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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무 태후는 막내딸 태평공주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월아야, 네가 보기에 고조영이라는 고려인이 어떤 것 같으냐?”
태평공주 이영월이 그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되물었다.
“뭐가 어떤 것 같으냐는 거예요? 묻는 말이 왜 그래요?”
“남자로서 곁에 가까이 둘 만한 강유剛柔 겸비한 매력적인 남자냐 말이다.”
“강유 겸비라니, 무슨 뜻이에요?”
“남성으로서 강력하고 여자를 배려하는 부드러움을 갖추었느냐 말이다.”
“실패했어요.”
“쯧쯧, 그 까짓 애송이 하나 굴복시키지 못하다니, 도대체 뭘 배웠느냐?”
“흥! 엄마가 한 번 겪어보세요. 풍소보 회의 같이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위인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이영월이 언성을 높였다.
“호호! 네 자존심이 좀 상했나보구나. 넌 아직 어리다. 남자를 다루는 법이 서툴러.”
“나도 열다섯 살에 시집을 가서 남자라면 쓴맛단맛 다 겪어봤단 말이에요. 하지만 고조영은 중국 남자들하고 달라요.”
“다르긴 뭐가 달라? 남자는 다 똑 같다.”
이영월이 입을 비쭉거렸다. 무 태후가 화제를 돌렸다.
“네 남편 설소薛紹하고는 아주 끝낼 거냐?”
“그러고 싶어요. 그 자식이 여자를 얼마나 밝히는지!”
“흥, 피장파장이지 뭐. 넌 어떻고?”
이영월이 대꾸를 못했다. 태평공주 이영월은 다섯 해 전인 681년에 부황인 고종의 외조카 설소와 결혼했었다<자치통감>.
하지만 품행은 그리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주변에 알려져 있었다.
무 태후가 조용히 타일렀다.
“황실의 체면을 생각해라. 가정을 깨는 건 안 된다.”
“그럼, 엄마는 왜 날더러 조영에게 접근하라고 하신 거예요?”
“그 때는 딴 생각이 있었지만, 네가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이루한가 뭔가 하는 계집하고, 천하를 말아먹을 것 같이 예쁘게 생긴 그녀의 여종, 여미아라는 요녀를 그에게서 떼어놓는 데는 성공했단 말이에요.”
“됐다. 가봐라. 앞으로는 너도 몸을 좀 조신하게 움직여라.”
“흥!”
이영월은 입을 비쭉거리며 무 태후의 방에서 물러나왔다.
무 태후는 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밖을 향해 외쳤다.
“게 누구 없느냐?”
“예, 대령했사옵니다.”
내시가 나타났다. 무 태후는 귓속말로 그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조영은 잠이 오지 않아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가 자정쯤 되어서야 겨우 선잠에 빠졌다. 그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 밤중에 웬일이지?’
그가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소리가 들렸다.
“조영 공자, 주무시오?”
“누구세요?”
반문하며 조영은 일어나 등잔에 불을 켜고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내시인 듯한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조용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폐하께서 공자님을 보고자 하십니다.”
“폐하라면?”
조영이 놀라 물었다.
“태후마마를 이름입니다. 지금 바로 모시고 오라 하십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을까요?”
“소인도 알 수 없습니다.”
조영은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그를 따라 나섰다. 북궁北宮에 들어가 여러 개의 문을 지나고, 이리 돌고 저리 돌아 긴 시간을 이동한 후에야 조영은 어느 고요한 대전 앞에 도착했다. 밖에서 보기엔 깜깜했으나, 대문과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불빛이 은은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내시의 안내에 따라 아주 깊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정면에 단정한 자세로, 홀로 앉아 있는 무태후의 엄숙한 얼굴이 등불 아래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시는 그를 방까지 인도하고 방문을 닫은 후 나갔다.
“어서 오시오. 조영 공자.”
