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 직을 맡아 국회의원(16대·대구 동갑) 이후 다시 지역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영화배우 강신성일(71)이 영천에서 한옥을 지으며 제3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영천시 괴연동 산기슭에 새 집을 짓고 있는 그는 강원도 진부에서 가져온 품질 좋은 금강송으로우리나라 최고의 한옥을 짓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강신성일은 "대구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 직을 맡았으니 서울에서 영천 집에 내려올 일이 많을 것 같다"며 "포도맛 좋은 영천에서 내 이름을 딴 '성일가(家)포도주'도 만들고 농촌에서 많이 쓰는 비닐을 재활용하는 운동도 하면서 나름대로 새마을운동을 하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영천에 집 짓는다니깐 엄 여사가 토라졌어…글쎄 요즘엔 말도 안해 흐흐흐"
영천시 괴연동 산 기슭에 영화배우 강신성일의 한옥이 한창 공사 중이다. 풍광이 좋아 보였다.
뒤쪽 소나무 숲이 한 쪽 옆으로까지 뻗어있고, 앞 쪽으로는 시야가 트여 있다. 조금만 올라가면 작은 호수가 있고, 다른 한 쪽으로는 온통 포도밭이다. 조용한 산골이라 포클레인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들렸다. 열댓명은 되어보이는 인부들도 바빠 보였다.
흙이 많이 묻은 등산화에 청바지 차림의 강신성일(71)은 목장갑을 낀 손을 흔들며 맞아주었다. " 자, 집 구경부터 시켜 드려야죠. (그는 잘 깎여진 목재 쪽부터 향했다) 이게 모두 금강송입니다. 정말 좋은 나무예요. 우리집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한옥이 될 겁니다." 옆에 있던 그의 비서가 광화문 복원에 쓰이는 것과 같은 종류의 금강송이라고 했다.
- 이렇게 좋은 금강송을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강원도 진부에 백림제재소라고 있어요. 그 사장이 나와 인연이 깊어요. 내가 한옥을 짓는다니까 자기가 갖고 있던 최고의 금강송을 다 내게 줬어요. 그걸 삼척 도계에 있는 한국전통건축직업학교에서 두 달 동안 다듬어 가져온거죠. 그 학교 교장이 이종은인데, 이필동 집행위원장이 나한테 소개해 줬어요. 그 사람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천거해서 교장이 된 사람이고. 나무 볼 줄 아는 사람은 다 놀라요. 이렇게 좋은 나무가 잘 없으니까. 원래는 집을 한 198㎡(60평)로 지으려고 했는데 나무가 정말 크고 좋아 330㎡(100평)로 늘렸어요."
- 원래 한옥에 관심이 있었나요.
"서울대 두번 떨어지고 들어간 회사가 신필름(신상옥 감독의 영화회사)인데 월급을 잘 주더라고. 내가 야심이 있었어요. 한국에서 최고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를 찾았어요. 가회동 잘 지은 한옥에서 몇 년간 하숙을 했죠. 또 제가 태어난 대구 동네가 인교동 아니오. 당시 대구 인교동은 서울 가회동같은 한옥 마을이죠. 한옥에 대한 향수가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아. 원래는 초가집이나 하나 짓고 살아야겠다 생각했는데 일이 커졌어요."
- 어떻게 이곳에 짓게 됐습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여기 포도밭을 사서 종종 포도 먹으러 내려왔지요. 이 동네 포도맛이 참 좋아요. 저기 지은 정자가 당시 빈땅이었는데, 내가 '원두막 하나 지읍시다' 해서 지은 게 저 정자요. 한번은 정자에서 낮잠 자고 일어나 보니 지금 이 땅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온통 잡목이었는데 지적도를 떼보니 가운데 330㎡(100평)가 대지더라고. 1천980㎡(600평)를 샀어요."
- 이 땅과의 인연은 우연하게 시작된 셈이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땅주인은 따로 있다고. 공사는 작년 10월 초부터 시작했어. 푹 꺼진 땅을 돋우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 한옥 부지를 구석구석 가르키며 손님방, 대청마루, 툇마루, 내 방, 온돌 자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온돌을 들여놓을 거예요. 여긴 누마루에서 바라보는 연못이고, 저기는 큰 연못을 파고 있어요."
이야기를 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 건으로 옮겼다. 그는 지난달 29일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 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직을 맡았는데, 대단한 뮤지컬 팬이시라고요.
"뮤지컬보다는 오페라에 먼저 빠졌죠. 1973년 5월 베를린 영화제에서 처음 오페라를 봤어요. 그리고 나서 몇 년 뒤 미국에서 처음 본 뮤지컬이 '코러스라인'입니다. '포티세컨 스트리트'(42번가), '캐츠'를 미국에서 봤죠. 91년 영국에서 2개월간 영화촬영차 머물며 '미스사이공' '레미제라블'을 봤어요. 감옥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게 '시카고'입니다."
그는 인터뷰 전날 대구에서 '나인'을 봤고, 그 전에 서울에서 '노트르담 드 파리'를 봤다고 했다.
- 뮤지컬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재미있잖아요. 오페라는 좀 무겁죠. 예술의 밀도를 이야기한다면 오페라가 훨씬 밀도가 높고 차원도 있지만 재미는 뮤지컬을 당할 수 없어요. 영화도 못 당해요. 뮤지컬이 어필하는 이유 중 오디오의 발전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지요. 와이어리스 마이크가 발달해서 연기자가 목도 안 다치잖아요. 오페라 가수는 목을 보호해야 하니 한 달 공연 그런 걸 못하죠."
