를 낼 때 공부를 했다면 더 많은 것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광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 갑자기 켜진 촛불이 한 줄기 희망이 되는 것처럼, 공부는 남은 인생길을 안내해 주는 고마운 등불이 될 수 있다.
하루 온종일 책을 읽고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정도, 그저 ‘오늘은 이걸 배웠지’ 정도면 된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성취감,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는 기쁨을 만끽하자. 공부를 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축하하며 매일을 음미하자. 이렇게 공부가 인생의 축이 된다면 그 인생은 죽는 마지막 날까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마케팅에 과학적 사고법을 적용한 이유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만약 당신이 가진 도구가 망치 하나뿐이라면 당신은 모든 문제를 못으로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내가 망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은 고리를 못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심지어 구멍을 못이라고 완전히 잘못 보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사고법이 단 하나라면 문제를 정확히 보는 데서부터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외과 의사라고 하자.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재활치료나 레이저치료를 통해 환자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데 외과적인 수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환자를 위한 가장 좋은 치료법이 아닐 수 있는데도 말이다.
쓸 수 있는 도구가 많을수록 유리하다.
공부를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 새로운 사고법을 익히게 된다는 것은 내가 쓸 수 있는 도구가 많아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에를 들어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도 수학이나 과학을 자유롭게 공부해서, 거기에서 배운 사고법을 토대로 더욱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여러 개의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만 가지고 있을 때보다 다각적인 면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창의적인 해결법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의식적으로 내가 자주 사용하는 사고법, 내가 자신 있는 전문 분야와는 동떨어진 분야를 공부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페이스 북의 마크 주커버그의 공통점이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주 전공인 공학 외에 다른 학문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스티브잡스는 대학을 중퇴한 이후에도 몰래 철학과 인문학 수업을 청강하며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워 나갔다.
잡스는 “애플이 돋보일 수 있는 힘은 인문학에서 가져온 인간적인 면모와 기술을 접목한 데서 온다.”라는 말로 애플 신화의 밑바탕이 인문학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했다. 마크 주커버그는 컴퓨터 공학과 심리학을 복수 전공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탐독하는 등 열정적인 문학 애호가였다. 그가 어린 나이에 페이스 북이라는 세상을 뒤흔들 아이디어를 내보인 것은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우리 인생에는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어서 하나의 사고법, 하나의 전문 영역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지름길을 여러 개 두고 눈앞의 길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별적인 전문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수학, 과학, 음악, 미술 등 그 분야만이 가진 특수한 사고법을 두루 익혀 두라는 말이다. 내가 문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과학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큰 손해는 없다.
우리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 온 지식 유산들,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후에 발전한 근대 과학의 모든 성과와 과학적 사고법의 강점을 하나도 활용하지 못하고 반쪽짜리 생각만 하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선택한 셈이니 말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노숙자와 범죄자들이 인문학을 공부한 이유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나요?”
그 죄수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인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예상치 못한 답에 놀란 얼 쇼리스가 정신적인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되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 말이에요.”
이 말에 깨달음을 얻은 얼 쇼리스는 노숙자, 매춘부, 범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기술도 아니고, 문학과 역사를 배운다는 게 새로운 인생을 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비를 털러 교수들을 초청했고 노숙자와 약물중동자 등 31명의 학생을 모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읽었을 때 학생들은 가족과 전통이 국가의 법과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이해했다”고 말한다.
처음 1년 코스가 끝났을 때 31명 중 17명이 수료증을 받았고 나중에 이들 중 2명은 치과의사가, 전과자였던 여성은 약물중독자 재활센터의 상담실장이 되었다.
“왜 내가 마약을 끊어야 하는지를 알았다”라는 클레멘스 코스 수강생의 고백은 공부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처지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지금의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해 자신의 삶을 멋대로 방치했던 사람들이 공부를 통해 인간답게 사는 법, 더 나은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자발적인 대학 진학과 취업으로 이어져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 주었다. 열악한 환경과 불운에 둘러싸여 생존을 위한 즉각적인 대응밖에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함으로써 반성적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얼 쇼리스의 목표가 실현된 셈이다.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무에 짓눌려서 잘 알지 못했을 뿐이지 공부에는 나 자신을 긍정하고 인생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 주는 힘이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으며 지혜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자신감과 성취감을 가져다주고 그만큼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한다.
