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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발굴·복원 ‘구수산 여(제)단’ 이해
(송은석)
1. 프롤로그
2. 구수산
3. 여제를 모시는 제단, 여(제)단
4. 무사귀신을 위로하는 제사, 여제
5. 여제 봉행의 현대적 의미
6. 에필로그
프롤로그
2025년 4월 대구 북구 읍내동에 구수산공원이 개원했다. 구수산은 대구 북구 칠곡지역 중앙에 자리한 작은 산이다.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긴 구수산을 기준으로 가운데는 읍내동, 동쪽은 동천동, 서쪽은 관음동, 남쪽은 태전동, 북쪽은 학정동이다. 최근 실시된 구수산 일대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구수산 북쪽 정상부 일원에서 고려시대 절터와 조선시대 여(제)단 유적 등이 확인됐다. 현재 절터는 주춧돌을 지상에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복원됐고, 여제단 유적은 발굴 유구 등을 바탕으로 여제단을 복원했다. 복원된 구수산 여제단은 조선시대 칠곡도호부 여제단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복원한 여제단이다. 흔히 ‘역병(전염병)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잘못 알려진 여제단. 과연 여제단이 어떤 곳이며, 이곳에서 행해진 여제라는 제사가 어떤 제사였는지 알아보자. 동시에 전통 여제 봉행이 갖는 현대적 의미도 함께 알아보자.
구수산(龜首山)
팔거천을 향해 머리를 내민 거북머리산
구수산은 대구 북구 칠곡 중앙에 자리한 해발 75.6m의 낮은 야산이다. 야산임에도 칠곡 관련 옛 문헌과 지도에도 등장하고, 칠곡의 풍광을 읊은 시에도 자주 등장하는 등 칠곡의 중요한 산이자 칠곡의 명승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대구 칠곡이 신도시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구수산은 지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2010년 구수산에 ‘구수산도서관’이 개관하면서 구수산이란 이름이 다시 지역민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구수산(龜首山)이란 이름은 ‘거북 머리 산’이란 뜻이다. 산 모양이 거북이 물을 마시기 위해 머리를 쑥 내민 모습을 닮아 구수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실제 하늘에서 내려다본 구수산은 북쪽으로 팔거천 물을 마시기 위해 머리를 내민 거북 모습을 닮았다. 구수산은 남북으로 약 1km, 동서로 약 200-300m로 남북으로 길쭉하다. 구수산에는 두 개의 고개가 있었다. 동쪽 동천동과 서쪽 읍내동을 연결하는 ‘대천고개’와 ‘야시고개’다. 현재 구수산은 구수산 도서관 앞 대천로를 기준으로 남·북 두 개의 산으로 나눠져 있다. 북쪽 산은 ’대천산(帶川山·大川山)‘, 남쪽 산은 ’칠성산(七星山)‘ 혹은 ’제봉산‘으로 불렸다.
칠곡사람들에게 누이 같은 산
과거 칠곡사람들은 구수산과 팔거천(八莒川)을 기준으로 동쪽 지역을 ’팔거들‘, 혹은 들이 넓어 ‘만마지기들’이라고도 불렀다. 칠곡사람들에게 있어 팔거들은 그야말로 복지(福地)였다. 남북으로 더없이 넓은 들에다 서쪽에는 큰 걸인 팔거천, 동쪽에는 작은 걸인 반포천(反哺川)까지 있어 물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구수산 서쪽 관음동 ‘고평들’은 팔거들에 비해 들도 작고 물도 귀해 농사짓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 이 고평들 물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 바로 구수산이었다. 1963년 관음동 주민들이 1년 노력 끝에 구수산 북쪽 끝단에 조성한 ‘궁숭암 관개수로’가 그것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구수산 동쪽 동천동·구암동 사람들은 칠곡시장, 칠곡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반포천·팔거들·팔거천을 건넌 뒤 구수산 ‘대천고개’ 또는 ‘야시고개’를 넘어야 했다. 동천동 자연부락이었던 대천·들말 여인들은 구수산 동쪽 팔거천변에 있었던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다. 또 구수산 인근 주민들은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가족들의 복을 빌 일이 있으면 구수산 북쪽 ‘궁숭암’이나 남쪽 ‘칠성덤이’를 찾아 촛불기도를 올렸다. 근대에 와서는 구수산 남단에 오스트리아 여인 ‘엠마 프라이징거’ 여사가 개원한 ‘칠곡가톨릭피부과병원’이 30년 넘게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며 전국적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렇듯 구수산은 오랜 세월 칠곡 사람들의 애환과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누이 같은 산이었다.
