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동(新吉洞)
-신길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도 신길동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신각리(新角里)ㆍ적길리(赤吉里)ㆍ선곡리(船谷里)ㆍ성내리(城內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이들을 통합해 신길리(新吉里)로 개칭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으며, 4월 1일 와리면이 군자면(君子面)으로 통합ㆍ개칭되어 시흥군 군자면 신길리로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신길동(新吉洞)이 되었다.
신길동은 신각리(新角里)의 ‘신(新)’자와 적길리(赤吉里)의 ‘길(吉)’자를 취한 것으로, 신도시개발로 폐동 후에는 공장들이 들어섰고, 조선시대 임금께 밴댕이[蘇魚]를 진상하던 ‘사옹원분원(司饔院分院)’터와, 조선 초기에 설치된 ‘무응고리 봉화 터’ 등도 보존되지 못하고 유실되었다.
• 능길
조선 제5대 임금 문종의 비이며 6대 임금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이라 능길이라고 하였다. 단종을 낳고 하루만에 죽은 현덕왕후의 묘 소릉은 세조가 임금이 된 후 파헤쳐져 천장되었다가 중종 임금 때 동구릉에 있는 문종의 능 현릉 옆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단종 임금은 즉위 2년인 1454년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3일동안 어머니 묘소인 소릉에 제사지내기 위해 안산에 왔었으며 9월 30일에는 안산의 보천리에서 하룻밤 묵었다. 따라서 능길은 단종임금이 어머니 묘를 참배하러 왔던 길이기도 하다 또한 이 마을 서남쪽 봉화재산 정상에 봉화대烽火臺(무응고리 봉수라 칭함)가 있어 적길리(赤吉里)라 하였는데, 한말까지 사용되다가 1914년 신각리와 합쳐져 신길리가 되었다.
만해 북쪽에 있는 능길은 곡부공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래 경주김씨, 순흥안씨, 김해김씨, 진주강씨 등이 세거해 경주김씨가 대성을 이뤘었다. 마을 서쪽지역은 바라지, 북쪽지역은 골안, 마을 중앙은 큰말이라 부른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3일이면 골안 뒷산 도당터에서 도당제를 지냈었다.
• 당쟁이[堂井]
본래 성안에 속했던 마을로, 성안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마을은 일제 초기에 시흥군 산뒤[山北]에 살던 신현보(申鉉輔)씨가 분가해 처음으로 살 때 집 하나에 우물(옹달샘) 하나가 있었다 하여 ‘당정[堂井]’이라 했다가 당쟁이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재[李縡(1680~1746)[가 쓴 <신점신도비>에 보면 신점(申點) 선생을 당정리(當正里)에 묻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당정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폐동 때(1985)는 2집이 있었다.
• 만해(滿海, 萬海)
본래 능길에 속했던 지역으로 능길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광복 후 최승구(崔承九)가 처음으로 살았으며, 한국전쟁 직후 황해도 옹진·연백 등지의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마을이름의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이곳의 지대가 얕아 물이 가득 찼다 하여 ‘만해(滿海)’라 칭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마을 남쪽에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할 물고기를 저장했던 사옹원 분원이 있어 만인(萬人)이 들끓었는데 그 후 서해안 간척지공사로 바닷물이 끊기자 농경지로 변모되어 ‘만인해들’이라 했으며,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만해(萬海)’로 불린다는 설이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서 마을 남쪽 끝에 있는 봉황재산 정상에서 당제를 지냈었다.
• 문화촌(文化村)
이 마을은 화성군 우정면 출신 김모가 큰뱅골에 있다가 광복 직후부터 살기 시작했고, 이어 1971년 서울 개봉동 하천변에 살던 주민들이 수해로 인해 4집이 정착하면서 호수가 늘어나 11집이 되었다. 신도시개발 전 군자면 관내에서 제일 빈촌이었던 이곳은, 1970년대 초에 이르러 마을의 분위기를 일신시키자는 주민들 의견에 따라 ‘문화촌(文化村)’으로 명명하였고 현재는 개발되어 택지가 되었다. 현재 단원경찰서 신길파출소가 들어섰다.
