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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첫째 날(8월 4일)
(18)
전남의 백의종군로?
유원지는 대개 밤 늦도록 소란하고 아침 늦게 까지 고요하다.
여기 탐진강 생태공원 역시 새벽 산책나온 이가 어쩌다 눈에 뜨일 뿐인 이른 아침.
버스터미널로 나와 시간표를 살펴볼 때까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오늘 출발지점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어제 중지한 매생이 마을에서는 어차피 길이 없고 회진면의 해안선은 수년전 천관산에
오른 후 노력도를 다녀갈 때 주마간산하듯 밟아본 적이 있다.
지형적 이유로 단절지역이 많은 해안이기 때문이었다.
회진에는 복원된 회령진성(會寧鎭城)이 있다.(회령진은 회진의 옛 이름)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1490년(이조 9대 성종 21년)에 쌓았다는 성이다.
또한 회진(회령포진)은 정유재란 때 백의종군 중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충무
공이 곧 명량(울돌목)대첩을 이룬 12척의 배를 수습한 곳이란다.
(한 드라마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이 포구에 숨겨둔 것으로 되어 있다)
충무공은 왕 선조로부터 합천의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정유
년(1597) 4월 1일(양5.16) 도성의 옥에서 풀려난다.
그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고향 아산에 들러 모친 장례를 치룬 후 공주-논산-삼례-임실-
남원-구례구-순천-구례-하동-단성(진주접경)을 거쳐서 모여곡(합천)에 도착한다.
여기(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경남 합천)까지가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다.
무관(無冠)의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의 쾌락(快諾)을 받고 단성, 진주, 곤양, 노량,
남해 등 연해안의 정황 탐색길에 나선다.
도중에(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충무공은 즉시 쌍계(하동)-구례-압록-
옥과-순천-낙안-보성을 경유해 장흥에 도착한다.
백사정-군영구미-회령포에 당도한 날은 8월 18일.
(白沙汀과 軍營仇未의 위치는 장흥읍 원도리와 용산면 해창리라 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구미'는 '串'곶의 다른 이름이며 군영이 있던 곶, 즉 군영구미가 해안 도처에 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곳 회령포진의 포구가 몹시 좁아서 진을 이진(梨津/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긴다.
그리고, 28일 후인 9월 16일(양10. 26)에 13척으로 133척의 적을 상대하여 대승한다.
이름하여 명량대첩(鳴梁大捷)이다.
전라남도는 충무공의 이쪽 행로를 고증을 거쳐서 '백의종군로'로 조성한다지만 아직은
달라진 지역이 없는데 연속성을 이유로 다시 밟기를 고집한다?
그보다, 충무공이 걸어간 이 길이 백의종군로가 될 수 있는가.
백의종군이란 아무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전장으로 나간다는 뜻인데 이순신이 전라도
지역을 걸을 때는 이미 삼도수군통제사 장군의 신분이었다.
궤멸되고 와해된 수군을 수습하고 재건하는 과정이었으므로'조선수군재건로'라 한다면
납득이 가지만.
정남진전망대
노력항(회진면)행 첫 버스에 오를 때까지도 무작정 탔을 뿐이며 결정은 도중에 했다.
삼산리 해변에 있는 정남진전망대를 오늘의 기점으로 삼기 위해 천관산 산행 들머리 중
하나인 삼산리(관산읍) 상촌마을에서 하차한 것.
지나는 산서 마을 입구에 천연기념물 제481호 후박나무가 있다.
세 그루가 마치 한 그루인 듯 서로 어우러져 있는 노거수들(老巨樹)인데 특이하게 우람
하고 아름다운 수형이다.
400여년 넘은 수령으로 마을과 영욕을 함께 해오면서 주민들에게 쉼터가 되고 있단다.
소 목장이 많은 마을이라 우산(牛山)인가 마을 이름이 우산인 까닭에 목장이 많은가.
우산은 섬일 때부터 목장마을로 점지되어 있었던가.
실은, 섬형태가 누어있는 소처럼 보인다 하여 예부터 쇠섬이라고 전해오다가 광복 이후
우산도(牛山島)라 했고 1960년 연륙 및 개간사업으로 섬 아닌 섬 우산리가 되었단다.
곳곳이 소 목장인 우산마을을 지나 정남진전망대로 올라갔다.
삼산리 해안의 야산 돌출부를 깎아서 건설한 지하1층, 지상10층, 높이45.9m라는 꽤 큰
규모의 이 전망대는 2009년 2월에 착공하여 2011년 7월에 개관했단다.
