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혁
ο 고인돌이 학성리·유평리·소룡리·수해리·대곡리·보생리 등지에 남아있으며 유평리·보생리·학성리 등지에서 대형고분이 발견된다. ο마한 54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을 삼서면·삼계면 일대로 비정한다. ο백제때 소비혜현(치소 삼계면 우봉)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때 삼계현(森溪縣)으로 명칭이 바뀌어 갑성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현종 9) 영광군에 내속되었다. ο조선 중엽 현 삼서면 지역에 삼남면과 외서면이 설치되었는데 영조 25년(1749)에 발간한 <여지도서>에 의하면 삼남면은 380호 1,557명·외서면은 261호 912명, 총 641호 2,469명 이었다. ο정조 13년(1789)에 발간한 <호구총수>에 의하면 삼남면에는 40개 마을 374호 1,491명, 외서면에는 43개마을 383호 1,545명이었다. 그리고 현 삼계리 어랑·초정은 삼북면(현 삼계면 지역)에 속해 있었다. ο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삼남면과 외서면을 통합하여 삼서면이라 하고 14개리를 설치하였으며 장성군에 편입되었다. ο1990년 학성리 학동·자동·원촌·회성 마을과 대도리·관동 마을이 상무대의 이전으로 인하여 없어졌다.
(2) 대곡리(大谷里)
대곡리는 인지·송곡·학산·월암·대곡·구적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에 속했었는데 1914년 장성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삼남면에 인지산(仁之山)·신송정(新松亭)·대곡(大谷)·신촌(新村)·외태산(外台山)·내태산(內台山)이 외서면에 월암(月岩)·맥동(洞)·위전(圍田)·각정(角井)이 기록되어 있다. 맥동과 위전은 확인할 수 없고 신송정은 지명만 남아 있다.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인지리(仁智里)·태산리(台山里)·송곡(松谷)·월암리(月岩里)·구적리(九迪里)가 나오며 1914년 삼남면의 인지리·송곡리·내태리·학산리와 지정리·하우리의 일부, 외서면의 구적리·월암리와 용호리·용한리의 일부, 현내면의 월구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곡리라 하였다.
ㅇ 인지(仁智) 주변에 고인돌과 대형고분(백제시대로 추정)이 있다. 옛날 파평윤씨가 살았다고 하며 300년 전 김해김씨와 상산김씨가 살다가 떠났다는 구전이 있다. 약 180년 전 전주이씨가 들어와 동족마을을 이루었으며 구한말 전절까지 퍼져 살았다. 일제때 밀양박씨·김해김씨·해주오씨·경주정씨·장수황씨가 들어오고 최근 문화유씨·철원주씨·인동장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35호(인지 23·장자터 9·전절 3)가 살다가 6·25때 7명이 죽고 3호 외 전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40여호가 살았으나 현재 29호(인지 17·장자터 6·전절 6)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분산동에 [매화낙지]가 있다하여 매답이라 했다고 하나 옛 기록에도 인지로 나오며 유래는 알 수 없다. 인물 : 이관주(한말의병), 이한수(선관위사무관). 유물유적 : 지석묘.
ㅇ 송곡(松谷) 송곡과 새터 두 뜸으로 이루어졌다. 약 200년전 풍천임씨, 150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와 살다가 6·25 전후에 모두 떠나고 금성나씨가 차츰 집성촌을 이루어 일제말엽 새터까지 옮겨 살았다. 25호(송곡 18·새터 7)가 6·25를 만나 6∼7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으며 60년대에 흥성장씨·수원백씨, 70년대에 청안이씨·함풍이씨가 들어왔으나 지금은 금성나씨(13호)를 비롯 21호 82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뒤에 소나무가 많이 있어 송곡이라고 했다 한다. 인물 : 나학렬(항일운동)·나봉기(삼서면장), 나근채(삼서면장), 양순희(장성군교육장).
ㅇ 학산(鶴山) 지정·태뫼·월막 3뜸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도 외태산으로 나오는데 옛 일은 알 수 없고 김해김씨가 120여년전에 들어온 후 일제초에 전주이씨·밀양박씨·경주최씨가 일제말에 하동정씨·광산김씨가 들어왔으며 6·25후에 진주강씨·파평윤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20호(태뫼 12·지정 7·월막 1)였으며 6·25때 20여명이 입산하여 죽고 2호만 남고 모두 소각되었다. 현재 14호(태뫼 7·지정 6·월막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태뫼산 아래에 있어 태뫼(태산台山)으로 불러오다 마을이 학의 형국이라 하여 학산으로 고쳤다고 한다. 인물 : 김형한(예비군면대장).
ㅇ 월암(月岩) 안맷등에 고인돌이 있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도 나온다. 김해김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상산김씨가 150여년전에 들어온 후 문화유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제주양씨가 들어와 10여호가 살다가 6·25때 4명이 죽고 3호의 가옥이 소각되었다. 마을이 복구되면서 진주강씨·선산김씨가 들어오고 최근 보성선씨·밀양박씨가 들어와 지금도 1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반달 형국이고 바위(지석묘)가 있어 달바우(월암)라 한다. 인물 : 유인채(한말의병)·유달선(삼서면장)·유우선(전남대교수)·유병인(농촌지도소장)·유재갑(삼서농협장). 유물유적 : 지석묘(안맷등에 7기).
ㅇ 대곡(大谷) 삼남면 면사무소가 있었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대곡·신송정·신촌·내태산이 나오는데 신송정은 지명만 남아있고 내태산은 안터라 부르며 파평윤씨가 살았다는 구전만 전한다. 하음봉씨가 10대째 금성나씨가 200여년·경주이씨가 160여년·해주오씨가 5대째·광산김씨와 전주이씨가 120여년간 살고 있다. 일제 중엽에 장질부사로 인명피해가 많았으며 66호가 살다가 6·25때 7명이 죽었다. 1908. 4. 7 태뫼산에서 의병 80여명과 일본군이 2시간동안 격전·의병 40명 전사·20명 부상·화승총 20정을 빼앗겼다. 현재 46호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한실(큰골)이라 부르며 대곡으로 표기한다. 인물:나정순(한말의병)·나상곤(삼서면장)·나관주(면장·통대의원)·나병만(병원장)·나동주(병원장)·나병재(병원장)·봉만기(삼성농협장)·나형주(의학박사)·이상보(문학박사)·이송주(한일교통사장)·나금주(고등교장)·나연주(광주농고교장)·나병유(사무관)·이훈필(장성경찰서장) 유물유적 : 망곡단과 숭모비 태뫼산 정상에 있다. 나상호가 고종황제 서거에 망곡, 1923년 광무, 1926년 융희황제 숭모비 건립, 구암재 서당이었는데 오성사립보통학교로 되었다가 삼서공립학교로 통합되었다. 나관주공적비 -1980년 면민이 세움.
ㅇ 구적(九迪) 호구총수(1789년)에 각정(角井)·구적봉(九積峰)이 나오는데 옛일은 알 수 없고 250년전 김해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차츰 소식개·흥동·대각정으로 분가해 나갔다고 한다. 구한말까지 김해김씨의 동족마을이었는데 1890년경 장흥고씨와 해주최씨가 들어왔으며 일제때 광산김씨·밀양박씨가 대각정으로 들어왔다. 일제때는 20여호(대각정 8·흥동 11·국적 3·소식개 3)가 살았고 상무대가 들어온 후 새건물이 많이 들어서 7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대각정 -우치리가 소형국인데 소뿔에 해당하여 각정이라 했다. 구적 -거북이 형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인물 : 김종규(중등학교교장), 김우근(통대의원), 김인수(불교신문편집국장).