일본에서는 과도한 경쟁과 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은 것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경쟁과 강요가 없어서 학생들 스스로가 즐겁게 공부할 수 있다면 이런 자살 문제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공부 스트레스로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아이가 있다면 푹 쉬게 해 주고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게 두면 된다. 공부하고 있다는 상태는 동일하지만 차차 공부하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알게 되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부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희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알고 싶다는 의욕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게 하고, 노력하는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성취감과 희열을 준다.
누구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쉽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의 삶이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더 행복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평생 공부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내가 “공부하는 인생은 반드시 달라집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나 스스로 그런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만약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모습이 어땠을까? 아마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공부할 날도 많이 남아 있으니 내가 평생 공부를 지속해 나간다면 미래의 내 모습도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달라질 거라 생각한다.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 달라질 수 있어서 내 경험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만의 아우라
사실 내가 이렇게 분야와 주제를 넘나들며 공부를 하고 책을 쓰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재미와 흥미에 따라 그때그때 공부 주제를 바꾸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주로 공부하는 것은 문학과 교육심리학이지만 수업을 하다가 ‘효과적인 토론법’에 대해 관심이 가면 그쪽 분야의 책을 섭렵하면서 나만의 공부를 한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글도 쓰고 강연을 하다 보니 내가 다루는 분야가 계속 확대된 것이다. 경계를 정해 두지 않고 쉼 없이 공부를 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만의 개성, 바꿔 말하면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강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강력한 무기를 하나 얻는 것과 같다. 하지만 평생 공부를 하다보면 오랜 시간 공부가 내 안에 쌓여서 누군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지식 세계, 나만의 아우라가 생긴다. 그게 바로 긴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가 아닐까.
그러나 오직 나의 성장을 위해 꾸준히 공부하는 인생을 살면 본인 스스로 ‘나는 지금 성장하고 있으며 성장을 이끌어 나갈 자신이 있다’라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된다.
남보다 하루 더 길게 쓰는 능력. 공부로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방향으로든, 어떤 모습으로든 변화한다는 것이다. 지금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변화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공부를 즐기면 인생이 바뀐다.
공부하는 즐거움
“너는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무언가를 배울 때는 온 마음을 다해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배움이 즐거워서 모든 근심 걱정도 잊어버린다. 그뿐인가, 나이가 들어서 늙음이 찾아오는 것조차 알지 못할 정도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말 이외에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야 할 말은 없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배움이 있다. 공자의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 나는 배움이 주는 순수한 기쁨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입신양명이나 부를 쌓기 위한 공부가 아닌 성장을 위한 공부 그 자체를 좋아한다.
- 나는 세상 어디에서든, 어떤 것에서든 ‘사람다움’의 가치를 찾아내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 ‘사람다움’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좋은 것은 기쁜 마음으로 배우고, 나쁜 것은 경계해야 할 예로 삼는다.
‘사람다움’을 일깨워 주는 공자의 공부
아이들에게 더 많은 지식을 가르치기 이전에 인간답게 살기 위한 가치를 먼저 가르쳐야 하는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생각만 주입하고 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을 보호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어른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대충 수습하려는 못난 모습만 보여 주니 더욱 답답할 따름이다.
나는 점점 각박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바로잡으려면 학교에서 『논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논어』는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이며, 그것이 모든 공부의 시작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공부는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
공자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치가 몸에 자연스럽게 베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즉 공부의 목표가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공자가 말하는 성숙한 인간이란 사람다움을 되살리고, 예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욕심을 앞세워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가난해도 공부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으며, 항상 사람에 대한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 이런 인격적 성숙을 갖춘 사람을 공자는 ‘군자(君子)’라고 불렀다. 공자의 제자로 알려진 자로 역시 처음에는 공부를 해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 공자를 만났을 때 ‘군자라면 반드시 학문을 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에 자로는 이렇게 말했다. “대나무는 잡아 주지 않아도 저절로 반듯하게 자라며, 그것을 잘라 쓰면 소가죽도 뚫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꼭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대나무는 누가 가꾸지 않아도 혼자서 곧게 자라기 때문에 그대로 잘라서 화살이나 창으로 쓸 수 있다. 자로는 원래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 데, 굳이 배울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공자는 뭐라고 답했을까?
