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조모(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감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김수환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金永錫) 요셉이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니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 역시 배우자의 믿음만 보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 와서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던 아버지는 소년 수환이 아직 어린 나이인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셨다. 성품이 곧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며 더 엄하게 자식들을 키웠다.
3살 차이가 나는 형 김동한(金東漢) 신부와 어머니는 유년 시절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초등부 5, 6학년 과정)에 갈 때까지 서로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형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두 형제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너희 둘은 이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는 말씀을 꺼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
(「샘이 깊은 물」1984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시절(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
동성학교 시절 민족혼을 일깨우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면 울분이 치솟았다. 그래서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의 명령을 받게 된다.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중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 (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결국 시편 51편에서 찾아낸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 13살 나이에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되었다.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렸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그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사제서품식 후 어머니와 함께(1951. 9. 15) ]
사제 수품 후 곧바로 안동성당(지금의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1953년 4월 대구대교구장 비서, 1955년 6월 김천성당(지금의 대구대교구 황금동성당)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은 안동성당과 김천성당을 합쳐 3년이 채 안되지만 김 추기경은 이때를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절’로 회상하곤 했다.
1956년에는 독일 뮌스터대학 유학길에 올라 은사이신 요셉 회프너 추기경을 만나게 된다. 김 추기경은 회프너 추기경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는데,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무렵 광부와 간호사로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건너온 한국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한편 유학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소식을 접하면서,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공의회를 통해 자성하고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회가 사회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체험은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귀국 후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로, 그는 다른 어떤 사제보다 먼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공의회 관련 외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그는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의 사설(社說)을 지면에 자주 실었다. 이 무렵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근본정신인 ‘변화와 쇄신’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한국 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창세기 12장 1-4절).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부분을 묵상하던 1966년 3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김수환 신부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着座式)은 1966년 5월 31일 완월동 성지여중고 교정에 열렸다. 김수환 주교가 사목표어로 택한 말씀은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이 문구를 훗날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할 때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해석을 조금 고쳐서 그대로 사용했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인의 삶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무시할 때 ‘저 사람은 우리 밥이야!’라는 표현을 쓴다. 주님은 그 정도로 당신을 낮추고 비우면서까지 우리 밥이 되어 주셨다. 나 역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어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환 주교는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대 사회적 발언을 한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968년 4월 어느 날, 김수환 주교는 그의 표현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는다.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은퇴한 노기남 대주교에 이어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이다.
마산교구의 초대교구장으로 주교직에 오른 지 2년밖에 안 된, 주교단에서도 제일 막내였기에 그의 머릿속에 맴돈 말은 ‘왜 하필 내가?’라는 반문뿐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서울대교구는 해결해야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상황이었다.
1968년 5월 29일 명동대성당에서 엄숙히 거행된 교구장 착좌식에서 김수환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는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한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힘만으로는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착좌할 수 있는 것은 저를 이 자리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인도를 믿는 신앙심과 신자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 때문입니다. …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하느님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는 우리사회의 요구를 명심합시다”
(명동대성당, 교구장 착좌식 1968. 5. 29).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추기경 반지를 받고 있다(로마 베드로 대성당, 1969. 4) ]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장 생활을 한 30년 동안 교회는 발전을 거듭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당시인 1968년 말 서울대교구의 규모는 본당 48개, 공소 63개, 신자 14만 명이었다. 30년 후인 1998년 말에는 본당 203개, 공소 6개, 신자 125만 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제44차 세계 성체대회 장엄미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여의도 광장, 1989. 10. 8)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다. 현재 국내외 원조사업과 백혈병 어린이돕기, 골수·제대혈기증, 장기기증, 국내입양운동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 ‘굶주리는 북녘동포를 생각하는 옥수수죽 만찬’(1997. 4. 12) ]
[ 민족화합의 대미사 후 도라산 역 전망대에서(2003. 6. 22) ]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그 믿음 때문에 추기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베풀었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추기경이 우선순위를 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서울대교구장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성탄 미사를 함께 드리기도 했다.
