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본의 왕국, 울산에서 불붙어 거제에서 구로까지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대투쟁, 6월 민주화항쟁을 압도한 거대한 해일, 겨우 3개월 동안에 일어난 노동쟁의 수가 무려 3,458건이며 새로 결성된 노조가 1,162개에 이르는 노동자대투쟁, 역사의 주인은 노동자계급임을 세상을 향해 당당히 선포하고, 노동해방 혁명의 전망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 이런 것이 87년 7·8·9노동자대투쟁을 다룰 때 나오는 얘기들이다. 지금 노동자들은 ‘제2의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만들어내기를 갈망한다. 그렇다면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어떻게 준비되고, 어떻게 전개됐는지, 그 의미와 교훈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87년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자운동에 동참한 세대들, 특히 지금 노동자투쟁의 선두에 서 있는 비정규직 투사들 대다수는 87년 노동자대투쟁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활동이 그러하지만, 특히 노동자운동은 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경로에 대해 생생하게 파악하고 있을 때에만 맹렬한 기세로 전개될 수 있다. 그 점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그로부터 계급적 교훈을 체계적으로 끌어내는 작업은 노동자운동을 전진시키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역사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해서 ‘역사의 주인이 노동자계급’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는지,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해방 혁명의 맹아들을 어떻게 드러냈고, 노동해방에 이르는 한국 노동자계급의 전진과정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노동해방에 이르기 위해서는 계급의식적 선진노동자들이 굳게 뭉친 정치결사체인 혁명정당이 왜 반드시 필요한지 등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자본의 축적은 곧 노동자의 축적
생산이 이루어지려면 공장, 기계, 원료 같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야 한다.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자본의 축적은 곧 노동자의 축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객관적 배경인 노동자의 축적을 이해하려면 자본의 축적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950년대까지 한국은 극히 낙후한 농업국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조국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경제성장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과 이에 빌붙은 독점자본은 미국, 일본 같은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돈을 들여와 섬유나 전자기기와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나 공해산업인 비료, 화학, 정유 등에 투자했다. 정부와 독점자본은 ‘수출 OO억 불 달성’을 목표로 내걸고 노동자들을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시켰으며,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뜨렸다. 살 길이 막막해진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해마다 평균 30만 명 정도씩 도시로 모여들었다.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의 성장으로 노동자의 수는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에 200만 명에 이르던 노동자가 1971년에는 4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섬유, 전자 등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의 성장은 청계피복, 원풍모방, 동일방직, YH무역, 고려피혁 등 70년대 여성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된 객관적 토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에도 60년대에 이어 높은 성장과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을 계속 강화해 나갔는데, 특히 중화학 공업 부문을 우선 발전시키기로 했다. 