“화살 한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쪽에 촉을 갈아 박는다면 박히는 깊이가 더 깊지 않겠는가?”
물론 타고난 재능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선한 심성을 가져 배우지 않아도 ‘인’과 ‘예’를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배움으로써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가진 능력이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구든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다 모면 나도 모르게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게 되며, 진실을 따르기 보다는 남들이 다 하는 대로 허례허식에 집착하게 된다. 공자는 바로 그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공자의 공부론에 따르면 공부에는 끝이 있을 수가 없다. 인생의 마지막 날 숨을 거둘 때까지 평생 동안 인격을 수양하고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공부고, 결국 삶을 산다는 것은 공부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배움은 해도 해도 늘 부족한 듯이 끝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알고 있는 것을 잊게 될까 늘 염려해야 한다.”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공부
그렇다면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안으로 파고들며 공부하면 그만인 것일까? 공자는 단지 나 혼자만 도덕과 예를 지키며 사람답게 사는 것이 공부의 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오도록 노력하는 것도 공부하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어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느냐에 따라 백성들의 삶이 달라지는 만큼, 백성을 이해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이끌 수 있는 ‘군자’가 ‘군주’가 되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가 인격이 훌륭하고 ‘인’과 ‘예’를 실천하는 동시에 정치 실력도 뛰어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군주가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군자들이 옆에서 도와야 한다는 것이 공자가 지향한 바였다.
나의 인격을 성숙시키는 것에서 시작하는 공부는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로 이어지고, 결국은 어떻게 정치를 펼칠 것인가,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로 이어진다. 공자는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나의 성장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세상,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군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세 가지 공부 원칙
1. 스스로 공부하라.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첫 번째 원칙은 바로 ‘스스로 공부하라’였다. 좋은 선생님과 동료들을 만나 거침없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공부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공부 하는 사람이 얼마나 치열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공부하느냐’라는 것이다.
“스스로 분발 하지 않으면 알려 주지 않고, 스스로 답답해하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는다. 네 귀퉁이 가운데 하나를 보여 주었는데 나머지 세 귀퉁이를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다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스스로 어찌할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공자는 공부하는 사람 스스로 학문을 좋아하고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노력해야 그다음 단계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가르쳐 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를 가르쳐주었다고 하나 밖에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스승이 일일이 가르쳐 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뛰어 넘으려면 공부하는 사람이 활발히 살아 있는 상태로 스스로 공부하고 깨달아야 함을 항상 강조했다.
2. 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라.
예를 들어 『논어』를 보면 제자 번지는 ‘인’에 대해 총 세 번이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공자의 대답은 이런 식이다.
“인이라는 것은 남보다 먼저 어려운 일을 하고, 얻는 것은 남보다 나중에 하는 것이다.”
“평소 행동을 공손하게 하고, 맡은 일을 정성껏 하며, 사람과 사귈 때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3.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공자는 제자들이 질문을 던졌는데 모르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했다. 어느 날 제자 자로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삶을 잘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고, 죽음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는 섣불리 알려고 덤벼들지도 않았다. 이 말에는 알 수 있는 것을 배우는 데 힘쓰겠다는 공자의 의지와 스승일지라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용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 어떤 주제든지 제자들과 자유롭게 질문을 하고 토론하며 함께 공부했다. ‘내가 스승이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배우는 사람이니 제자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공자가 반란을 일으킨 사람과 같이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때 제자 자로는 “하필이면 왜 그런 사람에게 가시려는 겁니까? “라는 말로 공자를 말렸다. 그러면서 왜 그와 일하면 안 되는지 거침없이 이야기 한다. 이런 대화를 보면 공자와 제자들은 예의를 다하면서도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생각법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당신은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많은 시간을 ‘생각하며’ 보낸다고 믿지만 대부분 그 시간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라 공상을 하거나 과거의 일을 반추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따져 보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정말 당신의 생각입니까?