양평동 철거민촌 ‘복음자리’ 성탄성야미사 후(1977. 12. 24)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사회와 개인을 구원하여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위한 싸움에서 미움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때문에 불의를 보고 분노하며 자신의 개인적 안락과 미래까지도 포기하면서 정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는 이들도 이 민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 민족 사회가 결코 미움과 대립의 사회가 되지 않고 사랑의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분들도 먼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9일 기도 메시지, 1986. 3. 9)
지학순 주교의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 현장에 함께 한 김수환 추기경(1974. 7. 23)
교회의 지도자이자, 사회의 큰 어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였다.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생을 두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을 지배하는 큰 주제는 ‘인간’이었다.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존재를 바치는 모범을 보여준 스승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절대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른 항해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관심은 도시빈민· 탈북주민?·국인 노동자?·매매 여성·미혼모·무주택자 등 매우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 1979. 4. 24 영등포 교도소 미사 ] “우리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진실한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세상이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이 내 안에서 나고,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영등포 교도소 미사 강론, 1980. 4. 24)
[ 사형수들을 위한 미사강론 ]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는 여러분이나 저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세상사람 모두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수라는 처지가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죽음의 운명을 쓰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서울구치소 사형수들을 위한 미사강론, 1999. 7. 2.)
[ 1983. 1 미얀마 아웅산 참변 희생 100일 추모 미사 ] “미얀마의 수도 랭군에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이 폭사할 때 하느님도 함께 폭사하셨습니다. 그 기막힌 죽음의 쓴 잔을 하느님도 함께 마셨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계시다가 죽음의 순간에는 물러서고 마는 그런 하느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당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함께 매달리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분들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역시 함께 계셨습니다.” (아웅산 참변 희생자 100일 기일 미사강론, 1984. 1. 15)
[ 1985. 8. 27~29 사북 탄광에서의 현장 체험 ] 추기경은 가난한 사람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 생활 체험, 즉 아시아 사회 주교 연수회(BISA)의 일환으로 사북 탄광을 찾았다. “피상적으로 듣고 보았던 현실보다 현장의 어려움은 너무 심각했습니다.…교회의 제반 여건이 그들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거리가 멀어진 삶을 살고 있어 현장 생활 체험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는 우리 주교 자신들에게 커다란 반성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인가 자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주교는 물론 성직자?평신도들에게까지 현장 생활 체험이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가톨릭신문, 1985. 9. 15 인터뷰)
[ 1989. 2. 19 ‘막달레나의 집’ 방문 ] “추기경님은 막달레나의 집 식구들이게 행복하고 건강하라는 덕담과 함께 오천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누구에게든 똑같이 오천 원씩 주었다. 그러자 식구 한 명이 문제 제기를 했다. ‘추기경님, 이건 좀 불공평해요. 애들도 오천 원, 어른은 좀 더 주셔야죠.’ 추기경님은 눈이 안보일 정도로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한테는 자네들이 다 어린아이라네.’”(《막달레나, 막달래나?》에서)
추기경은 매춘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 복귀를 도와주고 있는 ‘막달레나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막달레나의 집을 운영하는 이옥정씨는 추기경이 방문하던 날에 대하여 “들뜬 마음으로 추기경님을 맞이했는데 옷차림이 좀 이상해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근엄하고 깔끔한 모습과는 달리 후줄그레한 감색 점퍼에 구김이 심하게 진 허름한 바지를 입고 나타나셨다. 동행자라곤 딱 비서 한 명뿐이었다.”라고 적었다. (《막달레나, 막달래나?》에서)
“올바른 사랑의 실천으로 에이즈를 예방하고 감염자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사회적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에이즈 연맹 창립2주년 기념 조찬회 격려사, 1995. 7. 7.)
[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미사 ] “필리핀의 전 대통령이신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연초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미사를 드리겠노라고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여러분들은 고향과 가족을 두고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나라인 한국으로 떠나 왔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첫 미사 강론, 1994. 4. 24.)
[ 1988년 장애인 올림픽 ] “성화를 여기 밝힌 목적은 장애자 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이가, 나아가 우리 사회의 모든 이가 이 횃불처럼 장애자에 대한 사랑의 불을 밝히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횃불은…저 자신의 해석일 수 있겠습니다만…장애자들이 자신들이 겪는 시련을 용감히 극복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밝히고 있는 희망과 사랑의 등불입니다.” (장애인 올림픽 성화 명동성당 안치 및 장애인을 위한 미사 강론, 1988. 10. 15)
남북한 장애인 걷기 본부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장애인 73명에게 보장구 및 생활 보조금을 전달하였다. 총재인 추기경은 격려사를 통해 “보장구나 성금을 보내는 일 그 자체보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의식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사랑의 보장구 보내기 전달대회, 1994. 4. 12.)