“폐하를 뵙습니다. 어인 일로 이 밤중에 소인을 부르셨는지요?” 조영이 꿇어 엎드려 인사한 후 물었다.
“편한 자세로 앉으시오.”
무 태후는 조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찬찬히 훑어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영 공자, 이곳이 편안하오?”
“네,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번 무술대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 것이, 나로서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과찬이십니다. 어쩌다 우연히 그리 된 것입니다.”
조영이 다시 겸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래서 묻는 말이오. 무술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한 공자에게 무슨 상을 내려야, 품위에 어울리는 합당한 예우가 될까 고심하고 있었소.”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하지만, 저는 상을 바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호오, 젊은 사람의 마음 씀이 참 넓고 너그럽구려.”
그 때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내시가 손에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쟁반을 내려놓고 나갔다.
“조영 공자, 밤이 깊어 배가 출출할 테니, 이것 좀 들면서 얘기를 나누도록 해요.”
그녀가 상건床巾을 벗기니 거기에는 약간의 과자와 음료가 놓여 있었다.
태후가 먼저 과자를 집어 먹고 음료를 조영에게 권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제공해주신 저녁밥이 너무 맛있어서 좀 과식을 했더니 배가 불러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랬군요. 하지만, 나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에요. 우리 황궁의 사람들은 나의 말 한 마디에 모두 벌벌 떤답니다. 하물며 내가 권하는 음식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조영은 난처했다.
“어서요.”
무 태후는 직접 손으로 과자를 들어 그에게 주었다. 차마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영이 과자를 받아먹고 잔도 입으로 가져가 음료도 약간 마셨다.
“감사해요. 그런데, 좀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하기로 해요.”
태후는 꿀물처럼 생긴 음료를 한 입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조영 공자에게 둔영비기屯營飛騎인 백기대百騎隊 장수의 직위를 제수하고 싶은데, 공자의 의향은 어떤가요?”
“네?”
조영은 몹시 놀랐다. 둔영비기 즉 백기대는 당태종 정관 12년, 638년에 설치된 황제의 친위대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건 예의상의 사양이 아닙니다. 소인은 결단코 감당할 수 없는 직책이옵니다.”
“고려인으로서 당의 황제를 위해 일한다는 게 싫은 건가요?”
당시의 당나라 명목상 황제는 무태후의 친아들 이단이었다.
“아닙니다. 저는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직 연소할 뿐만 아니라 그런 대임을 맡을 만한 자질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안을 하나 하죠. 이 태후를 곁에서 지켜주면 어떻겠소? 내게 원한을 품고 나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오. 내게는 그대같이 용맹하고 무예가 뛰어나며 총명한 젊은이가 꼭 필요하오.”
무 태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태 전 서경업, 서경유 형제의 난이 있고난 후부터 무 태후는 천하사람 대부분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고 의심하고, 극도의 불신과 두려움 가운데서 자기신상의 안전에 골몰해 있었다<자치통감>.
조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진즉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이상한 욕망이 솟구쳐 올라와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영은 이를 악물고 참느라 적절한 말을 하기 힘들었다.
무 태후의 잔잔한 음성이 이어졌다.
“황제의 친위대처럼 규율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궁 안팎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하겠소.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대가 승려의 지위를 가져야 하오. 도교의 도사든, 부도교의 승려든, 경교의 경승이든 괜찮소. 여긴 금남의 지역이라 승려가 아닌 남자는 출입할 수 없소. 공자는 나의 특별 배려로 밤중에 여기에 들어온 것이오.”
낙양궁은 남궁과 북궁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남궁은 대신들이 정사를 보는 곳이며 북궁은 무 태후와 황제, 황후, 후궁, 환관, 궁녀 등의 거처였다.
“아, 아닙니다.”
조영이 간신히 한 마디 대꾸했다. 무 태후는 발갛게 달아오른 조영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좀 더운가 보군요. 더우면 윗옷을 벗어도 괜찮아요. 나도 좀 덥군요.”
