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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396 겨울. 다물 22 매아리 17
삭풍과 한설이 남녘의 산과 들을 차갑고 희게 물들이고 있었다. 완산성주의 관저에 잠시 기거하던 다물은, 이제 이곳을 떠나 삼삼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아비 될 자의 도리라는 판단 하에, 홍란의 공부를 마무리하고 신변을 정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에 그는 마지막으로 매아리와 수련의 얼굴을 보고자 사해제일관을 찾는다. 거기서 다물은 그녀들에게 붙잡혀 온종일 함께 지내야 했다.
두 여인과 헤어진 후 다물이 아직 어둡기 전, 사해제일관 바깥의 야산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산책하고 있을 때다.
“공자님!”
속삭이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련이었다.
“아가씨. 이 밤에 웬일로······.”
“공자님을 찾아왔냐구요?”
그녀가 다물의 말을 가로챈 다음, 근처 바위에 앉으며 권한다.
“공자님, 잠깐 여기에 앉으시겠어요?”
다물이 다가가 앉자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도 나이가 들대로 들었는데 걱정이에요.”
다물은 할 말이 없었다.
“혼처를 봐 두었다며 집에서 재촉하는데, 아버님 뜻을 거역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
“제게 이미 낭군이 있다고 하자, 누구냐고 묻더군요.”
“아, 그래요? 있으면 잘 됐군요.”
“하지만 그 낭군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아요.”
“옛?”
“그 낭군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글쎄요. 제가 알아서 뭐하게요?”
그녀가 다물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얘기보단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나 하죠.”
다물이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 낭군이 바로, 무정한 당신이에요.”
그녀의 말투는 무덤덤했다.
그 때다.
“흥! 잘도 노는구먼!”
어디선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일어선다.
“남의 것 도적질하다 들킨 사람들처럼 왜 그렇게 쩔쩔매요?”
매아리가 두 사람에게 쏘아붙였다.
‘이거야말로 큰일이군. 나는 이미 혼약한 몸인데, 두 여인이 이렇게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지금 아예 혼약한 사실을 밝힐까?’
다물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랬다가 만에 하나 매아리가 어떤 불상사라도 일으킨다면?
이튿날 다물은 완산을 몰래 떠나기로 작심하고 완산관아로 되돌아왔다.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아침에 매아리와 수련은 완산관아까지 다물을 따라왔다.
다물과 세 여인은 따스한 화롯불 가에서 담소를 나누며 밤과 고구마를 구워먹고 겨울날의 온기를 즐겼다. 그러나 다물은, 어떻게 작별을 고해야 할지 몰라 겉으로 웃으면서도 속으로 근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지내고 내일 은밀히 떠나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뿔싸!
인생사가 예상대로 착착 진행된다면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실화든 소설이든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날 난데없는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두 노인과 두 처자가 다물을 찾아왔다고 객사의 사환이 연락하는 것이었다.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설 때 다물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여길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하늘 끝까지라도 가서 자네를 찾아야만 우리 딸아이가 산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다름 아닌, 약혼녀의 아버지, 삼삼촌의 촌장이었다.
다른 두 부녀는 칠칠동 노인과 그의 딸이다. 그의 딸은 예전에 다물이 그 마을들에서 머무는 동안, 늘 유달리 은근한 눈빛으로 다물을 바라보던, 매우 청순하고 과묵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삼삼촌 촌장의 딸과 혼약한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속셈으로 찾아왔단 말인가? 친구 따라 놀러온 건가?
아무튼 염려하던 일은 결국 벌어지고야 말았다. 약혼한 사실을 숨기고 떠나려했는데, 이제 만사는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 국면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 보이는 건 암흑뿐이요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하지만 다물은 격식을 갖추어 네 사람에게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서방님도 잘······?”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을 쏘아보는 여인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다. 그녀가 보니, 유달리 매혹적이고 선연嬋娟한, 생전 처음 보는 경국지색의 한 미인이 자신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미인의 시선에 삼삼촌의 여인은 가슴이 떨리고 혼백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삼삼촌 여인의 “서방님”이라는 호칭에 다물은 뒤통수가 후끈거림을 느꼈다.
“덕분에 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삼삼촌에 올라가 계시면, 제가 이곳을 정리한 후 뒤따라 올라가겠습니다.”