「세계의 장애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사회와 교회에서의 장애인 소외 현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회가 언제 참된 인간다운 사회가 되느냐?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때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극복’ 프로그램진행자 김연종 박사와의 대담, 1996. 5. 4.)
[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 “우리는 외양으로는 그럴싸하게 화려하게 큰 집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가 좀 더 정직하였더라면, 좀 더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었더라면,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루가 9,25)고 하신 복음 말씀대로 인간과 인간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강론, 1995. 7. 16.)
[ 일본군 위안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 ]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금년 1월 10일부로 일본의 무라야마 수상에게 편지를 쓴 일이 있습니다. 편지 내용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국가로서 개인 배상을 하지 않고 민간 모금으로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할 방침을 세운데 대하여 강력히 유감의 뜻을 표한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여성을 전쟁터에 강제로 끌고 가서 강간을 일삼은 것은 분명히 윤리와 도덕에 반하고 여성에 대한 더할 수 없이 큰 모독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인권 유린입니다.…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범한 모든 반인륜적·반도덕적 죄를 깊이 인식하고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일본은 참된 의미로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고 일본 자신도 큰 나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 미사 강론, 1995. 12. 4.)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명의 가치가 사라져 가는 것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오늘날 불행하게도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 낙태가 그렇고 교통사고로 죽는 건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이 그렇고, 이보다 수적으로 더 많아지는 자살이 그렇다. 생명 존엄과 그 가치를 모르면 이는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 존중, 인간 사랑이 없는 곳엔 삶의 가치도, 의미도 없다. 이런 사회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다. 우리는 지금 생명이냐, 죽음이냐 갈림길에 서 있다. 참으로 깊이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생명은 어머니 뱃속 잉태 순간부터 시작되고 작은 배아도 인간이다. 생명운동이 전 교회와 사회로 확산되길 바란다“
(명동대성당, 2005. 12. 4 생명미사 축사).
추기경 김수환.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겨운 벗이자 착한 목자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혜화동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과 힘있는 강론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
[訃告] 김수환 추기경 선종(善終)
천주교 서울대교구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이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향년 87세. 김 추기경의 빈소는 명동대성당에 마련됐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추모메시지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 빛과 희망이 되어주셨다”며 “평소 추기경님께서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마음을 모아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고 기도해 달라”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 겸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정진석 추기경, 의료진, 김 추기경님 비서인 백성호 신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며 “추기경님께서 ‘고통스럽지 않냐’는 주위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기위해 노력하셨다”고 전했다.
또 허 신부는 “추기경님께서 2-3일전부터 ‘나는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시며 문병 온 신부님 수녀님들께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전했다.
평소 생명나눔을 강조했던 김 추기경은 지난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기증 의사를 밝힌 바 있어, 선종 후 각막기증이 이뤄졌다
▣ 김수환 추기경 선종
□ 선종일시 : 2009. 2. 16(월) 오후 6시 12분
□ 빈 소 : 명동대성당
□ 입 관 : 2009. 2. 19(목) 오후 5시
□ 장례미사 : 2009. 2. 20(금) 오전 10시 집 전 : 정진석 추기경과 서울대교구 사제단 공동집전
□ 장 지 :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지 내 성직자 묘역
□ 추도미사 : 2009. 2. 22(일) 낮 12시 명동대성당/ 집전 : 정진석 추기경 2009. 2. 22(일) 낮 12시 용인 성직자 묘역/ 집전 : 염수정 주교
[앵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김수환 추기경이 오늘 오후 향년 87세를 일기로 선종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유해는 안구적출 후 명동성당으로 운구됐습니다.
강남성모병원에서 김혜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한국 천주교회의 큰 목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오늘 선종했습니다.
향년 87세입니다.
지난해 9월 11일 서울 반포동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 김수환 추기경은 다섯 달이 넘는 투병생활 끝에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오늘 오후 6시 12분 선종했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과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도 임종 직전 김수환 추기경의 병실에 도착해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 선종 직후인 오후 6시 30분에 김수환 추기경의 병실 앞에서 선종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허영엽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은 어제 저녁부터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졌으며, 최근에 “항상 기도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평생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항상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덧붙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 후 생전의 약속대로 장기기증을 실천하기 위해 안구를 적출했습니다.