이렇게 말하며 무 태후는 두루마기 같은 겉옷을 벗어 한쪽에 놓았다.
“이 거추장스런 옷을 입고 있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네요.”
무 태후는 이렇게 말하며 조영의 안색을 살폈다. 조영은 고개를 숙인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저런! 몸이 좋지 않은가 보군요.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어서 속히 숙소로 가서 쉬도록 하세요. 제 요청에 승낙하는 거죠?”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마마를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우리 당나라와 고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꼭 수락해야 하지 않을까요? 후고구려 고중상의 태자인 조영 공자가 여기에서 나를 돕는다면, 양국 간에 평화가 진작되고 백성들은 전쟁 없이 얼마나 평안한 삶을 살 수 있겠어요?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무 태후는 약간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조영을 설득하려 했다.
“마마의 말씀도 일리가 있사오나, 저는 달리 할 일이 있사옵니다. 지난 번 마마를 알현했을 때 주청 드린 대로, 저를 고리군백으로 임명하시어, 동북방 영주 등에 흩어져 사는 우리 고려 백성들을 돌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조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면서 대꾸했다.
“그대의 뜻이 거기에 있었구려. 귀한 생각이지요.”
“양국 간에 평화가 진작될 수 있다면 제가 여기에 볼모로 잡혀 있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폐하를 모시는 일은 어렵습니다. 저는 승려가 될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까요.”
“경승 고양원도 고려 왕족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대는 경승이라도 될 수 없나요?”
“예, 마마. 제게는 혼인을 약속한 여인이 있사옵니다. 그 여인을 버릴 수 없습니다.”
“오, 그렇군요.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그건 저의 사적인 비밀이라서 말씀 드리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그건 그렇고 볼모를 자청하다니, 조영공자의 애국심과 평화애호심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무슨 어려운 문제가 있나요?”
“동행한 일행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요?”
“동행한 일행이라면?”
“조부 고승 대인을 비롯해 송막도독 이진충, 그의 부장들인 이해고와 사비우, 그의 딸 이루하와 여미아, 귀성주자사 손만영, 경승 고양원 등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는 거예요.”
“······?”
조영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깊은 숨을 내쉬며 들이쉬고 있었다.
무 태후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정말 지독한 놈이구나. 그토록 강력한 약기운에도 시종일관 조리 있는 말을 하고 있다니. 이런 놈을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채 그대로 살려둔다면, 우리 당나라에 두고두고 후환거리가 될 것이다.’
“정말 죄송해요. 그들은 지금 우림군羽林軍 감옥에 갇혀 있어요.”
“네? 그들이 무슨 중죄를 지었습니까?”
조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요. 반역죄를 모의했어요.”
조영은 떨리는 가슴을 내리 누르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영 공자도 인정을 하는 군요. 영주도독 조문홰가 그 반역죄를 낱낱이 실토했다오. 하지만, 나는 참으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모든 반역죄를 용서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화해의 의미에서 조영 공자를 부른 거예요.”
조영은 신음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조문홰가 정말 배신한 건가? 아니면 이 백여우가 나를 속이고 있는 건가?’
“마마, 반역죄라니, 청천백일 하에 무슨 말씀이신가요?”
무 태후는 갑자기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호호! 지금은 한 밤중이에요. 청천백일靑天白日 아래라니, 공자야 말로 무슨 말씀이죠? 공자의 정신이 혼미한가요?”
“있지도 않은 반역죄를 영주도독 조문홰가 실토했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내 정신이 혼미해진 것 같습니다. 한 밤에 마신 독한 음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군요.”
조영은 끙끙거리면서도 오기가 솟아올라 은근히 비꼬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있어요. 조문홰가 실토한 것은 사실이에요. 만일 조영 공자가 내 요청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조영 공자를 포함한 동행인들 모두가 갈 길은, 단 하나 뿐이에요. 어때요, 정신이 좀 들지 않나요?”