다물은, 그게 예의가 아니었지만 가급적 속히 그들을 올려 보내고 싶었다.
삼삼촌과 칠칠동에서 온 두 노인은, 다물이 여기서도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고 혀를 끌끌 찼다.
“허허, 여복女福이 많은 사람은 어딜 가나 이 모양이구먼.”
다물은 그 말을 듣고 괴로운 웃음을 짓는다. 이건 결코 여복이 아니었다. 이걸 여복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다.
삼삼촌의 여인은 매아리의 자색에 정신이 황홀할 지경이었다. 이런 미녀가 곁에 있으니 다물 공자가 자신을 잊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물의 약혼녀, 삼삼촌의 여인은 당황하고 절망스런 나머지 마침내 여러 사람 앞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다물은 기어이 터져버리고야 만, 여인들과 얽힌 문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나님, 하나님,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매아리는 매아리대로 화가 잔뜩 났다.
‘뭐라고? 서방님? 이것들이 여기 와서 장난하나?’
다물이 이곳저곳 쏘다니며 여자들만 사귀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돌 것 같았다. 매아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련이 감정을 억제하며 다물에게 물었다.
“공자님, 어떻게 된 거예요? 서방님이라니요?”
“네, 다물 선생님은 저와 혼약하셨습니다. 뭐가 잘못 됐나요?”
삼삼촌의 처녀가 울다 말고, 제정신을 차린 듯 야무지게 대답을 가로챘다.
매아리와 수련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넋을 잃었다고 해야 옳다. 다물은 난처해 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다는 속담이, 버선 짝 발에 꼭 맞듯, 이런 경우에 딱 들어맞을 터였다.
“언제 혼약하셨어요?”
수련이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금년 유월 초이레에요.”
여인이 확답한다.
“난 금년 정월에 이 사람하고 혼약했어요. 그건 무효에요!”
매아리가 나서며 거침없이 주장했다.
“네? 선생님, 그게 정말이에요?”
삼삼촌의 여인이 물었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나요?”
매아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삼삼촌의 여인이 다물과 매아리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왜 제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혼약한 여인이 있다고.”
“아니, 그게, 사실은······.”
다물이 떠듬거렸다.
“뭐가 아니, 그게, 사실이에요?”
매아리가 역정을 낸 후 여인에게 말했다.
“알았으면 어서 돌아가세요!”
훌쩍거리던 여인이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상관없어요. 전 선생님의 첩이 될 거예요.”
지켜보던 두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 때 홍란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물 선생님은, 저와 삼년 기한으로 학문을 가르쳐주시기로 언약했으니, 그 동안에는 꼼짝 않고 여기 계셔야 합니다. 삼년 치 월사금도 미리 지불했습니다. 그러니, 혼인 얘기는 삼년 후에 꺼내도록 해요.”
그건 거짓말이었다. 홍란은 다물의 난처한 상황을 보고, 궁색하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물이 위기를 모면하도록 도와주고 싶었을까?
다물이 삼삼촌의 여인에게 사과했다.
“아가씨,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아가씨에게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사실, 다물이 잘못한 건 아니었다. 매아리에게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을 뿐 혼인을 약속한 적이 없었다. 수련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다물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기 싫었다.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와 혼약한 이상, 저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겁니다.”
다물은 이어서 홍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홍란 아가씨, 저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어떻게요?”
“······?”
“몸으로 갚아주세요. 몸이 아니면 안돼요.”
“예, 제가 아가씨에게 종노릇해서라도 갚겠습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다물과 혼인을 하고 싶다는 암시인지 뭔지, 도대체 무슨 심보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물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삼삼촌의 여인에게 부탁했다.
“아가씨, 여기서 며칠 쉬다가 귀향해 기다려주세요. 나도 원래는 곧 삼삼촌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아무래도 할 일을 먼저 끝내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삼년은 지나야 정식으로 혼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물은 혼인을 하기 전, 이미 시작해 놓은 책의 집필을 넉넉잡아 삼년에 완성할 계획이었다. 책의 완성은 자신의 천명과 깊은 관련이 있었으므로, 그는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혼인보다 천명의 이행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해, 삼삼촌으로 가려던 결심을 바꾸어 이곳에 좀 더 머물기로 했다. 혼사는 그 이후에 치르더라도 늦지 않을 터였다.