(3) 삼계리(三桂里)
삼계리는 명주·장동·금광·삼봉·초정·어랑·계동·월계 8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어랑리(魚浪里)·어동촌(魚東村)·초정(草亭)·계동(桂洞)·삼봉(三峰)이 나오며 1914년 외서면의 삼봉·명주·장동·계동·월계·용강리 일부와 삼북면의 초정리·어랑리를 병합하여 삼봉과 계동의 첫 자를 따서 삼계리라 하였다.
ㅇ 명주(明珠)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으나 수원최씨가 부자로 살았었다는 구전이 있으며 250여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온후 문화유씨가 수룡동으로 들어와 두 성씨가 주류를 이루었다. 150년전 밀양박씨가 들어오고 일제말 전주이씨 6·25후 광산김씨·경주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60여호(유씨 30·김씨 25·박씨 2·이씨·정씨)가 살았는데 수룡동에는 유씨만 6호였다. 인공때 19명이 죽고 수복때 전호가 소각되었다. 44호가 다시 살았으나 현재 2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에는 [명기동]·[명주동]으로 불렀는데 마을이 구슬형국이어서 명주라 했다고 한다. 인물 : 유달선(면장)·유우선(전남대교수)
ㅇ 장동(壯洞) 수원최씨가 살다가 떠났다고 하며 청주한씨가 200여년 전 입향하여 주성을 이루고 있으며 일제초 문화유씨와 상산김씨가 들어온 후 동래정씨가 들어와 20호(한씨 15·김씨 4·유씨 1)가 살다가 인공때 30여명이 죽고 가옥일부가 소각되었으며 수복때 입산하여 20여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밀양박씨·전주이씨가 새로 들어왔으며 12호 정도가 유지되고 있다. 동명유래 : 장군이 태어날 마을이라 하여 장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인물 : 한동석(초등교장)·한기장(해군중령)·한재성(육군중령).
ㅇ 금광(金鑛) 일제때 사금을 채취하면서 생긴 마을이라 금광이라 한다. 해방후 경주김씨가 들어왔으며 6·25후 문화류씨가, 최근 교하노씨·광산김씨·청주한씨가 들어와 현재 7호가 살고 있다. 인물 : 김채욱(고등교장)·김문옥(의사)·유모선(의사)
ㅇ 삼봉(三峰) 오래전에 林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90여년전 문화유씨가 들어온후 120여년전 상산김씨·전주이씨, 100여년전 경주최씨·영광전씨·영월辛씨·동래정씨가 들어오고 해방후 청주한씨가 들어와 25호가 거주하다가 6·25때 3호를 제외한 전호가 소각되고 입산하여 30여명이 죽었다. 10여호가 다시 들어오고 행주기씨·남평문씨 등이 새로 들어와 24호가 되었는데 현재 9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삼봉산에서 유래되었다. 인물 : 유만열(사헌부감찰)·이회문(가례전집을 집필)·이성립(군의원)·한윤섭(리비아 대사관 근무).
ㅇ 초정(草亭) 오래 전에 수성최씨가 살다가 떠났다고 하며 광산김씨가 350여년 전에 들어와 동족마을을 이루었는데 일제때 진주정씨·경주이씨가 들어와 24호가 살다가 인공때 3명이 죽고 수복때 3호외 전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제주양씨·인동장씨·동래정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12호(광산김씨 11·정씨·장씨·양씨)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암산이 와우형이고 이 마을은 풀밭이다. <호구총수>에도 초정으로 나온다. 인물 : 김수록(농지개량조합장)·김덕호(병원장)·김성환(조대의대 외과과장)·김주호(사장).
ㅇ 어랑(漁浪) 오래전에 여산송씨와 전의이씨가 살았다고 하며 무오사화때 진주김씨가 가산으로 내려왔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약 200년전에 동래정씨가 100년전 장흥임씨가 들어와 일제때 42호가 살다가 6·25때 15명이 사망하고 전가옥이 소각되었다. 35호가 다시 들어왔으나 현재 진주김씨 13호를 비롯해 1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배형국이며 가옥이 고기같다 하여 어랑이라 했다. 인물 : 김선정(형조좌랑)·김수하(예조정랑)·김겸(공안공)·김봉열(국민훈장석류장)·김강열(초등교장)·김재민(외교관)·김재복(사장) 유물유적 : 어랑사·지석묘·낭암정·취적정.
ㅇ 계동(桂洞) 400여년전 장흥임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180여년전 제주양씨·120여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진주송씨·동래정씨·밀양손씨 그리고 최근 청주한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50여호가 살다가 6·25때 15명이 죽고 2호 외의 전가옥이 소각되었다. 38호가 다시 들어와 살다가 지금은 1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을 달로 보고 계수나무가 있다하여 계동이라 했는데 [쥐굴]로도 많이 부른다. 인물 : 정진욱(영광우체국장)·정진순(전남대교수)·정진후(수리조합장)·정진권(육군대장). 유물유적 : 계산사(임두춘 등 4위 배향).
ㅇ 월계(月桂) 장흥임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160년전 제주양씨·일제때 진주정씨가 들어와 15호가 살다가 6·25때 6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23호까지 살다가 현재 4호(임씨 5)가 살고 있다.
(4) 유평리(柳平里) 유평리는 부귀동·옥동·저전·박주·관음·유정 6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원래 영광군 외서면 지역으로 1789의 <호구총수>에는 부귀(富貴)동·송산(松山)·저전(猪田)·회화정(會花亭)·평연(平連)이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평연·박주·관음·진천·옥동·염천·유정·저전·부귀의 일부를 병합하여 유평리라 하여 장성에 편입되었다.
ㅇ 부귀(富貴) 백제시대의 고분이 있고 돌칼이 발견된 마을이다. 300여년전 청송심씨가 들어와 자자일촌 하였다. 일제때 몇 성씨가 들어와 25호(심씨 15·류씨 3·정씨 1·최씨 1·김씨 1)가 살다가 28호가 되었는데 6·25때 입산자 4명이 죽고 2호 외의 전가옥이 소각되었다. 다시 마을을 복구하고 나주오씨·해주오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와 35호까지 살았으나 지금은 20호(청송심씨 13·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이라 [부구(浮龜)동]이 [부귀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물 : 심상호(삼서우체국장)·심동엽(의학박사)·심현우(KBS 부장) 유물유적 : 고분(백제시대 것으로 추정)·표의사(심우신 배향).
ㅇ 옥동(玉洞)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 영광군 외서면 조에 화신촌(禾新村)·신산(新山)·회화정(會花亭)이 나오는데 화신촌과 신산은 알아볼 수 없다. 1912년 기록에 진천·옥동·염천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염천·문암·석성·진천·회화 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문암(門岩)은 1870년경 김해김씨가, 진천동은 장흥임씨가, 석성(石城)은 일제초에 경주최씨가 가장 오래살고 있으며 염천은 주막거리였다. 일제때 34호(문암 10·회화 7·진천동 8·석성 4·염천 5)가 살았으며 6·25때 4명이 죽고 진천동 2호 외 전가옥이 소각되었다. 현재 장흥임씨 8호·광산김씨 3호 등 총 24호(문암 6·회화 5·진천동 8·석성 6·염천 2)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문암 -문턱바위에서 유래, 회화--회화나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해징이], [해진]으로 부른다. 진천 참샘에서 유래, 석성 일출암산에 돌이 많아 생긴이름, 염천 -소금나들이에서 유래. 인물 : 임근성(삼서단위농협장) 유물유적 : 칠성당, 사기점.
ㅇ 저전(楮田) 주변에 지석묘와 고분이 있다. 옛날 청송심씨가 살았다고 한다. 220여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와 7대째 살고 있으며 일제초 수성최씨와 함풍이씨, 그후 청송심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32호(광산김씨 11·청송심씨 4 등)가 살았으며 6·25때 5명이 죽고 3호가 소각되었다. 대부분 다시 들어왔으나 현재 8호(광김 3·수성최 2·심씨 2·전주이 2·박 1·임 1·노 1·함이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금계포란형으로 닭밭으로 부르다 저전으로 변했다. 인물 : 김오원(외서면장)·김원봉(국회사무처서기관) 유물유적 : 고분(소멸).