무 태후는 얼굴에 비릿한 미소를 가득 담고 있었다.
“조영 공자, 그러니 내 말을 들어 봐요.”
무 태후는 의자에서 일어나 쟁반을 한 쪽으로 치우고 조영에게 핍근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녀는 조영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태후의 얼굴에서 강렬하고 불쾌한 향내가 물씬 풍겨와 코를 심하게 자극했다.
조영은 감히 얼굴을 들어 무 태후를 바라보지 못하고 잠깐 숨을 멈추었다.
“공자가 내 요청을 수락하면, 그들 모두는 자유인이 돼요. 약속해요. 하지만, 거절할 경우에는 모두가 죽음을 당해요.”
이렇게 말하며 무 태후는 조영의 옷깃을 붙잡더니 저고리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조영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태후의 손을 뿌리치고 순식간에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방 한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조영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간신히 말했다.
“폐하, 고정하소서. 제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를 보내주소서. 보내주신다면 사흘 기한 안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안 돼요. 이곳은 들어오기도 어렵지만, 나가기는 가일층 어려운 곳이에요. 그대는 여기에 나와 함께 사흘 동안 머물며 결정을 내리도록 하세요.”
무 태후는 조영을 아예 내보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른 곳으로는 갈 수 없어요. 이방에 사흘 동안 있어야 해요. 반역 모의를 함께 한 일행들뿐만 아니라 조영 공자도 지금 붙잡힌 몸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조영이 속으로 떨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설사 이곳에서 뛰쳐나간다 하더라도 밤중에 황궁 경내를 함부로 활보하다가는 둔영비기들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기 십상이에요. 그리고 이곳 북성의 문들을 우림군과 비기飛騎들이 지키고 있어서 이곳에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해요. 혹시 조영 공자가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가 해를 입을까 걱정되어, 공자를 아끼는 마음으로 일러 드리는 거예요.”
조영은 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오, 하나님, 하나님, 이것이 웬 날벼락입니까?’
계속해서 무후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조영 공자가 내 요청을 수락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에요.”
“마마, 저를 볼모로 잡아 주시고, 부디 죄가 없는 일행들을 석방해 주소서.”
“그대를 볼모로 잡으면 그대의 부친이 어찌 성을 내지 않겠어요? 그는 매우 독랄한 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자식의 목숨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당나라와의 일전을 불사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찌 양국 간에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겠으며 백성이 두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겠어요?”
조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속으로 하나님만을 부르고 있었다.
“마마, 하지만 제가 만약에 마마를 곁에서 모시다가 역심이라도 품고 마마를 해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저를 어떻게 믿고 제게 그런 중책을 제수하려 하십니까?”
“호오, 젊은이가 못하는 말이 없구려. 그대의 용기가 가상하오. 하지만 염려 마오. 내게도 사람 보는 눈은 있소. 그대의 얼굴은 반역을 저지를 상相이 아니오. 오히려 충직하고 충성스러우며 매우 정직한 모습이오.”
“하지만 저는 동이족입니다. 누가 반역죄로 저를 무고한다면, 제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서씨 형제의 반역 사건(684년)이 있고난 후, 무 태후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의심 병에 걸린 나머지, 밀고密告의 문을 크게 열고 밀고를 독려하며 밀고자들을 극진히 우대하였다. 이에 따라 당나라 전역에서 밀고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백성은 발을 편히 뻗고 잘 수 없었으며 조정은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자치통감>.
“죽는 것이 두렵소?”
“아닙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사오나, 밀고자의 손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써서 고려인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진 않사옵니다.”
“그도 그렇겠지. 고려를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하구려.”
무 태후는 천정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물었다.
“내 앞에서 이토록 당당한 그대의 용기가 가상하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소?”
“제게 고리군백의 작위를 하사하시어 저를 영주로 보내주신다면, 제가 맡은 지역의 평화를 위해 분골쇄신하겠사옵니다. 그것이 결국 대당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고, 폐하를 위하는 길이라 사료되옵니다.”