이어 병실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는 미사가 봉헌됐습니다.
그리고 9시 15분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와 강남성모병원 원목실장 최정진 신부, 원목수녀들이 함께 한 가운데 엠뷸런스를 통해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까지 김수환 추기경의 병실이 있는 강남성모병원에서 PBC NEWS 김혜영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유해...명동성당에 안치
고 김수환 추기경의 유해가 오늘 밤 9시 15분 서울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을 출발해 조금전인 9시 40분쯤 빈소가 마련된 이곳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에 도착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유해는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과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그리고 명동성당 주임 박신언 몬시뇰을 비롯해 교구청 사제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유해는 명동성당 대성전 제대앞 유리관에 안치됐고 분향과 기도 등 안치 예절이 진행됐습니다.신자들의 조문은 안치 예절이 끝나는 대로 바로 가능하다고 장례위원회는 밝혔습니다. 다만, 밤 12시에 성당문을 닫고 내일 아침 6시경부터 조문이 다시 시작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이곳 명동성당은 현재 애도의 물결에 휩싸여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소식을 들은 신자들이 명동 성당에 속속 모여들고 있는 가운데 고인의 유해를 보기 위해 신자들의 애타는 기다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앞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저녁 8시 30분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의 기자회견을 통해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공식 발표했습니다.서울대교구는 정진석 추기경 명의의 선종 애도 메시지를 통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서 김수환 추기경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받아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빛과 희망이 되었으며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사랑과 평화의 사도였다고 애도했습니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외쳤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고 화해였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평소에 김수환추기경께서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마음을 모아 애도하고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집니다.김수환 추기경의 장례가 치러지는 닷새동안 명동성당에서는 매일 추모미사가 봉헌되고 명동성당 꼬스트 홀에서는 신자들의 위령 기도가 바쳐집니다.선종 나흘째 되는 날에는 고인의 시신을 안치하는 입관 예식이 진행되고 선종 닷새째인 오는 20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장례미사가 봉헌됩니다.
장례미사 후 고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은 경기도 용인시 서울대교구 묘지에 안장되고 장례미사후 사흘째 되는 날 명동성당에서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 미사를 봉헌한다고 장례위원회는 밝혔습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 "항상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앵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오늘 선종했습니다.
강남성모병원에 나가있는 김혜영 기자 연결합니다. 김혜영 기자!
[기자] 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오늘 선종했습니다.
향년 87세입니다.
지난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한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 반포동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한 끝에 오늘 오후 6시 12분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선종했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과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도 임종 직전 김수환 추기경의 병실에 도착해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조금 전 6시 30분 김수환 추기경의 병실 앞에서 선종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허영엽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은 어제 저녁부터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졌으며, 최근에 “항상 기도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평생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항상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덧붙였습니다.
현재 강남성모병원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소식을 접한 주교와 사제, 수녀, 신자들을 비롯해 언론의 발길이 이어져 어수선한 모습입니다.
서울대교구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함에 따라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오늘 오후 8시 30분 명동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구체적인 장례절차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오후 10시까지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을 명동성당으로 운구해 빈소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추기경의 시신이 명동성당으로 옮겨지면 장례가 치러지는 닷새 동안 매일 추모미사가 봉헌됩니다.
또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는 고인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하는 신자들의 위령기도가 바쳐집니다.
