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 : 1 - 8절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기도”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라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아르헨티나 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르헨티나 하면 메시만 아는데 이런 영적으로 훌륭한 분도 알고 있으면 좋습니다. 이 분이 쓴 책 중에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합니다.”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기도를 기쁨으로 하지 않고 노동처럼 생각하고 율법처럼 생각을 해서 하게 되면 잡동사니 우편물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고, 우리가 지난주에 확신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믿음의 확신 없이 반복적으로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그런 잡동사니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주인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종인 것처럼 요구하고 간청하고 떼를 쓰는 것은 올바른 기도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과 기도는 하나님께 설명하는 시간이 아니라 대화하는 시간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을 당하고 있다면 사실 기도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음이 굉장히 언짢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 상달되어지는 기도가 있고 그렇지 못한 기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보다 겸손하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원칙들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 말씀 끝부분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던 부분인데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가 욥바에서 여러 날을 있게 되는데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머물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6절에도 다시 한 번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무두장이는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가죽을 유통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직업이 얼마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천대를 받았냐면 가부장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에서는 여자가 먼저 이혼에 대한 소송을 제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두장이의 아내에게는 허용이 됐을 정도로 무두장이를 천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룻다에서 팔 년된 중풍병자를 고치고,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였기 때문에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 원하기만 하면 보다 더 좋은 집에서 머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베드로가 천대 받고, 멸시 받았던 무두장이 집에 머물렀던 것을 보면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서 그들의 집에 머물렀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모습이기 때문에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물렀던 베드로를 보면서 도전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에는 고넬료라는 이방인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달리야라는 표현이 있는데 지금의 이탈리아를 말하는 것이고 로마의 총독을 보호하기 위해서 파견되어 있던 중대장급의 장교였습니다. 그런 고넬료에게 4절 말씀에 보면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이런 감격적인 내용을 하나님의 사자가 환상 가운데 나타나서 고넬료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상달되어진 기도는 절대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를 않습니다. 어리석은 우리가 잊어버렸으면 잊어버렸지 하나님께 상달되어진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가 된다는 사실을 믿고서 기도를 했을 때 우리의 기도가 보다 더 갈급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소망 있는 기도가 될 수 있고 믿음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얼핏 한 번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 지방에서 사역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왔는데 애들도 있고 하니까 당장 차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차를 한 대를 구입을 했는데 30만짜리 차를 구입을 했습니다. 외관상으로 보면 거의 폐차 직전의 차였는데 사모님도 운전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차라면 사고가 나도 우리 차는 수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과감하게 구입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수첩에 적어 놓고 “저렴한 차를 구입했지만 차가 사고 나지 않고 수리비 많이 들지 않고 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수첩에 적어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한 일 년 정도 타면 본전을 뽑겠다 싶었는데 거의 4년 정도를 탄 것 같습니다. 더 탈 수 있었는데 다른 차가 생겨서 눈물을 머금고 폐차를 시켰습니다. 한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사실 한 번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차에 여러 가지 이상한 증상들이 나타나서 ‘카센터에서 진단을 받아보고 수리비가 많이 나오면 폐차를 시켜 버리자.’ 이런 생각으로 카센터에 갔는데 카센터에서 몇 가지를 만져 보더니 아주 가볍게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돈 한 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우연한 기회에 기도 수첩을 보면서 한 1년 전에 기도 했었던 기도 제목이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몇 번 기도하고 잊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별것 아닌 기도 제목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얼마나 기쁘면서도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이 말씀 한 마디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또 능력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지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고넬료 같은 경우 그의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었냐면 일단은 2절 말씀에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기뻐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 차례 은혜를 나누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을 하고, 우리를 심판하실 심판자 하나님이심을 인정을 하고, 우리를 빚으신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왕이신 것을 인정을 하며 그와 같은 믿음으로 살았고 그와 같은 믿음으로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하지 않으시고 기뻐 받으시고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기도하면 이런 기대는 크게 가지면서도 고넬료처럼 정작 가져야 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믿음이 천국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어설픈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간절하고 갈급한 믿음이 되려면 지옥에 대한 확신도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뜨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천국에 대한 환상만 가지고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항상 기도하는 습관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지혜를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고넬료가 했던 기도만 하나님께 상달된 것이 아니라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들이 자신의 실력이고 공로 때문이라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오만방자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청지기로 삼아서 맡겨 주신 은혜이고 이 은혜를 나누고 베풀기를 원하시는 구나.’ 이런 겸손한 마음을 품고서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제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보여 드려야 할 열매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하나님에게만 보여 드리겠다는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고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습관을 반드시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황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사람들에게 구제를 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구제는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살았던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이방인의 삶과 기도를 기억하셨다가 응답을 하시는 귀한 은혜를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헛된 기도가 되지 않으려면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구제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기도하는 습관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도 잘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또 다른 창조물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존귀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려면 교회에서 보여 주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불쌍한 영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작은 신음조차도 상달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고넬료처럼 항상 기도하여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기도자, 그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어서 항상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