ㅇ 박주(泊舟) 옛날에는 관음과 박주가 한 마을로 송산(솔뫼)이라 하였다. 약 300년전 장흥임씨가 들어와 자자일촌 하다가 일제때 해주오씨·청송심씨·이천서씨가 들어왔으며 최근 함평이씨·광산김씨·창원황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17호가 살았으며 6·25때 전호가 소각되고 불갑산 전투때 39명이 죽었다. 현재 장흥임씨(11호)를 주축으로 21호(도촌 6·박주 15)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메어놓은 배 형국이라 박주라 했다고 한다.
ㅇ 관음(觀音) 옛날에는 박주와 함께 솔뫼로 불렀던 마을이며 관음과 평연(平連)이 합해진 마을이다. 관음에는 장흥임씨가 300여년간 살면서 자자일촌한 마을인데 150여년 전 청송심씨 일제말 전의이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8호(임씨 7·심씨 1)가 살다가 6·25때 10여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다. 평연에도 장흥임씨가 처음 살았는데 일제때 5호(임씨 3·이씨 1·봉씨 1)가 살았으며 6·25때 4호가 불탔다. 현재 1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뒤에 일출암이 있었는데 이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물유적 : 지석묘.
ㅇ 유정(柳汀) 옛날에는 박주·관음과 함께 솔뫼에 속했었다. 장흥임씨가 350여년 전에 들어와 자자일촌 하였다. 일제때 30여호가 거주하다가 6·25때 7명이 죽고 2호 외 전호가 소각되었다. 20여호가 다시 들어오고 최근 김해김씨·전의이씨가 들어왔으나 현재 12호(임씨 10호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장흥임씨 선산 옆 연못의 버드나무에서 유래 인물 : 임홍수(항일운동). 유물유적 : 일출암지, 가사(佳寺)지, 도요지, 근수정.
(5) 대도리(大都里)
대도리는 석동·수침·대도동으로 구성되었다. 옛날 영광군 외서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반학·영동·입점·대도동·내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중산리·칠령리·행정리·석동리·관동리와 내기리·수침리·반학리·원촌리의 각 일부를 합쳐 대도리라 하여 장성군에 편입되었다. 반학과 칠령리는 6·25후에 폐촌되고 관동은 상무대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현재는 1리(석동, 수침)·2리(대도동)로 나뉘어 있다.
ㅇ 석동(石洞) 옛날에는 안터(내기)·도롱굴(석동)·웃도롱굴·장구밭 4뜸이 있었다고 하는데 내기에는 고려장이라고 전하는 대형고분이 있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도 내기만 기록되어 있다. 창녕성씨가 처음 내기에서 살았는데 약방을 오래동안 했다고 하며 그뒤 창녕조씨·경주이씨·동래정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광주이씨·영월신씨·전주이씨·김해김씨·장흥임씨·강화최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와 24호(내기 7·장구밭 5·도롱굴 12)가 살다가 6·25때 2호만 남고 모두 소각되었다. 그뒤 마을이 복구되었으나 내기는 1970년경 폐촌되고 현재 장구밭 9호(창녕성씨 2·천안전씨 2·광산김씨 1·장흥임씨 1·여양진씨 1·전주이씨 1·신평송씨 1) 도롱굴5호(광산김씨 2·광주이씨 1·창원황씨 1·김해김씨 1) 총 14호 60여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돌이 많아서 [독골], [도롱골]로 부르다 [석동]이 되었다. 인물 : 이장순(육군중령).
ㅇ 수침(水砧) 옛날에는 대도동·석동·수침을 합하여 [독골]로 불렀다고 하며 오래 전에 권씨와 丁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260여년전 광주이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일제때 교하노씨·파평윤씨·김해김씨 등이 들어와 40여호가 살았다.(반학에도 3호가 있었다.) 해방후 보도연맹사건으로 8명이 희생되고 6·25 수복때 3호 외 전호가 소각되었으며 소개 생활중 장질부사로 20여명이 죽었다. 35호가 다시 들어왔으나 반학은 복구되지 못했다. 현재 16호(광주이씨 7·김해김씨 3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에 반학(伴鶴)으로 나와있는데 인접 학성리와 관계가 있는 것 같으며 수침은 대도동과 한 마을로 대도동을 [안물], 수침을 [밧몰]이라 했는데 물방앗간이 있었다하여 수침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이석규(삼서면장)·이학재(삼서면장)·이성수(목포대교수)·이현수(중앙대교수)·이은수(하학박사).
ㅇ 대도동(大都洞) 오래 전에 권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교하노씨가 임진왜란때 들어와 그의 손이 살고 있으며 300년 전 동래정씨가 들어와 해방후 모두 떠났다. 광주이씨가 7대째 살고 있으며 200년전에 창녕성씨·광산김씨·청송심씨 그리고 최근에 밀양박씨·여양진씨·김해김씨·전주이씨가 들어왔다. 1914년까지 영광군 외서면사무소가 있었으며 원래 안몰·밧몰(수침)·중산·칠영동·하춘·행밭(새터) 등의 뜸이 있었는데 일제때 50여호(만몰 20·중산 15·칠영동 5·행밭 5·하춘 5)가 거주하다가 하춘은 일제말 대도저수지 축조때 없어졌다. (행밭 북쪽 허굴에도 해방후까지 5호가 있었다.) 6·25 수복때 불갑산으로 피난갔다가 25명이 죽고 3호 외 가옥이 전소되었다. 그후 40여호가 살다가 24호(안몰 14·중산 8·행밭 1·칠영동 1)로 줄었는데 상무대가 들어서 정문 앞에 상가 4호가 생기면서 9호가 들어와 모두 33호 88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대도동 원래 [독골]이 도동이 되었는데 외서면사무소가 생기면서 대도동이 되었다. 인물 : 이범진(한말의병), 이만순(면의원).
(6) 소룡리(小龍里)
소룡리는 용동·덕촌·소도·안정으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외서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소도동·복룡·안동·안정이 나오며 1914년 소도동·용동(복룡·안동)·덕촌·안정을 소룡리라 하여 장성에 편입되었다. 현재 1리(용동·덕촌)·2리(소도)·3리(안정)로 나뉘어 있다.
ㅇ 용동(龍洞) 용동과 묘동(猫洞)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호구총수(1789년)의 안동은 용동의 한 뜸이고 복룡은 용동으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다. 용동에는 360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와 자자일촌 하였으며 묘동에까지 분가해 나갔다. 일제때 용동에는 이씨·심씨·박씨 3호가 살다가 6·25후 떠나고 파평윤씨·장흥고씨·나주정씨 등이 들어왔으며 묘동에는 나주정씨·장흥임씨·전주이씨가 들어왔다. 일제말엽 44호(용동 30·안동 4·묘동 10)가 살다가 용동에만 6명이 죽고 가옥이 소각되었다. 현재 광산김씨 24호·나주정씨 4호를 비롯해 38호(용동 22·안동 2·묘동 14)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용동 -나무가 울창하여 '밀울'이라 하다가 용동이라 했는데 복룡과 안동에서 유래한 것 같다. 묘동 -마을이 고양이 형국이라 '괴서리'라 하다가 [묘동]으로 바꿨다. 인물 : 김용백(서기관), 김덕용(장성군과장), 김오차(세일학원장). 유물유적 : 지석묘.