“자신은 다 알고 있다고 속이지 마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하고 여기까지는 알지만 그 이상은 모르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라.”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어떤 사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도출된 ‘생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체화하고 있으며, 우리 뇌가 생각하기 편한 데로 기억을 바꾸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엉뚱하게 기억하고, 순전히 감정에 따러 편파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생각이 정말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야 ‘자신의 생각’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게 정말 당신의 생각인가?”라고 근거를 파헤쳐야 자신이 기존의 생각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자신의 삶과 행복 역시 생각하는 힘에 달려 있다. ‘돈을 많이 벌수록 행복하다’, ‘남들 사는 것처럼 가족을 꾸려야 진짜 행복해질 수 있다’, ‘착한 사람은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와 같은 생각들을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인지, 내가 정말 행복해지는 길인지 생각해 보지 않은 채 받아들이려고 할 때 얼마나 괴로워지는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왜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는 거지? 그게 정말 나의 행복과 관련이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하기는커녕 후회와 분노만 가득 찬 인생을 살게 될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의 불행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하루에 한 번, 소크라테스처럼 생각하기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대화를 한 내용을 쓴 『향연』,『국가』등을 보면 질문을 주고받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 주는데, 소크라테스가 나서서 어떤 지혜를 주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 본인 스스로도 누군가를 가르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가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산파에 비유하며 사람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혹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단지 아무런 의심 없이 일상적으로 믿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따져 보고 철학적인 차원으로 다시 생각해 보도록 이끌어 준 것이 전부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배움을 바탕으로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며 소크라테스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광범위한 지식을 배웠고, 아마 그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는 못했다.
정해진 답만 있는 찾는 공부, 암기를 해서 답을 찾는 공부에만 치우쳤기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산다면 생각하는 힘은 점차 약해지고,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믿는 사실에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그게 정말 옳은 것인지 혹은 내가 정말 행복해지기 위한 길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처럼 철학자가 되어 ‘더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르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평생 고민하며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어떨까? 내가 해야 할 일과 이루고 싶은 목표 사이에서 정신없이 살다 보면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따라가게 된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처럼 잠깐씩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하루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소크라테스처럼 생각해보자.
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질문할 게 없다는 것은 곧 수업을 듣는 동안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선생이 하는 말에 논리적으로 오류는 없는지 검토하고, 수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내 생각과 다른 점은 무엇이며 그게 혹시 잘못된 논리는 아닌지 점검하려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이 하는 말을 열심히 듣고 필기를 하는 것에서 끝나 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공부한 것은 일방적으로 암기하는 것에 불과해서 시험을 보고 나면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져 버린다.
질문에는 내가 생각하는 과정이 담겨 있으며 질문에 답을 하는 동안 논리를 점검해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사람들을 배움의 길로 이끌었을 때 그 중심에 ‘질문’이 있었던 것이다.
질문하는 사람, 소크라테스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니, 그래서 결론이 뭐야?”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일반적인 대화 양상에 비추어 보면 결론 없이 대화가 끝나 버렸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아포리아’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유대인은 전 세계 60억 인구의 0.2%에 불과하고, 나라가 없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30%가 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민족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런 유대인들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오늘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라고 한다. 학교에서도 좋은 질문을 하는 학생이 훌륭한 학생으로 평가받고, 학급의 리더가 된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토론과 질문으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며 공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생각하는 법과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유대인이 지혜로운 민족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공부법은 여럿이 함께 모여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는 토론으로 시작해서 토론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토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평등한 활동이다.
2. 이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한다.
토론은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 아니다.