무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같은 영걸을 내 곁에 둘 수 없다니, 하늘이 어찌 이리도 무심하오? 나는 왜 이렇게 인복人福이 없어서, 곁에 천하의 영재가 있는 것을 보고도 얻을 수 없단 말이오?”
무 태후는 진정으로 탄식해 마지않았다.
“마마, 대당 조정과 낙양궁 및 낙양성을 천하의 인재들이 구름같이 둘러싸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 썩어빠진, 군자연君子然하는 작자들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나를 백안시하며 은근히 멸시하고 있는데.”
무 태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거듭 거듭 탄식했다.
“믿을 놈 하나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데, 그대는 어찌 나의 이 외로운 정황을 몰라주오?”
무 태후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조영이 마음을 진정시킨 후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 밤 내가 그대를 시험해 보았소.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대 같이 준수하고 진실하며 충직한 영웅을 나는 도저히 밖으로 내 보낼 수가 없소. 여기서 사흘 동안 지내며 결단을 내려주오. 만일 그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그대를 평생 내 곁에 그냥 머물게 하고 싶소.”
“마마,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사람이란 마음을 얻어야만 하는 법이옵니다. 억지로 곁에 둔다고 하여 위안이 되는 건 아닙니다.”
“어찌 하면 내가 그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소? 그걸 말해 보시오.”
“황공하옵니다. 제 요청을 수락하시는 것이 제 마음을 얻는 길이옵니다. 하오나, 저 같은 필부의 마음을 얻어 마마께 무슨 유익이 있사오리까?”
“그런 말 마오. 나는 그대에게 반했소.”
무 태후의 마음이 몹시 외로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 곁에 미남 승려 회의가 있었으나, 그는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했다. 그녀가 추측하건대, 회의도 일편단심 그녀만을 생각할 위인은 아니었다.
‘젊고 혈기방장한 남자가 어찌 나이 환갑이 넘은 늙은이를 좋아하겠는가?’
이것이 그녀의 심사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훗날 회의의 여자관계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던가 보다.
외로운 그녀 앞에서 조정과 황가의 모든 사람들은 그저 벌벌 떨거나 비위를 맞추느라 아양을 떨어야 했다. 태후는 그게 더욱 역겨웠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인물은 가차 없이 숙청하고, 누가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밀고가 들어오면, 사실 여부를 캐기 전에 그의 일가족은 몰살당했다.
대신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무 태후는 폭정, 폭압, 학살의 공포정치를 통해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뭇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아 자신의 외로움을 잊으려 했으나, 그럴수록 외로움은 점점 가중되었다.
바로 이 때 조영을 만난 무 태후는 이 동이족 고려인 젊은이의 정직하고 온후한 인품과 고상한 절개, 기오한 기질에 크게 반한 나머지, 그를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굳게 결심했던 것이다.
무 태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탄식했다.
“그대가 어찌하여 대당大唐의 땅, 내 곁에 태어나지 않고 저 동이족 고려 왕실의 핏줄로 태어났단 말인가?”
“마마, 어찌 인간이 탄생의 시기와 장소뿐만 아니라, 출생의 여부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사오리이까?”
대답하고 보니 우답愚答인지라 조영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사해가 한 혈통이요 형제라고 했으니 어디에 태어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만난 것 자체가 몇 겁을 지나도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인연이 아니던가? 그대는 어찌 이런 소중한 인연을 거부하는가?”
“마마, 그건 제 분수를 알기 때문이옵니다. 통찰해주소서.”
무조, 무 태후는 말없이 조영을 응시하다가, 한 마디 던진 후 조영을 홀로 방에 남겨두고 방에서 물러나갔다.
“내가 젊다면, 사흘 아니라 삼십년이라도 그대를 기다리고 싶소. 부디 좋은 답을 주시오. 편히 쉬고.”
조영은 호흡으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불을 끄지 않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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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10. 28.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