ο 덕촌(德村) 인동장씨가 터를 잡았다는 말이 전하며 150년전 광산김씨와 함평이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울산김씨·장수황씨가 들어와 22호(이씨 10·광김 5·울김 4·기타 3) 살았으며 6·25때 5명이 죽고 가옥 14동이 소각되었다. 그후 마을이 복구되고 신안주씨·김해김씨 등이 이거해 왔는데 지금은 12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뜃물·뙤앗물이라 부르다 덕촌으로 바꿨다. 인물 : 김오원(외서면장)·김원본(교육감)
ㅇ 소도(小都) 소도·야중촌·시리등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호구총수(1789년)에도 소도동과 대야(大野)(한들-야중촌)이 나온다. 창녕성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10년전 모두 타지로 떠나 상고할 수가 없으며 창원황씨가 7대째 살고 있다. 1880년대에 영성정씨와 창녕조씨가 들어 왔으며 1900년대에 김해김씨·장흥임씨, 1910년대에 순천김씨·영월신씨·진주강씨·경주최씨, 6·25 이후 나주정씨가 들어와 70여호(소도 53·야중촌 12·시리등 5)가 살았는데 6·25전에 27명, 인공때 20명, 반란군의 습격으로 20명(인근주민포함)이 죽고 좌익들이 가옥 15동과 회관을 불태웠다. 피난갔던 주민들이 돌아오고 파평윤씨·광산김씨·동래정씨·선산김씨 등이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43호(소도 36·야중촌 5·시리등 2)가 거주하고 있다. 만세운동 -1919. 3. 10 소룡리교회 부설 소학교 교사 송주일이 70여인이 모인 예배당에서 광주의 만세운동에 대한 서신을 읽어주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고 7일후 본격적인 만세시위를 결의했으나 체포되어 1년 선고를 받았다. 동명유래 : 소도동 대도동과 상대적인 작은 독골로 불렀는데 주변에 고인돌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유물유적 : 삼서 서초등학교(1933년 인가)·서부보건진료소(1982년 개설)·성광교회(1905년 설립). 인물 : 조병희(삼서면장)·조세환(전주기전여대)·조창환(병원원장)·송주일(항일운동)·정현성(목사)·송광현(농림부사무관)·송동진(사법연수원)·송현규(성심학원장).
ㅇ 안정(雁井) 큰동내·서당재·구석밭 3뜸이 있었는데 구석밭은 1976년 경지정리때 없어졌다. 옛날 장씨와 심씨가 살았다고 하며 1730년경 광산김씨가 1860년경 함평이씨가 1900년경 신평송씨와 행주기씨가 들어왔다. 해방후 영성정씨·경주최씨가 들어와 41호(큰동내 30·서당재 8·구석밭 3)가 살다가 6·25때 35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으며 다시 마을을 복구하여 현재 30호(광산김씨 13·함평이씨 5·영성정씨 5·청송심씨 3 등) 75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기러기 형국이라 안정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김상복(군의회 부의장) 유물유적 : 지석묘.
(7) 수해리(水海里)
수해리는 화해·신죽·월곡·양현·하죽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외서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화해리·양현촌·광곡·용현·덕산이 나오는데 광곡은 월곡의 한 뜸이고 용현과 덕산은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발산마을이다. 1914년 하죽리·흥곡리(미상)·화해리·신죽리·월곡리·양현리·반학리 일부를 수해리라 하여 장성군에 편입하였다. 1리(화해)·2리(신죽·월곡·양현)·3리(하죽)로 편성되어 있다.
ㅇ 화해(禾海) 맹진사라는 사람이 처음 터를 잡았고 그 후 창녕성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약 200년전 장흥임씨가 120년전 광산이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마을 앞 들가운데 수촌·반월·해평·월평모퉁이 등의 마을이 있어 80여호(장흥임 50·상산김 7·광산이 5·신평송 5·진주강 3·문화유 3·전주최 3·청송심 1·전주정 1·해주오 1·하음봉 1)의 큰 마을인데 해방후 월야의 좌익들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고 2∼3명이 죽었으며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70여호가 살았으나 현재 41호가 살고 있다. 100여년전 성촌되었던 수촌·반월·해평·월평모퉁이는 1976년 경지정리때 없어졌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에도 화해로 나오는데 '수해'로 많이 부른다. 화(禾)는 화(火)와 음이 같아 해(海)와 수(水)로 바꿨으며 들이 넓어 마치 바다 같다는 뜻도 있다. 인물 : 김기현(조달청 이사관)·이석진(육군소령).
ㅇ 신죽(新竹) 오래 전에 이씨와 한씨가 살았다고 하며 약 250년전에 함평노씨가 들어온 후 나주김씨·청송심씨·장흥임씨가 들어왔다. 일제 때 30여호(함평노 23·청송심 4·나주김 1·장흥임 1·안동권 1)가 살았으며 6·25때 5명이 죽고 가옥이 1호만 남고 전소되었다. 그후 20여호가 살다가 현재 14호(노씨 7·권씨 2·심씨 1·김씨 1·임씨 1·밀양박씨 1·진주정씨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수해리가 배형국이므로 상단(上舟)라 부르다가 상죽으로 바뀌고 다시 신죽올 바뀌었다고 한다. 유물유적 : 지석묘. 인물 : 노경춘(광양제철부사장)·노병룡(인하대교수)·노동원(초등교장)·노병유(CBS대구본부장).
ㅇ 월곡(月谷) 원래 월곡과 광곡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호구총수(1789년)에는 광곡(廣谷)만 나오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월곡만 나온다. 서쪽에 있던 광곡은 70여호의 대촌으로 부자가 살았는데 도둑과 전염병으로 1900년대 초에 없어졌다고 한다. 월곡에는 220여년 전에 영광김씨가 들어왔으며 입향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나씨·기씨·반씨 등이 일제말까지 살았다고 한다. 일제때 인동장씨·장흥임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오고 해방 후 함평노씨가 들어와 40여호가 살다가 6·25때 5∼6명이 죽고 가옥 5호가 소각되었다. 그 후 33호가 정착하였는데 현재 28호(영광김 9·장흥임 6·인동장 4·밀양박 2·여양진 2·광산김 1·김해김 1·창원조 1·함평노 1·전주이 1)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형국이 달형국이다. 인물 : 김동술(삼서면장)·김동현(광주고법과장)·김동구(사법연수원서기관)·노영대(목포지원장). 유물유적 : 지석묘.
ㅇ 양현(洋峴) 오랜 옛날 김씨가 살았다고 하며 130여년전 장흥임씨가 들어와 동족마을을 이루었는데 안·황·성·배씨 등이 6·25전까지 심·고·광김 등이 60년대까지 살았다고 하며 그 후 진주정씨·전주이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25호였는데 6·25때 9명이 죽고 20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20호가 살다가 현재는 11호(임씨 7·정씨 2·이씨 1·김씨 1) 78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에는 [양현(兩鉉)촌]으로 나오는데 홍수가 나면 물고개라 하여 [양현(洋峴)]이라 했다고 한다. 유물유적 : 지석묘.
ㅇ 하죽(下竹) 옛날 임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70여년전 청송심씨가 들어왔다. 해방후 41호(청송심씨 36·순흥안씨 2·진주강씨 2·영월신씨 1)가 살다가 6·25 전후에 7명이 죽고 수복때 전호가 소각되었다. 그호 45호가 살다가 35호(심씨 25·안씨 4·강씨 1·신씨 2·영광김씨 1·전주이씨 1·진주정씨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행주(行舟)형으로 하주라 하다가 하죽이 되었다. 인물 : 심은택(영광군수)·심길채(초등교장)·심상묵(면의원)·심은섭(광주동부경찰서).
(8) 우치리(牛峙里)
우치리는 하우·중우·상우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삼남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하우치·중우치가 나오며 1914년 삼남면의 하우리·중우리와 외서면의 기동과 용호리 일부를 우치리라 하여 장성군에 편입하였다. 현재 1리(하우)·2리(중우·상우)로 편성되어 있다.