• 배나루
터진목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일제강점기 때 순흥안씨가 처음 거주하였다.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마을 서북쪽 산모퉁이에 배가 정박했다 하여 ‘배나루[船津]’라 불리고 있다.
• 별당(別堂)
안산역(安山驛)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풍전과 함께 해주 정씨(海州鄭氏)가 처음으로 세거했다. 별당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풍전에 살던 주민(주로 해주 정씨)들이 별도로 집을 짓고 살아 ‘별당(別堂)’이라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중엽 어느 해인가 여러 해 동안 가뭄이 극심하자 임금이 안산 당상배미(현 선부동 산대장터 부근)에 이르러 갈증이 나자 물을 마시고 이곳에 당도해 보니 다른 지역의 농작물들은 가뭄 때문에 시들시들했으나 이곳의 농작물들은 한결같이 싱싱하였다. 이를 본 임금은 하도 이상하여 “별땅이구나.”하였다. 그때부터 이곳을 ‘별땅’이라 했는데,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별당(別堂)’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해주 정씨 7가구가 살아오다가 1950년대 초부터 타성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안산신도시 건설로 1979년 폐동되고 일성신약·정우벤쳐타운·영림화학·조선무약 등의 공장이 들어섰다
• 살막재
만해 서남쪽으로 주식회사 장천(長川) 반월공단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때 시흥군에서 신길리의 공동묘지를 조성했다가 광복 직후 서울 출신 최승구(崔承九)가 처음으로 입주했고, 이어 그의 처남인 송(宋)모가 최씨 집 옆에 살다가 1970년대 방죽 건설로 폐동되었다.
‘살막재’란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할 물고기를 어살漁箭(살막재에서 서쪽으로 약 3~4km 지점)에서 잡아 이곳 빙고(氷庫)에 저장했던 곳이란 뜻으로, 마을에서는 보통 ‘핑고구뎅이’라 부르는데, 본래의 이름은 사옹원분원(司饔院分院)의 빙고이다.
• 샛뿔[新角]
능길과 시흥시 거모동 도일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풍수로 보아 소의 뿔처럼 생겼다 하여 ‘샛뿔[新角]’이라 불렀다. 샛뿔의 표기는 조선시대에는 신각리(新角里)라 칭했는데, 일제 강점기에 정길섭[丁吉燮(정봉진 전 안산문화원장 조부)]씨가 이곳에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면서 새 학문을 익혀 깨달아야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로 깨달을 ‘각(覺)’자를 써서 ‘신각(新覺)’으로 바꿨다고 한다.
샛뿔은 조선시대에는 염전(鹽田)으로 유명했으며, 신도시개발 전 군자면 관내에서는 자연취락 중 호수가 가장 많았다. 회덕송씨가 처음 거주한 이래로, 김해김씨와 나주정씨가 대성을 이루며 세거했다고 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 뒷산 정상에서 해마다 음력 7월 길일을 택해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 성안[城內]
목내산성(木內山城)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 ‘성안[城內]’이라 칭했다. 안동권씨가 처음 자리를 잡았으며, 폐동 때(1979년)는 20여 호가 있었다. 본래 풍전에 속했던 마을로, 현재 한국전력 변전소 등이 들어서 있다.
• 신촌(新村)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에 큰뱅골에 살던 주민들이 분가해 새로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이라 불렀으며, 이어 한국전쟁 직후 난민들이 거주해 4집이 있었다가 1970년대 초에 원곡역과 시흥시 거모동 도일 사이의 도로확장에 따라 폐동되었다. 신촌은 원곡역과 문화촌 사이에 있었다.
• 원곡역(元谷驛)
옛 원곡역(신길동 910번지 일대) 주변에 자리잡은 마을로, 1937년 경동철도주식회사에 의해 수인선(水仁線)이 부설될 때 원곡역사(元谷驛舍)를 원곡동의 현 안산역 자리에 건립하려다가 그곳이 고개 밑이라 경사졌으므로 현 신길동 지역에 건립했다고 한다. 이곳은 본래 오음방죽[五音防築]이 있어 지대가 얕으므로 작은뱅골 뒷산의 흙을 손수레에 실어다 매립해 역사를 건립했고, 마을 또한 원곡역이 영업을 개시하면서 함께 번성하기 시작했었다.