전망대 지상에는 특이하게도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서있다.
장동면 만년리에는 안 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전국 유일의 사당이 있다.
황해도 출신인 안 의사의 사당(海東祠)이 최남단 장흥군에 있는 연유는 모르나 동상과
사당을 연관해 보면 의아해 할 일이 아니겠다.
전망대 상층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개장시간(09:00)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장흥의 랜드마크(land mark)로 부상하고 있다는 전망대의 시계(視界)는 대기한 보람을
느낄 만큼 일품이지만 건물과 조형물은 요란스럽게 현란(絢爛)하고 현란(眩亂)하다.
"한반도의 정남쪽으로 대륙의 기운과 해양의 웅비가 조화롭게 교차하는 고을의 상징이
될 것"이라는 정남진전망대.
"오대양으로 약진하는 이 전망대에 안중근 의사의 고결한 정신이 함께 함으로서 통합과
통일의 시대를 소망하고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바란다"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이같은 소망과 기대가 건물과 조형물에 담겨있는지는 문외한인 늙은이가 알 리 없다.
다만 표현력이 부족한 사람이 중언부언하는데 반해 세련된 사람의 간결한 표현이 많은
뜻을 담듯이 건물과 조형물 역시 단순하고 간결한 구도가 함축력이 강하지 않을까.
현란하고 복잡한 외형은 얼마간은 시선을 끌지만 쉬이 싫증이 나는가 하면 단순하지만
상징적인 구조는 시간이 갈 수록 더 매력적이 되어간다.
정남진전망대는 어느쪽에 속할까.
장흥군 관계자들의 기대와 달리 외래객(外來客)과 장흥주민 간에 2.000원과 1.000원(반
값)의 입장료 차등 체계는 장흥군 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분명 쓴소리 대상이다.
원거리를 마다 않고 스스로 방문하는(自遠方來) 내방객들을 우대하는 예우는 하지 못할
망정 바가지를 쓴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야 어찌 상도(商道)라 할 수 있는가.
외지인에게 고을인보다 특별하게 우대한다면 회자(膾炙)가 꼬리에 꼬리를 물 것이며 그
어떤 거액의 유료광고보다 월등한 홍보효과를 낼 것이다.
이같은 발상의 전환이야 말로 소탐대실(小貪大失)에서 소실대득(小失大得)으로 바뀌는
획기적인 경영전략이 될 것이련만.
나는 십수년 전,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DFW/미국남부 택사스 주))에서 카우보이형
밀짚모자를 받았다.
댈러스 시의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내방외국인들의 머리에 직접 씌워준 선물 모자다.
공짜지만 어찌나 튼실하게 만들었는지 지금껏 마당일을 할 때 즐겨쓰는 나는 그 때마다
그들의 애향정신을 새삼 느낀다.
우리네 지역 시민단체들도 맨날 어린애 보채듯 하거나 비판의 목청만 높이지 말고 자기
고장을 위해 이같은 유형의 활동을 비롯해 뭔가를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접 받으려 하는 소아적 자세를 버리고 대승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다.
정남진 미스터리
삼산 방조제를 건넜다.
관산읍 삼산리와 신동리 간의 바다를 막은 3.063m 방조제다.
2011년에 국가관리 방조제 결정으로 국가가 개보수 한 것으로 보아 최초의 축조시기는
일제 강점기였으리라고 추정된다.
한데, 방조제 중간을 조금 지나면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인 정남진 조형물이 서있다.
이 지점이 경도126도 59분, 위도34도 32분(사금마을산94-11/실제 여부는 모른다)으로
서울 광화문 기점 정남쪽이란다.
광화문 도로원표를 중심으로 정북인 중강진과 일직선 상에 있는 최남단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장흥군 전 지역이 '정남진'으로 표기되고 불리는 것은 정남진이 장흥의 신생
브랜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정동진의 유래가 서울 광화문의 정 동쪽 끝 나루에서 비롯되었음을 착안해 발굴한 지역
이미지 브랜드라는 것.
방조제 북쪽 끝을 지나면 신동리 사금마을이다.
해안 바위 위 정자 선유각(扇遊閣)을 지나면 정남진사금마을 돌비와 사금마을유래비가
있는데 민박집 주인으로부터 쇼킹(shocking)한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이 곳(사금마을)에 세우게 되어 있던 정남진전망대가 현 위치에 건설되었단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는 거액인 수십억대의 공사가 마을에 주는 영향 또한 크기 때문에
지역의원 간의 치열한 힘겨루기에서 밀렸다는 것.