매아리는 매아리대로 뭔가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다.
‘어디 당신 뜻대로 되나 보지?’
다물은 삼삼촌과 칠칠동의 손님들을 며칠 동안 정성스럽게 접대했다. 속으로는 여인들 간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모두가 평온했다.
북녘의 손님들과 다물, 매아리, 수련, 홍란은 완산 성중을 싸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야외의 설경을 구경하기도 했다.
서기전 396 겨울 - 392 봄. 다물 22-26, 매아리 17-21세
그로부터 몇 년 지나 다물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게 바로, 세 개의 두루마리로 된 <행심록幸心錄>이다. “혜심”慧心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제 일 권에는 마음을 지혜롭고 평화롭게 하며 하늘의 진리 깨우치는 법을 기록했다. 아울러 일 권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책, <천명신서天命神書>의 핵심 내용을 다 수록했다.
<천명신서>는 선대의 명저다. 구물 임금은 자신의 애첩 주랑朱朗에게 이 책을 한 부 하사했었는데, 별실의 주랑이 그 두루마리를 제궁의 매아리梅雅裏(매화현설)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은, “청동단검의맹서”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다물이 가지고 있던 <천명신서> 사본은 어렸을 적부터 그의 소유물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 책이 자신에게 주어졌는지는 수수께끼였다.
<행심록>의 제 이 권 “연심”鍊心에는 스승에게 배우고 또 그 동안 새롭게 터득한 무학武學을 수록했다. 삼 권 “전심”傳心에서는 천명을 어떻게 이행해 인간과 나라를 이롭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상술했다.
이 책은 그가 총력을 기울여 스승 일승월과 자신의 진수를 담아낸 것이다. 옛말에 영웅은 소년 가운데 나온다고 했는데, 이 책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하늘만이 아는 일이었다.
나중에 과연, 옛 고리국高麗國(단군조선 시대부터 요녕성 요하유역에 존재한 단군조선의 일원一員 소국가)의 후예 중, 황가 종실의 해모수라는 걸출한 인재가 나타나 이 책을 입수하고 이를 통치기반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그 나라는 역사에 북부여 혹은 고구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일백 육십여 년이 지난 이후의 일이다.
다물은, 이 책을 읽는 누군가가 대오각성하고, 이 책이 통치에 반영된다면, 그것이 자신의 천명 가운데 일부를 이행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393 다물 25 매아리 20
완산의 봄은 매아리의 생일과 함께 찾아온다. 이레 전부터 사해제일관은 환국의 여왕 천국화 매아리의 성대한 생일 준비로 떠들썩했다. 떡도 하고 전도 부치고 과자도 만들고, 돼지도 잡고, 소도 잡고, 각양각색의 온갖 음식도 요리하고, 그야말로 어느 때보다 성대한 잔치준비에 들어갔다.
여러 지방의 영웅들과 완산관아의 관리들, 산채의 중요인물들에게는 사전에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다물에게도 초청장이 도착했다.
삼월 삼일. 매아리의 생일이자 화창한 봄날이다. 이른 아침에 다물은 홍란과 함께 성을 빠져나와 사해제일관으로 향했다. 사해제일관은 각지에서 온 축하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삼월 삼일(혹은 보름날)은 국조성군의 기일忌日이므로 으레 천제天祭가 거행되지만, 이 날은 평소의 천제 때와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오늘 무슨 거창한 혼인잔치를 하는 것 같구먼. 뭐가 이리 떠들썩하지?’
다물은 의아해하며 사환의 안내를 받아, 사해제일관의 동쪽 뜰로 갔다. 이미 많은 손님들이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매아리와 수련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홍란은 다물과 헤어져 여성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로 간다. 다물의 좌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다물은 지정석에 앉아 호흡을 고르며 하나님의 영기를 마시는 한편, 주변을 둘러보았다.
축하의 분위기를 띄우는 듯, 하늘에는 푸른 색, 붉은 빛, 연노랑 차양이 늘어져 있었고, 전면에 마련된 높은 무대 위에는 악사들과 무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축하와 기복祈福의 글이 담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깃발들도 여기저기에 나부끼고 있었다.