평화방송 TV와 라디오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기간에 추도미사와 장례미사를 전국에 생중계하고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낼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김수환 추기경의 병실이 있는 강남성모병원에서 PBC NEWS 김혜영입니다
.추모시 이해인(수녀.시인)
사랑의 길을 넓히고 떠나신 빛이시어 !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고 하늘이 투명했던 2009년 2월16일 마악 봄이 일어서기 시작한 이 땅에서 슬픈 소식을 전해 들은 많은 사람들이 당신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울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웠습니다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미덥고 따뜻했던 아버지가 안 계신 이 세상이 문득 낯설어 갈피를 못 잡고 서성였습니다
한국의 첫 추기경으로서 종파를 초월한 첫 사랑을 많이 받으신 추기경님 우리를 기쁘게 했던 환한 웃음과 유머 과분한 사랑을 받았노라고 나직이 고백하신 그 음성 당신을 힘겹게 했던 기침소리까지도 그립습니다 병상에서도 미소와 평화를 잃지 않으셨지요 매사에 최선을 다하시고도 늘 부족하다고 자책하셨지요 예수님을 닮은 사제가 되지 못했다고 좀 더 가난하게 살 용기가 부족했다며 부끄러워 하셨습니다 ‘고맙다’ ‘고맙다’고 되풀이하신 소박한 인사가 세상과 사람을 향한 당신의 마지막 화살기도였습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시고 마침내 길이 되어 하늘로 떠나신 분 시들지 않는 사철나무로 살아계실 분이시어 삶 자체로 ‘모든이의 모든 것’되신 넓은 사랑 아픔과 시련 속에 더 맑아지고 깊어진 당신의 영적 통찰력을 우리도 배우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라는 그 말씀 늘 잊지 않고 기억할게요 당신처럼 스스로 낮추는 겸손의 미덕을 우리의 가슴에, 삶에 새길게요
가톨릭신문 2009년 2월 22일자 특집면에 게제된 詩 입니다. 이 시를 다른곳에 옮기실때는 반드시 출처를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강론 (정진석 추기경)
오늘 우리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김 추기경님께서는 지난 16일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우선 입원 기간 동안 추기경님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주신 강남성모병원 의료진의 노고에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장례기간동안 김 추기경님을 위해 기도하고 조문해주신 모든 분들, 빈소를 지키며 봉사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추운 날씨에 몇 시간씩이나 조문 순서를 기다리며 추기경님을 위해 기도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장례 미사에 참석해주신 내외귀빈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미사동안 김 추기경님께서 늘 기도하신대로 우리의 세상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 추기경께서는 항상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빛과 희망이 되어주셨습니다. 김 추기경께서는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사랑과 평화의 사도’ 였습니다.
우리나라가 힘들고 어려웠던 때마다 김 추기경님의 존재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김 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안구를 기증하고 떠남으로써 착한 목자의 삶을 다하셨습니다.
김 추기경님은 한 사제이기전에 따뜻하고 상냥한 마음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세상에서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병원의 의료진에게도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방문객들에게는 항상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십시오”. 라는 말씀은 이제 다시 만나 뵐 수 없는 김 추기경님의 유언이 되었습니다. 이자리에 있는 우리는 김 추기경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본받아 감사하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2006년 2월 제가 추기경으로 서임되는 발표가 있었을 때 김 추기경님께서는 “이제야 다리를 뻗고 잘 잘 수 있게되었다” 며 기뻐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저는 그분이 평생동안 얼마나 큰 짐을 지고 살아오셨는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던 1970년대 김 추기경님이 짊어진 십자가가 무거웠고 풀어가야 할 숙제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 때 마다 김 추기경님은 피할 수 없는 모든 고난을 기도와 대화로 풀어갔습니다.
김 추기경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어도 쉽고 감동적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느 자리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건 인간과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진솔한 사랑과 체험을 바탕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들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를 꿰뚫고 하나의 주제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엄’입니다.
그래서 김 추기경님은 늘 입버릇 처럼 “적어도 인간으로서 정직하고 솔직하며 남을 존중하고 위할 줄 아는,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늘 역설하셨습니다.
또한 김 추기경님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김 추기경님의 사목 활동에서 우선수위를 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습니다.
그래서 김 추기경은 도시빈민들의 허름한 막사나, 노동자들의 시위현장을 가리지 않고 찾았습니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은 그분이 가진 가치관과 믿음의 실천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1971년 성탄미사에서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중에 정부에 대한 쓴 소리를 하는 용감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70~80년대 김 추기경님은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격동의 세월을 보내시느라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겪은 심적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입니다. 평생 고생하셨던 불면증도 그 때 생겼다고 합니다.
또한 김 추기경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소탈한 모습을 지니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항상 어린이처럼 해맑은 김 추기경님의 미소는 보는 이들의 마음도 훈훈하게 해주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회고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김 추기경님은 우리 가운데 성자처럼 사셨던 촛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김 추기경님은 한평생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봉사하신 사제였습니다. 자신보다는 교회와 신자들을 돌보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하며 사셨습니다. 사랑과 나눔을 우리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유산으로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슬픈 상황 속에서도 한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의 허무함과 슬픔은 어떠한 인간적인 언어로도 달래줄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비정하고 냉정한 현실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인생은 참으로 덧없고 허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이라는 부활 신앙 때문에 오히려 희망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매우 두렵고 엄청난 사건이긴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고린토 전서 15장의 말씀을 들어보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우리의 죽음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서 정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이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죽음은 곧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이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부활 신앙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 죽음이란 희망의 문턱이요 시작이라는 믿음을 갖고 사랑하는 김 추기경님을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위대한 목자 김 추기경님과 한 시대를 함께 살았다는 것에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김 추기경님의 명복을 빌면서 추기경님이 믿고 바라시던 대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2009년 2월 20일
추기경 정진석
김수환 추기경 유해, 소박한 삼나무관으로…
[앵커]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나흘째인 오늘 오후 입관예절이 진행됐습니다.