늙은 나그네의 관심사는 진위 여부가 아니라 작은 농어촌까지 파고든 이기주의다.
지역 이기주의가 구석구석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현실을 개탄하는 것이다.
신당어촌체험마을(돌비)을 지나면 고마리 방조제가 장환리로 이어진다.
여기 또한 장환도(島) 섬이 방조제 축조로 뭍이 된 곳이다.
폐교된 초등학교 교사(校舍)가 깨긋하게 보존되고 있다.(어떤 용도로 재활용 중?)
분교에서 본교로, 다시 분교로, 그리고 폐교의 수순을 밟은 학교를 통해 그 지역 성쇠의
역사가 읽혀진다.
초등학교의 폐교가 속출하는 것은 학령기 아동의 급감현상을 뜻하며 이는 상급 학교의
폐교 또는 축소라는 도미노현상으로 이어진다
인구의 감소를 의미하며 국력의 쇠퇴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점증하는 폐교현상은 국력의 쇠퇴를 뜻하기 때문에 심각한 현안인 것이다.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는 슬로건을 내걸고, '예비군 소집 면제'라는 미끼로
정관수술을 유도하는 등 산아제한에 박차를 가한 원흉이 5.16군사쿠데타 세력이다.
그 세력에 빌붙어 온갖 아양을 떨던 주구들이 이제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
이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語不成說) 표어 설파에 게거품을 물고 있지만 용이한 일인가.
파괴는 쉽지만 복구는 어렵기 때문이다.
동생이 가장 좋은 선물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동생은 또 동생이 필요한 형이 되며 그 동생, 동생의 동생, 또 동생의 동생의
동생 역시 동생이 필요한 형일 것이며 형과 동생의 관계는 무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고의 미숙아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에 최면되어 포악한 독재자를 최고의 영웅
으로 받드는 국민의 각성이 없는 한 단언컨대 이 나라의 밝은 미래는 없다.
나 하고는 평생 무관한 바다낚시로 유명하다는 장환도, 갯장어축제가 매년 열린다는 섬
아닌 섬을 지나 모처럼 검푸른 바닷물이 출렁대는, 축조된 긴 해안로를 따라 북상했다.
해안이 막혀 육지로 진출할 수 밖에 없는 도로를 따라 도착한 산정 삼거리의 또 하나의
정남진 안내판이 늙은 나그네를 혼란스럽게 했다.
삼거리에서 500m남짓 되는 청정해역 돌꽃(石花)마을 남포(南浦)가 진짜 정남진이란다.
"人文, 社會, 地理, 歷史的인 資料와 國立國土地理情報院의 개략적인 측량에 근거하여
'南浦'마을 이름을 '正南津'으로 改稱하기로 議決하고 正南津標識石을 세우다"
"2004년 2월 5일 정남진 주민 일동"의 이름으로 세운 표석이다.
한데, 2001년부터 정남진 표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2003년 3월에는 정남진 표지석
설치 및 소공원 조성계획을 수립했다는 군청 당국자들은 이에 대해 왜 수수방관했을까.
정남진 조형물은 관산읍 신동리 사금마을 방조제에 세웠고, 전망대는 삼산리 우산도에
지었으며 군청 홈피에는 장흥의 극남을 '대덕읍 옹암리'(126°53'00 34°25'02)라 했다.
이미지 브랜드 정남진이 아닌 정남진 지점이 4곳이나 되는데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의 머리야 말로 휴면중이라 해야 하지 않나.
왜 이렇게 갈팡질팡일까.
남포 주민도 사금마을 민박집 주인과 똑같은 말을 했다.
용산면 출신 의원(議員)이 관산읍 출신 의원보다 힘이 약해서 빼앗겼다는....
삼남대로 평택에서 들은 경부고속도로 노선 변경과 대동한 유형의 비리 이야기가 거의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현실이라니?
민초들이 살기 좋은 나라는 요원한가?
P의원과 옥섬파크
정남진 여부와 관계없이 경관이 빼어난 마을이다.
전국 최고라는 석화구이 맛, 황홀한 일출과 달맞이 등은 체험이 없으므로 유보하더라도
득량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선이라는 홍보에는 수긍한다.
회진면이 고향인 소설가 이청준의 작품 '축제'를 촬영한 곳이라고 자랑하는데 1990년대
였다니까 영화제목처럼 작은 어촌의 대형 축제였겠다.