여제를 모시는 제단, 여제단(厲祭壇)
조선시대 전국 330여 고을에 설치한 ‘3단(壇)1묘(廟)’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명으로 전국 330여 모든 고을에 ‘3단(壇)1묘(廟)’를 설치했다. 3단은 토지신과 곡식신 제단인 ‘사직단(社稷壇)’, 고을 수호신인 성황신 제단 ‘성황단(城隍壇)’,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무사귀신(無祀鬼神) 제단인 ‘여제단’이다. 1묘는 향교에 있는 공자 사당 ‘문묘(文廟)’다. ‘3단1묘’는 도성을 비롯한 전국 모든 고을에 반드시 설치해야 했던 국가공인 제사 공간이자 그 지역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런 만큼 고을수령은 부임 초기 먼저 ‘3단1묘’를 찾아가 살펴야 했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각종 제사는 수령의 중요한 책무였다. 이처럼 ‘3단1묘’를 설치하는 이유에 대해 『중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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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제사는 만물이 땅에서 살며 곡식을 먹기 때문이고, 문묘의 석전(釋奠)과 석채(釋菜)는 옛 성인과 성현이 백성들을 위해 가르침을 세웠기 때문이며, 성황단과 여단은 (고을을 지키는) 성황신에게 발고(發告)하여 제사 없는 귀신들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종실록 36년(1541)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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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담장 안, 네모꼴 제단
제사를 모시는 시설은 제사의 대상이 ‘사람신’인가 ‘자연신’인가에 따라 형태에 큰 차이가 있다. 사람신에 대한 제향처는 지붕과 벽 등을 갖춘 집 형태의 ‘사당’인 반면, 천신(天神)·지기(地祇)와 같은 자연신에 대한 제향처는 공중과 사방이 완전히 노출된 ‘제단(祭壇)’ 형태다. 그런데 여제단은 ‘무사귀신’이라 칭하는 사람신에 대한 제사 시설임에도 사당이 아닌 제단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여제단을 ‘영성단(靈星壇)’과 같게 하라는 조선시대 ‘단묘(壇廟)’ 규정 때문이었다. 국조오례서례 「길례」 ‘단묘도설(壇廟圖說)’을 참고하면 영성단 모습은 여타 제단들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가운데 정사각형 제단이 있고, 제단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 각각 3층 계단이 있다. 제단 주위에는 남북 방향으로 조금 긴 직사각 형태의 낮은 담장인 유(壝)가 있고, 유의 네 방위에는 4개의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또 여제단 주위에는 신위판(神位版)을 모신 신실(神室)과 제관이 머무는 재소(齋所), 제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 같은 부속 시설도 있었다.
무사귀신(無祀鬼神)을 위로하는 제사, 여제(厲祭)
국가에선 소사(小祀), 지방에선 주현제(州縣祭)
유교 국가 조선은 예치(禮治)를 통한 국가 운영을 중요시했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 소개된 많은 종류의 조선시대 제사는 이전과 비교해 이름과 절차 등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대부분 이전부터 있었던 제사였다. 이는 이전에 행해진 제사 중에서 유교 예법에 맞지 않는 제사를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이 음사를 유교 예법에 맞춘 유교식 제사로 다시 정비한 결과였다. 대표적인 예가 여제다. 여제는 조선 개국 이전부터 행해졌던 불교·도교·무속 등의 각종 기양제(祈禳祭·재앙은 사라지고 복이 오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한데 묶어 ‘유교화·관권화’ 한 것이었다. 국조오례서례에는 국가 제사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국조오례서례 제사의 구분과 종류
| 대사(大祀) | 사직(社稷)‧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 |
| 중사(中祀) | 풍운뇌우(風雲雷雨)‧악해독(嶽海瀆)‧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문선왕(文宣王)‧역대시조(歷代始祖) |
| 소사(小祀) | 영성(靈星)‧노인성(老人星)‧마조(馬祖)‧명산대천(名山大川)‧사한(司寒)‧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마제(禡祭)‧영제(禜祭)‧포제(酺祭)‧칠사(七祀)‧독제(纛祭)‧여제(厲祭) |
| 기고(祈告) | 사직(社稷)‧종묘(宗廟)‧풍운뇌우(風雲雷雨)‧악해독(嶽海瀆)‧명산대천(名山大川)‧우사(雩祀) |
| 속제(俗祭) | 문소전(文昭殿)‧진전(眞殿)‧의묘(懿廟)‧산릉(山陵) |
| 주현(州縣) | 사직(社稷)‧문선왕(文宣王)‧포제(酺祭)‧여제(厲祭)‧영제(禜祭) |
이중 ‘대사·중사·소사·기고·속제’는 임금 또는 임금을 대신한 중앙 관료가 제주(祭主)가 되어 서울에서 행하는 국가 제사이며, ‘주현제’는 지방 고을 수령이 제주가 되어 지방에서 행하는 국가공인 지방 제사다. 하지만 국가 제사나 지방 제사나 상징적 제주는 임금이었다. 지방에서 행해진 주현제 역시 고을 수령이 임금을 대신해 모시는 제사였기 때문이다.