평생 공부하게 하는 습관의 힘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처음에는’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일단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 놓으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시점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발적으로 되지 않을 때는 규칙을 만들어라
혼자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언제 시간을 내어 어느 정도의 분량만큼 책을 읽고 공부할 것인지를 미리 정해 놓지 않는다면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은 금세 무용지물이 된다. 초심자일수록 게임의 규칙을 확실히 익혀 놓아야 실력이 늘고 기본이 탄탄해진다.
매일 할 수 있는 쉬운 규칙이 좋은 규칙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반드시 1페이지 정도는 소리 내어 읽어 본다’라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이런 습관을 만든 것은 아니었고,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직소』라는 단편을 읽으면서 우연히 얻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전체가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냥 눈으로 읽으면 굉장히 산만하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리, 그 사람은 지독합니다. 지독합니다. 예, 정말 싫은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이 소설이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도대체가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잠이라도 깨야겠다는 생각에 소리를 내서 읽어 보았는데, 눈으로만 읽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작품의 맛이 확 살아나면서 순간적으로 소설의 내용이 감정이 이입됐고, 소설이 너무나 생생하고 재밌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은 다자이 오사무가 직접 입으로 구술하고, 그것을 받아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리 내어 읽었을 때 그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라도 구체적인 내용이 헷갈리지만 이 경험은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 경험으로 나는 ‘책을 다 읽고 나면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을 찾아 소리 내어 읽어 본다는 규칙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그 부분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공부습관‘의 범주에는 벗어나 있는 독특한 습관이다. 나는 다만 이 방법이 나에게 잘 맞기 때문에 정한 것뿐이다. 즉,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잘 맞는 규칙을 찾아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부를 인생의 축으로 삼고 살고 싶다면, 그래서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먼저 공부 습관부터 들여 놓자. 밥을 먹고 난 뒤에 이를 닦는 것처럼 공부가 자연스러운 습관이 될 때까지 조금만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 두면 그 뒤로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먼저 움직인다.
책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 빌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고,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책 읽는 습관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의 ‘도서관 사랑’은 심지어 시애틀 교외에 있는 저택 안에 개인 도서관을 만들게 했다. 이 저택은 1,000평이 넘는 부지에 세워졌으며 체육관, 수영장, 개인용 극장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여기에 1만4,000여 권 이상의 책을 보관할 수 있는 개인 도서관을 지은 것이다. 그는 평소 주중에는 매일 1시간, 주말에는 3~4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다고 한다.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는 영국에 망명한 후 3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영박물관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이 문을 여는 오전 10시부터 문을 닫는 오후6시까지 자신의 지정석이었던 ‘G-8’에 앉아 연구를 하고 책을 썼다. 『자본론』의 초안 역시 이 열람실, 자신의 지정석에서 썼다.
위의 글을 읽으며 빌 게이츠와 칼 마르크스의 공통점을 발견했는가? 그것은 바로 두 사람 모두 매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죽어도 책 읽기가 싫은 사람들을 위한 독서법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누구든 가장 쉽게 공부를 하는 방법은 바로 책을 읽는 것이다. 책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앞선 생각이 담겨 있으며, 그 생각이 과연 논리적으로 옳은지 따지며 읽는 동안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그뿐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엿보고 참고할 수 있다.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책 읽기가 재미없다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들은 “책을 읽지 않아도 인터넷이나 뉴스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는데 문제가 없다”라고 말한다.
죽어도 책 읽기가 싫은 사람들이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관계지도 독서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단 한 줄이라도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찾아보라
비슷한 방법으로 ‘인용 노트’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 책을 읽은 뒤 가장 좋았던 부분, 인상 깊었던 부분을 발췌해서 노트에 쓰고 나의 경험이나 생각과 연결 지어 글을 쓰는 것이다.