그 결과 조선, 종합제철, 석유화학 등 대규모 중화학 공업이 제조업 분야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72년 43.9%에서 1978년에는 55.2%로 높아졌다. 박 정권은 외국의 자본, 기술, 원료에 기대어 대규모 공장을 세우고 그 제품을 수출했는데, 특히 일본의 요구에 따라 울산, 마산, 창원, 포항 등 동남 해안에 중화학 공업단지를 많이 지었다. 그에 따라 해마다 30~50만 농민들이 도시로 이동했다. 1960년대에는 영세한 농민 가족 전체가 고향을 떠났지만, 1970년대에는 대부분 15세에서 25세에 이르는 젊은 층이 홀몸으로 농촌을 떠났다.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도시에서 젊은 노동력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중화학 대공장과 공단의 형성은 젊은 남성노동자들의 집중을 낳았으며, 그것은 결국 자본의 살인적 착취와 억압에 맞선 그들의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은 1971년 9월 한진상사 노동자들의 KAL 빌딩 방화사건, 1974년 9월 울산 현대조선소 2,500명의 폭동의 단계를 거쳐 1980년 4월 사북 탄광노동자들의 항쟁, 같은 해 동국제강·인천제철·일신제강 노동자들의 투쟁, 85년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을 지나 마침내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 대중투쟁의 활성화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마치 수많은 시냇물이 강으로 흘러들어가고, 강들이 바다로 모여드는 것처럼 수많은 노동자투쟁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거대한 ‘노동자투쟁의 바다’였다. 따라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낳은 수많은 ‘노동자투쟁의 실개천’을 모두 살펴보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살펴볼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피를 머금고 탄생한 청계피복 노조는 70년대 암흑의 시대에 세상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경찰의 감시, 연행, 구속, 고문 등 온갖 탄압이 빗발쳤지만 청계피복 노조는 목숨을 건 투신과 할복, 점거와 시위 등 모든 투쟁을 다해 자신을 지켜왔고, 노동자운동을 선봉에서 이끌어온 ‘불굴의 결사대’ 역할을 했다. 원풍모방, 동일방직 등 70년대에 민주노조운동의 주축이었던 다른 노조들은 광주에서 2,000명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에 짓눌려 숨죽이면서 서서히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81년 강제해산 당했던 청계피복노조는 84년 법외노조를 선언하고, 합법성 쟁취를 위해 학생, 진보단체와 함께 치열한 가두투쟁을 벌이는 등 70년대에 이어 80년대 초중반에도 운동의 선봉에 굳건하게 서 있었다. 83년에 사회 전반에 민주화투쟁의 바람이 불자 84년 여름 대구 택시 노동자들이 노동자대중 투쟁의 불을 당겼다. 택시 노동자들은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8시간씩 일하고, 휴일도 10일에 하루밖에 갖지 못하며, 과도한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과속운전을 해야 했다. 이들은 남달리 권리의식, 정치의식이 높았고, 정보교환을 빨리 할 수 있었기에 유리한 기회를 포착해 과감하게 투쟁했다. 84년 5월 24일 대구의 택시노동자 1,000여 명은 사납금 인하, 퇴직금 지급, 노조결성 방해 중지 등을 내걸고 대구시청 앞 등을 차량으로 봉쇄한 다음 농성에 돌입해 대구시의 항복을 받아냈다. 비록 택시노동자들이 해산한 다음 대구시가 약속을 어겼지만, 이 파업은 부산, 대전, 강릉 등 전국 각지의 도시에서 잇달아 택시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운수업계에 노조 설립의 물결이 일게 했다. 유화국면에서 민주화 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을 이용해 구로지역에서도 민주노조 건설의 물결이 일어났다. 청계피복노조 출신으로 대우어패럴에 근무하고 있던 김준용을 중심으로 1984년 6월에 대우어패럴노조가 결성되어 노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자본가들은 노조간부 회유와 협박, 흑색선전, 노조탈퇴 강요, 노조반대파 조직, 구사대를 동원한 조합원 폭행, 라인축소, 납치와 감금 등 온갖 수법으로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 이런 집요한 탄압 때문에 1,400명에 이르던 조합원이 불과 1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도 노총 위원장실 점거농성, 민한당사 농성투쟁을 전개하며 완강하게 맞서 김우중으로부터 일정하게 항복을 받아냈다. 대우어패럴을 시발로 대한마이크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협진, 유니전 등에서 속속 민주노조가 결성되어 85년 구로동맹파업의 기초가 확립됐고,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달굴 또 하나의 불꽃을 지펴 올렸다.