- 뮤지컬을 좋아해서 대구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직을 맡으셨나요? 페스티벌을 발전시킬 복안으로 어떤 걸 갖고 계십니까.
"대구는 전국에서 제일 못살잖아요. 제주 빼고 제일 못살잖아(그는 10여년째 꼴찌인 대구의 GRDP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뮤지컬 관객이 서울 다음으로 많다는 점에서 큰 잠재력이 있다고 봐요. 대구시민들을 하루 아침에 잘 살게 하기는 어렵지만 문화적 정신이 어느 정도 고양되면 자연히 잘 사는 길로 가게 될 겁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사업비를 어떻게해서든 늘려야 한다고 봅니다. 디테일한 부분은 이필동, 배성혁(성우기획 대표) 그 친구들이 잘해요. 내가 할 일은 위(중앙정부)에 가서 사업비도 따고 지원을 많이 받도록 하는 거죠. 친분으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없는 거보다는 나아요."
- 현역을 떠난 지 오래인데, 아직도 사람들이 강신성일을 좋아한다면,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이 대목에서 예상 답을 갖고 있었다. 검은 돈을 받은 혐의로 당당히 감옥에 갔고, 사면을 받고는 '공짜밥 잘먹었다'고 인사한 그이니 만큼 '사나이다워서'라는 정도를 예상한 것이었다. 기자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몸관리 잘해서 그렇지. 감옥속에 있을 때도 문신한 아이들이 목욕탕에서 '어르신 존경합니다'라고 했지요. 나는 내 몸을 아주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몸이 건강하니까 516편 주연 배우를 한 거요. 출연이 아니라 주연입니다. 내가 운동을 참 열심히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는, 먹고 싶은 음식 마음껏 먹고 둘째로는, 좋은 옷을 입으려고 운동합니다. 내 사이즈가 딱 이탈리아 사람들 미디엄 사이즈요. 미디엄 사이즈 옷이 참 예쁘거든. 운동을 하면 딱 그 사이즈가 나와."
그는 요즘도 운동을 쉬지 않는다. 대구에서는 아침에 집에서 나와 신천교에서 상동교까지 걷거나 뛰며 섀도 복싱(그림자를 보며 연습하는 복싱)을 한다. 화제가 다시 한옥으로 옮겨갔다.
"집 입구에 '성일가(家)'라 쓸 건데, 앞으로 포도주도 만들까 싶어요. 이 산을 임차해서 굴을 팔거야. 성일가 포도주를 만들어서, 여기 오는 분들에게 팔까 싶어요. 여기 포도 정말 맛있어요. 경북대가 여기하고 합작해서 만드는 게 있는데 아직은 수준이 떨어져요. 앞으로 외국 전문가한테 자문도 받고 해서 한번 만들어볼까 해. 농산물을 2차 산업, 3차 산업으로 발달시키는 게 고부가가치 아니오. 맛있는 포도를 맛있는 포도주로 만들면 더 좋잖아."
- 엄앵란씨가 영천에 한옥 짓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던데요.
"그거 땜에 틀어져서 요즘 말도 안해요. 엄 여사는 팔당에 집을 짓자고 그랬지. 서울과 가까우니까. 근데 난 여기는 내 고향이기도 하고 땅도 좋아서 짓는다니까 아주 틀어졌어."
- 감옥에서 나올 때 '앞으로 조용히 가족을 위해 살겠다'고 했는데, 벌써 틀어져서 어떡합니까.
"아 글쎄 말이야. 엄 여사는 왜 쓸데없이 거기(영천 한옥)다 돈을 쓰냐고 해. 그래서 내가 자기 주머니 안 터니까 걱정말라고 그랬어. 우리는 완전 딴 주머니야. 서울에 가서 우리 마누라 보기 싫으면 마포에 있는 내 사무실로 가요. 여의도 밤섬 앞에 있어 아주 경치가 좋아요.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어야 서로 마음이 편해. 서로 하나도 안맞아하며 평생 사는 게 우리 부부야."
그는 기분좋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여기 한옥 지어놓으면, 내가 자신을 해요. 엄 여사도 오고 싶을거야. 대한민국에서 최고 한옥을 짓거든."
그는 앞으로 농촌의 비닐을 모아 흙을 닦아내 재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할 거라고도 했다. 그게 그의 '새마을 운동'이다. "5월8일이 내 생일인데 그 때 (한옥) 입주식을 할거야. 친한 사람들 불러서." 칠순이 넘은 그에게 할 일이 천지였다. 그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내가 태어난 대구 인교동이 예전엔 한옥마을이었어…그래서 한옥에 대한 향수가 짙어.
감옥 있을때도 몸관리 철저히 했지…문신한 아이들이 '어르신 존경합니다'그러더군.
앞으로 집앞 山 임차해서 굴을 팔거야…그리고 '성일家 포도주'만들어 팔 계획도 있어.
강신성일은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나 수창초등, 경북중·고등학교를 나왔다. 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63년부터 73년까지 10년 연속 청룡영화상 인기상을 받을 정도로 정상의 위치를 지킨 배우였다. 무려 516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은막의 스타는 90년대 들어 정치판에 뛰어들어 두 번의 낙선 끝에 국회의원(16대·대구 동갑)이 되었다. 의원 생활 중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옥외광고물업자로부터 1억8천7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2005년 수감돼 약 2년간 복역하다 지난해 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현재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지난 2월29일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2대 이사장직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