• 작은뱅골
큰뱅골과 원곡역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큰뱅골에 살던 전의이씨 후손들이 분가하면서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다. 작은뱅골[船谷]에는 안산시 향토유적 제21호 이경희(李慶禧) 선생 묘역이 있다.
• 장자골[長子谷]
능길 서남쪽에 있던 마을이다. 예전에 부자가 살았다 하여 장자골[長子谷]이라 칭하고 있다. 마을 앞의 큰 우물은 뱃사람들이 마셨던 우물이라고 한다.
• 잿마당
능길과 샛뿔 사이 고갯마루에 있던 마을이다. 이곳은 예전에 능길·샛뿔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이면 달맞이를 하던 곳으로, ‘재’란 고개를 말하며, ‘마당’은 주민들이 달맞이를 하던 곳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ㆍ큰뱅골
작은뱅골 북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에 바닷물이 이곳까지 이르러 배가 닿았다 하여 '배안골[船谷]'이라 칭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부터 ‘뱅골’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전의이씨족보》에는 이곡(梨谷)우로 기록되어 있다. 배船자 대신에 같은 음을 가진 배梨자를 썼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에 양주목사를 역임한 이경희(李慶禧)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 전의이씨가 대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해주최씨와 전주이씨도 세거하였다. 큰뱅골은 북쪽지역은 웃말, 동남쪽지역은 건넌말, 서쪽지역은 아랫말이라 각각 불렸다. 마을에서는 큰뱅골과 작은뱅골 사이에 있는 도당재에서 매년 산신제를 지내왔는데, 어느 해인가 산신제를 지낸 달에 마을에서 소를 잃자 그 다음해부터 산신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신길택지개발사업으로 현재 LH아파트와 신길초등학교가 들어섰다.
• 터진목
능길 서쪽에 있던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근호씨가 능길과 터진목 사이를 막았는데, 이곳이 사질토여서 큰비가 내리면 둑이 자주 터지므로 ‘터진목’이라 칭했다 한다. 광복 전에는 솥점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낚시터에 강태공들이 붐벼 임시 신길간이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도로로 변모했다.
• 풍전(楓田, 豊田)
해주정씨(海州鄭氏)가 배판했던 마을이다. 해주정씨 후손 중에 정구(鄭構)란 사람이 용인에서 살다가 종사랑(從仕郞)을 역임하고 이곳에 세거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본래의 마을 이름은 단풍나무가 많아 풍전(楓田)이라 불렀는데, 일제 때 일인들이 풍년 ‘풍(豊)’자로 잘못 기록하면서부터 ‘풍전(豊田)’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주정씨족보》에도 이곳을 풍전(楓田)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주정씨 후손 중에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정범석(鄭範錫)씨의 아호도 풍재(楓齋)였던 것으로 보아 풍전(楓田)이 본래의 지명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 때는 시흥군의 갱생(更生) 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던 이 풍전은 동쪽지역을 건넌말, 서쪽지역을 큰말이라 불렀다. 신도시건설로 1979년 폐동되어 현재는 안산유통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 한티
터진목 서남쪽에 있던 마을로, 서울 출신 박○○(본관 밀양)씨가 능길에 살다가 한국전쟁 직후 이곳에 토지가 있어 생활 터전을 위해 집을 짓고 살았다. 신도시건설 때 폐동된 후 집터는 밭으로 변하였다. 취락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이곳을 한티골짜기라 불렀다.
• 횟밭머리
샛뿔과 시흥시 거모동 도일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일제 초에 샛뿔 등 인근의 주민들(회덕송씨, 나주정씨, 김해김씨 등)이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이곳은 본래 밭이었으며 백회(白灰)가 많아 횟밭[灰田]이라 불렀는데, 밭 위에 민가가 들어서자 ‘횟밭머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샛뿔 뒷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현재는 삼일아파트가 들어서고 일부분만 남았다.
• 도당재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할 떼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다. 안산시향토유적 제21호 이경희 선생 묘역이 있는 곳이다.
• 외딴말
대쟁이에서 내려오는 냇가의 뚝에 있던 마을로 3집이 있었다. 현재는 신길아파트부지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