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6. 한훤당 선생 이하 3대에 걸친 여묘살이, 정수암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지난 2019년 도동터널이 개통됐다. 이 터널은 현풍읍과 구지면의 경계인 다람재를 관통하는 터널이다. 차량으로 다람재를 넘어 도동서원을 가려면 최소 5분 이상 시간이 소요 되지만 터널을 이용하면 단 30초면 된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시간이 단축되고 이동이 편리해진 만큼 잃어버리고 놓치는 것도 있다. 예전처럼 다람재 정상 정자에 올라 도동서원과 낙동강 그리고 강 건너 고령 땅을 느긋하게 조망하거나, 정자 옆에 있는 한훤당 선생 시비(詩碑)를 감상하는 즐거움 등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람재길을 포기하면 또 하나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바로 다람재길과 이어져 있는 ‘정수암(淨水菴)’을 놓치게 된다는 점이다.
여묘살이·시묘살이·3년상
전통예법 중에 ‘여묘(廬墓)·시묘(侍墓)’란 게 있다. 상주(喪主)가 돌아가신 어버이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여묘살이’와 ‘3년상’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엄격하게 구분하면 여묘살이와 3년상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여묘살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버이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며 무덤을 지키는 행위다. 반면 3년상은 여묘살이 여부와는 상관없이 어떠한 형태로든 3년이란 기간 동안 상례 예법을 지키는 행위를 말한다. 참고로 필자의 지인 중에도 3년상을 치룬 이가 있다. 집안 한쪽 공간에 어버이 영정을 모시고, 처음에는 아침·저녁으로, 나중에는 초하루·보름에 상식(上食)을 올리는 식으로 현대식(?) 3년상을 치렀다. 이처럼 상기(喪期)를 지키는 3년상은 지금도 마음먹기에 따라 행할 수 있지만, 여묘살이는 제 아무리 하늘이 낸 효자라 해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3년상은 유교 예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3년일까? 그 답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와 그의 제자 재아의 문답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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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아가 말했다. “3년상은 1년만 하더라도 너무 길다고 할 것입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3년 동안 음악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이미 다하고, 새 곡식이 이미 상에 오르며, 불씨 만드는 나무도 바뀌었으니, 1년이면 그칠 만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상을 당한 지 3년 안에)쌀밥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너는 편하더냐?” 재아가 대답했다. “편안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여라. 군자가 상을 치를 때에는 맛있는 것을 먹어도 달지 않으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인데,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하여라.” 재아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재아는 참으로 인(仁)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 3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거늘, 재아는 3년의 사랑을 그 부모로부터 받지 못하였던가! (논어, 「양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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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사람과는 달리 태어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걷고 뛰고 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3년 동안 어버이의 품에서 길러진 뒤라야 그 품을 떠날 수 있다. 이처럼 유교에서는 어릴 적 어버이 품에서 받았던 3년간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3년이란 상기가 정해진 것. 여기에서 3년은 ‘만3년’이 아닌 ‘햇수 삼년’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초상부터 담제(禫祭)까지인데, ‘중월이담(中月而禫)’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25개월 혹은 27개월이 되기도 한다.
한훤당 선생 이하 3대가 여묘살이를 한 곳
정수암 역사는 도동서원보다 무려 117년이 앞선다. 도동서원이 세워지기 한참 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세워졌다. 물론 지금 건물은 당시 건물은 아니다. 정수암이 처음 세워진 것은 1487년(성종 18)이다. 선생이 부친 김뉴(金紐)의 상 때 3년 여묘살이를 할 목적으로 처음 세웠다. 그 뒤로는 선생의 장자인 김언숙(金彦塾)이 이곳에서 어버이 상에 6년 여묘를 했고, 그 뒤 다시 선생의 장손(長孫)인 김대(金垈) 역시 이곳에서 6년간 어버이 상에 여묘를 했다. 이후 1626년(인조 4) 선생의 5세손 김대진(金大振)이 문중의 도움을 받아 정수암을 중건했다.
현재 정수암 처마에 매달려있는 이원윤의 「정수암기」(1956년)를 참고하면, 1626년 정수암 중건 당시 본채는 3칸으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은 방이었다고 한다. 또 그 앞쪽에 4칸 집이 있었는데 부엌, 창고, 방으로 이뤄졌다고 되어 있다. 「정수암기」에 묘사된 기록과 현재의 정수암을 비교해보면 건물의 수와 위치는 일치하지만 건물의 칸수에는 약간 변화가 있다.
유교 공간이 불교 공간으로
우리나라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불교 공간이 유교 공간으로 바뀐 곳이 많다. 도동서원에도 과거 사찰에서 사용된 석재가 일부 눈에 띈다. 이처럼 시대에 따른 유·불 공간의 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유교 공간이었던 정수암 역시 지금은 불교 암자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정수암의 법당, 요사채, 대문은 옛 건물이고, 나머지는 근래에 신축한 건물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수암은 예로부터 샘이 좋기로 이름이 났다. 가뭄이나 홍수에도 항상 일정 양의 차고 맑은 샘물이 솟는다. 대니산 중턱 암반 아래에서 솟는 샘물인 만큼 물맛이 좋다. 지금은 샘물을 물탱크에 저장한 뒤 호스를 연결해 수도처럼 사용하고 있다.
정수암에서 또 살펴봐야 할 곳이 있다. 법당과 산신각 사이 바닥에 있는 특별한 모양의 암반이 그것이다. 마치 나발이라 불리는 부처님 머리 마냥 엠보싱 화장지 표면 마냥 올록볼록한 것이 정말 특이하다. 평생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한 주민 말에 의하면 대니산에서 이런 형태의 바위는 오직 이곳밖에 없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지기(地氣)는 흙보다는 바위를 타고 더 잘 흐른다고도 한다. 그래서 바위 위에 얹혀 있는 기도처가 흙 위에 있는 곳보다 기도빨이 더 좋다는 말이 나왔다.
에필로그
도동터널이 개통된 지 3년이 지났다. 이젠 네비게이션에 도동서원을 검색하면 십중팔구 도동터널로 길안내가 나온다. 길은 짧지만 좁고 험한 고갯길인 탓에 대형버스와 덤프트럭은 이젠 아예 다람재길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래서일까. 다람재길은 옛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다. 가로수로 심은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가지가 웃자라 마치 나무터널인양 고갯길을 덮고, 청설모와 다람쥐도 다시 돌아왔다. 만약 가로수 정비를 하지 않고 이대로 둔다면 앞으로는 대형버스를 이용해 다람재에 오르는 일은 힘들어질 것 같다. 참고로 2022년 6월 현재, 아직은 대형버스가 다닐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