ㅇ 하우(下牛) 원하우와 일제때 성촌된 용구메로 이루어졌다. 선조때 금성나씨가 나주에서 이거해왔으며 1800년대말에 나주임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하우에 18호(금성나씨 12·나주임씨 2·밀양박씨 1·평택임씨 1·영월신씨 1·전주이씨 1)와 용구메에 8호가 거주했으며 6·25때 10명이 죽고 9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55호까지 되었는데 현재 30호(금성나 13·나주임 3·무송유 2·상산김 2·남양홍 2·밀양박 2·영월신 1·김해김 1·평택임 1·해주오 1·전주이 1·천안전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우치리가 소형국으로 하우는 아랫부문에 해당된다. 인물 : 나봉서(효자)·나몽성(도의원).
ㅇ 중우(中牛) 하우의 금성나씨가 분가해 왔으며 그 뒤 철원주씨·능성구씨(110년전) 일제때 인동장씨·무송유씨 해방 후 장흥고씨·안동권씨·경주최씨가 들어와 20여호(나씨 13호 등)가 살다가 6·25때 유씨 일가가 몰살되고 가옥이 소각되어 남은 5호에서(천막 2호) 함께 살면서 마을을 복구하였다. 그뒤 김해김씨·밀양박시·영산김씨·청송심씨 등이 들어와 40여호까지 증가했으나 현재 25호(나씨 9·해김 3·주씨 3 등)가 살고 있다. 인물 : 나갑주(한학자, 성균관대교수), 나병준(삼서농협장). 유물유적 : 금성나씨 삼강정려(전남 문화재 자료 128호).
ㅇ 상우(上牛) 원래 중우에 속했었는데 일제 때 종방이 생기면서 호수가 늘어나 분리된 마을인 것 같다. 김해김씨가 살다가 1960년대 모두 떠났다고 하며 일제때 일본인 여자가 살았다고 한다. 약 90년전 나주나씨가 들어온 후 풍천임씨·나주임씨·문화유씨·장흥고씨가 들어왔는데 인가가 많았던 복구메가 일제때 화재로 소각되었다. 6·25때 유씨 일가가 죽고 가옥이 전소(1호만 남고)되었다. 현재 19호(밀양박 3·문화유 2·인동장 2·경주김 2·이천서 2·장흥고 2·나주나·강능유·풍천임·수안이·순흥안·김해허 등)가 살고 있다. 인물 : 고광복(국세청서기관), 박성완(공군소령).
(9) 금산리(金山里)
죽산·화산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삼남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상횡산(上橫山)·하횡산(下橫山)·팔죽산(八竹山)이 나오며 <호구총수>에는 비금리 하나만 나와 있고 1914년 봉동(함평 월야)·비금리·보강리·죽산리·주곡리 일부(함평)를 병합 금산리라 하여 장성군에 편입했다.
ㅇ 죽산(竹山) 600여년전 남원양씨가 들어왔고 그뒤 전주이씨가 살다가 떠났으며 약 400년전 금성나씨 통서가 처가인 진주정씨를 따라 입향했다고 한다. 약 220년전 청도김씨가, 160년전 평산신씨가, 120년전 상산김씨가 들어오고 75호(나씨 30·상산김 17·청도김 6 등)가 되었으며 6·25때 25명이 죽고 가옥 10동과 금성나씨 재실이 소각되었다. 그 후 전주이씨·광산김씨 등이 새로 들어와 70여호가 살았으나 현재 54호(금성나 18·상산김 11·청도김 4·김해김 4 등) 128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뒤 계봉산이 봉형국인데 봉황은 죽실을 먹는다하여 죽산이라 하였으며 [대뫼]라고도 부른다. 인물 : 나통서(병자호란때의병)·나길주(장성군과장)·김은원(광주이공대 교수)·김재원(초등학교교장)·나남주(삼서면장)·김경진(전주지검 검사). 유물유적 : 지석묘, 금성나씨재실.
ㅇ 화산(華山) 화산·유곡·발향·도롱굿테 4뜸으로 나뉘어 있다. 1500년경 하동정씨가 들어왔으며 그후 영성정씨가 들어왔다. 1700년경 능성구씨가, 약 110년전에 밀양박씨와 한산이씨가 일제때 진주강씨·순천박씨·수원백씨가 들어와 54호가 살았으며 6·25때 14명이 죽고 2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경주김씨·한양조씨·장흥고씨·고흥유씨·인동장씨가 들어오고 최근 광산김씨·전주이씨 등이 들어왔으며 일부는 떠나가 현재 52호(하동정씨 26호 외 성씨는 1∼2호임) 125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빗기뫼(횡산 ; 橫山)라 하다가 화산으로 고쳤는데 마을이 비금표란형이어서 비금으로 바꾸었다가 좋지 않다고 하여 다시 화산으로 부른다. 인물 : 정순(현감)·정열(어모장군)·정운용(공조판서)·정여덕(진사, 남문창의 가담)·정풍기(양잠조합장)·정인규(훈장·군민의상수상)·정진기(공군대령)·정준기(철학박사)·정찬태(육군대령)·정재기(육군중령)·정회범(순천대교수)·정윤태(이학박사·조선대교수)·정조성(초등학교)·정윤표(수원중부경찰서)·정활기(육군중령)·정종강(육군소령)·정인채(면의원)·정찬선(면의원)·정봉기(면의원)·정찬덕(소방대장)·정선기(서울시의원)·정회만(광주여대교수)·정회웅(의사)·정회상(의사)·정성국(의사)·정회열(국가대표야구선수).
(10) 석마리(石馬里)
석마리는 마령·전도·석령·녹서·옥산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삼남면 지역과 함평군 장본면 지역(옥산)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내전도·외전도·석령·마량·녹서치가 기록되어 있고 1914년 영광의 내전리·외전리·마령동·석령동·녹서치·함평의 옥산리를 석마리라 하여 장성군에 편입했다 현재 1리(마령)·2리(전도·석령)·3리(녹서·옥산)로 편성되어 있다.
ㅇ 마령(馬嶺) 안뜸(마령)·은행정·토수만이·새터뜸·초당골 5뜸으로 이룩된 마을이다. 370여년전에 교하노씨와 밀양박씨, 150년전에 경주김씨, 120년전에 청송심씨, 110년전에 금성나씨, 100년전에 하동정씨와 함평이씨가 들어왔으며 일제때 금성오씨·경주최씨·김해김씨·담양여씨, 해방 후에 진주정씨·해주오씨·광산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70여호(경주김씨와 경주최씨가 대다수였으며 안뜸 27·은행정 30·새터 5·초당골 4·토수만이 3)가 살았으며 6·25때는 사망 1명 외 다른피해는 없었다. 현재 33호(경주김씨 15·금성나씨 9·밀양박씨 4 등) 83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이 말형국이어서 마령이라 하였다. 인물 : 박창순(예조참의)·김채욱(의금부도사)·김열(의병활동)·김갑청(삼서면장)·나영국(면장·통대의원)·정일섭(육군소령)·정웅기(조선일보)·정찬길(면장)·최경천(장성군경영기획실장)·나기식(광주우체국)·김권필(전남일보)·나계식(장성군농업기술센터)·정병기(육군소령)·정창명(육군중령)·김석동(농협지부장)·나문식(삼서면장). 유물유적 : 돌도끼(1980년 출토 광주국립박물관 소장), 운곡정사(추산김열강학지소), 말바우제.
