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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차창 원문보기 글쓴이: 박 지기
동래 읍성지(東來 邑城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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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읍성지(東來 邑城址)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는 1021년(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壅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1-2 일제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稚城). 여장(女醬)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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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 대
북 문(北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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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역사관(東來邑城 歷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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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 박물관
* 지하철 동래역에서 내려 3시간(14:30 - 17:30)을 걸었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어두운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이 흐른다. 내일(8. 13)이 말복이니 계절의 끝자락이다.
* 복천박물관에서 일이다. 지갑을 안챙겨 입장료(500원)를 낼 수 없다.(면허증, 신용카드, 교통카드 말고 현금은 한푼도 없다) - 친절한 분의 배려로 관람할 수 있었다.
* 지하철 동래역 - 서장대 - 북문 - 동래읍성 역사관 - 복천 박물관 - 북장대 - 부산3.1독립 운동 기념탑 -복천동 고분군 - (인생문 -동장대- 군관청은 우회하여 통과) - 충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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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단비(永報檀碑)
1909년 중앙정부에서 호적대장을 거두어들이려 하자 주민들은 조상들의 성명이 적힌 호적대장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마안산 기슭에 동래지역 13개면의 호적대장을 모아 불태우고 이 위에 단을 쌓아서 영모단(永慕檀)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음력 4월 23일 이 단에 모여 동래기영회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며 잔치를 벌였으며 1915년 일제침탈로부터 우리의 것을 지켜 내려는 의지를 다짐하여 영보단(永報檀)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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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장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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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0-1-19 관리자: 부산광역시동래구
위치: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산 93-10번지
이 기념탑은 1919년 부산에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8월 15일 착공, 1996년 3월 1일 완공하였으며 만세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마안산에 세워졌다.
부산광역시에서는 3.1독립운동 당시의 민족기상과 나라사랑을 드높인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을 기리고, 선열의 숭고한 뜻과 얼을 받들어 부산지역의 항일민족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탑을 세웠다.
이 탑은 부지가 2,310m2, 탑 전체 높이 21.6m이며, 독립운동 모습을 새긴 높이 6 m의 원추형 군상에는 기미독립선언서 공약3장이, 탑 기둥에는 건립취지문, 독립운동 약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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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동 고분군(福泉洞 古墳群)
사적 제273호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일원
이 고분군은 현재 동래 중심가 북쪽 마안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부산에서 가정 대표적인 고분이다.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후 1995년까지 부산대학교와 시립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는 모두 130여 기에 달하며, 출토유물은 총 9,000여 점이다.
출토유물에는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인골, 말 이빨 같은 동물의 몸체 일부 등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유물은 많지 않지만, 대신에 철로 만든 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 가운데서도 무구류(武具類)와 갑주류(甲胄類)가 특히 많다. 부장품의 대무분을 차지하는 토기류는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보물 제598호인 마구식 각배와 오리모양 토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 고분군은 경주의 대형고분을 제외하고는 남부지방 최대의 고분 가운데 하나이며, 유물도 경주의 대형고분 다음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방어용 무기인 갑옷과 투구는 복천동고분의 중요한 유물로서 우리 나라 갑옷 연구 및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중요한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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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동 53 . 54호 무덤
이곳은 복천동 제3차 발굴조사(1089. 8. 31 ~ 10.31)에서 확인된 복천동 54. 54호 무덤의 내부 모습을 발굴 당시 그대로 복원하여 전시한 야외전시관이다.
두 무덤은 모두 덧널(목관) 구조의 부곽이 별도로 딸린 구조이나, 주곽은 구덩시돌덧널(53호 무덤)과 덧널(54호 무덤)로 서로 다른 형식이다.
복천동 53호. 54호 무덤과 출토유물
복천동 53호 무덤과 출토유물
복천동 고분군의 능선 중앙에 위치하는 53호 무덤은 5세기 중엽에 조영된 대형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으로, 덧널무덤(목곽묘)형식의 부곽이 딸려있는 구조이다. 완전한 상태로 발견됨으로써 당시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부장상태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무덤 속에서 토기, 철기, 목걸이, 귀걸이, 숫돌, 철제품 등 모두 310여 점의 부장용 유물이 출토 되었는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토기이다. 토기 종류는 굽다리접시, 항아리, 그릇받침, 등잔모양토기, 신발모양토기 등이 있으며, 특히 등잔모양토기와 신발모양토기는 당시 가야인의 부장 풍습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굽다리 접시는 신라계, 재지계, 함안계 등 여러 형식으로 나누어지는데, 함안지역(아라가야)의 토기도 상당수 확인되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서부경남지역의 사람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철기는 대부분 주곽에서 출토되었는데, 복천동고분의 다른 무덤에 비해 출토량이 적고 무기류의 비중이 낮은 것으로 보아 피장자는 여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부곽의 빈 공간에서는 순장자로 보이는 인골의 흔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복천동 54호 무덤과 출토유물
복천동 54호 무덤은 4세기 말에 축조된 대형 덧널무덤(목곽묘)으로, 주곽과 부곽을 갖춘 형식이다. 후대의 교란으로 무덤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하였으나 무덤이 깊어 부장유물은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물은 토기, 철기, 목걸이 등 모두 2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토기류이다. 토기는 굽다리접시, 항아리, 손잡이달린 굽다리항아리, 그릇받침대 등 그 형태가 다양하며, 철기는 투구, 재갈, 덩이쇠, 창, 도끼, 관못 등이 출토되었다.
54호 무덤에서는 함안을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지역과 일본계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부산지역의 가야집단이 당시 주변지역은 물론 멀리 일본지역과 인적, 물적 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54호 부곽의 빈 공간에서 인골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53호 무덤과 마찬가지로 순장자를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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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탑(忠烈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장력하게 전사(戰死)한 무명용사(無名勇士)들이 수천에 달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항전(抗戰)을 상정한 이 충렬탑은 높이가 28.6m이며 6인 군상(민, 관, 군, 봉수지기, 나팔수, 여인)을 새겨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수호했던 우리 민족의 굳센 단결을 표상(表象)한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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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렬 사 (忠烈祠)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
충렬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적과 싸우다 장력히 순절하시 부산지방 순국선열(殉國先烈)의 영령(英靈)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일본(日本)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무력(武力)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욕(領土慾)을 채우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조총(鳥銃)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으나 우리 선열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현 충렬사는 1605년(선조38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에 의하여 동래읍성(東萊邑城) 남문 안에 충렬공 송상현(忠烈公 宋象賢)을 모신 송공사(宋公祠)가 세워졌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624년(인조2년)에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건의로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발(忠壯公 鄭撥)을 모시게 되었다.
그후 1652년(효종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安樂洞)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學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고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1709년(숙종35년)에는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사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군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 등의 위패(位牌)를 모신 별사(別祠)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12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合享)하였으며 1772년(영조48년)에 다대첨사 윤흥신(多大僉使 尹興信 ) 공을 추배하고 임란 때 송상현 공과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는 93,399m2(28,253평)의 경역에 본전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1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
* 촬영: 2009.8.12. 15:00-1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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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차창 원문보기 글쓴이: 박 지기
첫댓글 이 땅에 뿌린내린지 참 오래 되었는데 성지(城址)에 직접 오르기는 처음입니다. 앞으로 가능한 여러곳을 열심히 다니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좋은 구경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기 바랍니다.
여긴 나의 아지트 인데 다녀가셨군요 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