85년 4월 대우자동차 파업
85년 대우자동차파업은 60~70년대 노동자운동과 80년대 노동자운동의 차이점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80년대 노동자운동의 전형을 제시한 선봉투쟁이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랬다. 첫째 70년대까지 산업은 주로 섬유, 봉제, 전자 등 경공업 중심으로서 노조운동도 이곳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 중심이었는데, 80년대에 산업의 중심은 중화학 기계공업으로 옮겨갔고 노조운동도 여성에서 남성으로, 경공업에서 기간산업으로 변하고 있었다. 대우자동차파업은 이런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대우자동차 파업은 억센 팔뚝의 젊은 남성노동자 부대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이런 위력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87년 노동자대폭발을 예고했다. 다른 한편 대우자동차파업은 지식인 활동가와 노동자의 유기적 결합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송경평, 홍영표, 이용선 등 지식인 출신 활동가들은 현장에 투신하여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노동자들은 자본과 정권이 ‘위장취업자’, ‘불순세력’이라고 매도하는 상황에서도 이들 지식인 활동가들과 굳게 결합해 파업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대우자동차파업은 지식인 활동가와 노동자들이 서로 분리된 채 불신하고 갈등하던 상황, 유기적으로 결합하길 원하지만 그 구체적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나아갈 길을 보여준 역사적 등불 역할을 했다. 이 파업을 계기로 지식인 활동가들의 현장투신이 더욱더 줄을 이었고, 현장에 투신해 있던 지식인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대중선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결합력을 강화해 갔다. 대우자동차파업은 정치조직들이 현장 바깥의 써클적 선전 중심에서 현장 안의 대중선동 중심으로 활동방식을 전환하도록 크게 자극했다. 85년 4월 16일 대우자동차의 1,000여 노동자들은 ‘18.7%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군대와 같은 조직력을 과시하는 파업농성이 사흘째 계속되자 회사와 정권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이 직접 나서서 해산을 요구했지만 노동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주말을 이용해 휴업을 선언하고 파업을 깨려 했다. 하지만 350여 열성 노동자들은 이 계획을 사전에 감지해 출퇴근 파업을 4월 19일부터는 아예 철야농성 파업으로 전환하고, 강제진압에 대비해 기술연구소 3층을 점거했다. 그리고 경찰이 강제로 해산하려 할 경우 기술연구소에 있는 설계도면 등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면서 18.7% 임금인상을 회사 측이 전면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조합원들의 들끓는 열기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파업을 선언하고 어정쩡하게 농성장을 지키고 있던 김영만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집행부가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빠져나갔지만 이미 실질적인 지도부는 홍영표 대의원을 비롯한 민주파에게 넘어와 있었다. 결국 파업 9일만에 김우중 회장과 민주파 홍영표 대표가 16.4%의 임금인상에 합의함으로써 파업은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대우자동차 임금인상투쟁은 국내 대자본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관심이 많았고 언론방송에서도 날마다 보도했다. 이 투쟁이 승리하자 여러 곳에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했고, 일정하게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수년 동안 계속돼온 임금동결 정책이 노동자투쟁으로 산산이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이 파업은 한계를 많이 드러냈다. 대중의 내분과 이탈을 두려워해 외부의 지원과 연대를 거부하고 한 공장의 경제투쟁으로만 한정한 것, 해고자 복직을 쟁취하지 못한 것, 농성노동자들의 안전보장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등이 그런 한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파업위원회의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합의사항이 이행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도,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거나 새롭게 탄압할 경우 다시 투쟁을 하기 위해서도, 더 큰 투쟁을 준비하고 노동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도 파업위원회를 유지하고 노조를 장악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교섭대표들은 투쟁의 무기인 노동자조직의 문제를 등한시해 자본가의 후속탄압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한계가 있었지만 건장한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의 결사적 파업투쟁, 지식인 활동가와 노동자대중의 굳건한 결합을 본질적 특징으로 하는 85년 대우자동차파업은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나아가는 굳건한 ‘징검다리’였으며,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훌륭한 예고편이었다.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투쟁이었다. 그것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의 지역노동자연대파업이었으며, 선진노동자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한 연대파업이었다. 