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 같은 감격을 느꼈다. 면접시험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체면은 유지하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9월 중순 서울 경기대학교 강당에서 면접시험이 있었다. 나는 하루 전에 상경하여 면접장소를 둘러본 후 날이 어둡기 전에 숙박을 위해 부근 여관을 찾았다. 날이 너무 밝을 때 여관문을 두드려서 그런지 여관 여주인은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며 내 뒤를 자꾸 살피더니 혼자 왔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여관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났다. 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데 나를 찾는 사람이 있어 나가보니 어떤 사람이 인사를 청하였다. 대전충청지역에서 필기시험에 합격하여 나처럼 면접시험을 보러온 사람인데 입구에서 주인으로부터 내 얘기를 듣고 반가워서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며 면접시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전년도에도 필기시험에 합격을 했었는데 면접시험 대비를 소홀히 하여 탈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하였다. 그에게서 비장한 각오와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얘기를 듣고 보니 나는 마음이 움찔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필기시험합격자가 20명 정원에 26명이어서 6명이 탈락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큰일 났다고 생각하며 당황해하고 있는 나에게 고맙게도 그는 자기가 준비해온 면접시험자료를 복사해주었다. 거기에는 과거 면접시험 질문 사례와 예상 질문 그리고 시사상식 등이 적혀있었다. 그가 준 자료를 몇 번 훑어보고 다음날 면접시험에 임하였다.
면접관은 중앙부처 과장급 공무원이었는데 내 원서에 적힌 이력사항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그런지 나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원서에는 군복을 입은 사진이 붙어있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묻는 질문에만 그런대로 대답을 하고 몇 마디 영어회화와 한자숙어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잘하지 못하였다. I.P.U.가 무엇의 약자냐는 질문에는 국제의원연맹 Inter-Parliamentary Union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발음을 정확히 몰라 우물쭈물 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질문한 것이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느냐?”이었다. 전형적인 이 질문에 대하여 “저는 공무원이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직업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하여 봉사를 하며 자기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발전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 대답이 과현 현실에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회의감이 들지만 공직에 대한 나의 이와 같은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고시의 전단계로 7급 공무원을 선택한 것이지만 고시에 합격을 했어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서만 공무원이란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국민에게 봉사함으로써 인생의 보람을 찾으려고 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30여년을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내가 받은 봉급에 대해서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항상 감사하면서 실제로 국민을 위해 별로 기여한 것이 없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했다. 이와 같은 나의 이상적인 공직관은 공직사회의 현실문제와 충돌하여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부패하고 타성에 젖은 공직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뜻있는 사람들의 단결된 힘이 필요하다.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이 그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변화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단결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공무원노조의 형태밖에 없는데, 노조의 본질은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들이 리더가 되어 집단의 이익추구와 더불어 국민을 위한 진정한 봉사자로서 공직사회를 개혁하게 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불성실한 자들이 노조 권력을 장악하여 자기 이익만을 위한 투쟁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공무원노조에 대한 나의 딜레마이다.
면접시험 후 그 결과에 대하여 상당히 염려를 했는데 10월경에 다행히 최종합격통지서가 날라 왔다. 채용신체검사서 및 신원진술서등 임용관련서류를 작성하여 서울에 올라가 직접 총무처에 제출하였다. 근무 희망부처는 내무부, 노동부 순으로 하였다. 내무부를 희망 한 것은 시청에 근무하는 것이 좋아보였기 때문이며, 차 순위로 노동부를 선택한 것은 노동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총무처로부터 임용후보자 등록번호를 통지받은 후 발령이 있기만을 기다렸다. 집에서 그냥 놀면서 기다릴 수가 없어 발령이 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하였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서면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오라고 하였으나 용기가 없어서 가지 못하였다. 발령이 언제쯤 날지 예측할 수 있다면 그 기간까지 계획을 수립하여 시간을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을 텐데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할 뿐이었다. 늦어도 3~4월경까지는 발령이 날줄로 알았다. 그래서 1월에는 부산대에 가서 방송대 출석수업을 받고 발령이 날 때까지 고시를 대비하여 공부를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원했던 법학공부를 하기위해 방송대 행정학과 1년을 마치고 학사과정인 법학과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곧 소식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발령이 반년이 훨씬 지나도록 늦어지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작은아버지는 혹시 자신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발령이 나지 않는 줄로 알고 앓아누우셨다. 나는 작은아버지를 위로하며 어떤 결과가 나와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1984년 7월 22일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이날도 발령을 애타게 기다리며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있던 작은 누나가 갑자기 숨을 크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누나는 헉 헉 헉 하면서 숨을 세 번 몰아쉬고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방안에는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나는 통곡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