위 제사 중 ‘사직·문선왕·포제·여제·영제’는 대사·중사·소사에도 들어있고, 주현제에도 들어 있다. 이중 ‘포제·여제·영제’는 백성들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재앙을 막거나,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는 제사다. 여제를 예로 들면 도성에서는 임금을 대신한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 당상관이나 한성부 당상관이, 지방에서는 고을 수령이 제주를 맡았다. 이처럼 ‘포제·여제·영제’가 도성은 물론 지방 주현제에도 들어 있는 것은 임금의 어진 정치가 제사라는 형식을 빌려 도성은 물론 전국 330여 모든 고을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포제·여제·영제는 서울과 지방 모두에서 행해진 중요한 제사였다.
불쌍한 혼령 무사귀신(無祀鬼神) 15위
무사귀신은 ‘자손이 없어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사람신’을 말한다. 유교에서는 ‘혼승백강(魂昇魄降)’, 다시 말해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아래로 내려가 흩어지는 것을 완전한 죽음으로 보았다. 그런데 비명횡사 등의 이유로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달랐다. 그들의 혼백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이 땅에 남아 있으면서 산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본 것이다.
여제는 중국에서 유래됐다. 여제의 목적은 제사를 받지 못해 여귀(厲鬼)가 된 귀신이 역병·가뭄 같은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고대로부터 유래된 중국의 여제는 명나라 초에 이르러 유교 제사로서 모습을 갖췄다. 이때 중국은 여제의 대상이 되는 무사귀신을 12위로 정했다. 중국의 무사귀신 12위를 그대로 도입한 우리나라는 조선 세종 때 기존 12위에 3위가 더해져 무사귀신이 15위로 늘어났다. 다음은 춘관통고에 나타나는 무사귀신 15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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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칼에 맞아 죽은 자, ②맹수와 독충에 해를 당해 죽은 자, ③수화나 도적을 만나 죽은 자, ④얼고 굶주려 죽은 자, ⑤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 ⑥전투에서 죽은 자, ⑦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 ⑧위급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 ⑨형화를 만나 억울하게 죽은 자, ⑩담이 무너져 압사한 자, ⑪천재나 역질을 만나 죽은 자, ⑫죽은 뒤에 자식이 없는 자, ⑬난산으로 죽은 자, ⑭벼락 맞아 죽은 자, ⑮추락하여 죽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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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사귀신이 12위에서 15위로 늘어나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세종실록(세종 26년(1444) 10월 1일)에는 당시 인순부윤(仁順府尹·조선 초기 왕실 세자 관련 관서의 장)이었던 박연(朴堧)이 난산(難産)으로 죽은 자를 여제 신위에 추가할 것을 건의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와 관련해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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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성 부윤이 북교(北郊·여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데 (중략) 꿈에 한 여자가 온몸에 피를 흘리며 와서 하소연하며 말했다. “북교의 제단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에게 제사 지내 준다는 말을 듣고 여기 와서 술과 음식을 먹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국법에 아기를 낳다 죽은 귀신에게는 제사 지내지 않는다며, 성황신이 꾸짖어 금하고 받아들여 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와서 하소연합니다.” 그 말을 듣고 깨어나 임금에게 아뢰니 이로부터 아기를 낳다가 죽은 자의 위패도 배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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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들을 통해 조선시대 행해진 수많은 국가 제사 중 여제만의 독특한 특징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먼저 여제가 무사귀신을 막고 쫓아내는 제사가 아니라 반대로 그들을 적극적으로 불러 위로하는 제사란 점이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백성뿐만이 아니라 죽은 원혼들도 다 임금의 백성이니 임금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좋은 예로 국조오례서례에 실려 있는 ‘도성여제제문(都城厲祭祭文)’과 다산 정약용이 곡산 부사 시절 고을 여제를 지내면서 지은 제문인 ‘곡산여제단위제문(谷山厲祭壇慰祭文)’을 들 수 있다. 