구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진노동자들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평가하면서 개별 사업장별로 고립되어 투쟁하면 각개격파될 수밖에 없으며,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결의했다. 84년 봄과 여름 사이에 구로지역에서 만들어진 신생 노조들은 85년에 임금인상투쟁을 함께 준비하고 거의 비슷하게 진행했다. 그런데 정권은 대우어패럴 위원장인 김준용을 임투를 빌미로 6월 22일 토요일에 전격 구속시켜 버렸다. 정권은 대우어패럴노조가 다른 노조에 비해 조직력이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약한 고리를 치려한 것이며, 대우자동차 파업과 대우어패럴의 파업을 연결시켜서 보고 민주노조 연대의 고리를 깨려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구로지역 노동자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정권은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깨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바로 그날 구로지역 노조 간부, 해고자, 활동가 190여 명이 모여 집중적으로 대책을 논의한 다음, 6월 24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연대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노조가 아침 일찍 먼저 파업에 돌입했고 효성물산과 선일섬유, 가리봉전자가 약속된 오후 2시부터 일제히 구속자 석방과 노동운동 탄압중지를 요구하며 연대파업에 돌입했다. 다음날은 세진전자와 남성전기, 롬코리아노조가 동맹파업 지지농성대열에 합류하면서 6·25 이후 유래가 없던 동맹파업의 불길이 거세게 번져나갔다. 6월 26일에는 민통련과 민청련, 청계피복 노조 등 22개 운동단체, 노조 대표들이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지지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27일에는 효성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노동부 중부사무소를 점거하고 이튿날 부흥사노조가 연대파업에 합류했다. 결국 29일 닷새 동안 굶주리며 농성을 계속하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벽과 출입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구사대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고, 연대파업은 막을 내렸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반드시 정치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경제투쟁이 격렬해지면 자본가계급의 집행위원회인 정부가 직접 나서서 노동자투쟁을 탄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은 이런 정부의 탄압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정부에 맞선 투쟁은 개별 사업장 노동자들의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지역 차원 더 나아가 전국, 전 세계적 차원의 노동자계급 연대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구로동맹파업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의 칼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연대파업의 전통이 끊긴 지 오래라 까마득하게 잊힌 상태에서 계급투쟁의 합법칙적 발전을 믿고 의식적으로 연대파업을 부활시켜낸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역사적 의의가 컸다. 구로동맹파업의 결과 35명이 구속되었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당했으며, 2,000여명이 해고되었다. 자본과 정권은 그만큼 강력한 탄압으로 노동자들을 위축시켜 연대파업의 정신을 영원히 지워버리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강력한 탄압으로 노동자운동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노동자들이 피흘리며 쓰러진 자리 위에서 축배의 잔을 부딪쳤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파업은 2년 뒤 87년에 벌어진 노동자대투쟁의 예고편이었을 뿐이며, 노동자대투쟁의 들불을 지필 또 하나의 거대한 횃불이었을 뿐이다.
운동의 연속성 사수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가운데에는 청계피복노조의 투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준용 대우어패럴 위원장과 연대투쟁위원회 홍보국장을 맡은 청계피복노조 김영대 사무국장은 열여섯에 청계천에 시다로 들어와 하루 18시간씩 질리게 일하며 뼈가 여물어 온 동지들이었다. 연대투쟁위원장을 맡은 효성물산노조의 김영미 위원장은 겨우 열두 살부터 청계천 시다로 일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청계피복노조를 불법화하고 폐쇄한 뒤 남아서 청계피복노조를 사수하기로 한 김영대를 제외하고, 김준용과 김영미는 짓밟힌 노동운동의 불씨를 더 넓은 광야에 퍼뜨리기 위해 구로지역 현장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다시 최전선에 서서 투쟁을 일구어갔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로동맹파업은 적들에게 짓밟혔지만 이 연대파업에 참가한 투사들은 결코 꺾이지 않고 구로지역 민주노조운동을 사수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등을 건설하여 노동자운동을 정치투쟁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앞장서기도 했으며, 곳곳에서 맹렬하고 헌신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선봉에서 일구어나갔다. 이 사례는 강철은 두들길수록 더욱 단련되며, 적들이 불씨를 꺼뜨리려고 광폭하게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불씨는 더욱 멀리, 더욱 힘차게 퍼져나가 들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가르쳐준다. 지금까지 수많은 비정규직 노조들, 중소기업 노조들이 자본과 정권의 잔악한 탄압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막을 내려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의 역사가 생생하게 가르쳐주는 것처럼 노동사투사들이 날카로운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고, 굳게 결합해 있다면 노동자대중이 있는 다른 현장에 들어가 얼마든지 투쟁의 불꽃, 연대의 불길을 다시 지펴 올릴 수 있으며,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수 있는 더 거대한 계급투쟁을 앞장서서 이끌 수 있다. 이처럼 노동자계급 운동이 연속성을 사수하고, 전진하려면 명료한 계급적 사상과 철의 규율로 무장한 계급의식적 선진노동자들의 정치결사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87년 6월 민주화항쟁
