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소감
아침을 향하여
이근형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성경에서 하루의 시작점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라 가르치지요. 아침을 약속하는 저물녘. 이 아침을 닮은 시간이 무척 행복합니다. 고단했던 하루가 끝나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곧 찾아올 꿈이 꿀처럼 달겠기에, 그 단꿈이 깨어난다 해도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펼쳐질 아침이기에 멋지기만 합니다.
저의 인생을 하루라 치면 지금은 저녁임이 분명한데, 이왕 어여쁘면 감사하지요. 붉은빛 석양으로 이불 삼으며 문학을 꿈꾸며 문학으로 깨어나는 인생의 새 아침을 맞이하렵니다.
느림보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민속에서도 일년의 시작은 동지冬至라고요. 겨울은 봄을 잉태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요. 그런 맥락은 성경이나 민속이나 같은 거라고요. 알겠습니다, 지금 나의 계절이 좀 춥더라도 문학의 봄을 꿈꾸며 손을 호호 불면서라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내게 연필 쥐는 법을 땀 흘려 교정해 주신 느림보 이방주 선생님, 느림보 수필 교실 정다운 문우들, 내밀기에는 수줍기만 한 글을 선택해주신 <수필미학>의 심사위원 선생님들 모두에게 큰절을 올립니다.
내게도 문학이라는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더 많은 달란트로 영광 돌리기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약력>
충남 서산 출생
장로회 신학대학교 졸업
청주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시가 흐르는 서울> 시부문 신인상 등단(2022년)
나를 보다
이근형
화가라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보통은 붓과 물감을 사용한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화가에 대한 통념이다. 그런데 오늘 관람했던 전시회 그림은 나의 통념을 깨뜨렸다. 전시된 그림들은 모두 잡지를 뜯어서 정사각형의 딱지를 접고 그 딱지들을 이리저리 연결하여 독특한 색감이 느껴지도록 하여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킨 기법이었다. 그 그림은 딱지가 물감이고 붓이라고 하면 된다.
붓과 물감 구실을 하는 도구는 그뿐이 아니었다. 망가진 라디오나 오디오 세트 같은 전자제품의 부속품들을 그림 도구의 주재료인 딱지 사이 사이에 배치하여 입체감을 주어 완성도를 높인 것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른다. 그림은 그리기도 어렵지만, 추상이니 구상이니 하는 화풍들을 접하다 보면 어리둥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 작가의 전시회에 간 이유가 있었다.
일간지에 실린 그 화가의 글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그의 글이 좋았다. 미술에 대하여 식견이 매우 짧은 나에게도 그 세계의 자잘한 뒷이야기며 화가들의 숨겨진 면모를 보게 하는 매력을 그의 글에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느지막한 나이에 수필이라는 장르의 숲에 들어와 문학을 탐색하는 나에게 문학이 아닌 장르의 숲에서 활동하는 그가 도리어 문학의 향을 느끼게 하였으니까.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이웃 도시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굳이 찾아서 갔다는 자체가 그 화가를 향한 신뢰였다. 그리고 신뢰의 결과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하나님 같으신 분이군요?”
내가 관람을 다 마치고 난 후의 한 줄 소감을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가 내미는 방명록에 내 이름 석 자 뒤에 ‘목사’라고 쓴 걸 무척 반색하는 걸 보고 그렇게 용감하게 한 것이었다. 그가 어리둥절하지만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을 내게 비추며 되묻는다.
“네에? 하나님 같다니요?”
“그렇잖아요, 내가 지금은 목사인데, 별로 대단치가 않은 사람이었어요.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쓰레기 같은 나를 사용하셔서 이토록 멋진 예술품 같은 목사의 삶을 평생 하게 하셨는데 선생님은 이런 쓰레기 책들을 딱지로 접고, 버려지는 전자 부품을 사용하여 예술품을 만드셨으니 작가님이야말로 하나님 같으신 거죠.”
이런 나의 말을 듣는 그가 싫지는 않은 듯 미소로 응답했다. 그 작가와의 대화는 잠깐이었지만 좋은 느낌으로 인사를 나누고 전시회장을 나왔다.
딱지와 전자부속품으로 구성한 작품을 이것저것 보며 줄곧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 화가는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딱지로 사용한 책이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아트지로 된 월간지라는 것과, 버려진 전자 부품들은 그 계통의 사업을 하는 친구가 준 것을 활용한 것이라 했다.
증평이라는 소읍에서 활동하는 그는 그렇게 완성한 작품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그림을 감상하는 나만의 느낌은 여러 가지였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월간지를 사용하여 가정의 회복을 말하려는 것인지, 버려지는 것들을 예술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지구 사랑의 의미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림 자체로 말하려는 화가 자신의 내면적인 고백들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나름 추측하였다.
그 작가를 하나님께 빗대어 작품 소감을 말하고 나니 나 자신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더 깊이 들었다. 나 자신이 때로는 과월호 잡지나 못쓰게 된 전자제품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어찌 오늘까지 살다 보니 과분하게도 누군가에게 멋지다느니, 대단하다느니 하는 걸맞지 않은 찬사를 듣기도 한다. 솔직히 내가 나를 봐도 좀 멋지다. 예술품처럼. 그런데 그게 과연 나 스스로의 능력이었을까.
기독교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이 들어봤을 성싶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라는 찬송가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놀라운 은혜로다, 얼마나 달콤한 목소린가
쓰레기 같은 나를 구원하신
한때 버림받은 존재였던 나, 지금은 그러나, 발견하였네
소경이었던 나,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전 세계인이 이 찬송을 공감하는 이유는 자신이 쓰레기 같은 존재였지만 현재는 예술품 이상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고백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읽을수록 버려진 인간을 거두어 다시 새롭게 만드는 신의 거룩한 모습이 보인다. 예수를 죽도록 증오하던 사람을 불러 그의 전파자로 삼거나,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인에게 하늘의 소망을 안겨주고, 천하의 매국노에게도 구원을 선포하는 등등 세어보자면 끝이 없다.
내가 회원으로 있는 수필교실의 수강생 중에는 현직에서 은퇴한 후에야 등단한 작가들이 꽤 있다. 열심히 배우며 글솜씨를 닦는 그들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 역시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건 아닐까? 지금 내가 그렇다 보니 남들도 그렇게 느껴진다. 아무리 그래도 삶은 역시 쉬운 게 아니다. 내가 나에게 실망스러워질 때가 많다. 그때마다 그 작가의 전시회를 한 번쯤은 떠올려야 할 것 같다.
첫댓글 성경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요.
오늘 딱 제가 드리고 싶은 고백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방주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은혜, 이곳에 저를 이끌어주신 신금펄 선생님을 만났던 은혜, 그리고 언제나 "만나면 좋은 친구"(엠미씨 문화방송이 아닌~~^^)인 문우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는 Amazing Grace!, 여러분이 제게 주시는 눈빛과 언어 표정 모두가 Amazing Grace!입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