ㅇ 전도(全道) 옛날 송·황·박·노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630년경 석령의 경주김씨가 분가해 왔다. 150년전 진주김씨, 구한말 진주정씨·나주오씨가 일제때 경주이씨가 들어오고 최근 상산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43호(경주김 20·진주김 12·정씨 7·오씨 3·이씨 1)였으며 6·25때 10명이 죽었다. 현재 2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앞산이 노승염불 형국인데 처음 입향자가 수도하여 전도(傳道)라 하다가 전도(全道)가 되었다. 인물 : 박창섭(농촌지도소장)·김희주(병원원장) 유물유적 : 화목수(경주김씨 형제가 화목하기 위해 심었는데 2주가 한 그루로 합해졌다.)·당산제.
ㅇ 석령(石嶺) 경주김씨가 1560년경에 입향하고 100년전 함평이씨·전주이씨·파평윤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33호(김씨 17·함이 10·전이 3·윤씨 3)였으며 6·25때 2명이 죽고 1호가 불탔다. 현재 25호 (김씨 14·함이 6·전이 3·윤씨 2)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에 송아지(독우)형국이 있어 '독고개'라 하다가 석령이 되었다고 한다. 인물 : 김덕인(효종이 승하하자 남산에 단을 쌓고 통곡하였다.).
ㅇ 녹서(鹿捿) 250년전 경주김씨가 입향하여 90년간 살다가 모두 떠났다고 하며 190여년전 하동정씨, 150년전 진주강씨, 120년전 함평이씨, 105년전 영성정씨, 70년전 풍천임씨가 들어와 일제때 41호(이씨 15, 정(丁)씨 15·강씨 7·정(鄭)씨 3·임씨 1) 였으며 6·25때는 1명이 죽고 다른 피해는 없었다. 현재 27호(이씨 7·정(丁)씨 6·정(鄭)씨 5·광김 2·장흥임 2·상산김 1·나씨 1·풍천임 1·진주강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신기新基라 했는데 노승이 뒷산에 갈녹음수형이 있다고 하여 녹서로 하였다고 한다. 인물 : 정조성(초등교장)·정상룡(중등교장)·정보성(판사, 변호사)·이인행(교역상사 사장)·이흥표(삼서면장)·이숙행(동양화가), 이두행(중등교장), 정종국(MBC 방송국 총무국장)·최순금(통대의원)·강원(명지대교수)·정종순(동신대교수)·정숙경(여성개발연구원 사회학박사).
ㅇ 옥산(玉山) 옛날 함평군 장본면에 속했는데 1914년 장성군에 편입된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고 130년전 파평윤씨가 들어온 후 전의이씨·인동장씨·이천서씨가 들어와 10여호가 살다가 해방 후 전주이씨·최씨 등이 들어와 20호가 되었는데 1990년 현재 13호(전의이 4·파평윤 3·해주임·전주이·장수황·영성정·경주김·최씨)가 거주한다. 동명유래 : 뒷산을 와우형과 구슬형으로 보는데 옛날에는 두리봉(두우봉 頭牛峰)이라 하다가 1956년 함동저수지 수로굴이 뚤려 옥산으로 개명했다. 인물 : 인만석(육군소령)·장성고(세무서과장).
(11) 보생리(寶生里)
보생리는 보강·생동·이문·남산 4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삼남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이문리·관개정·사장내·아라물·잠두·보강동·생동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라물과 잠두는 남산의 일부이고 사장내(四檣內)는 위치를 알 수 없으며 관개정(冠盖亭)은 백산(삼계면)의 남쪽이라는 기록이 있을 따름이다. 1914년 생동·옹림리·남산리·이문리·보강리·하라리·전도리 일부를 보생리라 하여 장성군에 편입했다. 현재 1리(이문·남산)·2리(보강)·3리(생동)로 편성되었다.
ㅇ 이문(利門) 오래 전에 황씨와 남씨가 살았다고 전하며 430여년전 함평이씨가 들어온 후 150년전에 경주김씨가 들어왔다. 일제 때 경주이씨·진주강씨, 해방후 제주양씨·장흥임씨가 들어와 34호(함평이 20·김씨 6·경주이 3·진주강 2·양·임)가 살다가 6·25때 7명이 죽고 1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광산김씨·해주최씨·하음봉씨가 이주해와 30여호가 살았으나 현재 18호(함평이씨 9·경주이씨 2 등)이다. 동명유래 : '이문안'이라 부르며 이(李)문(함평이씨)·이(二)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있다. 인물 : 이몽인(임란의병장)·이준범(판사)·이창헌(의사)·이선희(광주교대교수)·이창주(의사). 유물유적 : 1907년 동학교당이 설립되었다가 없어짐.
ㅇ 남산(南山) 남산·하나몰·대정(大鼎)·새터·누에머리 뜸이 있다. 호구총수(1789년)의 아라물(阿羅勿)·잠두(누에머리)는 이 마을의 한뜸이다. 오래전에 남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경주김씨가 130년전 석마리에서 들어왔다. 일제때 36호(경주김씨 30·진주정씨·밀양박씨·광산김씨·수원백씨·평산신씨·장흥고씨)가 살았으며 6·25때 8명이 죽었다. 그후 함평이씨·상산김씨·경주이씨·철원주씨·한양조씨가 들어왔으나 현재 경주김씨 7호·수원백씨 3호 등 23호(남산 6·대정 4·하나몰 5·누에머리 3·새터 5)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남산 -남씨 또 남정산에서 유래, 하나몰 -하나 마을 또는 한(큰)마을에서 유래, 누에머리 -뒷산이 누에형국, 대정 -마을이 솥형국, 새터 -새로 생긴 마을임. 인물 : 김창환(서울청량리경찰서).
ㅇ 보강(保江) 오래 전 오씨와 신씨가 살았다고 하며 260여년전 우치리의 금성나씨가 분가해 왔다. 200년전 진주정씨, 120년전 진주강씨, 100년전 인동장씨가 일제때 능성구씨, 김해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54호(금성나씨 30·진주정씨 13 등)였으며 6·25때 4호외 전가옥이 소각되고 불갑전투때 40여명이 죽었다. 그후 함평이씨·하음봉씨·해주최씨 등이 이거해와 60여호까지 살았으나 현재 45호(큰보강 37·작은보강 8)가 살고 있는데 금성나씨(18호)·진주정씨(12호)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동명유래 : 복양(伏羊)사라는 절이 있어 복양이라 하다가 물이 있어야 한다고 보강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인물 : 정두석(산부인과 원장).
ㅇ 생동(生洞) 지석묘가 있고 백제시대 석실분이 있으며 오래 전 남정봉에 남씨와 정씨가 살았다고 한다. 1460년경 하음봉씨가 단종복위 사건때 낙담하였다고 하며 그후 1900년대 초 영월신씨, 조금후 함평이씨가 들어왔다. 해방후 60여호(봉씨 50·이씨 6·신씨 4)가 살다가 6·25때 불갑산에서 40여명이 죽었다. 그후 50여호가 살았으며 최근 경주이씨·광산김씨·이천서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39호(하음봉씨 32호등)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가뭄에도 물이 많아 또는 앞산이 시체형이기 때문에 生골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봉단의(임난때의병장)·봉태열(서울지방국세청장)·봉태영(초등학교장)·봉만전(의사)·봉석호(군수). 유물유적 : 지석묘 3기·대형고분(대곡리 경계 도로변에 있었는데 1995년경 없어졌다.)·도남정사 봉씨 강학지소, 만곡사(전남기념물 제 98호).
(12) 홍정리(紅亭里)
홍정리는 가산·외동·서제·홍정·원당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삼남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원당·판신촌·홍정·외가산·내가산이 기록되어 있는데 판신촌(板新村)은 동화면 구룡리 너더리 인 것 같다. 1914년 내가리·외가리·홍정리·원당리·외동리·서제리·판교리 각 일부를 홍정리라 하여 장성군에 편입시켰다. 현재 1리(서제·외동·가산)·2리(원당·홍정)으로 편성되어 있다.