2.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책과 만나라
3. 책을 따라 넝쿨을 뻗어 나가라
공부를 할 때 쓸데없이 융통성 없는 성실함이 문제가 될 때도 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며 억지로 붙잡고 있다 책이 싫어진다면 그것이 더 문제다. 실제로 1년에 책을 300권 이상 읽는 다독가들도 자기에게 들어온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책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부분을 찾아 발췌하며 읽기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빠른 속도로 훑어보면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으로 독서를 끝내기도 한다. 모든 책을 집중해서 완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버리고 어떤 책이든 일부분이라도 읽으면서 좋은 부분, 나와 통하는 부분들을 찾아보라. 만약 ‘이거다’ 싶은 부분을 만나 불꽃이 터진다면 그 불꽃을 시작으로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 나갈 수도 있다. 거기에서부터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고전을 읽을 때 잊지 말아야 할 것들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으로 시작하라
고전을 깊게 읽고 싶다면
저자가 똑똑한 사람이니까, 시대를 바꾼 사상을 탄생시켰으니까 라는 생각은 버리고 한번쯤은 용감하게 저자와 대결한다는 느낌으로 책을 읽어 보자.
공부가 되는 대화
창조적인 자극을 주는 관계를 맺어라
회의가 공부가 되는 대화로 만들려면 : ‘브레인스토밍’은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싶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이다. 브레인스토밍은 어떤 일정 주제에 대해 회의를 할 때, 폭풍우가 치듯 생각나는 대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토론 방식을 말한다.
어떤 수업이든 끝날 때까지 3가지 질문거리를 만들어라
좋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면
질문을 꺼리는 이유들을 살펴보면 모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 겁이 나서 내가 정답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앞에 두고 멀리 돌아간다는 것은 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그것보다는 좋은 질문을 던져서 나는 물론이고 대답하는 상대방,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혼자 공부를 할 때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나를 즐겁게 한 순간을 기록하라
공부로 경험한 즐거움을 기록해 보자
내가 말하는 공부 일기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하루 일정을 적는 스케줄 수첩이든 평범한 노트든 하나를 정해 날짜를 적고 오늘 공부한 것에 대해 3줄 정도로 아주 간단하게 적는다.
절대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라쿠고 공연을 봤는데 새로운 점을 알게 되어 재미있었다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도 쓰고, 영화를 보다 잠들었다면 왜 집중을 못한 것 같은지를 적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나는 오늘을 어떻게 보냈는지, 무엇을 배우고 거기에서 어떤 재미를 느꼈는지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내가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작은 성과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공부 일기가 한두 달 쌓였을 때 지난 일기들을 쭉 보면 내 공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으며 하다못해 영화 한 편을 본 뒤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 매일 똑같아 보이는 일상에 즐거움이 생겨난다. 공부 일기는 곧 매일 찾아낸 새로운 즐거움을 적은 일기와 같다. 내 삶이 특별한 일도 없이 반복되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날마다 다르게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뿌듯하지 않겠는가. 삶이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사람에게 의욕을 북돋워 주는 데 공부 일기만큼 빠르고 유용한 약은 없을 것이다.
경계 없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배워라
내 제자 중에 “공부는 여행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을 하는 제자가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제자는 바쁜 직장 생활에서 유일한 낙이 1년에 한 번 여행을 다녀오는 것인데 여행을 다녀오면 자신의 공부 주제가 바뀐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아름다운 풍경이나 고풍스런 건축물, 맛있는 먹거리에 끌려 여행을 가지만 여행하는 동안 그곳의 역사와 문화, 언어 등을 직접 접하게 되면서 그 나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그 관심이 여행의 즐거운 기억이 합쳐져서 ‘이 나라를 더 알고 싶다’라거나 ‘이 언어를 배워 봐야 겠다’라는 의욕으로 이어진단다.
공부 방학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얻자
1. 어떤 공부를 좋으니 주제를 정해라
공부의 종류는 경계를 두지 않되, 자유롭게 나만의 주제를 정해서 ‘이번 방학을 통해 이것을 배웠다’라고 최소한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 기한을 정하고 시작하라
몸에 밴 공부가 진짜다.
성공률 높은 공부법 찾기보다 자신의 성향 파악이 먼저다
최선을 다한 공부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노력의 힘을 의심하지 마라
그렇지만 오늘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그 위치는 분명 어제와 다르다. 그리고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발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