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그락쿠스 형제와 그 어머니 코르넬리아에 대하여 얘기하였지요. 로마 공화국의 기백이라고 할까요, 불굴의 용기로 로마 공화국의 갱신에 신명을 다 바친 청년 그락쿠스 형제의 삶,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이 이 경우보다 더 실감나는 예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기원전 역사이니만큼 그락쿠스 형제의 행적에 대하여는 사실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 세기 정도 지나 플루타르크가 전하는 얘기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하에서는 그에 기초하여 그락쿠스 형제와 그 가족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머니 코르넬리아에 대하여 보충해 보겠습니다.
수업 시간에 설명한 대로, 포에니 전쟁 후, 세계 제국의 정점에 올라선 로마는 공동체 정신과 사회 기강에서는 오히려 문란해지고 몰락해 가게 됩니다. 지중해 세계의 정복으로 부와 자원들이 넘쳐나는데, 전장에서 돌아 온 다수의 평민 병사들이 마주한 것은 빈곤과 수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플루타르크는 "들짐승들도 몸을 누일 굴이 있는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공기와 햇빛뿐"이라는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의 사자후를 전하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와 가이우스 그락쿠스, 로마 헌정의 개혁의 선두에 선 형과 아우는, 결국 약 10년 간격으로 차례로 로마 공화국의 제단에 목숨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락쿠스 형제는 상류층의 토지 겸병과 독점을 제한하고 평민들을 위한 토지 분배 곡가 안정을 추진하고,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여 로마인들의 배타적 특권을 완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득권층의 요람인 원로원의 비상결의에 의해 무참하게 격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반대파의 음모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티베리우스 그락쿠스는 민중들이 집회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연히 광장으로 나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살해의 모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무장하기를 거부하고 역시 광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가이우스 그락쿠스의 부인은 남편을 부둥켜 안고 만류하며, "오, 당신은 지금 티베리우스 그락쿠스(형)를 죽인 이들에게 당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는 당하는 편이 옳겠지만, 당신의 죽음은 나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서럽고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플루타르코스(천병희 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로마가 만든 영웅들, 도서출판 숲, 2006, 121쪽]
이후 로마 공화국의 미래는 결국 폭력에 저당잡히고, 장군들에 의한 내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로마 헌정의 개혁이 폭력에 의하여 좌절된 이상, 다른 해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편 그락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로마인들의 어머니의 상징으로 꼽힙니다. 그 자신 역시 명문가 출신이었던 코르넬리아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 전념하였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기원 전 시대 12명의 아이들 가운데 살아 남은 아이들은 그락쿠스 형제와 누나 셈프로니아 3남매였습니다. 그락쿠스 형제는 로마가 자랑하는, 로마에서 가장 탁월한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셈프로니아는 카르타고와의 최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마의 명장 (소)스키피오(대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의 제2차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고, 여기의 소 스키피오는 그 손자가 됩니다)의 부인이 됩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요. (소)스키피오는 바로 그락쿠스 형제가 넘어서려고 했던 기득권층의 대변자였습니다. 스키피오는기득권층이 퍼뜨린 소문, 즉 티베리우스 그락쿠스가 참주가 되려한다는 누명을 오히려 기정사실화하면서, 그런 행동을 하는 자는 누구든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살해를 두둔한 것이었습니다....
혹시 자기 처남인 그락쿠스가 로마 민중의 희망으로 떠오르는 것을 시기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로마 유력 가문 남성들 사이의 '명예'를 위한 경쟁은 굉장하였다고 합니다. 혹자는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에 대한 헌신도 매형인 스키피오와의 라이벌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이후 스키피오 자신도 그 후 침실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부인이자 그락쿠스의 누이인 셈프로니아가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코르넬리아의 덕성과 아름다움은 로마 제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코르넬리아에게 청혼을 하였다고 합니다. 코르넬리아는 왕비의 왕관을 거부하면서 동방제국의 왕관보다 공화국 시민의 어머니가 더 자랑스럽다고 했다고 합니다. '로마 여성의 자부심'은 왕비의 황금보다 높았던 것입니다.
두 아들의 비참한 죽음을 겪으면서 코르넬리아는 나폴리만의 해안가로 이사하여 남은 평생을 학문과 손님 교우로 마쳤다고 합니다. 코르넬리아는 방문객들이 아들에 대하여 물어볼 때,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마치 옛 영웅들에 관하여 얘기하듯, 아들들의 행적과 운명을 얘기하였다'고 합니다. 그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그녀가 '노망이 들거나', '너무 큰 슬픔에 총명이 흐려지고 불행에 둔감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그에 대하여 플루타르크는 다음과 평하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가이우스 그락쿠스 평전의 맨 마지막 구절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고매한 성품과 좋은 가문과 훌륭한 교육이 슬픔을 이기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되며, 운명이 불행을 물리치려는 미덕의 노력을 압도할 수는 있어도, 불행을 담담하게 참고 견디는 힘마저 우리에게서 빼았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둔감한 이들인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앞의 책, 34쪽)
참으로 심금을 울리는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인간의 참된 덕목과 위엄에 대한 여러 명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만, 이 구절도 참으로 빛나는 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이후 스토아 철학의 등불을 미리 밝혀 놓은 듯합니다.
아래는 코르넬리아의 일화에 대한 그림들인데, 먼저 이집트 프톨레미의 왕이 바치는 왕관을 뿌리치는 그림이고, 그 다음은 보석으로 치장할 것을 권유하는 이에 대하여 '나에게는 이 아이들이 바로 보석이랍니다'며 사양하는 그림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File:Laurent_de_la_La_Hyre_001.jpg)
(http://en.wikipedia.org/wiki/File:Halle_CorneliaMotherOfTheCracchi.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