유리관에 안치됐던 추기경의 유해는 소박한 삼나무 관으로 옮겨졌습니다.
김혜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오늘 오후 4시, 나흘 동안 계속됐던 조문이 잠시 중단됐습니다.
그 시각 명동성당 대성전에서는 추기경의 유해가 안치됐던 유리관이 벗겨지고 염습이 진행됐습니다.
▶ [녹취 :허영엽신부] “신호등이 너무 많게 되면 시민들에게 불편을 드리기 때문에 신호등이 없는 쪽을 택하고 시민들에게 불편 주기 않기 위해 돌아가는 길을 정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유해는 내일 낮 1시 장지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고 오늘 묘지 땅파기 작업이 완료된다고 장례위원회는 밝혔습니다.
하관예절은 무덤축성과 하관예식을 이뤄집니다.
기도와 함께 성수를 뿌리고 향을 드리는 무덤축성후 정진석 추기경을 시작으로 흙을 뿌리며 하관예식을 마치게 됩니다.
묘비는 사제들의 일반적인 묘비와 같고 묘지가 조성된뒤 며칠 후에 세워집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에는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이를 위하여’가 새겨지고 이외에도 지인들에게 평소 넣어달라고 당부하신 시편 문구가 새겨집니다.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 홍보담당인 허영엽신붑니다.
▶ [녹취 :허영엽신부] “시편 23장 1절 그것을 묘비에 넣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유지를 받들어서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게 없어라 이런 대목이 들어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운구행렬과 하관예절은 이처럼 선종과 장례미사처럼 고인의 유지에 따라 검소하고 특히 겸손하게 진행됩니다.
[명동성당 꼬스트홀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PBCNEWS 서종빈입니다]
고별사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을 느끼며 추기경님과 모든 한국인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랫동안 서울의 가톨릭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추기경단의 일원으로서 여러 해 동안 교황에게 충심으로 협력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노고에 보답해 주시고 그분의 고귀한 영혼을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화로 맞아들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장례 미사에 모인 김수환 추기경님의 친족과 모든 분에게 주님의 힘과 위로에 대한 보증으로서 진심으로 사도의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2009. 2. 20 교황 베네딕토 16세
고별사
교황대사로서 저는 서울대교구 전 교구장이시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을 맞아, 서울대교구의 공경하올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과 사제들과 신자 공동체가 겪고 계시는 슬픔을 함께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교황님과 교황청과 각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또한 언젠가 “‘나는 그저 당신 양떼에게 ’비천한 종’일 뿐”이라고 저에게 하신 말씀과는 달리, 사제요 영적 지도자로서 당신에게 맡겨진 양떼에게는 충실하고도 선견지명을 갖춘 훌륭한 목자셨습니다. 김 추기경님께서는 당신 민족의 영적이고 물적인 안녕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생명과 인권,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정의의 충실한 변호자이셨습니다. 당신 민족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셨던 김 추기경님께서는 빛과 희망과 평화의 참된 횃불이셨습니다. 교구장 지위에서 물러나신 후에도 김 추기경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항상 낙천적이고 기쁜 모습을 보여주셨던 참 신앙인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당신의 전 생애와 영면을 통해서 당신이 참된 하느님의 사람이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황대사로서 저는 공경하올 김수환 추기경님의 영혼의 평화를 위한 기도 안에서 한국의 모든 가톨릭 공동체와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주님과 함께 일생을 지내신 그분께서는 주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무르실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와 함께 주님께서 김 추기경님을 영원히 사랑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2009년 2월 20일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추도사
사랑하고 존경하는 추기경님.