다물이 앉아있을 때 산채의 식구들이 나타났다. 남해어부 월앙일을 필두로 서해어부 장공, 완산대렵 우원, 한산의 이확, 여홍 등이 줄줄이 장내로 들어왔다. 다물이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올린다.
그들이 착석하는 위치가 다물의 눈에 좀 거슬렸다. 그들은 모두 다물을 에둘러 전후좌우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다물이 깊이 호흡할 때, 약간의 불안감이 인다. 그들의 좌석배치는 의도적인 것 같았다. 경각심이 일었다. 완산관아의 욕살과 광중행, 상유교 등도 그들 곁에 자리를 잡는다.
다물이 얼추 헤아려보니 근 천여 명의 손님들이 참석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고, 무희들은 춤을 추었다. 손님들에게는 각종 술과 음식들이 전달되고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음악과 춤이 끝난 후, 광대들의 연극이 시작되었다. 광대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연극은 악한 려黎나라와 선한 환桓나라가 싸우다 마침내 환나라가 이긴다는 줄거리였다. 다물이 생각해 보니, 아마도 월앙일의 작품인 것 같았다. “환桓”은 월앙일 무리의 비밀 국명이지만, 동시에 현 임금의 성씨다.
연극이 막바지에 도달했을 무렵, 환나라의 왕과 겨루던 려나라의 왕이 쓰러지자 곁에 있던 환나라 군사들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소리쳤다.
“환나라 만세!”
청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광대들이 무대의 천막 뒤로 퇴장하고, 조금 있으니 누군가가 무대로 나왔다. 그가 손을 저어 장내의 소란을 진정시킨 후 띄엄띄엄 힘주어 외친다.
“오늘의 주인공, 전대미문의 천하절색, 미증유의 경국지색, 공전절후의 천상선녀, 매아리 아가씨를 소개합니다!”
젊은 여자를 청중 앞에 소개하는 이런 장면은 조선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색적인 광경으로서, 화하인들의 축제와 흡사했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무대 뒤에서 한 어여쁜 처자가 연분홍색이 감도는 새하얀 옷을 가볍게 차려입고 사뿐사뿐 걸어 나온다. 저고리 어깨에는 곱고 또렷한 한 쌍의 매화가 수 놓여 있고, 저고리와 소매를 두른 드넓은 자색 깃에는 진분홍색 환화들이 수 놓여 있었다. 긴 바지치마는 땅에 끌리는 듯하며 그녀의 자태를 한층 우아하게 했다.
허리에 두른 황금색 띠는 발아래까지 멋지게 드리워져 있다. 머리 위에서는 화려한 금빛 관이 번쩍이며 그녀에게 여왕의 기품과 위엄을 하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하는데, 그 기품은 마치 한 떨기 매화가 봄바람에 하늘거리며 뭇 벌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의 선녀도 저렇게 아름답지는 않으리라. 남자 여자 할 것이 청중은 그녀의 미색에 넋을 잃은 듯하다.
“각지의 여러 어르신들, 선비님들, 영웅들, 이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고맙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볼품없는 춤이지만, 잠시 여러분의 호의에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이어 여기저기에서 휘파람 소리와 박수소리, 탄성이 터져 나와 장내를 진동한다.
매아리가 관을 벗어 놓은 후, 악사들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녀의 춤은 우아하기 그지없고 또 가볍기 이를 데 없었다. 이리저리 뛰고 날고, 빨라졌다 느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멈추었다 움직였다 하며 그의 손과 발, 몸이 자유자재로 놀았는데, 춤을 추는 건지, 무예를 하는 건지 다물은 분간하기 어려웠다. 뭇사람들의 혼은 그녀의 춤추는 소용돌이 속으로 마치 가랑잎처럼 빨려들고 있었다.
춤의 동작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각종 악기음도 그녀의 노래에 맞추어 고요하고도 느린 흐느낌으로 변조變調되고 있다.
♬ 아리 아려라 쓰리고 쓰려라 알 앓이가 났네
내 님을 뵙고파 가슴앓이가 났네
매아리가 노래를 시작하자 돌연 장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매아리의 노래는 계속 이어지면서 점점 애절한 음조를 띠어갔다.
