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신앙심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전교 연설을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수업을 받고 빌렘을 수행하여 해주, 옹진 등 지역을 순회하며 전교 활동을 벌였다. 전교활동의 과정에 황해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일반대중의 교육수준이 저급함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문명개화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하여 마련된 것이 '천주교대학'의 건립운동이다. 천주교신앙과 문명개화를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신부와 주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뮈텔(Mutel 민덕효) 주교
안중근이 구상한 대학 설립의 계획은 뮈텔(G. Mutel, 민덕효)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단호하게 거절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대학설립의 승낙을 얻고자 계속 설득해 보았지만, 끝내 외국인 신부들이 반대함으로써 대학설립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교회는 점차 확장되어 교인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황해도에만 여덟 분의 선교사가 머물고 있었다. 나는 그때 홍신부(빌렘신부 - 저자) 에게서 프랑스말을 몇 달 동안 배웠다. 그리고 홍신부에게 이런 의견을 말했다.
"지금 한국의 교인들은 학문에 어두워 교리를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앞날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 합니다. 민주교(뮈텔주교 - 저자)에게 말씀드려 서양 수사회에서 박학사 몇 분을 청하여 대학교를 세운 다음, 나라 안의 유능한 자제들을 뽑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계획을 세운 다음에 홍신부와 함께 곧 서울로 올라가 민주교를 만나보고 그 의견을 제시했으나 민주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데 소홀해 질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나는 두 번, 세 번 권고해 보았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음으로 어찌 할 수가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분함을 참을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교의 진리는 믿을 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은 믿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리고 프랑스 말을 배우던 것도 중단하고 말았다. (주석 5)
외국인 신부와 주교는 한국인들에게 천주교신앙은 가르쳐도 교육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포들의 참상을 지켜본 안중근의 학교설립제안도 냉정하게 거부하였다.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데 소홀해진다"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한국인들의 근대화 내지 변화에 대한 프랑스 신부들의 부정적 시각을 확인한 안중근은 이후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오로지 전교에만 관심을 가졌던 외국인 신부들의 종교적 가치관과 자신의 민족적 의식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명맥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 지언정 외국인 신부들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그로 인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수개월 동안 배우던 프랑스말도 중단하고 말았다.
(주석 6) 안중근은 프랑스 말을 중단한 것과 관련하여 뒷날 자서전(<안응칠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벗이 묻기를, "왜 배우지 않는가"하기로, 대답하기를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고, 영국말을 배우는 자는 영국의 앞잡이가 된다. 내가 만약 프랑스말을 배우게 되면 프랑스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를 폐하였다. 만약 우리 한국이 세계에 떨친다면 온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우게 될 것이다. 자네는 이를 염려하지 말게."라고 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안중근에게 천주교대학 설립의 좌절은 깊은 충격을 안겨주고 외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하였다. 나라는 점차 기울어가고 있는데 백성들은 배우지 못하여 그런 사정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안중근은 몇 해 뒤에 결국 학교를 건립하였다. 안중근은 '천주교대학'설립 문제로 주교, 신부들을 불신하게 된 데도 불구하고 천주교 자체를 부정하거나 신앙생활에 태만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신앙생활은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고, 차츰 사회성과 역사의식과 접목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 안태훈 형제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였다. 이들은 청계동에 천주교 본당의 축성 공사를 하여 산골마을에 상당한 규모의 성당을 세웠다. 그리고 1898년 4월 빌렘신부를 초청하여 성당을 맡겼다. 청계동 성당은 황해도에서 두 번째 가는 큰 규모의 성당이 되고 빌림은 주임 신부가 되어 교목의 책임을 맡았다. 이에 따라 청계동 성당은 황해도 포교사업의 지휘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주석
5 - <안응칠역사>, 40쪽.
6 - 장석흥, <안중근의 대일본인식과 하얼빈의거>, <교회사연구>제16집, 39~40쪽, 2001.
뮈텔(Mutel 민덕효)주교는...
뮈텔 주교는 1890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교구장으로 재임, 한국천주교회를 이끌었다.
안의사는 청계동에 사목방문한 뮈텔 주교를 해주까지 수행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실한 천주교도인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를 용납하지 않고 안의사 순국시 빌렘 신부의 여순행도 반대하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