추기경님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놀랐습니다. 전국 각 교구의 성당과 빈소에 추기경님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밀려드는 인파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우들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의지하던 아버지 같은 분을 잃은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휑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성당으로 빈소로 모여와 몇 시간씩 기다리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리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명동만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바다 건너 제주에서 조차 조문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살이가 너무 어렵고, 희망은 안보이고, 어디를 봐도 의지할 데가 안 보이니, 추기경님의 떠나심이 더욱 안타깝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2년여 동안 추기경님이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 하시고 급속도로 체력이 약화되시다가 7개월 전부터는 퇴원도 못하신 채 계속 병실에 붙잡혀 계시니 참으로 애처로웠습니다. 갈수록 초췌해지시는 모습을 뵈면서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식사할 힘도 식욕도 없으시고, 소화도 안 되시고, 배설도 당신 뜻대로 안되시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신체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가셨습니다. 마침내는 영양이 부족하여 당신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하셨습니다.
화장실만은 당신 힘으로 가시려던 마지막 자존심마저 포기하시고 당신 몸을 온천히 다른 사람에게 내맡기셨습니다. 노환이라고는 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호흡곤란과 혈액 내 산소 수치 저하로 가쁜 숨을 몰아쉬시며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추기경님은 계속되는 육신의 한계 상황을 온 몸으로 겪어 내시며 정신적으로도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홀로 힘겹게 싸우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싸움은 저희가 아무도 도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추기경님 모습을 뵈면서 하느님께 투정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우리 추기경님 무슨 보속할 것이 그리도 많아서 이렇게 길게 고난을 맛보게 하십니까? 추기경 정도 되는 분을 이 정도로 족치신다면 나중에 저희 같은 범인은 얼마나 호되게 다루시려는 것입니까? 겁나고 무섭습니다.”
몇 주일 전에는 ‘주님, 이제 그만하면 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추기경님 좀 편히 쉬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지금 추기경님은 당신의 투병생활과 죽음을 통하여 경제위기와 사회불안으로 깜깜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국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특히 도산과 실직, 절망과 불안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모든 어려운 이들이 추기경님의 생전의 가르침과 행적에 희망을 찾고 용기와 힘을 얻으면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동으로, 전국의 성당으로 모여왔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있었기에 추기경님의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계시며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을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추기경님 말씀을 음미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은 이제 혜화동 할아버지가 아니라 한국의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추기경님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하신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 곁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주교직에 오르고 추기경직에 오르시며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의 밑바닥에서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큰 빚을 지고 사셨습니다. 연세가 높아지신 다음에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요 모양 요 꼴”이라고 탄식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바보야!’라고 읊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추기경님, 저는 믿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내 사랑하는 바보야! 그만하면 다 이루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평안히 가십시오, 추기경님.
그리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당신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사랑하셨던 우리 백성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여 주십시오.
많이 아껴주셨던 강우일이 인사 올립니다.
2009년 2월 20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
고별사
오늘 우리는 이 나라를 지탱해 온 큰 기둥이셨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가르쳐 준 큰 어른이셨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고 합니다.
추기경님의 선종을 온 국민과 함께 깊이 애도합니다.
작년 성탄절 날 저희 부부가 찾아뵙고 여러 말씀 나눌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습니다.
힘들어 찾아뵐 때마다 기도해주시고 용기와 격려를 불어넣어주신 추기경님의 숨결을 지금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가톨릭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서 항상 병든 자, 가난한 자, 약한 자와 함께 하셨습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소외된 노동자들 편에서, 때로는 불의와 부정에 맞서 정의를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민주화 시대에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편에서 권위주의에 맞서 정권의 압박을 맨 앞에서 온 몸으로 막아내셨습니다.
네편 아니면 내편이라는 이분법이 팽배한 요즘에는 타인을 존중하고 마음을 열고 대화할 것을 가르치셨고, 그러면서도 원칙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이 오만해지거나 부패할 때에는 준엄히 꾸짖으셨고, 시류에 휩쓸려 흔들릴 때에는 가야할 바른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힘없는 자에게는 한없이 인자하셨고, 가진 자와 오만 앞에서는 추상과 같으셨습니다.
추기경님 스스로도 ‘다시 살아보라고 해도 더 잘 할 자신이 없다’고 하실 만큼, 진실로 전력을 다해 살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추기경님의 선종을 슬퍼할 수만 없습니다.