♬ 높고 높은 저 달은 구름 속에 출렁이고
낮고 낮은 이 가슴은 임의 품에 출렁이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다시 떠나 가지 마오
천년이고 만년이고 임의 노예 되오리다
매아리의 음성이 너무나 느리고 애절해서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중에는 손으로 눈가를 훔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다물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속으로 뜨끔했다.
매아리는 같은 노래를 연거푸 세 차례나 되풀이해서 부른다. 세 번째의 가창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물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고요히 호흡하며 매아리의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슬픈 기운에 극력 저항했다. 매아리의 음성에서는 미혼迷魂과 최면催眠의 암울한 영靈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다물의 마음에 평온함과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매아리는 노래를 끝낸 후 장내를 향해 봄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듯, 봄바람에 벚꽃 잎이 살랑살랑 떨어지듯, 사람의 심령을 흔들리게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오늘은 저의 스무 번째 생일입니다. 이 좋은 날, 이 자리에는 제가 꿈에도 그리던 저의 낭군님이 오셨습니다. 저는 몇 해 전, 저의 정절을 장래에 그분께 바친다는 뜻으로, 어릴 적부터 소중하게 간수해오던 한 쌍의 황금환화를 그분께 드렸습니다.”
장내의 인물들이 죄다 놀랐지만, 다물의 경악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분이 지금 황금환화를 가지고 이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혼약을 발표하면, 명실 공히 저희는 한 쌍의 아름다운 부부가 될 것입니다.”
청중 가운데서 아연실색에 이은 탄성과 아울러 부러움 섞인 한숨, 여러 가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어떤 공자가 저렇게 고운 아가씨를 얻게 되었는가?”
“부럽다 부러워!”
“나도 저런 절세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네.”
“예끼, 이 사람아! 자네는 이미 장가를 가지 않았는가?”
“죽어도 한이 없다니. 죽어버리면 절세미녀는 누가 차지하라고?”
한쪽 구석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분을 바로 지금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매아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물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름을 감지한다. 오늘 매아리의 함정에 단단히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니, 당혹감에 일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다물 자신에게 보낸 초대장에 별도로 명시되어 있던 부탁, 황금환화를 꼭 가져와달라는 글귀를 읽을 때부터 어쩐지 불안했던 게, 결국 이런 사태로 귀착된 것이다.
청중의 고조된 분위기는, 이 자리에서 딴 말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다물이 어쩔 줄 모르고 있자, 전후좌우에 앉아있던 산채의 식구들이 그의 등을 떠밀어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앉은 것은 바로 이런 뜻이었음을 이제야 다물은 환하게 알았다. 그들은 다물을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에라! 이판사판이다. 뭐 그냥··· 하지만, 삼삼촌의 여인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물의 몸은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청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린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 다물의 환한 얼굴이 만인 앞에 드러났다. 다물이 매아리 앞까지 다가간 후 뒤돌아서서 청중을 향해 인사한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머머머, 세상에!”
가까운 데서 터져 나오는 여인네의 비명에 다물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람 구경 처음 하나?’
남정네의 음성도 들린다.
“아, 그 낭자에 그 공자군.”
“이봐! 저 청년의 얼굴 좀 보라구! 하늘이 맺어준 만세의 짝이 아닌가!”
“겉만 번지르르하면 뭐하는가? 내실을 봐야 알지.”
청중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 마디씩 뱉어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그토록 아름답고 평화롭고 순결하고 고고하며 늠름해 보이는 젊은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젊은 여인들은 부러움과 찬탄을 금치 못하고, 젊은 남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탄성 섞인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내질렀다.
“여러분, 이 공자님이 바로 저의 낭군이십니다. 과거에 제가 드렸던 한 쌍의 황금환화를, 이제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저의 낭군님 가슴에 손수 달아드릴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찬탄이 터지고, 많은 사람이 산천에 메아리치는 박수와 환호로 축하를 보냈다.
매아리가 손을 흔들어 화답하며 장내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애조로 변한다.
“고맙습니다, 호남湖南(금강이남)호북湖北(금강이북)영동嶺東강호江湖산지사방散之四方의 영웅호걸, 열녀현모烈女賢母여러분! 하오나, 저는 먼저 한 가지 애달픈 소식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있자 군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매아리가 말을 이었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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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1. 8. 7. 한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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