ㅇ 서제(西才) 200년전 기록(호구총수)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전에는 원당과 한 마을이었는지도 모른다. 광산승씨가 12대째 살고 있으며 함평이씨가 210여년전 입향하였다. 해방 후 23호(함평이씨 10·광산승씨 5·금성오씨 3·기타 5)가 살았으며 6·25때도 무사하였다. 마을 서쪽 새터에 5호가 있었는데 1970년대 폐촌되었다. 현재 10호(함평이씨 5·광산승씨 3·수원최씨 1·손씨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 또는 서쪽에 고개(재)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인물 : 오승수(삼서면장).
ㅇ 외동(外東) 김해김씨가 살았다는 말이 있으며 1800년경 광산김씨가 들어와 30여호의 동족마을을 이루었는데 일제 중엽 이농현상으로 현재 11호(광김 8·신씨 1·윤씨 1·경주이씨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가산마을의 동쪽이기 때문인 듯하다. 인물 : 김병준(육군중령).
ㅇ 가산(佳山) <호구총수>에 외가산·내가산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을내에 밤안태·안뜸·밖갈매·서원뜸이 있다. 이 마을의 첫 입향자는 장흥고씨(임진왜란 전으로 추정)이며 밤안태에서 살다가 떠났다는 설이 있는데 밤안태는 60년대 말(당시 4호) 없어졌다. 지금 주성을 이루는 함평이씨는 서재에서 옮겨왔으며(170∼80년전으로 추정) 그 후 경주이씨·전주최씨·광산김씨(120년전)가 들어왔다. 해방후 40여호(함평이씨 20·경주이씨 5·전주최씨 4·장흥고씨 4·광산김씨 2·광산승씨 2 등)였으며 6·25때 7∼8명이 죽었다. 현재 30호(함이 11·광김 7·경이 6·전최 3·경김·탐최·송·고·밀박·반남박·강)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이 갈모형이라 갈뫼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 같다. 인물 : 이상식(전남대학장), 이상권(중등교장), 고희주(사법연수원), 이상용(특허청 서기관), 유물유적 : 가산사와 익제영정(전남기념물 164호).
ㅇ 원당(元堂) 1600년경 경주최씨가 낡은터로 들어왔으며 1820년경 수원백씨가 홍정에서 옮겨왔다. 1900년경 진주강씨가 입향하고 일제때 함평이씨·나주오씨·전주이씨가 들어와 40여호(백씨 29·최씨 6·강씨 3 등)가 살았는데 6·25를 거치면서 11명이 죽고 가옥 1채가 소각되었다. 그후 몇 성씨가 나가고 들어와 지금은 20호(백씨 12·오씨 2·강씨·최씨·박씨·함이·전주이·광산이)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부근에서 첫 번째 동네라는 뜻, 원댕이라 부른다. 인물 : 허일회(육군대령)
ㅇ 홍정(紅亭) 수원백씨가 1780년경 임곡에서 들어와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 일제때 30호 중 하씨 5호·김씨 4호·노씨 1호가 살았다고 한다. 인공때 20여명이 죽고 20여호가 소각되었으나 그 후 전호가 거주하였는데 이농현상으로 8호(수원백씨 6·진주김 1·밀양박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백씨 마을이라 홍(붉은색)이 깃들어야 하며 마을에 정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백일홍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인물 : 백규수(홍문관 교리)·백용규(독립운동가: 임정대의원)·백동호(문공부국장)·백진호(안전기획부과장)·백재호(안전기획조정관)·백하규(함평군수)·백봉호 (한양대 교무처장)·백인호(매일경제이사, YTN 사장)·이재환(공인회계사)·백청호(강원대교수)·백이호(나산그룹부회장)·백생호(국가정보원 서기관)·백기열(LG건설 부사장).
(13) 두월리(斗月里)
두월리는 월령·월산·두동·남계·소갈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삼남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두웅동·월산·곡령·영신촌·관서당·지노지가 나오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두동·월령리·월산리·남계리·소갈리·냉촌리·두남리·하백리가 나오는데 1914년에 이 마을들을 합쳐 두월리라 하여 장성군에 편입했다. 현재 1리(두동)·2리(월령·월산)·3리(남계·소갈)로 편성되었다.
ㅇ 두동(斗洞) 웃뜸·서뜸·한둑살이·산밑테·아랫뜸이 있으며 웃뜸이 가장 먼저 성촌되었다고 한다. 호구총수(1789년)에 두응(斗應)동으로 나와 있는데 1700년경 함평이씨가 들어온 후 장흥임씨가 1810년경에, 광산이씨가 1890년경에 들어왔다. 일제때는 70여호(함평이 40·임씨 15·광산이 5·광산김 5·이천서 2·남양홍 2·최씨 2·청안이 1· 홍 1 등)의 대촌으로 삼남면사무소가 있었다. 63호가 6·25를 만나 입산하여 7∼8명이 죽고 웃뜸이 전소되었다. 그후 60여호가 살다가 현재 45호(함이 32·임 5·광이 3·한양조 3·광김 2) 114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둥굴이라고 부르며 말(斗)처럼 둥근형국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인물 : 이분(임란공신)·임수동(고등교장)·이송범(서울시경수사과장)·이시범(경정)·이영석(광주대교수)·이계곤(초등교장)·이계상(광주시의원)·임순진(초등교장)·이동헌(도 건설과장). 유물유적 : 두동사·둔벽정·농악이 유명했다.
ㅇ 월산(月山)·월령(月嶺) 월산과 월령은 원래 한 마을이었는데 일제때 분리하였으나 한 마을처럼 생활하고 있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월산과 곡령(曲嶺)(월산의 한뜸인 궁령-弓嶺)이 나오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월령(月令)리가 나온다. 월산에는 옛날에 마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약 320년전 상산김씨가 하수에서 분가해 왔다 270여년전 경주이씨가 보생에서 궁령으로 1900년경 남평문씨가 들어온후 성씨의 변동이 없다. 월령에는 월산의 상산김씨와 경주이씨가 옮겨와 성촌되었으며 1840년경 양성이씨·광산김씨가 들어온 후 울산김씨·김해김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박씨가 거쳐갔다. 일제때 월산은 20여호 월령은 30여호 였는데 1908. 12. 4 월랑산에서 전해산 의병 60명과 히라노 토벌대가 격전을 벌여 의병 2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월령 김용기 의병은 태뫼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왜군이 마을 장년들에게 물을 먹이는 등 갖은 고문을 하였다. 6·25때는 7명이 사망하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6·25전후부터 호수가 줄었는데 70년대 이농현상으로 경주이씨 13·광산김씨(9호)와 울산김씨(4호)는 전호, 그리고 그 외 성씨들이 도시로 떠나가 현재 월산 10호(상산김 8·경주이 1·남평반 1)·월령 15호(상산김 5·경주이 5·양성이·하동정·평강채·광주노·상주박)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뒤 월광산과 마을형국(반월형)에서 비롯되었다. 인물 : 김용기(한말의병)·이상술(초등교장)·이상호(초등교장)·이상천(제일은행이사)·김만호(광주교육청)·김정관(재경부사무관)·김철호(초등학교장)·김권호(무주우체국장)·김용출(판사)·김창호(경찰대 교수)·김경운(문공부서기관). 유물유적 : 김보원묘(임난의병장).
ㅇ 남계(南溪) 남계·아래미(하백; 下白)·대생이(대산 ; 大山) 3뜸으로 이루어졌다. 구전에 의하면 1510년경 경주이씨가 보생리에서 이거해 와 200여년 살다가 모두 떠났다고 한다. 약 110년전 경주최씨가 들어온 후 전주이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상산김씨·하음봉씨·밀양박씨·함평이씨·수원백씨·김해김씨·진주정씨 등이 들어와 30여호(경주최씨 22 등)가 살다가 6·25를 거치면서 23∼4명이 죽고 4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광산김씨·영성정씨·장흥임씨·청송심씨·천안전씨 등이 입향했으나 현재 27호(경주최 7·전주이 4·함평이 3·하음봉 2·상산김 2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 현감 아들의 서당이 있어 관서당(官書堂)(호구총수에는 관(觀)서당)이라 하다가 마을 양편에 냇이 있어 남계로 개명했다. 인물 : 박영관(독립유공자)·최경환(삼남면장)·최판진(문화부사무관), 이영규(사법연수원).