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종으로 삼으신 것이 하느님의 뜻이셨다면, 님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도 뜻이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소중한 분을 데려가시면서,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변화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추기경님이 말씀과 행동으로 이 세상에 남기신 메시지는 감사, 사랑 그리고 나눔입니다.
빈손으로 오셨다가 사랑을 남기고 가신 추기경님은 이제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현재에 감사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 추기경님이 남기고 간 뜻을 받들어 서로 사랑합시다.
추기경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만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2009년 2월 20일 대통령 이 명 박
고별사
지극히 사랑하옵고 존경하올 추기경님,
저희는 요 며칠간 생생한 기적을 목격하였습니다. 끝없이 이어진 조문객들의 경건한 행렬을 보았습니다. 40만 가까운 군중이었습니다. 신문마다 김 추기경 신드롬이라 할 만큼 추기경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추기경님의 사랑의 바이러스, 나눔과 희생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입니다.
이 기적의 정점은 추기경님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당신의 각막을 기증하신 일이었습니다. 이 기증으로 두 사람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장기 기증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평소보다 장기 기증자가 5배나 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기적 이야기를 우리 모두 잘 압니다. 저 나름대로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갑자기 “펑”하고 터지면서 산처럼 솟아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당신 도시락을 옆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어 드셨습니다. 이를 보고 너도나도 옆에 있는 사람들과 자기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모두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이렇게 추기경님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주위 사람들에게 감염되어 기증자와 이에 따른 수혜자가 늘면 5천명이 빛을 보게 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느 장관께서도 추기경님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장기 기증서에 서명하셨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더욱이 우리 마음의 눈이 추기경님의 모범으로 열리게 된다면 이는 더 큰 기적입니다. 미움과 갈등과 욕심의 각막을 벗기고, 사랑과 화해와 희생의 각막을 이식하면 평화와 행복이 올 것입니다.
추기경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안심하십시오.
추기경님의 뜻을 따라 사랑의 향기를 온 세상에 뿌려
좋은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불쌍한 우리를 돌보아 주십시오.
당신의 온화한 웃음 때문에,
저희는 따라 웃기만 하다가
웃음 뒤에 숨겨놓은 불면의 30년,
당신의 그 속마음 헤아리지 못하였어도 올곧은 샘이시여!
이 땅에 퍼뜨린 당신의 바보 웃음의 향기에 우리도 취하게 하소서.
(詩 김형영)
2009. 2. 20 서울대교구 사제단 대표 최승룡 신부
고별사
지극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 추기경님,
추기경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어떠한 부당한 세력도 감히 범접 못할 겨레의 성지로 일궈 놓으신 명동 성당에서 모든 신자와 수많은 국민이 함께한 가운데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저희 마음은 한없는 슬픔으로, 그러나 동시에 기쁜 희망과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온 국민이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는 것을 보며 저희는 평생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우리 민족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요한 10, 10) 헌신하며 착한 목자의 삶을 사신 추기경님이 무척 자랑스럽고 고맙고, 그리고 이러한 목자를 우리 민족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추기경님께서는 당신 죽음까지도 도구삼아 우리와 모든 이를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는 영원한 사제요 선교사이십니다. 참으로 추기경님께서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같은(요한 12, 24 참조) 삶을 사신 분, 저희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신 희망의 증인이십니다. 오늘 추기경님께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면서 언젠가 저희도 하느님께 나아가 추기경님을 다시 뵈올 때까지 추기경님의 가르침을 따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같은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그리하여 저희도 추기경님처럼 희망의 증인으로 살도록 힘쓰며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기로 다짐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저희는 추기경님께서 저희 곁에 계셔서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저희에게 이토록 큰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신 추기경님,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추기경님을 뵈올 수 없게 된 것은 크나큰 슬픔이지만 추기경님께서 이승에서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어머님과 함께 이제 주님 곁에서 주님을 마주 대하며 크나큰 행복을 누리고 계시리라는 믿음은 저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은퇴하신 뒤에는 혜화동 신학교 사제관에 기거하시며 우리 사회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예언자의 지혜로운 가르침으로 올바른 길을 일러 주시던 추기경님, 이제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 민족을 돌보시며 저희를 축복해 주십시오. 매일매일 추기경님을 인도해 주셨고 이제는 추기경님을 당신 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해 주실 하느님의 어머님이요 추기경님의 어머님이신 성모님께 추기경님의 영혼을 돌봐 주시기를 간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