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신라 석탈해 왕, 日 바다-의술의 神
오늘 이야기는 신라의 제4대 왕 석탈해(昔脫解) 이야기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기이>편에 실린 석탈해에 대한 기록과 일본 역사 기록을 비교하며 어쩌면 그가 예(濊; 초기 한반도 동부의 부족국가) 출신이 아닌가를 추측한다.
석탈해는 <가락국기>에서는 키 3척의 난쟁이로, <기이>편에서는 9척 7촌의 거인으로 기록하고 있어 혹시 서로 다른 척도가 아닐까 조사했지만, 지금의 척의 크기(30.3cm)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결론한다.
결국 작가는 석탈해는 1미터 남짓한 어린아이 정도의 키로 추정한다.
<가락국기>에는 김수로가 금관가야국을 세운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석탈해가 나타나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고 하여 둘이 술법으로 겨루기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석탈해가 매로 둔갑하자 수로가 독수리로, 참새가 되자 매로 변하여 석탈해는 할 수 없이 항복하고 바다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둘 사이에 치열한 왕권쟁탈전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기이편>의 기록을 살피며 수로왕이 나타나기 전까지 구지벌(지금의 김해 평야)는 혹시 석탈해와 관련 있는 땅이 아니었을까를 알아본다.
<기이편>에 실린 이야기는 이러하다.
가락국 바다에 어떤 배가 나타나자 수로왕이 백성과 함께 그를 머물게 하려 하자 배는 아진포(경북 영일만 포구)로 달아났다.
그 배 위에 까치 떼가 가득 모여 지저귀자 아진의선 할미가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자 큰 상자 안에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와 노비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유리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57년 6월), 23년 재위 후 돌아갔다. 그의 키는 9척 7촌이었다.
여기에서 작가는 까치 ‘작(鵲)’은 예 ‘석(昔)’과 새 ‘조(鳥)’의 두 자로 이루어졌으므로 바로 석탈해와 그 세력(까치 떼)를 의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鳥’의 새김 ‘새’는 고대어로 <시>, <수>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무쇠의 옛말이 <새>, <시>, <쉬>이므로 제철 기술 집단을 암유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석탈해가 사실 철기 제조 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석탈해 스스로가 자기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라고 주장했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단다.
탈해 니사금은 62세에 즉위했으며 성은 석(昔), 이름은 토해(吐解)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다파나국(多婆那國) 태생이다.
그 땅은 왜(倭)국 동북 1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나라 왕이 여인국(女人國) 왕의 딸과 혼인하여 아이를 가진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알을 버리라고 했다.
아내는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알을 비단으로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로 띄웠고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그러나 이를 괴이하게 여긴 그 나라 사람들은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경북 영일만 포구)에 당도하게 되었다.
신라의 혁거세가 나라를 연지 39년 되던 해였다. 바닷가의 노인이 궤를 여니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키우니(그가 석탈해가 되었다),
키가 9척으로 자라났고 잘 생기고 지식이 뛰어났다.
유리 니사금이 돌아가자 왕위에 올라 왜국과 친교를 맺고 지냈다.
이렇게 하나의 사실이라도 역사책에 따라 서술이 다른 것은 자기 나라 왕을 서로 미화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시마네반도와 노토반도 등 동해 쪽 해안 일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금껏 사랑받는 난쟁이 신이 있다.
바다의 신이자 의술의 신인 스쿠나비코나다.
「일본서기」는 그의 이름을 한자로 소언명(少彦名)으로, 「고사기」에는 소명비고나(小名毘古那)로 표기하고 있다.
새 날개로 옷을 해 입은 이 난쟁이 신이 어느 날 배를 타고 와 이즈모에 상륙한다.
그가 소남(少男)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성인이지만 아이처럼 작은 몸매의 남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난쟁이 신은 나라를 다지는데 힘쓰다가, 어느 날 홀연히 영원한 나라 상세국(常世國)으로 떠버린다.
「풍토기」에도 같은 신으로 보이지만 이름이 다른 신이 등장한다.
그 신은 신라에 남아도는 자투리땅인 곶을 밧줄에 매어 살살 끌어당겨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는 유명한 신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 국수주의자 구미에 잘 맞았는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어김없이 실렸다고 한다).
신라의 곶이란 요즘의 영일군과 포항시 일원을 가리킨 것 같은데, 작가는 이곳 사람들이 정권 변동에 의해 일본에 망명한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로 또 비약한다.
어쨌든 신라의 석탈해와 「일본서기」의 난쟁이 신, 「풍토기」의 줄다리기 신 모두가 동일 인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된다.
석(昔)의 우리식 운독은 ‘예’이다.
이는 고대국가 예(濊)와 같은 음이다.
탈해의 성을 석(昔)이라고 한 것은 어쩌면 예(濊) 계통의 고대 한국인임을 시사한 것은 아닐까?
뛰어난 항해술과 튼튼한 배를 지닌 해양 부족 예(濊)가 한반도 남부의 바닷길로 해서 일찌감치 일본에 진출한 것을 아닐까?
그리고 일본기록과 한국 기록상의 인물이 모두 탈해왕 동일인이라면, 그는 키 3척에 머리 둘레 1척이라는 가락국기의 기록이 맞다.
이것은 일본의 신들이 한국의 고대 실존 인물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일 고대 역사서의 비교를 통해 뜻밖에도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작가의 글은 우리가 읽어도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당시 이 책을 일본에서 출간했을 때, 일본인들의 아우성이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이분의 박식함과 노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30년 전쯤에
최인훈 장편소설 <화두>
작가 최인훈 선생(1936-2018)의 소설 <광장>은 아마도 고등학생의 필독 도서였을 것이다.
남북한의 이념 대립과 갈등, 그 가운데 주인공이 한국전쟁을 퉁해 파멸해 가는 과정이 줄거리다.
이 책은 그후 20년 만의 걸작이라고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