소(牛)등의 형상이라 해서 소등섬인 마을 앞의 작은 무인도가 작은 등을 뜻하는 소등(小
燈)섬이 된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소등섬에는 할머니 당제의 전설이 깃들어 있단다.
마을의 한 유지가 "소등섬에 자기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제사를 지내주면 미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 풍어의 태평마을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는 여인의 꿈을 꾸었다.
마을인들은 합심하여 정월보름날에 이 여인을 위한 당제를 지내기 400여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에 일체의 해난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숲이 우거진 소등섬에 다녀오려면 매일 2회 일어나는 모세의 기적에 맞추면 된단다.
다행히도 그 시간대에 도착해 돌로 닦아놓은 길을 걸어서 다녀왔으나 상처투성이인 돌
길은 밟지 않은 것만 못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매일 2회씩 물살에 시달리는 길인데도 벽돌을 깔아놓듯이 했으니 온전할 리 없다.
마치 닦은지 얼마 되지 않은 길인 듯 끄떡없는 서양의 로마시대의 돌길들은 못질하듯이
땅속 깊이 박아놓았으므로 2000년 세월을 당당하게 이겨내고 있다.
자자손손이 걸을 길이며 살아갈 집인데 얼마후에 절로 없어질 것들인 듯 대충하는 못된
버릇은 정녕 불치병인가.
남포에서 해안로는 이어갈 수 없다.
더구나, 득량만으로 흘러드는 남상천을 건널 길이 없기 때문에(장재도를 거쳐 수문해변
으로 이어지는 해안로 개설 계획중) 산정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삼거리 직전의 상발보건진료소와 문화복지센터 앞 정자로 갔다.
라면을 끓일까 망설이고 있을 때 몇쌍의 장년 커플들이 짧은 시차를 두고 모여들었다.
각지에 산재한 죽마고우들의 연중 친목 모임이란다.
그들의 권유로 라면 대신 각기 준비해 온 떡과 치킨, 맥주 등으로 포식했다.
지방도로일수록 공포의 차존인비로(車尊人卑路)다.
하긴, 도시인보다도 더 철저하게 걷지 않으려 하는데 인도가 왜 필요하겠는가.
버스편으로 지방도로(접정남포로,덕암풍길로)를 통해 남상천(덕암교)을 건넌후 도로와
농로를 바꿔가며 '한승원문학산책로'(수문리 해안)에 진출했다.
이 지방 대덕면 산(産) 소설가 한승원의 이름을 딴 해안로는 수문해수욕장을 거쳐 옥섬
워터파크까지 이어진다.
나는 한승원을 말할 자격이 없지만(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으니까) 대덕 사람의 문학
산책로가 왜 안양 해안에 있는지는 궁금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비중있는 작가라면 글비들을 많이 세우지 않아도 이미 널리 회자될 텐데 너절한
느낌이 드는 것이 내가 옹졸한 탓일까.
옥섬워터파크(장흥군 안양면 수문리)는 득량만과 솔숲 수문해수욕장, 낙조 등의 아름다
움을 감상할 수 있다는 16층 높이의 해양휴게시설이다.
나는 수년 전에 이곳 찜질방을 이용한 적이 있다.
호남정맥 종주때 매료되었던 일림산~사자산~제암산 철쭉을 잊지 못해 W대의 S교수와
함께 재차 방문했으나 S교수의 유고(有故)로 인해 중도 포기했다.
하산은 했으나 귀로가 막막한 밤이 깊어가고 있었는데 한 사마리아인(신약성서 누가10:
33,34)이 먼거리를 기꺼이 달려 우리를 이곳에 내려놓고 갔다.
한데, 이 사마리아인이 나와 대작한 적이 있는 보성군의원(議員) P씨였으니 이럴 수가.
내가 호남정맥 종주중이던 10년전(2003년) 5월의 일이다.
보성군 지역을 통과하다가 인연을 맺은 S(前回에 소개)가 한 주석(酒席)을 마련했다.
호남정맥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군의원 P를 내게 소개하려고 마련한 자리였다.
밤 늦도록 술잔을 나누며 담소했던 그 P가 이 밤에 곤경에 빠진 우리를 구한 것이다.
그는 어떤 일로 밤중에 이 길을 달리다가 적선을 하게 되었는데 백미러를 통해서 나를
확인하고는 놀라고 반겼던 그를 생각하며 군학재를 넘어 보성땅 회천면에 들어섰다.
내가 그 길을 걸은 것은 평생에 단 2번이며 그와 안면을 튼 후에는 유일하다.