다음은 ‘도성여제제문’ 중 일부다. 흥미로운 것은 도성 여제의 제문은 ‘제문’이 아니라 임금이 내리는 ‘교서(敎書)’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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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예부터 지금까지 나라 안의 ‘불행하게 죽은 자(不得良死者)’를 염려한다. (중략) 이들의 종류는 그 수를 다 알 수가 없다. 외로운 혼들이 의지할 곳이 없고 제사도 받아먹지 못하여 달 아래에서 슬피 울고 바람이 몰아칠 때면 통곡한다. 이러한 음혼(陰魂)들이 흩어지지 않고 맺혀서 요망한 기운이 되어 말을 만들어냄이 이에 이르니 참으로 측은하다.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성 북쪽에 단을 쌓고 구역 내의 무사귀신을 위해 두루 제사를 지내 주고자 한다. 이에 그곳 성황신으로 하여금 모든 혼을 소집하고 이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바라건대 너희 모든 신들은 어둡지 않음을 바라고, 벗들을 이끌고 짝들을 불러 모아 와서 이 음식을 누리고(來享飮食), 여재(厲災)를 끼쳐 화기를 상하게 하지 말라. 유명(幽明)의 세계가 감통하여 온 나라가 평안하게 되기를 바라노라. 조용히 교서(敎書)를 내려 알리니, 너희는 마땅히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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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다산 정약용의 「곡산여제단위제문(谷山厲祭壇慰祭文)」의 일부분이다. 참고로 제문이 지어진 시기는 1799년(정조 23년) 1월로,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해 사망자가 많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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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아, 그대여! 나의 강토를 네가 지키니, 어서 물 뿌려 청소하여 신께서 배부르시게 하라” 하시기에, 살찐 희생(犧牲)을 바치고 좋은 술을 올리니, 신이시여! 꿈틀꿈틀 무리를 이끌고 너울너울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셔서 음식을 드시고 기뻐 뛰면서 연락(宴樂)을 즐기소서. 신이시여! 똑똑히 들으시오. 나는 왕명으로 삼가 그대의 시신을 묻어주고 그대의 자손을 기를 테니, 그대는 괴로움과 억울함을 풀고 재앙과도 같은 이 병을 거두어 영원히 우리나라를 도우시어 만물이 순조롭지 않음이 없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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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선시대 행해진 수많은 제사 중 여제는 좀 특별난 제사였다. 여제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여제의 대상이 되는 무사귀신 15위가 모두 그 지방 수호신인 ‘성황신’의 통치하에 있다는 점이다.
무사귀신 15위를 통치한 성황신(城隍神)
여제에서는 다른 제사에서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절차가 있다. 바로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다. ‘성황발고제’는 여제 3일 전 해당 고을 성황단에서 행하는 일종의 고유제(告由祭)다. 앞으로 3일 뒤 여제단에서 여제를 올릴 계획이니, 성황신에게 여제의 대상이 되는 이 지역 무사귀신 15위를 모두 여제단으로 불러 줄 것을 요청하는 절차다. 이는 여제의 대상이 되는 무사귀신 15위가 그 지방 수호신인 성황신의 통치하에 있다는 도교의 ‘성황신앙’에서 유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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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교에서 성황신은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으로 죽은 자에게 저승으로 가는 증명서 발급을 담당한다.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기 전 일정 기간 성황묘에 머물며 성황의 관할 아래에 있게 된다. 이처럼 성황은 저승의 신으로 인식되어, 여제에 초대될 신들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G. 프르너 저, 조흥윤 옮김, 『중국의신령』, 정음사 1984, 139-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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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신은 고을 수호신으로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다. 마을 단위 성황신, 고을 단위 성황신, 심지어 국가 단위 성황신도 있었다. 도성에서 행하는 여제에서는 국가 성황신을 모신 도성 성황단에서 발고제를 행하고, 지방에서는 고을 성황신을 모신 고을 성황단에서 발고제를 행했다. 성황신 위패는 평소에는 성황단에 두었다가 여제를 지낼 때는 여제단으로 위패를 옮겨 여제를 지냈다.