ㅇ 소갈(小葛) 소갈·영신촌·방아다리·지루지·냉촌·두남 6뜸이 있었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영신촌(靈新村)·지노지(支老之)가 나오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소갈리·두남리·냉촌리가 나오는데 소갈만 남고 모두 폐촌되었다. 영신촌이 먼저 성촌되었으며 냉촌에는 역이 있었고 찬 샘이 있었는데 1982년(당시2호) 없어졌다. 구한말까지 아랫녁에서 서울 갈때는 방아다리(1930년 폐촌)에서 투숙하며 마졸들은 영신촌(1975년 폐촌)에서 잤으며 지루지는 질그릇을 굽던 곳으로 1975년에, 두남리는 신축년 홍수때 각각 폐촌되었다. 300년전 인동장씨와 200년전 김해김씨가 들어와 최근까지 살다가 떠났으며 구한말 전주이씨가 입향하여 광산김씨가 들어오고 일제초 해주최씨, 일제말 하동정씨가 들어와 해방후 12호(장씨 3·해김 3·전주이 3·광김 1·최씨 1·정씨 1)가 살다가 6·25때 1명이 죽었다. 그 후 인동장씨·김해김씨가 떠나고 청송심씨·밀양박씨·수원백씨·함평이씨·경주정씨 등이 들어와 현재 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소(牛)형국이라 소갈이라 불렀는데 소(小)갈로 표기한다. 인물 : 이용환(광주임동동장)·장석종(전신전화국장)·최화집(우도농악의 원조, 1875년경 출생, 특히 부포놀이에 능하였고 5·16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유물유적 : 냉촌역.
(14) 수양리(首陽里)
수양리는 월봉·중수·하수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삼남면 지역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중수산·신수산이 나오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양곡(陽谷)·월봉(月奉)·중수(中首)·진천동(眞川洞)이 나온다. 1914년 중수·진천·도봉·월봉·하수·월송·양곡·하백 일부와 삼계면의 백산·부연 일부지역을 수양리로 병합하여 장성군 삼서면에 편입했다. 현재 1리 월봉, 2리 중수·하수로 편성되었다.
ㅇ 월봉(月峰) 월봉과 양곡 두뜸이 있는데 1800년경 삼계면 부연의 상산김씨가 옮겨오고, 1900년대 초 함평이씨 일제초 광산김씨·낙안오씨·강능유씨, 일제말 제주양씨·신평송씨가 들어와 27호(양곡 20 ·월봉 7)가 살았는데 해방후 전주이씨와 함동저수지에 수몰된 진천동의 광산김씨·문화유씨가 옮겨오고 남양방씨·평산신씨가 들어와 호수가 늘었다. 6·25때 6명이 죽고 현재 21호(상산김씨 4·전주이씨 3·제주양씨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달형국이기 때문이라 한다. 인물 : 김정기(농수산부 서기관).
ㅇ 중수(中首) 500년전 청주한씨가 터를 잡았다는 설이 있으며 1820년경 홍정의 함평이씨가 이거해 오고 비슷한 시기에 상산김씨가 들어와 살다가 최근에 모두 떠났다. 일제말엽 광산김씨가 들어와 해방후 50여호(함이 35·상김 15 등)였는데 6·25때 10여명이 죽었으며 30호 정도가 살다가 1955년경 함동저수지 축조로 일부가 떠나가고 이농현상으로 현재 8호(함이 6·광김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태뫼산이 말의 머리 형국으로 머리매(몰매)로 부르다가 하수와 구분하기 위하여 중수라 한 것 같다. 인물 : 이준범(고려대 총장)·이석범(변호사)·이정범(기업은행장)·이상범(판사·변호사)·이계학(공학박사·전남대교수)·이계욱(고등교장)·이재창(변호사)·이재갑(서기관)·이맹범(육군중령)·이건호(군의회 사무과장)·이강범(삼서농협장).
ㅇ 하수(下首) 오래 전에 청주한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상산김씨가 삼계 발산에서 이거해 와 동족마을을 이루고 17대째 살고 있다. 일제말에 50여호(성산김씨 29·함평이씨 3·경주이씨 2·영월신씨 등)였는데 6·25때 5명이 죽고 3호가 소각되었다. 함동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가장굴·뒷굴·가운데뜸·웃뜸·아랫뜸에 100여호가 살았다고 하며 1955년경 완공되면서 가장굴·뒷굴은 완전 수몰되고 웃뜸·아랫뜸은 터만 남았다. 현재는 가운데뜸의 높은 지역만 남았으며 이농현상이 겹쳐 11호(상김 6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태뫼산이 말형국으로 [몰뫼]가 머리뫼로 변해 수산(首山)이 되었는데 윗마을(중수)과 구분하여 하수라 했으며 호구 총수에는 신수산으로 나온다. 인물 : 김형진(임난시의병장)·김정기(서기관)·김윤원(육군대령)·김장생(변호사)·김상엽(보건대교수) 유물유적 : 수산사(조헌·김형진 배향).
<표8-5>마을현황 2001. 5. 31 현재
법정리 |
행정리 |
마을명 |
세대수 |
인구수 |
비 고 |
13개리 |
33개리 |
63개 부락 |
1,285 |
3,030 |
|
대곡 |
1리 |
인지,송곡 |
50 |
106 |
|
2리 |
학산,월암 |
20 |
51 |
|
3리 |
원대곡(한실) |
46 |
110 |
|
4리 |
구적 (홍동) |
76 |
217 |
|
삼계 |
1리 |
명주,장동,금광,삼봉 |
52 |
119 |
|
2리 |
계동,월계,어랑,초정 |
46 |
104 |
|
유평 |
1리 |
부구,옥동,저전 |
48 |
101 |
|
2리 |
박주,관음,유정 |
39 |
84 |
|
대도 |
1리 |
석동,수침 |
29 |
65 |
|
2리 |
대도동,중산 |
20 |
58 |
|
소룡 |
1리 |
용동,덕촌,묘동 |
45 |
89 |
|
2리 |
소도,야촌 |
40 |
86 |
|
3리 |
안정 |
20 |
47 |
|
수해 |
1리 |
화해 |
41 |
98 |
|
2리 |
신죽,월곡,양현 |
42 |
90 |
|
3리 |
하죽 |
32 |
64 |
|
우치 |
1리 |
하우 |
31 |
80 |
|
2리 |
중우,상우 |
39 |
90 |
|
금산 |
1리 |
죽산 |
54 |
128 |
|
2리 |
화산,발향 |
52 |
125 |
|
석마 |
1리 |
마령 |
33 |
83 |
|
2리 |
전도,석령 |
45 |
113 |
|
3리 |
녹서,옥산 |
43 |
122 |
|
보생 |
1리 |
이문,남산 |
37 |
84 |
|
2리 |
보강 |
46 |
103 |
|
3리 |
생동 |
39 |
78 |
|
홍정 |
1리 |
서재,외동,가산 |
50 |
118 |
|
2리 |
원당,홍정 |
28 |
86 |
|
두월 |
1리 |
두동 |
44 |
92 |
|
2리 |
월령,월산 |
23 |
60 |
|
3리 |
남계,소갈 |
34 |
80 |
|
수양 |
1리 |
월봉 |
21 |
60 |
|
2리 |
중수,하수 |
18 |
39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