그 역시 자기 지방인이기는 하나 그 길을 달리는 일은 드물단다.
그러므로 그 날, 그 시간, 그 지점에서 그와 내가 해후할 확률은 아마 로또 당첨보다도
더 희소할 것인데 어찌 생각나지 않겠는가.
군학마을 김상섭 옹
18번 국도(남부관광로)를 따르다가 군학마을(群鶴/회천면 건일리) 해안로를 택했다.
석양볕을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길게 우거진 송림 속의 적지 않은 피서객들.
회천면소재지의 율포해수욕장을 목표로 왔으나 실망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오히려 맘에
든다는 한 가족의 말대로 자연 조건이 아주 훌륭한 해수욕장이다.
그럼에도 1558년 이래 경주김씨 집성촌이라는 마을 측에서 환경과 인심의 오염을 염려
하여 개발을 거부하고 있단다.
나도 율포해수욕장까지 가려 했으나 곧 일몰 시간이고 이미 40km이상 걸어왔으며 해양
수산부 선정 아름다운어촌 100선에 든다는 이 마을이 안온하게 느껴져서 수정했다.
그보다도, 호남정맥 종주때는 산 위에서 내려다 볼 때 아름다운 보성만이었는데 보성만
해안에서 올려다 보는 호남정맥(일림산~삼비산)의 미려에 더 매료되어 그랬을 것이다.
군학이란 무리를 이룬 많은 학을 뜻하므로 마을 유래가 궁금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
년의 행정구역 개편때 붙여진 이름일 뿐이란다.
이조 초(세종3년)에는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개설되어 군영구미(軍營仇未)라 했고,
그 후 휘리포(揮里浦), 구미영성(龜尾營城) 등으로 불리었단다.
솔숲 가게에서 맥주1병을 마시며 정자를 묻고 있는데 주문하지 않은 파전1접시가 왔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좌석의 손님이 보냈단다.
대간, 정맥들의 종주와 십대로에서는 이따금 있어온 일이며, 그래서 인연길이 열리기도
했지만 서남동 길에서는 처음이다.(함평 안악해수욕장에서 술 대접을 받은 적은 있다)
이 파전이 그들과 나의 말길을 텄으며 내 연배로 보이는 좌장(座長)은 자기 집에 유하기
를 원했고 그의 수하들도 합창하듯 적극적으로 권했다.
혼자 기거하시는 집이므로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며.
치도곤을 당했던 백두대간 용추골(대야산자락, 버리미기재아래) 사건(메뉴'백두대간과
아홉정맥'15회 글 참조)이 주저하게 했으나 결국 그(좌장)의 뒤를 따라갔다.
대기업의 감사직을 끝으로 은퇴한 후 홀로 낙향했다는 그.
가족의 완강한 반대로 부득이 이산가족이 되었다는 그의 언행으로 보아 하룻밤 말벗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되어서 그랬을까.
80후에도 건강이 유지된다면 수개월~1년씩 도(道)단위로 낭인(浪人?)생활을 해보려는
내게 그의 이산가족 생활이 귀한 참고(他山之石)가 될 듯 하여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는 군학마을의 경주김씨 문장(門長?) 김상섭 옹이다.
그가 손수 지은 밥으로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 나는 앞마당의 대나무평상을 차지했다.
집이 마을고지대에 위치해 보름을 막 넘긴 휘황한 달빛에 온전하게 내려다 보이는 검은
바다가 공포를 자극하나 금방 쏟아지기라도 할 듯 온하늘을 수놓고 있는 총총한 별무리.
이런 파노라마를 두고 빈방이 있다 해서 들어갈 수 있는가.
평상에 누운 객을 두고는 편히 잠들지 못하겠는지 주인도 평상으로 나왔다.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서로 부담되지 않을 세상살이였다.
유일하게 의아로운 것은 그가 옛 기아자동차회장이었던 김선홍을 존경한다는 점이었다.
김선홍은 공채 1기로 입사해 30여년만에 그룹 총수에 오름으로서 우리나라 전문경영인
체제에 준거를 제시한 분이며 명예롭지 못한 퇴진이었으나 한국자동차산업의 선도자다.
아마도 그가 몸담았던 회사가 옛 기아그룹이었으며, 그래서 그룹 회장과의 교의(交誼)를
통해 쌓인 정리(情理)가 그 까닭이 아닐까.
못나고 못된 정치가들 때문에 스스로 우뚝 선 한 최고의 전문경영인이 한참 일할 나이에
사라진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계 속>