여제를 지낼 때 성황신과 무사귀신 15위의 위치도 흥미롭다. 성황신 신위는 여제단 위 북쪽에 남향으로 설치했다. 반면 무사귀신 15위는 여제단 위가 아닌 여제단 남쪽 아래 바닥에 설치했다. 이때 동쪽에 6위, 서쪽에 9위를 설치하는데 가운데를 바라보며 남북으로 길게 설치했다. 성황신과 무사귀신 15위 위패는 모두 나무로 만든 위패였다. 다만 도성의 경우 정기 여제 외 부정기적으로 행한 별여제(別厲祭) 때는 북교(北郊) 여제에서는 나무 위패를 사용하고 기타 삼교(三郊)에서는 지방(紙榜)을 사용했다. 성황신 위패에는 ‘모주(某州) 모현(某縣) 성황신(城隍神)’이라 적었고, 무사귀신은 15위를 모두 각각 설치한 경우도 있고, 무사귀신 15위를 합쳐 그냥 ‘무사귀신’이라 설치한 예도 있다.
여제 봉행 절차
여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황발고제’와 ‘여제’ 두 번의 제사로 이루어져 있다. 여제는 제사일이 정해져 있는 정기 제사로 매년 청명, 7월 보름, 10월 초하루에 지냈다. 두 제사의 봉행 절차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진설(陳設)→사배(四拜)→삼상향(三上香)→전작(奠爵)→독축(讀祝)→철변두(撤籩豆)→사배(四拜)→예필(禮畢)→망료(望瘞)
성황단에서 행하는 성황발고제는 엄밀히 말하면 성황신을 모시는 제사가 아닌 성황신께 어떠한 상황을 알리는 고유제다. 3일 뒤 여제를 봉행할 예정이니 성황신에게 무사귀신 15위를 여제단에 불러 줄 것을 청하는 의례다. 따라서 성황신에게 이러한 사유를 담은 ‘축문’(고유문)을 읽는 행위가 중심이 되며, 술잔도 세 번 올리는 삼헌(三獻)이 아닌 한 번만 올리는 단헌(單獻)으로 절차가 간략하다.
여제(厲祭)
○성황신(城隍神) : 사배(四拜)→삼상향(三上香)→초헌례(初獻禮)→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
○무사귀신(無祀鬼神) : 전잔(尊盞)→독축(讀祝)→철변두(撤邊豆)→사배(四拜)→분제문(焚祭文)→예필(禮畢)
여제의 본 제사 역시 크게 두 절차로 나눠진다. 먼저 여제단 위에 모신 성황신에게는 술잔을 세 번 올리는 정상적인 삼헌(三獻)을 행한다. 이후 단 아래 모신 무사귀신에게는 헌관 1인이 연달아 잔을 세 번 올린 후 축문(제문)을 읽는 것으로 예가 끝난다. 이처럼 여제에서는 성황신이 아닌 무사귀신 신위에 술잔을 올린 후, 무사귀신에게 독축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이는 고을 수호신이자 무사귀신 15위를 통치하는 성황신을 여제의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무사귀신은 성황신 아래에 있는 종향(從享), 그야말로 여귀(厲鬼)로 응대한 까닭이다. 술잔을 올리는 것도 성황신에게는 ‘전작(奠爵)’, 무사귀신에게는 ‘전잔(奠盞)’으로 격에 차이를 뒀다.