“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인다. 모든 중요한 정치적 대중행동은 그 절정에 다다르고 나서는 일련의 경제적 대중파업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법칙은 하나하나의 대중파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일반에도 적용된다. 정치투쟁이 확산되어 명확해지고 강화됨에 따라,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됨과 아울러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로자, ≪대중파업론≫)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사례는 대단히 많다. 60~61년 4·19혁명기, 70년대 반독재 투쟁기, 80년 민주화의 봄 시절, 83년 유화조치 이후 투쟁국면 등에서 모두 이런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거대한 규모로 상호작용이 이루어진 것을 찾으라면 단연 87년 6월 민주화항쟁과 87년 7·8·9노동자대투쟁을 들 수 있다. 87년 7·8·9노동자대투쟁은 6월 민주화항쟁을 질적으로 뛰어넘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투쟁이었지만, 어쨌든 6월 민주화항쟁이 열어놓은 ‘정치적 공간’을 전면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는 ‘호헌조치’를 선언했다. 이에 대한 치떨리는 분노를 안고 있던 민중은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조작 내막이 알려지자 대대적인 투쟁으로 떨쳐 일어섰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6월 10일 국민대회에 전국적으로 24만이 모이고, 시위대가 폭력경찰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며 경찰버스, 파출소,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사를 습격하는 것으로 표현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호응하고, 남대문 시장에서는 상인들도 합세해 시위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수만 명의 경찰병력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대규모 집회, 시위를 막기 위해 전국에서 전투경찰들을 서울로 집결시켰지만 이것은 오히려 지방의 치안공백을 낳아 지방의 시위가 분출되는 것을 도왔을 뿐이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타오르는 투쟁의 불꽃을 더욱 거세게 키우자 군사정권은 비상계엄발동설을 퍼뜨려 농성단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민중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6월 18일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모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부산에서 투쟁이 가장 고조됐다. 10년쯤 전에 부마항쟁 경험을 가진 부산지역에서는 100만 명 가까이 모인 가운데 노동자들이 대형트럭, 트레일러 10여 대를 앞세우고, 200여 대의 택시를 가세시켜 시청으로 돌진하는 등 과감한 투쟁을 벌여 도시 전역을 해방구로 만들어버렸다. 투쟁은 호남, 강원 일대로, 중소 도시로 시간이 갈수록 확대됐다. 6월 26일에도 전국적으로 100만 명 정도가 모여 시위를 전개했다. 서울, 부산 등 주요 도시에서는 날마다 가두투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투쟁규모는 확대되고 투쟁은 더욱 격렬해져갔다. 이런 투쟁압력에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결국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항복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은 자본가정권을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직접민주주의 권력을 건설해 노동해방으로 나아가겠다는 뚜렷한 계급적 지향을 갖지 못한 채 ‘독재 타도, 민주(정부) 쟁취’나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에 머물렀다. 또한 6월 민주항쟁에는 정치조직과 연결된 일부 선진노동자들과 미조직된 노동자들이 일부 참여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노동자계급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6월 항쟁은 4·19혁명 및 80년 광주항쟁을 뛰어넘는 전국적이고 전 계급적이며 폭발적인 민주항쟁의 위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6·29선언이라는 기만적 선언 앞에서 중단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 개량만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동요하는 소부르주아가 주도하는 민주주의 운동의 계급적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은 수십 년 동안 숨죽여 지내왔던 노동자계급이 어깨를 활짝 펴고 억센 주먹을 치켜든 채 역사의 무대로 성큼 뛰어올라 자신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혁명적 잠재력을 역사의 무대 위에 폭발적으로 드러냈는지에 대해 다음 호에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