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김재희
하얀 그림자
산속을 굽이굽이 돌아 너머에 있는 작은 학교, 그 학교 옆엔 사택이 있었고 그 사택 앞에는 두레박으로 퍼 올려야 하는 우물이 있었다.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 할 소녀 시절에 결핵을 앓았던 나는 휴학을 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바깥출입이란 겨우 그 우물가에 들랑날랑하는 정도였다.
누군가 우리 집에 오는 날엔 작은방에 숨어 있어야 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다는 건 누가 보아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낮에는 방에 처박혀 책이나 보고 있었고 밤에만 잠깐씩 바깥바람을 쐬곤 했다. 한동안 그렇게 유령처럼 살았다.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선홍색 각혈이 그리 두렵지는 않았었다. 다만 그런 나를 멀리하는 사람들로 인해 받은 상처가 더 벌건 상처가 되어 대인기피증을 앓았다. 그저 사람 만나기가 싫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서러웠던 날이 많았다. 그런 날엔 근처의 산 밑에 자리한 저수지를 찾아가곤 했다. 교실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신나게 놀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며 한바탕 울고 나면 하얀 백지장처럼 마음이 개운해졌다.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앉아 있노라면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물너울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때로부터 혼자여도 외롭지 않았다.
붉은 꽃무릇이 한창 어우러지는 계절엔 하늘이 그지없이 맑다. 그런 날은 배낭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초가을 산머리에 걸친 구름이 아름다워서 그 구름을 만나러 간다. 산바람은 얼마나 상큼하던가. 그런 날은 심호흡을 더 깊게 해본다. 가슴이 뻐근해서 짜릿할 정도로 깊게 들이마신 공기를 뱉어내면 폐 속의 오물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다. 그럴 땐 내 폐가 깨끗하다 못해 하얗게 변할 것 같았다.
꽃무릇이 피어나면 산을 찾고 싶은 것은 왜일까. 왜 하필 험한 산속을 걸어가며 헉헉대는 것일까. 아무리 힘들어도 고통이라기보다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그 사실이 내 삶의 윤활유가 되었다. 초가을 맑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을 보고 있으면, 깊은 산속의 맑은 바람을 흠뻑 들이마시고 나면 꽃무릇 같은 선홍색으로 멍들었던 폐가 하얗게 깨끗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지통幻脂通이라고 했던가. 나는 아직도 가슴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명한 핏빛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날들의 집념이 나를 좀 더 나은 삶 속으로 이끌어 간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 펜으로 새 삶을 그려나간다. 누군가 옆에서 웃으면 덩달아 따라 웃으며 행복을 나눠 갖고 누군가 손을 내밀면 마지못한 척 손을 잡고 따뜻한 체온을 받는다. 그렇게 받은 체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려고 슬쩍 시도도 해본다.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나 혼자 민망해서 헛웃음도 웃는다. 그렇게 나를 키운다.
붉은 자국 밑에 어리는 하얀 그림자, 굳어져 석회가 되어버린 그 하얀 그림자가 홀로서기를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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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 | 전북 정읍 출생으로 2002년 《수필과비평》,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으로 등단했다. 행촌수필문학상, 수필과비평문학상, 전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그 장승이 갖고 싶다》, 《꽃가지를 아우르며》, 《하늘밥》, 《쉬어가는 물레방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