또한 여제에서 읽는 글은 ‘축문’이 아닌 ‘제문’이다. 참고로 다산 정약용이 작성한 ‘곡산여제단위제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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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늘이 재앙을 내려 백성들이 병들어 죽어가네. 따뜻한 봄이나 얼음 어는 겨울철에 뱃속이 결리고 코가 막히네. 음려(陰沴)가 서쪽에서 오니 그 빠르기가 역말과 같은데, 괴상한 올빼미는 낮에 울고 훈호(訓狐)는 밤에 울었네. 우리 노인과 소아를 죽게 하여 들것이 길가에 깔려 있네. 슬프다! 이 노약자들은 걸리면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지 못하네. 어떤 아낙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한밤에 목 놓아 울부짖고 누렇게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이 마구 울었네. 목민관으로서 자애롭지 못해서 구원의 손길 뻗지 못하니 나는 부끄러워 옷에 때가 낀 것 같도다.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아, 그대여! 나의 강토를 네가 지키니 빨리 물 뿌리고 소제하여 신께서 배부르게 하라.’ 하였네. 살찐 희생을 드리고 향기로운 술을 올리오니 신이시여! 길게 구불구불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노닐며 마음껏 음식을 드시고 기뻐 뛰면서, 연회를 즐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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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전폐례(奠幣禮·신에게 폐백을 올리는 예)와 ‘음복례(飮福禮·신으로부터 복주를 받는 예)’가 없다. 전폐례와 음복례가 없는 이유는 첫째, 여제의 대상인 무사귀신이 임금이 받들어 모셔야 하는 신령스런 신이 아니라는 점. 둘째, 여제가 신명(神明)에게 복을 바라는 제사가 아니라, 반대로 임금이 여귀를 위로하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제는 혼령을 ‘떠받드는 제사’가 아니라 임금의 명으로 혼령에게 ‘위로의 잔치를 베푸는 제사’였다. 여제에서 절을 하는 횟수는 사배(四拜)다. 사배는 조선시대 모든 국가제사에 공통적으로 적용된 배례법이다.
변두(邊豆) 제사
여제를 비롯한 ‘단묘’에서 지내는 각종 제사는 제기(祭器)와 제수(祭需)가 민간의 제사와는 완전히 다르다. ‘단묘’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는 이름도 생소한 ‘변·두·조·보·궤·형·작·대준·희준·상준·착준·산뢰’ 같은 것들이다. 이 중에는 (대)나무 등으로 만든 소박한 제기도 있지만, 흔히 놋쇠로 불리는 황동으로 만든 유기그릇도 있다. 특히 제수의 물리적·상징적 특성을 고려해 만든 각종 유기그릇은 그 화려함이 예술품에 가깝다. 제수 역시 민간 제사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제수의 조리 여부다. 민간에서는 곡류·육류·어류·나물류 등을 열을 가해 익히거나 조리해 사용한다. 그러나 여제는 다르다. 곡류·육류·어류·나물류 등 모든 제수를 익히거나 조리하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 사용한다. 이는 예기에 나오는 ‘혈(血)·성(腥)·섬(爓)·숙(熟)’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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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血)·성(腥)·섬(爓)·숙(熟) : 제례(祭禮)에서 신(神)에게 올리는 고기의 익힘 정도를 나타내는 말. 고례(古禮)에는 격(格)이 높은 제사일수록 익히지 않고 생(生)으로 사용하는 것을 관행(慣行)으로 생각하였다. 예기(禮記)「교특생(郊特牲)」에 “교(郊)[천신(天神)에 대한 제사]에서는 희생(犧牲)의 피[혈(血)]를 올리고, 대향(大饗)[종묘·사직·문묘·서원의 제사]에는 날고기[성(腥)]를 올리고, 삼헌(三獻)의 제사에는 데친 고기[섬(爓)]를 올리고, 일헌(一獻)의 제사에는 익힌 고기[숙(孰·熟)]를 올리는데, 이것은 지극히 공경하는 제사는 맛으로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라 기(氣)와 냄새를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고 하였다. 예기(禮記)「예기(禮器)」에도 보인다. 예기(禮記)「교특생(郊特牲)」에 “옛날 유우씨(有虞氏)[순(舜)임금]의 제례에서는 제물로 생기(生氣)가 강한 것을 좋은 것으로 여겼다. 즉 희생(犧牲)의 피, 날고기 또는 약간 데친 고기 등 생기(生氣)가 강한 것을 존귀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의 가례보의(家禮補疑)에 “태고(太古)에 불이 널리 사용되지 않을 때는 생육(生肉)을 먹었기 때문에 제사에 생육을 썼으나, 후세에 불이 널리 사용된 뒤에는 익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예(禮)에 삶고 구워서 올리는 것이 있다[後世 火化之後 則用熟物 故禮有烹燔之薦].”고 하였다.
(전통예학용어해설사전, 이원균·송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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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제수는 맛이 아니라 생기(生氣)를 귀하게 여기므로, 생기(生氣)가 강한 희생의 피[혈]→날고기[성]→데친 고기[섬]→익힌 고기[숙] 순으로 제수의 등급을 매긴 것이다. 또 여제에는 민간 제사와 달리 제상에 수저가 올라가지 않는다.
여제 봉행의 현대적 의미
여제단과 여제는 지금도 존재하고 행해지고 있다
형식과 모습이 달라졌을 뿐 무사귀신을 추모하는 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국 시·군 단위별로 세워져 있는 수많은 충혼탑을 들 수 있다. 충혼탑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시설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물론 이름 없이 사라져간 무명용사들도 함께 추모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구에는 근래에 조성된 공간도 있다. 월성동 ‘상인동 지하철 가스폭발 사고 위령비’, 성내동 ‘지하철 중앙로역 방화 사건 추모벽’ 등이다. 이들 추모 공간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특정 일자를 정해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비록 형식과 모습은 다를지언정 예기치 않은 불행한 죽음을 맞은 혼령을 지역 사회 전체가 함께 위로한다는 점은 여제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여제 봉행은 600년 내력의 전통문화 계승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유산·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와 ‘사직대제’(국가무형문화유산)는 60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매년 봉행된다. 특히 사직제는 서울을 비롯한 사직단이 복원된 전국 10여 곳의 사직단에서도 매년 사직제를 봉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전통문화 계승’이라는 긍정적 시각과 함께 ‘사라져야 할 미신, 전근대적 문화’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하지만 ‘종묘제례·사직대제’는 종교나 미신이 아닌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소중한 전통문화로 바라봐야 한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현재의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는 문화적 가치에 있다. 선조들이 오랜 세월 힘들게 지키고 가꿔온 전통문화는 그 자체로 문화적 가치가 있다. 따라서 현재 세대는 선조들이 남긴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해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필로그
구수산공원은 대구 북구 칠곡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칠곡의 중심부라는 지리적 조건과 칠곡의 다양한 역사·문화적 배경을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현재 구수산 정상부에는 조선시대 칠곡도호부 여제단이 복원되어 있다. 조선시대 여제단 중 발굴을 통한 복원으로는 국내 최초이자, 국내 유일의 여제단이다. 여제단은 조선시대 전국 330여 모든 고을에 세워졌던 국가 제사시설인 ‘3단1묘’ 중 하나다. 이 중 여제단은 후손이 없거나 비명횡사 등으로 사후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불쌍한 혼령, 이른바 ‘무사귀신(無祀鬼神)’을 위한 제사 공간이다. 그것도 임금의 명을 받든 고을수령이 직접 지냈던 국가공인 ‘제사’였다.
현재도 여제단과 여제에 해당하는 문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전국 모든 시·군 단위에 설치되어 있는 충혼탑이 대표적이다. 특히 우리 대구에는 두 번의 지하철 대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추모시설이 있다. 바로 이러한 추모시설과 추모의식이 조선시대 ‘여제 문화’의 현대적 변형이요, 변신이라 할 수 있다.
여제는 종교나 미신이란 관점에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600년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소중한 전통문화로 바라봐야 한다. 여제는 지금이라도 누군가 계승하지 않으면 사라질 운명에 처한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대구 북구 칠곡 구수산에 여제단이 복원됐다. 앞으로 이곳에서 고증에 충실한 전통 ‘여제’까지 행해진다면 아마도 구수산 여제단은 전국 유일의 ‘여제 문화’ 성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방 읍치의 여단은 혼령과 살아 있는 존재가 조우하고, 임금과 신료, 지방관과 지역 엘리트 및 고을 백성이 회합하는 장소이자, 중앙의 제도화한 의례가 민간신앙과 교차하던 장소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읍치의 여제 의례와 여단의 장소성」, 전종한, 문화역사지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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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국조오례의, 「여제의」, 「주현여제의」
대한예전, 「여제의」
김해영, 조선초기 제사전례 연구, 집문당, 2003
이원균·송은석, 전통예학용어해설사전, 전통예학연구회
김유리, 「조선시대 여제 설행과 무사귀신의 문제」, 한국역사민속학회, 2016
이태경, 「정조대 국행의례로서 여제의 설행과 수령 규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1
전종한, 「조선시대 읍치의 여제 의례와 여단의 장소성」, 문화역사지리, 2024
최진아, 「조선시대 설행된 여제의 제장연구」, 목원대학교,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